2012년 2월 5일 일요일

1992-2012 벌써 20년? 아직 20년!

일생을 살면서 개인에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살았던 1992년같은 한 해를 경험하기란 귀운 일이 아닐 것이라 장담한다. 데이비드 하비는 "초보적인 수준의 논쟁조차 벌일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은 운동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어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자본주의와 그 적들"-돌베게- p.152) 사실이 그렇다. 정말 초보적인 수준의 논쟁조차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게다가 그 사람이 자타가 공인하는 운동가 혹은 활동가라면-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의 일이 아니라 짜증을 유발하는 일이다. 하지만 1992년엔 절대다수인 그들과 멘땅에 헤딩을 하듯 하면서 1년의 2/3을 허비했다. 87년 세대를 사람들에겐 자랑스러운 기억이라도 있지만 나같은 사람에게 1992년이란 그저 내가 얼마나 "절대적 소수"인가를 스스로 깨닫는 과정외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목표는 거창했다. 오세철 교수의 총선 당선, 진보정당 창당을 위한 민중회의의 출범과활동의 가시화, 백기완 후보의 100만표 득표, 이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엔오세철 교수의 국회의원 당선외에 나머지는 모두 가능한 목표라 생각했다. 결과야 다들 알고 계실테니 굳이 반복해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당시 경험을 토대로 20년이 지난 오늘날의 이야기를 곁들여보도록 하자는 것이 내 이야기라는 말씀! 난 인간적으로 이른바 "운동가 혹은 활동가"라 불리는 사람이 범민주 단일후보(난 이를 범만주 단일후보라 했다)론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를 분열주의자 혹은 종파주의자로 몰아붙이기 시작하는 것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1992년이 시작되자마자 남민전에선 "당선가능한 후보에 대한 애국시민과 청년학생의 지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주사위들은 그에 충실할 것이라는 것 정도는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독자정당이라든지 독자후보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매도할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동을 이야기하고, 스스로 활동가라 이야기하면서 별다른 고민도 없이-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보수정당의 후보를 암묵적으로(심지어는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이란 말인가?(김어준같은 사람들에겐 이런 것 정도는 문제거리도 되지 않겠지만...) 보수들이 절대다수를 선점하고 있는 정치판에서 선거라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해야 할 것인가?라든지 선거라는 계기를 이용해서 노동계급이 어떻게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동력을 얻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라는 점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로선 "또 민자당이 집권하게되면 다 너희들이 책임져야할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어이없는 공격을 받았을 땐 그냥 확 한번 성질 제대로 부리고 남은 인생을 국가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하며 보내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92년도엔 주사위 후배 하나를 곤죽이 되도록 패버려서 학교를 꽤 오랜 기간 멀리한 적도 있었다.

92년 백기완 후보의 득표수는 27만표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에 백기완 후보가 대선을 완주하지 않았더라면 2004년에 민주노동당이 총 10석을 확보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자부한다. 92년 이후 민주노동당이 정식으로 창당을 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8년이었는데, 92년과 비슷한 형태의 독자후보 선거대책본부 형식으로 97년 대선을 치룬 후 비로소 정당이 탄생하게 되기까지도 엄처청난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꼭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2008년 선거에선 2004년의 결과보다는 상당히 "후진" 결과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또 정치의 해가 오고야 말았다. 92년처럼 두 선거가 동시에 행해지는 해로...4월 총선, 12월 대선 공교롭게도 정말 정확하게 20년 만이다.

1992년에 어렴풋이 생각했던 2012년은 이런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때 뭔가를 구체적으로 생가갛진 않았으나 최소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좌파정당돠 유의미한 득표수를 기록하는 독자후보 정도는 상식적으로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지금 현실은 어떠냐고? 늬들도 눈이 있으면 처보면 알 것 아닌가? 또 빌어먹게 옛날 이야기가 길어졌다. 하나의 상징적인 예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애증의 박용진씨가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민주통합당으로 갔고 그는 그 곳에서 당대표 및 최고윈원 경선에 출마했다. 그의 득표율은 대략 2.67% 1인 2표제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루미 많이 봐줘야 그가 첫번째 선택이었던 투표자는 기껏해야 2*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진보진영을 대표하여 야권 대통합에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던 것이다.

(하나에 다 쓰려 했더니 엄청 길어져서 나눠야겠다는... 바로 다음 게시물에 이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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