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3일 화요일

Toots Thielemans을 추모하며

Toots Thielemans(1922. 4. 29~ 2016. 8.22)
워낙 무식한 탓에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벨기에 인은 에르큐르 포와로지만 그는 가상의 인물인 관계로 아마도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로타 마테우스와 함께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라 불렸던 엔초 시포일텐데 엔초 시포는 늬들 중 상당수가 모를테니 그 역시 참 애매한 인물이고 가장 무난하게 벨기에 인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에당 아자르가 아닐까 싶다.
그 외에 아마도 흔히들 얘기하는 고무신 팝음악 팬들에게 가장 유명한 인물은 한 때 "생송의 제왕"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살바토레 아다모가 가장 유명한 벨기에인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과거 웬 프랑스인에게 듣기로는 프랑스에서 샹송이란 것은 한국의 트로트와 비슷해서 젊은 세대는 샹송 보다는 프렌치 팝이 더 대중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그 사람의 말이 얼마나 믿을만한지는 내가 장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패스!
그러나 실질적으로 팝음악계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벨기에인은 며칠 전 세상을 떠나신 Toots 할아버지가 아닐까 한다. 사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벨기에의 재즈 뮤지션이 갔다는 것 말고도 현존하는 재즈 아티스트들 중 베니 굿맨의 밴드에서 활동을 했던 아티스트로는 마지막으로 생존해 있던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굉장히 큰 사건이 될 것이다. 이제 빅밴드나 스윙의 전성기를 몸소 체험햇던 아티스트는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앨범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 양반은 지구상에서 아치탑 할로바디 기타의 명기중 하나라 일컫는 Gibsom ES-175를 가장 잘 다뤘던 인물일 것이다. 이 ES-175의 경우 명기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실제로 대가들에게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악기였는데 같은 깁슨사의 Super 400이나 500 그리고 L 4 혹은 L5에 비하면 이른바 재즈의 대가들이 그렇게 많이 사용한 기타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가끔 당황스러운 것은 건즈&로지스의 원년 멤버였던 슬래시가 이 기타를 들고나올 때인데 ES-175의 경우 악기가 가지고 있는 더럽게 좋은 소리에 비해 메탈이나 Hard Rock 기타에 있어서 필수라 할 수 있는 몇 종류의 이펙터가 더럽게 안먹는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디스토션이 깁슨 ES 175터럼 안먹는 악기는 정말 드물 것이다.
아무튼 슬래시의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므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가자면 의외로 깁슨 ES-175를 가장 대중들에게 널리 알린 인물은 Yes의 브레인이었다 할 수 있는 Steve Howe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기타가 빛나야할 장르인 재즈에선 Toots 선생이 이 기타를 가장 잘 다루신 분으로 기억될 것이라 추측해 본다. 그러나, 정작 Toots 선생은 재즈 하모니카의 독보적인 인물로 자신의 시그니처 모델 하모니카만 두 종류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도 하다.
1949년 재즈 색소포니스트들의 전설 중 한 명인 Zoot Sims의 스튜디오 작업의 세션으로 스톡홀롬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에 참여한 이래로 2014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시기 전까지 자신의 음반은 물론 수많은 다른 아티스트들의 녹음에 참여한 경력이 있고 이 부분에 대해 엄청나게 높은 평가를 받는 아티스트라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Toots Thielemans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 유명한 줄리안 레넌의 데뷔 앨범의 타이틀 트랙인 Too late for goodbye를 통해서였다고 할 수 있을텐데-아마 그 외에 다른 연주를 들었을 먼저 들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만 말이다.- 그 곡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말 기가 막힌 하모니카 세션이었고 우연히 그 앨범의 크레딧을 통해 Toots의 이름을 알게 되었단 이야기다.
각설하고 1959년 발매된 이 앨범을 듣도록 하는데 참으로 Toots이 기타를 연주한 트랙과 하모니카를 연주한 트랙의 배분이 절묘하다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아마 별 관심이 없을테지만 각종 재즈 관련 웹사이트들은 지금 Toots Thielemans에 대한 추모 열기가 가득하다. 국내에선 방송국의 메인 뉴스에서는 커녕 포털 사이트에서도 그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러면 뭐 어떠랴... 나 때문에 알게 되지 않았나 말이다. 같이 추모에 동참합시다. 아님 말고




2016년 7월 27일 수요일

정치적으로 올바른 위선

개인적으로 메갈리아에 대한 이런저런 논쟁에서 가장 우스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핸 동의하나 메갈리아의 방식에는 찬성할 수 없다. 그런 방식이라면 그들에 대해 지지할 수 없다."라는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서야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사회의 전면에 나온-이라고 얘기해 봤자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아직도 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것 자체가 얼마 되지않는 이 시점에서 제 3자 혹은 그들의 공격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너희는 이런 방식으로 이렇게 운동해야 해"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극단적-이라고 대부분의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운동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고 싶다면 그들 내부에 들어가서 그들과 투쟁하는 것이 무모해 보일지만 가장 설득력있는 행동이라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을 생각이라면 그들의 방식에 전지적 작가시점을 동원해 행하려는 당신의 "정말 좋은 길을 알려주려는 이성적 행위"는 반동적 책동에 불과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언제나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에 대의는 찬성하지만"이란 전제를 가지고 잇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페미니스트들의 판을 깨려는 반동적 언사는 절대 삼가야할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정해야할 성질의 것이다. 심지어 지금의 방법으로 페미니스트들이 판판이 깨진다 하더라도 그 결과조차 온전히 그들의 것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만일 그 후에도 여전히 당신이 의심의 여지 없이 "기본적으로 당신들을 응원한다"거나 "기본적으로는 당신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면 그 후 재편될 페미니즘 운동을 열심히 응원하거나 그들 내부에 들어가 그들과 결합하면 될 것이다. 만일 당신들이 "그런 식으로 가다간 공화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판판이 깨질 것"을 걱정해서 지금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면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자신이 꼰대인지 한 번 반성해볼 것을 권한다.

2016년 5월 25일 수요일

Anohni-Hopelessness(2016)





앨범의 자켓 사진이 과도하게 큰 것은 대단한 에러지만 그러려니 하고 보시기 바란다. 이 앨범의 한글 booklet엔 이 음악을 두고 힐링 팝이라는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사실 이 음반 자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음악을 추구하고 있는지 자체가 대단히 모호하다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음반을 구성하고 있는 곡들 자체가 대단히 추상적이며 아주 탄탄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곡들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아주 딱 짜여진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는 그런 구성의 곡들이 우월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는 사람은 다들 이미 알고있을 이야기지만 이 앨범은 Anohni라는 아티스트의 앨범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이 Anohni라는 아티스트가 Antony Hagarty의 새로운 스테이지 네임이다. 나중에 딴소리 할 사람이 있을지 몰라 미리 말해두건데 앤토니 해거티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말지어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혹시나 모를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결정적으로 이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 힌트를 한 방 날리자면 Antony and Johnson이라고 이야기하면 당연히 무릎을 치면서 아! 그 사람! 이럴 것이다. 물론 이래도 모른다면 넌 무지하게 팝 음악을 안들은 놈이라는 얘기다.

이미 어느 정도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있을 부분이지만 앤토니 해거티 즉 아노니는 특유의 몽환적이면서도 (미국 아이들의 표현 그대로를 빌리자면) Beautiful한 음색으로 은근히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터라 아노니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이 프로젝트 역시 Chamber Pop의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본인의 명성 그대로 사운드의 규모 면에서 그리고 그의 특별한 음색을 통해 앨범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이끌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버뜨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앨범이 대중들에게 대단히 심하게 "먹힐"수 있는가에 대해선 자신없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매번 어떤 앨범에 대해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주저리 주저리 떠들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지 않으려는 노력은 굉장히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가끔은 들어보지도 않고 덜컥 산 앨범에서 이런 장벽에 부딪히게 되는 일도 생긴다. 조금 더 여러번 들어보고 이런 소리를 지껄였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 대단히 죄송ㅇ하게 생각한다. 뭐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욕하진 말아주기 바란다. 늬들이 내가 써놓은 개소리를 읽는 데에 돈내는 것 아니지 않은가... 대단히 미안하게도 워낙 최신작인지라 유투브 태그는 생략한다.


2016년 5월 23일 월요일

Tangerine Dream-Stratosfear(1976)






일반적으로 탠저린 드림이라는 팀에 대해 대중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을 나타내는 단어를 열거하자면 독일, 트리오, 무그 신서사이저 그리고 에드가 프로제일 것이다. 그렇다. 에드가 프로제(Edgar Froese) 없는 탠저린 드림은 일반적으로 쉽게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은 어쩌면 다수의 사람들이 에드가 프로제가 팀을 떠난 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심지어는 어느 순간부터 에드가 프로제가 없는 탠저린 드림이 존재했다고 믿는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에드가 프로제는 1967년 팀이 결성된 후 2015년 사망하기 전까지 탠저린 드림이라는 팀을 단 한 순간도 떠난 적이 없다.

사람들이 실제적 사실과 달리 에드가 프로제가 팀을 떠났던 적이 있다거나 심지어 어느 시점에 떠나서 탠저린 드림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에드가 프로제가 그냥 솔로 아티스트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많은 솔로 프로젝트들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실제로 1990년대엔 탠저린 드림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당시 멤버들이 모두 솔로 활동에 매진한 시기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절대로 에드가 프로제는 탠저린 드림이라는 팀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냥 우리는 에드가 프로제의 그 놀라운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생산성에 주목하면 될 따름이다. (그의 솔로로서의 생산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가?라는 질문에 유치한 답이 될만한 것은 이런 것이다. 심지어 에드가 프로제는 포르노 영화의 사운드 트랙 작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가 프로제나 탠저린 드림이 현대 대중음악계에 미친 영향에 비하면 국내에서 에드가 프로제나 탠저린 드림의 인지도나 인기는 미미하기 그지없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다들 잘 아는 사실 아닌가? 실상 한국인들은 음악을 심각하게 듣는 것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으며 일부러 어려운 음악을 찾아서 듣는 이들은 극소수다. 탠저린 드림의 음악이 어려운 음악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은 차치하고라도 30분이 넘는 음반 하나에 보컬도 없이 10분이 넘는 트랙이 존재하는 일이 부지기수인 이 팀의 음악은 사실상 고음역의 보컬에 극도로 민감한 한국의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그다지 큰 매력을 가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잇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버뜨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은 국내에서 탠저린 드림의 음반들 중엔 그나마 대중적인 인지도가 상당한 음반이라 할 수 잇을 것이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그래도 이 팀이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전세계적으로 그다지 "잘 팔릴" 음악을 하지는 않았어도 나름 전세계적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음반업계의 괴짜 중 괴짜인 Virgin의 Richard Branson이 일찍이 그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버진 레이블을 통해 이들의 음악을 전세계적으로 유통시켰던 덕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앨범도 버진 레이블을 통해 발매된 앨범이기도 하다. 이 앨범이 미국 시장에 출시된 것은 1976년 10월의 일이다.














2016년 5월 20일 금요일

T. Rex-The Slider(1972)





연초 우리가 접했던 21세기의 가장 안타까운 팝계의 비보가 될 수도 있는 지기의 사망 소식으로 인해 개인적으로는 이 팀의 이름이 여러번 거론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서 얻어야만 하는 결론은 쓸 데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펽치지 말라! 그럴 경우 실망만 너의 몫이 된다. 세상은 네 상상 따위와는 관계 없이 돌아간다. 뭐 대충 이런 것 아니겠냐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남들이 이 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면 될 일이다. 상처 따위 받을 필요 없이.

다들 잘 알고 있듯 1947년 생으로 지기와 동갑이던 Marc Bolan이 이끌던 이 팀은 1977년 마크가 이제 겨우 30세가 되던 해의정확하게는 1977년 9월 29일인 그의 서른번째 생일을 정확히 2주 앞두고-9월 15일 조금은 어이없는 자동차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고 만다. 그리고 그 것이 지기와 함께 Glam Rock Scene을 양분했던 티렉스의 종말이 되고 만다. 그 후로 근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비공식적으로 팀의 재결성과 활동의 재개에 대한 논의가 수차례 진행되었으나 결국은 1977년 9월 15일이 한 때는 세계 최고 밴드 중 하나였던 티렉스의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1967년에 결성된 팀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그들은 그들의 결성 초기에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1967년은 정말 두드러지는 사이키델릭의 약진의 해였고 사회 문화적으로는 한 마디로 히피 문화라는 것이 전지구적 현상으로 대두되던 시기였다. 1967년 결성된 티렉스 역시 팀을 결성한 초창기엔 말 그대로 그 시대를 대표할만한 20대들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이키델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히피의 생활을 동경하고 몸소 실천하던 영국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팀을 결성햇을 때 팀이 Glam Rock을 대표하는 이름이 될 것이라는 것은 그들조차 몰랐을 수도 있었단 말씀이다.

시간이 허락하면 그들이 아직 티라노사우르스 렉스였던 시절의 이야기는 따로 하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이 앨범에 대해  이야기의 폭을 좁혀보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 앨범은 이례적으로 영국에서보다 미국에서의 반응이 훨씬 좋았던 앨범이다. 그냥 사실관계만을 놓고 이야기하자면 빌보드 200 앨범 차트에서 이 앨범은 4위까지 올라갔던 반면 UK 차트에선 겨우 17위에 머물렀다는 말씀이다. 당시에 영국에소 미국에도 살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뻥 따위는 1 밀리그램도 들어가지 않은...

이 앨범의 커버는 바이널 판의 앞면엔 마크 볼란의 앞모습을 찍은 사진ㅇ니 뒷면엔 마크 볼란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대단히 특이하게도 이 두 장의 사진을 찍은 사람은 당신들이 익히 알고있는 바로 그 링고 스타라는 사실! 대단하지 않냐? 링고 스타로 더 잘 알려진 우리의 리처드 스타키 선생에게 이런 재주도 있었다니 말이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이렇게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둔 앨범에서 싱글로 커트된 곡은 A side의 첫번째 트랙인 Metal Guru와 B Side의 첫번째 트랙인 Telegram Sam 두 곡 뿐이라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앨범의 다소 특이한 점은 이전 앨범과 비교될 정도로 오케스트레이션에 대단히 큰 공을 들인 앨범이라는 것이다. 이 앨범의 오케스트레이션 어레인지먼트 작업을 맡은 사람은 Toni Visconti라는 사람인데 공교롭게도 토니 비스콘티는 지기의 두번째 앨범에서부터 최근작인 Blackstar에 이르기까지 함께 작업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물론 토니 비스콘티를 유명인이라 부를만한 근거가 보위와의 작업 하나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아무은 그런 섬세한 부분에 까지 공을 들인 깓락인지는 몰라도 까다롭기로 유명한 All Nusic은 이 앨범에 별 다섯개 만점을 주는 등 평단에서도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은 앨범이 되고 말았다.

B Side의 Ballrooms of Mars의 경우엔 The Bongos의 Richard Barone이 1997년 리메이크 했는데 리메이크라기 보다는 커버 버전에 가깝다는 것이 평단의 평가다. 그리고 이 앨범 전체가 1994년에 CD 버전으로 재발매 되었는데 심지어 2002년엔 디지팩으로 재발매 되기도 했다. 음악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1994년과 2002년 이 두 해엔 모두 월드컵이 열린 해였다. 물론 이 것은 이 포스트의 내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Glam Rock이라는 음악이 조금은 기괴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선입견으로 듣기를 꺼리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들어보라 권해주고 싶은 음반이다.  불금!




2016년 5월 17일 화요일

Elton John-Empty Sky(1969)

가장 먼저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유투브에 올라와있는 이 스트리밍은 오리지널 보전이 아닌 1995년 재발매된 앨범의 버전으로서 애초 Vinyl 버전엔 실려있지 않던 트랙이 네 개가 추가된 버전이다. 또한 애초에 이 앨범은 미국에선 발매되지 않았고 앨범 자켓의 사진을 다른 사진으로 교체한 뒤 1975년에 발매되었다고 한다.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들 알고있을 이야기지만 엘튼 존은 국내 팬들이 알고있는 것과 달리 자신과 동갑인 지기 못지 않게 당시로선 대단히 파격적인 음악을 선보이던 "무서운 신예"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이며 혜성과 같이 영국의 Pop Scene에 나타났다 할 수 있다.

물론 자켓의 그림엔 지금은 적응이 어려운 엘튼 존의 20대 초반 시절의 풍성했던 머리카락을 그림으로나마 볼 수 있다. 애초에 그의 아버지는 엘튼 존이 은행가-모두가 은행가가 되지는 않지 않는가? 그냥 은행원 정도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와 같은 일을 하기 원했다고 한다. 엘튼 존의 아버지가 공군 장교 출신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아들에 대한 바람이었다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정작 엘튼 존의 음악적 재능은 자신의 아버지 쪽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할 수 잇다는 점이다. 엘튼 존의 아버지는 공군으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중에도 Bob Miller의 밴드에서 트럼펫 연주잦로 활동했던 인물이었고 아버지의 그런 음악적인 재능과 음악에의 관심과 열정이 엘튼 존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 아버지의 보수적인 성향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란 생각이다.

나중에 까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앨범에 대한 대략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밝혀야만 하는데 이 앨범-정확하게는 유투브 스트리밍-당신들이 가장 주목해서 들어야할 트랙은 2번과 9번이다. 다른 트랙들이 구리다거나 후지다거나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2번 트랙에서는 엘튼 존의 하프시코드 연주를 들을 수 있고 9번 트랙은 당신들이 이전에는 들은 적이 없었을 확률이 90% 이상이고 앞으로도 듣기 힘들 구성의 곡이기 때문이다.ㅣ 그 구성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안들을 것이 뻔하므로 직접 들어 확인하기 바란다.

앨범은 런던의 Dick James Music Studio에서 1968년 12월에서 1969년 4월까지 상당히 장기간에 걸쳐 녹음되었고 발매는 한국으로 따지면 현충일인 1969년 6월 6일이다. 개인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그지같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All Music의 경우엔 별 다섯개 만점에 겨우 두개를 주는 아주 박한 평가를 내렸고 물론 평단의 싸늘한 반응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겠으나 발매 당시 UK 차트에선 순위에 오르지도 못했으나 1975년 미국에서 발매되었을 당시엔 빌보드 팝 앨범 차트에서 무려 6위에 올랐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 때는 이미 엘튼 존읭 이름이 알려질 만큼 알려진 후였다.




2016년 5월 16일 월요일

Queen-A night at the Opera(1975)










한국에서의 인기가 궈낙 압도적이기 때문에 퀸의 앨범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앨범을 고르라 한다면 공화국 인민들은 당연히 이 앨범을 꼽을 것이고 그 것이 알게 모르게 공화국의 퀸의 팬들의 바람일 수도 잇다. 하지만 퀸이 말 그대로 월드 클래스의 밴드가 된 것은 이 앨범이 발매된 지 무려 5년이나 지난 후에 나온 "The Game" 앨범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늬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플래티넘+을 기록한 앨범이 당연히 그들의 대표작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미 다 알려져있어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이 역사적인 퀸의 앨범 타이틀은 이 앨범이 발매되기 부려 40년 전인 1935년에 Marx 형제의 의해 제작되고 연출된 동명의 영화로부터 따왔다. 이 역시 공화국의 퀸의 광팬들을 실망시킬지 모르나 사실인 걸 어떻게 하겠냐 말이다. 이런 것이 바로 손석희의 뉴스에서 하는 그 유명한 "팩트 체크"라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앨범이 이 앨범이 아니라고 해서 이 앨범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이 앨범은 당연히 UK 차트에선 1위를 총 4주간 했고-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연속 4주간이 아니라 띄엄띄엄 4주란 말씀이다.- 그리고 빌보드의 200 앨범 차트에선 4위까지 올라가며 당연히 드디어 미국 시장에서의 연착륙에 성공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는 그들에겐 5년 뒤의 전세계적인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는 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앨범 타이틀에서 풍기듯이 일봄과 한국에서의 그들의 이미지, Operatic Rock밴드라고 흔히들 이야기하는,를 확고하게 하는 데에 기여하게 된다.

이미 예전에 이야기한 바 있듯 퀸이라는 팀의 영미에서의 이미지는 "하드하고 때로는 헤비한 사운드를 구사하는 밴드"고 이 앨범 역시 가장 주된 부분은 이런 사운드가 담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물론 공화국 인민들이 환장하는 "Love of my life"와 같은 전형적인 팝 장르의 곡이라 할만한 곡도 있다. 마치 오페라의 한 작품이 지나치게 일관성있는 곡으로만 이뤄진다면 극적인 구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듯 이 앨범 역시 장르의 폭이 다양하다 .

아마 국내의 퀸의 라이트한 팬들이 들으면 "정말 이 곡이 퀸의 곡이야?"라고 할만한 곡인 "I'm in love with my car"와 같은 트랙은 반드시 한 번 정도 들어볼 것을 권한다. 물론 싫음 말고... 지나치게 당연해 보이는 이 앨범을 발매된 지 무려 40년도 더 지난 지금에서 반드시 다시 들어봐야 한다는 개소리를 하는 이유는 퀸이라는 밴드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대단히 강렬한 사운드와 그 바탕에 있는 존 테일러와 브라이언 메이와 존 디콘의 기여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한다는 바람에서다.













2016년 5월 4일 수요일

Overkill-The Years of Decay(1989)

이 앨범의 자켓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긴 설명이 필요 없는 헤비메탈 밴드다. 그 것도 쓰래쉬 메탈 음악을 하는 팀이다. 왜 굳이 이 앨범을 오늘 택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바로 1989년은 메탈리카가 그들이 Thrash Metal 씬에선 더 이상 자신들의 적수가 없음을 확인한 "...And justice for all" 앨범을 발매한 것이 바로 이 해이고 그냥 단순히 메탈리카가 그들의 정점을 찍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1989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에 부여하자면 이 시기가 바로 Thrash Metal 이라는 장르 자체가 정점을 찍은 시기라는 점이리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앨범은 당대 "...And justice for all" 정도는 아니더라도 Thrash Metal 장르에서 거둔 커다란 성과로 찬사를 받던 앨범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당연히 그러니까 80년대 말이 장르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냐마는... 뭐 그렇다. 이 팀이 결성된 것은 1980년 뉴저지 주의 Old Bridge Township이라는 곳이란다. 1980년 결성된 이후 83년 까지는 주로 동네 밴드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할지 몰라도 이 팀은 애초에 결서오디었을 당시는 펑크 밴드였다는 점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물론 아님 말고!

이 팀이 가장 확실하게 휠을 잡았던 시기는 1987년의 "Taking Over" 1988년 발매된 "Under the Influence" 그리고 이 앨범으로 활동하던 시기인 1990년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고 한다. 1991년 이후로는 다소 정상권에선 멀어진 밴드가 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는데 가장 큰 이유로 꼽는 것은(물론 미국의 전문가들이) 지나치게 잦은 멤버 교체로 인한 팀 자체의 어수선했던 분위기를 꼽는다. 그래도 정말 대단한 것은 메탈리카나 메가데스 앤스랙스 슬레이어의 이른바 빅 4 밴드들이 1980년대의 헤비메탈 키드들이 보기엔 배신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며 음악 씬에서 그들의 이름값을 유지한 것에 비하면 이 팀은 끊임없이 죽으나 사나 THRASH! 이 정신으로 버틴 팀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앨범을 끝까지 들어서 절대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앨범이 발매되었을 당시인 1989년에 빌보드 200 앨범 ㅁ차트에서 물며 155위까지 찍었으며 그 땨나 지금이나 팀의 간판인 Bobby "Blitz" Ellsworth이 팀의 리드보컬과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앨범이다. Bobby Gustafson의 기타도 아마 당신들의 기대 이상의 연주를 들려줄 것이라 자신한다. 쓸 데 없이 야구 끝나고 드라마나 쳐보지 마시고 이 앨범이나 듣다가 고이 주무시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개인적 생각이다.









2016년 5월 2일 월요일

Osamu Koich-The Chord(2006, King Record)




읹간의 일이라는 것들이 다 그렇다. 뭐 넌 블로그가 얼굴책보다 어울린다. 생각 잘했다. 다시 블로그를 살렸구나 이런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 중 여기 와서 그 흔하디 흔해빠진 리플 하나 남기는 닝겐들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들을 데려다 전주 풍년제과의 초코파이 하나 씩을 앵기면서 제발 여기 와주세요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게 모양 빠지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여지껏 대충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일관성이 잇는 일이라 생각한다.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이 앨범을 바램한 킹 레코드는 일본의 음반사-특히나 재즈를 전문적으로 출반하는- 1989년 당시 이문세의 다섯번째 앨범을 당대의 가격에 두 배 이상을 받아서 물의를 일으켰던 그 킹 레코드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회사다. 물론 킹 레코드라는 말에 그 당시의 사태를 떠올리며 분노가 앞서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문제의 이 앨범은 바로 이 킹 레코드가 특별기획으로 시리즈로 출반한 "저음 시리즈" 연작 중 한 앨범이다. 물론 당연히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06년에 발매한 앨범이 지금 한국에 수입되는 것 아니겠는가?

http://www.osamukoichi.com/profile/english.html

위에 링크한 사이트는 바로 이 오사무 코이치 형님의 공식 웹사이트-그 것도 영어다-되시겠다. 모든 재즈 음반들이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이 앨범은 2005년 9월 28일과 29일 양일간ㅇ네 걸쳐 토쿄의 세키구치에 위치한 킹 레코드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한다. 물론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재즈라는 음악은 특성상 각자 다른 채널에 각자 다른 악기를 따로 녹음하여 그 것을 스위치를 들어올려 합치는 작업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영어로 Improvisation 한국에서 많이 쓰는 단어로는 애들립이 곡의 연주에서 주가 되는 만큼 다른 장르가 하는 방식의 작업 보다는 과거 방식의 작업을 할 수밖에 없고 또 그런 면에서 의되하지 않은 (다른 장르에 비해) 음질의 저하현상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장점은 스튜디오에서 녹음 시간이 굉장히 절약된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 시리즈의 핵심을 얘기할테니 필요하면 받아 적거나 줄을 치시기 바란다. 이 앨버의 수록곡들의 리스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존에 베이시스타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곡들을 베이시스트가 팀의 리더로서 다시 해석하고 편곡하여 녹음을 한 연작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연작의 기획이 저음이라는 말로 대표될 수 있는 것이고 연주력이야 당연히 검증받고도 남을 사람들이 참여한 것이니 연주가 어디가 좋느니 어디가 아쉽느니 이런 이야기들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그냥 조금 더 새로운 해석의 연주를 접하고 싶은 사람들에겐 강력하게 추천할 수 잇는 시리즈다.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오사무 코이치 선생은 더블 베이스를 굳이 우드 베이스라고 부르신다. 


  • 1-1. Actual Proof
  • 1-2. Bud Powell
  • 1-3. Three Views of a Secret
  • 1-4. I Wish I Knew
  • 1-5. Donna Lee
  • 1-6. Some Skunk Funk
  • 1-7. Mood Indigo
  • 1-8. Ladies In Mercedes
  • 1-9. I Wish
  • 1-10. Everything Happens To Me


2016년 4월 29일 금요일

Suede-Nhisht Thoughts(2016)




어쩔 수 없이 스웨이드의 가장 최근 앨범이 이 앨범 되시겠다. 이 프로젝트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2014년 1월 아직도 국내에 팬들이 무지하게 많은 Brett Anderson이 갑자기 우리는 지금 현재 새 앨범 녹음작업을 하고 잇는 중이라고 발표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물론 당연히 대중들의 기대치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썩어도ㅗ 준치랬는데 천하의 스웨이드가 새 앨범을 작업중에 잇다는데 기대하지 않을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오매볼망 이 앨범을 ㄱ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마치 조만간 작업이 끝날 것처럼 이야기했던 브렛의 이야기는 일종의 뻥카가 되어ㅏ가고 있었다. 2014년에 작업중이라 이야기했던 앨범이 당연히 발매되어야하는 시기로 생각했던 2014년ㄴ에 발표되지 않고 해를 넘기고야 말았으니 별의별 소문이 다 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작인 2013년 앨범인 "Bloodsports"에서 이미 엄청난 규모의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을 시핸한터라 이 앨범의 방향이 어떨지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발매는 늦어지고 늬들 같으면 안돌아버리겠냐?

긴 기다림에 지칠 때즈음 드디어 스웨이드는 그들의 새 앨범을 3년 만에 세상에 내놓게 된다. 바이널 레코드로도 나오고 그냥 CD로도 나오고 (자 이제 중요한 이야기다. 이 버전이 바로 내가 구입한 버전 되시니 말이다.) 그들이 제작한 영화를 담은 DVD롸 함께 CD 한 장으로 된 패키지. 이렇게 세 가지로 아는데 이 것보다 더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영미의 팝시장도 이제 아이튠스가 잡아먹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대규모의 음반작업은 신기하기도 한 동시에 고맙기도 한 일이다. 정말 그렇다.

전 곡의 작곡엔 Brett Anderson이 참여했으며 기타리스트인 Richard Oakes, 건밙악기 연주자인 Neil Codling이 적당히 잘 나눠서 참여하고 있다. 전작 만큼은 아니지만 스타트 트랙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오케스트레이션이 들어가 있어 "난 고상한 음악만을 내 아이들에게 듣게 할거야"라는 생각을 하시는 부모님들이 홀딱 반할만한 인트로를 들려준다. 앨범엔 당연히 그들의 뿌리라 할만한 음악인 브릿팝이나 얼터너티브라 분류될 ㅣ수 있는 곡들도 있다. 물론 그들의 올드팬들은 이런 곡들에 귀가 솔깃할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앨범은 브릿팝이나 얼터너티브의 바탕 하에 Art Rock 혹은 Prog. Rock에 한 발 더 가까이간 음악이라는 평가가 조금 더 정확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미 아시겠지만 별점이니 몇점 만점에 몇점이니 이런 식으로 음반을 평가하지 않기로 한 지 굉장히 오래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이 음반의 가치에 대해 이야갸ㅣ하지는 않을 것이나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기존의 스웨이드의 열혈 팬들 외에도 흔히들 이야기하는 Classical Rock의 팬들도 만족할 요소들을 갖추고 잇는 앨범이라는 생각이다. 그 나이에 아직도 목소리가 짱짱한 브렛의 보컬을 듣는 것부터가 굉장히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결론은 사서 들어라!


Pavement-Crooked Rain, Crooked Rain(1994)

이 앨범을 모르더라도 심지어 페이브먼트를 모르더라도 Cut your hair이라는 곡을 모를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팀을 결성한 연도를 기점으로 보면 만으로 10년 첫 앨범이 나온 해를 기준으로 한다면 만으로 7년 이 팀은 그야말로 미국 Indie Rock Scene의 아이콘이었다. 모두가 미국은 이 시기에 Alternative Rock의 전성기라 기억하고있을 바로 그 시기를 얼터너티브의 음악적 세례 없이 정말 자기들의 길을 걸은 몇 안되는 밴드였고 그들의 존재가 바로 당대 미국의 Indie Rock이었던 팀이 바로 Pavement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2010년 잠시 재결성을 하여 활동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시기에 페이브먼트는 스튜디오에서의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투어 활동을 한 것이었으므로 실재했으나 실제로 활동한 것은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관계로 이들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이들의 활동시기로 나오는 2010년은 이들의 무대를 기다려왔던 팬들에겐 역사적인 기간으로 기록될법한 시기이긴 하나 이들의 정식 활동기간으로 여겨야할지에 대해서 앞으로 논의를 거쳐야할 정도로 애매모호한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들의 시그니처 사운드가 된 Scott Kannberg의 의도적인 불협화음의 연주가 이 앨범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면 대단히 훌륭한 일일 것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바나와 커트 코베인의 개간지에 밀려 그간 과소평가된 억울한 팀들의 대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가장 심한 피해를 본 것은 Pearl Jam이라 할 수 있겠지만 페이브먼트 역시 펄 잼에 못지않게 저평가를 감수해야만 했던 팀이라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페이브먼트는 사골처럼 우릴 이야기가 많은 팀이니 오늘은 정말 이 정도만 하자. 물론 귀찮기도 피곤하기도 하고 말이다.




Amebix-Arise!(1978)

1970년대 후반은 팝음악계 전체가 커다란 혼란에 빠져있던 시기라 해도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딱 잘라서 실패했다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Punk Rock이라는 장르의 발흥 자체가 어떻게 보면 그 시기가 혼란의 시기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수도 있다. 나날이 갈수록 정교해지던 Rock 음악에 등장한 펑크의 존재는 안정적인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졍교해지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가리라는 전문가들의 기대와 대중들의 취향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실이라 여길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지 기존의 Classic Rock Era와는 다른 형태의 음악들이 Scene의 전면에 등장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고 그 시기가 언제가 될 것인지에 대해선 불분명하긴 했지만 한 시대를 휩쓸 음악이 펑크가 되리란 것을 예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 씨발 너무 과도하게 큰 이야기부터 하려니 답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 아래부터는 나중에 덧붙이도록 하고 일단 올린다.





2016년 4월 27일 수요일

Prince and the Revolution-Purple Rain(1984)

프린스 형님이 세상을 떠나신 일이야 이미 며칠 지났으니 굳이 그 이야기를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이 포스트질은 프린스 형님에 대한 추모의 의미가 있다는 점ㅇ느 분명하다는 점을 알아주기 비란다. 올해는 정말 과도하게 마가 낀 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짐 모리슨과 제니스 조플린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를 모두 잃었던 19701년(아 왜 하필이면 잉런 저주받은 해라는 말인가?) 이후로 팝계가 이렇게 많은 것을 한번에 잃은 해는 올해가 처음일 것이란 생각이다.

혹시 늬들이 PMRC(Parents Music Resources Center)이라는 잔체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잇을지 모르겠는데 이 단ㄴ체가 창설되는 데에 가장 큰 기여를 하신 것이 바로 프린스 형님이시란 말씀이다. 그리고 바로 이 앨범하고도 연관이 있다.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하다고 여길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만 한 때 미국 부통령의 부인이었던 Tipper Gore여사를 아시는가 모르겠다. 그렇다 그 분은 바로 Ql Gore 전 미국 부통령의 부인 되시겠다. 티퍼 여사가 어느날 자신의 열한살 난 딸이 바로 이 앨범의 Darling Nikki를 듣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당연히 이 앨범이 발매되었을 당시 공화국에서도 그 선정적인 내용 때문에 방송 금지곡 풀반 금지곡의 영예를 얻으신 곡인데 자신의 열한살 먹은 딸이 이 곡을 듣는 것을 보고 이 단체를 세우게 되신다.

물론 티퍼 고어 여사가 PMRC을 세울 당시에 티퍼 여사는 당연히 부통령의 부인이 아니었지만 이 단체를 세우시고 우리가 해외 직구를 통해 구입하는 음반에서 볼 수 있는 "Parnetal Advisory:Explicit Lyrics"이라는 스티커는 바로 이 PMRC의 권고로 음반을 배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측에서 자발적으로 붙이는 것으로 되어있다는 말씀이다. 물론 이른바 19금 음반이라는 것을 구입해보신 적도 없으신 이 사회의 밝고 건강한 성인이신 여러분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일테지만 말이다.

아무튼 프린스 형님의 앨범들 중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이 바로 이 앨범인 것만은 틀림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엔 당신들이 모르는 세계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 하나 있다. 같은 날짜에 동시에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와 빌보드 200 앨범 차트 그리고 전미 박스 오피스의 1위 자리에 동시에 자신의 작품을 올린 아티스트는 프린스가 최초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아무도 이 기록은 깨지 못하고 있다. 당시엔 동명의 영화가 100 퍼센트 프린스 자신의 이야기라 알려졌지만 사실 그냥 자신의 이야기에 바탕을 둔 영화였다고 한다.

사실은 앨범에 대한 프로젝트가 먼저 진행되었고 그리고 그 와중에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그 뒤 프린스의 흑역사를 장식하게 될 프린스의 두번째 영ㅇ화 작업인 과는 달리 철저하게 음ㄴ반 프로젝트가 먼저 시작된 후 영화가 뒤를 따른 경우라 할 수 있다. 어쨌든간에 1984년 이 앨범은 빌보드 200 앨범 차트에서 무려 24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으며 같은 해에만 1300만장 이상이 팔리는 기록을 세웠으며 (영화의 제작비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어 순수익의 규모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으나) 6800만 달러 이상의 흥행수익을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한가지! 작년 아델의 앨범에 한참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을 때 경향신문에 팝 칼럼리스트 I모씨가 이런 이양기를 하신 적이 있다. 그 분의 이야기인즉, 요즘 차트의 순환이 빠른 이유가 과거에 비해 들을만한 곡 혹은 역작이나 명작이 없어서 그럿다> 근데 어떻게 차트의 순환이 빠른 것과 음악의 퀄러티를 연관시킬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당대의 음반들의 수준이 상향 평준화된 결과를 반영하는 것이 빠른 차트의 순환이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자. 그 분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classical rock의 명반들도 10주 이상 차트의 정상에 있어본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체크해 보셨는가?









2016년 4월 25일 월요일

Genesis-...And there were three...(1978)

피터가 팀을 떠나면서부터 제네시스의 음악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팀의 절반 이상을 차지햇던 그의 존재감을 대체할만한 방법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사후적으로 그들의 음악에 대해 내릴 수 있는 평가다. 하지만 아직도 드럼로서의 연주력에 대해선 끊임없이 의문부호가 붙는 필이었지만-지금은 그나마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필의 드러밍을 들을 수도 없다.-그에게는 피터에 뒤지지 않는 곡을 쓰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한 필의 능력은 피터가 팀은 떠난 후에도 여전히 제네시스를 작품성이 뛰어난 음악을 생산해낼 수 있는 팀이라는 위치에 머무를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결국 토니와 마이크 필 이 세 사람만이 제네시스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음악적인 방향성에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베이시스트도 없고 드러머가 보컬을 담당해야 하는-그 것도 전 곡의- 상황에 처한 제네시스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와 같은 대규모 사운드의 팀으로 남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피터가 팀을 떠난 이후에 오히려 상업적으로는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평단의 평가 역시 피터가 떠난 이후에도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상업적인 성공과는 별개로 이 팀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달라지게 되었고 공화국 이님ㄴ들이 잘 아는 80년대의 제네시스는 그 전처럼 대 밴드라는 인식을 심어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평단의 평가가 달라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이 앨범에서부터였다. 이토록 비장한 타이틀의 앨범이 평단에서의 평가가 나빠지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앨범을 발매하던 1978년은 뉴웨이브의 총아라 할 수 있는 듀란듀란이 아직 세상에 나타나기 전이지만 이미 디페쉬 모드나 저팬(일본의 X-Japan과는 다른 밴드라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란다. 베이시스트가 없는 팀의 구성상 더 이상 그들의 사운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들에게는 불세춝의 키보디스트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Tony Banks이 건재했다. 그리고 이 문단의 시작에서 이야기한 뉴웨이브는 그들의 음악에 하나의 돌파구가 되었다. 물론 그 것이 옳은 방향이든 그렇지 않든간에 말이다.

클래시컬한 Rock 밴드들에게 대단히 우호적인 롤링 스톤 조차 이 앨범에 별 다섯개 만점에 겨우 별 네개를 주었으며 항상 제네시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던 Q는 겨우 세개의 별점, 심지어 당대 가장 옇ㅇ향력있는 팝 저널리스트였던 Robert Christgau의 경우엔 D+이라는 상상외의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UK 차트의 맨 꼭대기에 오르는 등 대단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앨범을 통해 우리가 한 가지 커다란 것을 알게 된다. 즉, 이후 필의 솔로 활동의 실마리가 이 앨범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특히나 대단히 중요한 것은 53분이 넘는 이 대작 앨범에서 대단히 안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 앨범의 마지막 트랙인 Follow you follow me의 경우에 제네시스가 발매한 싱글들 중에선 가장 파괴력이 강한 곡이 되었는데 이 곡이 가지고 있는 미니멀한 사운드와 서정적인 가사는 80년대 솔로 아티스트로서 전성기를 누린 필 콜린스의 음악의 전범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Suede-Suede(1993)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나-라고 하기엔 이유가 대단히 분명하다.- 많은 이들은 스웨이드의 출현을 지기의 재림으로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얼터너티브, 브릿팝 계열의 밴드 중에선 대단히 특이하게도 Glam Rock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밴드가ㅏ 스웨이드 였고 스웨이드의 프런트맨인 브렛 앤더슨의 별난 행동이 (개인적으로는 별 상관이 없다고 보지만) 지기를 연상시켰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측면에서가 아니라 스웨이드야 말로 한 시대의 지분을 크게 장악했던 수많은 브릿팝 밴드들 중에서 가장 저평가된 팀 중 하나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겠지만 지금은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의 다섯 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데뷔 당시엔 4인조였다. 보컬엔 굳이 이름을 다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명한 Brett Anderson, 기타엔 Bernard Butker, 베이스 기타의 Matt Osman, 드럼엔 Simon Gilbert이 그들이었다.

여기서 또 하나, 아는 사람은 다 알고있을 사실이지만 스웨이드가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앨범인 Coming Up(1996)을 발매할 당시엔 창단 멤버이자 팀의 한 축을 담당했던 버나드 버틀러가 팀을 떠난 상태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팀의 초창기 음악에서 버나드 버틀러가 담당했던 부분을 간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게다가 오늘 늬들이 들을 이 음반이야 말로 브렛 앤더슨은 물론이요 버나드 버틀러의 역량이 대단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음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발매 당시에 이 앨범은 UK 차트의 정상에 올랐고 공교롭게도 이 앨범을 발매한 레이블은 늬들이 좋아 환장할 이름인 Nude이라는 음반 회사다. 이미 1992년에 싱글로 두 곡 "The Drowners"와 "Metal Mickey"을 발매해 간을 보았던 만큼 데뷔 앨범이긴 해도 이 앨범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리라는 것은 예견된 것이었지만 영국에서의 뜨거운 반응에 비하자면 다른 지역에서의 반응은 그리 불타오르지는 않았다 할 수 있다. 아무튼 닥치고 감상하다 보면 좋은 음반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라 본다. 물론 아님 말고...


2016년 4월 22일 금요일

Milt Jackson and John Coltrane - Bags & Trane(1960)

자. 일단 링크부터 걸고 개소리는 잽싸게 첨부하도록 하자.

1923년 미국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Milt Jackson은 대중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비브라폰 연주자로서 솔로 커리어로도 수많은 업적을 이뤄낸 사랑이며 동시에 일본에서 굉장히 인기가 있는 아티스트라는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한다. 수많은 미국의 아티스트들이 그랬듯 밀트 잭슨 역시 음악적인 경험을 처음 하게 된 계기가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니면서였다고 한다. 물론 교회에서 재즈를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맨처음으로 악기를 (정식으로) 연주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기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대부분의 마림바나 비브라폰 연주자가 그렇 듯이 시작은 팀파니였다고 한다. 팀파니를 연주하는 외에 고등학교 시절에 그는 주로 드럼을 연주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설마 그런 것을 가지고 거짓말을 하겠냐는 말이지...뮐론 비브라폰을 처음 접하게 된 것도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본인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한다.

밀트 잭슨의 일대기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포스트가 아니니 그에 대해선 이 정도로 이야기하도록 하고(물론 앞으로도 또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 단언한다.) 그랬거나 저랬거나 하드 밥 시대의 거장 중 한 명이라 불리는 밀트 잭슨은 수많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연주했고 특히 Modern Jazz Quartet의 멤버로서 활동하며 수많은 명반을 남긴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궁금하면 늬들이 찾아보기 바한다.


2016년 4월 20일 수요일

John Coltrane-My Favorite Things(1961, Atlantic Record)

정말 날로 먹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뭐 이 건 굳이 설명이 필요가 없는 앨범임에 분명하다. 존 콜트레인이 소프차노 색스는 어떻게 연주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준 앨범임과 동시에 이 앨범의 타이틀 트랙은 수많은-사실상 세는 것이 가능할까 싶으로 많은- 재즈 넘버들 중 가장 사랑받는 곡이기도 하고 이 앨범 자체가 1988년 Grammy Hall of Fame에 헌정되기도 했다. 조만간 다시 설명할 기회가 오리라 생각하지만 Modal Jazz의 교과서라 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앨범이다.

닥치고 감상!!!


2016년 4월 19일 화요일

Portrait in Jazz-Bill Evans(1959)

우리가 빌 에반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상식 중 하나는 빌 에반스가 대단히 오래 전 태어난 사람일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빌 에반스는 겨우 1929년 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시대의 인물이라 생각하는 미셀 푸코에 비해서도 두 살이나 어리다. 물론 빌 에반스 역시 미셀 푸코 만큼이나 일찍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말이다.

이 앨범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1959년 4월 마일스 데이비스와 빌 에반스의 재즈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음악적인 측면은 물론 상업적인 측면에서도 성공한 공동 작업-요즘 하도 Collaboration이라는 말을 많이 쓰다 보니 이 말에 거부감이 들기도 하거니와 굳이 이 단어를 꼭 써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아니다.- 이후 빌은 자신의 밴드를 재정비하게 된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그 이전 상당히 오랜 시간 자신과 같이 해오던 사람들 중 상당수와 헤어지고 거의 새로운 밴드를 조직하다시피 한 엄청난 재편이었다 할 수 있는 팀의 재정비후 같은 해 12월에 발매한 것이 바로 이 앨범이다. 그리고 이 앨범은 빌 에반스 자체가 역사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빌 에반스 자신의 음악 생활은 물론 재즈의 역사 더 나아가서 대중음악의 역사에 길이 남을 앨범이 되고야 만다.

아마 인류가 발매한 재즈 음반들 중 피아노가 팀을 리드하는 음반들 중 최고의 앨범을 꼽으라 하면 충분히 몇 손가락 안에 꼽히고도 남을만한 음반인 이 음반에 이르러 비로소 피아노는 당당히 모던 재즈의 주역으로 확실한 자신의 위치를 가지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의 찌질이들에게 "네가 빌 에반스에 대해 알아?"라 시작하는 허세를 부리고 싶다면 반드시 이 앨범은 꼭 들어보고 연기하기 바란다. 허세와 허풍에도 나름의 격이 있는 법이다.



2016년 4월 18일 월요일

Genesis-Genesis(1983)

제네시스와 같은 역전의 밴드가 셀프 타이틀드 앨범을 발매한 것이 그들이 정식으로 앨범을 발매한 후 활동을 시작한 후 거의 15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라는 것이 거짓말이라 믿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애석하게도 말이다. 그리고 그 것이 벌써 33년 전의 일이란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제네시스의 역사에 있어 이 앨범이 차지하는 위치도 대단히 애매하다. 이미 1975년 피터가 팀을 떠난 후 팀의 음악적인 색깔이 달라질 것이라는 점은 개나 소나 다 직감한 일일 것이다. 사실 80년대는 기존에 휠을 잡던 팀들이 음악적으로 다소 아스트랄한 변신을 시도한 때이기도 하다. 무디 블루스나 예스 심지어 재결성했던 딥 퍼플에 이르기까지 당시 음악계의 대세이던 뉴 웨이브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경우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 와중에서도 이 앨범은 그 어느 팀들보다 먼저 더 소프트하고 무그 악기들의 영향력에 의해 지배되는 새로운 시도를 1980년대의 활동방향으로 가장 먼저 천명한 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론 그 유명한 Abacab을 통해 제네시스의 이런 변신은 이미 예견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어느 팀보다도 제네시스만큼 시대의 조류를 잘 따랐던 팀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과거 피터가 리드보컬을 담당하던 시기의 음악과 비교하자면 피터의 활동기간의 무거움을 털어내는 데에 다소간의 강박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필이 팀을 주도하던 이 시기의 제네시스를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스티브 해킷이 팀을 떠난 이후로 제네시스는 유능한 기타리스트가 없는 한계를 미리 설정하고 음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면죄부를 받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장기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피터의 솔로 앨범 역시 당대의 조류를 충실히 따르고 있지 않았던가...


2016년 4월 7일 목요일

공화국에서 야구는 어떻게 가장 재미없는 스포츠가 되었는가?

이 포스트도 과연 올라갈지 아닐지 자신할 수 없지만 아무튼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노력을 통해 사장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하...기엔 그간 양치기 소년 짓거리를 많이 해서... 일단 시작하도록 하자. 재미없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공화국의 삶 자체가 재미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순서겠지만, 오늘은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덜 재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행동 중 하나인 "프로야구를 즐기기"가 어떤 이유로 가장 재미없는 일 중 하나가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공화국의 특징 중 하나는 대부분의 야구팬이 대부분의 축구 팬이라는 점이리라 생각한다. 여기다 토달지 말기 바란다. 대부분이라 했지 전부 다는 아니라고 했다. 이걸 가지고 또 뭐 난 축구는 존나 좋아하는데 야구는 혐오한다 이 개새끼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말아라! 이 씨발놈아! 이런 식으로 지껄이려면 딴 데 가서 지껄이라는 말씀이다. 각설하고 문제는 야구는 점점 즐기는 연령층이 높아지고 축구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에 대한 가장 명쾌한 해답은 야구는 지루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루하다는 것이 단지 경기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경우에 따라 10분 이내에 경기가 끝나는 경기들도 지루할 수 있고 수일에 걸쳐 벌어지는 종목도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야구의 문제가 단지 경기 시간이 길기 때문에 지루하다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니미

니미 씨발이다.

이런 식으로 다시 블로그로 돌아오게 되다니...

좆같다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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