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님 말고 1000곡
142. Sing, Sing, Sing-Benny Goodman(1935, Bluebird)-
듀크 엘링턴을 빼놓고 모던 재즈, 혹은 메인스트림 재즈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모던 재즈 혹은 메인스트림 재즈를 이야기할 때 듀크 엘링턴을 언급하기 훨씬 이전에 반드시 언급해야만 할 몇 사람을 꼽으라면 그 안에 반드시 들어갈 인물 중 하나가 바로 Benny Goodman일 것이다. 혹은, 그의 이름을 빼먹으면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돌팔매에 혼비백산하며 도망다닐 각오를 해야만 할 것이다. 대단한 이야깃거리는 아니니 베니 굿맨의 본명이 Benjamin David "Benny" Goodman이라는 문헌학적 정보 정도는 미리 밝혀두고 시작한다. 그리고 베니 굿맨은 일리노이주의 시카고에서 1909년 5월 30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도 아울러 밝힌다. 그를 칭하는 명칭은 꽤 여러가지가 있지만 단 하나의 명칭을 이야기하면 모든 이들이 베니 굿맨을 떠올린다. "King of Swing" (이 것은 다른 말로 하면Sultans of Swing이 되는 것인가?)
그가 스윙의 제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아티스트인가를 말해주지만, 누군가에겐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점이지만, 그를 평가하는 데에 있어 나름대로 절대로 빼놓아선 안되는 업적이 있다. 그가 그런 일을 한 최초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는 대중음악의 역사에 기록될만한 성공을 거둔 "백인과 유색인 유대인 등으로 이뤄진 역사상 최초의 다인종 밴드"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로 말미암아, 그 것이 다소 비극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는 해도 재즈라는 장르는 다양한 대중음악의 장르 중, 가장 인종주의의 벽이 낮은 장르로 인식되고 있고 그런 과거의 전통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유대인이었던 그의 인종문제에 대한 태도를 자세히 기록한 문헌은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그가 전성기를 보냈던 30년대만 하더라도 이런 일 자체가 역사에 기록될만한 크나큰 의미를 갖는지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베니 굿맨을 스윙의 제왕이라 부르는 만큼 그의 곡들 중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곡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고 그 중 한 곡을 꼽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소 진부한 선택일지 몰라도 이 곡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팝 음악의 역사를 서술하다 보면 일종의 페스티벌이라 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니라 단일한 팀의 단일한 무대가 그 자체로 팝 음악의 새로운 분수령이 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Rock 음악의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공연인 레드 제플린의 그 유명한 1973년 7월 27일에서 29일 사이의 공연과(이는 Song remains the same이라는 앨범으로도 발매되었고 같은 이름의 기록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딥 퍼플의 Made in Japan이라 이름 붙여진 앨범으로도 출시된 1972년 8월 15일에서 17일 사이에 도쿄와 오사카에서 벌어진 공연의 실황을 꼽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딥 퍼플의 이 앨범은 미국에선 Live in Japan이라는 타이틀로 출시되었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이전인 1938년 1우월 16일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는 베니 굿맨과 그의 밴드가 무대에 서게 된다. Bruce Eder이라는 이름의 당대 최고 수준의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은 이 공연에 대해 이런 커멘트를 남겼다. "the single most important jazz or popular music concert in history: jazz's coming out part of 'respectable' music" 개인적으로 영어가 약한 관계로 더 세심한 뉘앙스는 읽는 분들이 더 빨리 알아채시리라 생각하나, 최대한 대중음악적인 이해를 위해 한국어로 다시 이야기해 본다면, 그 공연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재즈 혹은 대중 음악 공연이었고 재즈는 이로 인해 '존중받을만한' 음악적 장르로 그 스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 정도로 약간의 뻥을 좀 섞에서 이야기하자면, 재즈 혹은 대중음악은 1938년 1우월 16일의 베니 굿맨 밴드의 공연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Sing, Sing, Sing 이 곡은 바로 이 역사적인 공연의 절정부를 장식한 곡이라 할 수 있다. 이 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고, 당시 공연을 눈으로 지켜봤던 사람들이나, 당대의 평론가 혹은 후대의 음악사학자 혹은 평론가들의 이야기다. 색소폰의 Babe Russin, 트럼펫의 Harry James 그리고 클라리넷엔 당연히 팀의 매스터이자 곡의 작곡자이며 이 게시물의 주인공인 베니 굿맨, 그리고 이들을 든든하게 바쳐준 드럼엔 Gene Krupa의 라인업이 이 곡을 연주했다. 한 가지 장담하는 것은 이 게시물을 보는 여러분들이 이 라인업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팝 매니아 혹은 재즈 매니아들보다 두 수는 먹어주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미리 팁을 드린다면, 다른 장르는 물론이지만 특히 재즈라는 장르는 연주의 라인업이 어떻게 되는가를 반듣시 염두에 두고 곡을 감상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이야기할 때가 올 것이다.
Show must go on!
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쫙 몰아서(개소리들)
1. 그들은 왜 실패했는가?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승패가 갈리는 게임에 있어 패자에겐 반드시 진 이유가 있다. 간혹 승자에겐 승리를 한 이유가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패자에겐 이유가 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질 이유가 없는 선거였다."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들이 다가가야할 문제의 본질이란 선거라는 것을 어떻게 임해야 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치적 목적이 대단히 분명한 데에 반해-그렇다. 그들의 정치적 목적은 정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들이 펼 수 있는 전술이라는 것은 선거를 통한 승리 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가에 상관없이 대중운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직접적으로 정권을 획득할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그들의 성공과 실패는 과도하게 명확하게 드러난다. 선거에서의 승리와 패배, 그래서 그들은 5년 후의 선거 외엔 다른 수가 없다. 하지만 "질 이유가 없었다."라고 한다면 그들은 전술적인 발전이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질 이유가 없는 선거에서 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들은 한 쪽의 길을 스스로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거에 임하며 세부적인 전술을 세울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해 대단히 가혹한 평가를 하고 상대방에 대해선 반대로 대단히 후한 평가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 견해는 그렇다. 선거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갈 수도 있는 표를 우리 쪽으로 가져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자신들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면 곤란한가?라는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자신들에 대해 후한 평가를 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 "자신들이 끌어 올 수도 있는 상대방 표를 잡아 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대단히 느슨해지게 될 것이다. 왜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은가? "잡은 고기에겐 떡밥을 던져주지 않는다." 조금 더 과한 상황이라면 자신에게 후한 평가를 하게 되는 순간 반대로 "절대로 자신이 이미 잡은 것이나 다른 물고기라 생각해서 떡밥을 던지는 것도 잊고 있던 고기"가 떡밥을 던지는 다른 이의 낚시대에 결린
찌를 물게 된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당의 실책이 드러난다. 50대의 이탈이나 생각보다 강했던 2030 세대의 우경화는 결과적인 문제일 뿐이다. 민주당은 그들을 위한 떡밥을 제대로 던지는 데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은 절대 선"이고 "머리가 제대로 박힌 인간이라면 우리를 찍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거는 신앙 고백을 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뒤 그리스도 예수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선거는 아주 대표적인 게임이다. 참가자가 있고 룰이 있으며 보상, 즉 결과가 있다. 분명 상대가 존재하는 게임을 그들은 "절대 선인 자신들에 대한 인민 대중의 찬반투표"로 사고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은 선거가 끝난지 벌써 열흘이 다 되어가는 데에도 자신들의 선거 전략과 전술에서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들이 자신들을 절대선으로 치부하고 선거에서 상대방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정에서의 잘못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봐도 이길 선거를 진 것이 누구의 탓"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번 선거를 사고한 그들이 패배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2. 난 항상 당신보다 왼편에 있다.
있어 보이냐? 하나도 안 있어 보인다. 멋있으라고 한 소리라면 이런 소리를 쓰진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멋진 말이에요! 죽여요!"라고 하는 것을 즐기고자 했다면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썼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한 우리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개뿔!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이라니... 대선 결과를 가지고 멘탈이 붕괴된 사람들은 사실상 "대선이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많은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일 것이다. 미안하게도 난 그다지 크게 정신이 빠져나갔다거나 하진 않았다. 물론 당연히 1번이 아닌 2번이 당선되길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1번이 당선되었다는 사실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진 않았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넌 1번이 당선되든, 2번이 당선되든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냐?"
답은 어떤 면에서는 그렇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 않을까? 그 갈갈이 찢겨진, 심지어는 대중의 비웃음의 대상인 MBC 문화방송에 다니면서도 그 조직의 구성원인 것을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는 정의사회의 2인자 대멀에겐 자신이 가진 자부심이 더 이상 바닥을 뚫고 가는 일을 지켜만 볼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정권교체라는 것이 누구보다도 중요한, 심지어 그에게는 정권교체라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수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공화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의 구성원들에게 정권교체라는 것이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해서 공화국의 구성원 모두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한가지 면만을 볼 수는 없겠지만 "좀더 정직하고 착한 자본주의"라는 것에 대한 기대치와 혹은 그 것의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의해 정권교체가 엄청난 의미를 갖는가? 혹은 그 의미가 엄청나지는 않은가?가 나뉠 것이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자신들에겐 좀 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대선 후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항상 그랬듯, "그럴 각오로 살아라!"는 따위의 말은 하지 않겠다. 죽음 외엔 탈출구가 없다는 생각까지 간 사람에게 그런 입에 발린 잠언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리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정권교체라는 것이 무지하게 큰 의미는 아니었던 것은 "정권교체를 엄청나게 큰 의미로 받아들인 사람들에 비해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이 더 왼 쪽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의미가 아니라 하더라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도 정권을 누가 잡게 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엔 동의할 수 없다. 분명히 자신의 이익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이 요구했던 정권교체라는 구호는 타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3. 그 외 할 이야기들이 있지만...
12월 18일 명랑사회를 위한 대선 평가 및 독자적 계급정당의 앞날에 대한 평가를 위한 좌담회... 는 개뿔이고 오랜만에 술을 먹기 위해 마련한 모임에서 마지막까지 멀쩡한 정신으로 남았던 사람들 중 두 명이 내게 예의 정권교체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를 가지고 "다구리"를 했더랬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밝혔듯, 기본적으로 딴따라 마인드인 나는 내가 딴따라 짓을 하는 데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정치적인 발언을 그다지 즐기지 않,....기는 개뿔이지만, 어느 정도는 참아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내가 마음 잡고 딴따라 짓거리에 매진하기엔 아스트랄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늘 비교적 정치적인 현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이 정도로 줄인다. 줴길...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승패가 갈리는 게임에 있어 패자에겐 반드시 진 이유가 있다. 간혹 승자에겐 승리를 한 이유가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패자에겐 이유가 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질 이유가 없는 선거였다."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들이 다가가야할 문제의 본질이란 선거라는 것을 어떻게 임해야 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치적 목적이 대단히 분명한 데에 반해-그렇다. 그들의 정치적 목적은 정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들이 펼 수 있는 전술이라는 것은 선거를 통한 승리 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가에 상관없이 대중운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직접적으로 정권을 획득할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그들의 성공과 실패는 과도하게 명확하게 드러난다. 선거에서의 승리와 패배, 그래서 그들은 5년 후의 선거 외엔 다른 수가 없다. 하지만 "질 이유가 없었다."라고 한다면 그들은 전술적인 발전이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질 이유가 없는 선거에서 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들은 한 쪽의 길을 스스로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거에 임하며 세부적인 전술을 세울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해 대단히 가혹한 평가를 하고 상대방에 대해선 반대로 대단히 후한 평가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 견해는 그렇다. 선거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갈 수도 있는 표를 우리 쪽으로 가져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자신들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면 곤란한가?라는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자신들에 대해 후한 평가를 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 "자신들이 끌어 올 수도 있는 상대방 표를 잡아 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대단히 느슨해지게 될 것이다. 왜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은가? "잡은 고기에겐 떡밥을 던져주지 않는다." 조금 더 과한 상황이라면 자신에게 후한 평가를 하게 되는 순간 반대로 "절대로 자신이 이미 잡은 것이나 다른 물고기라 생각해서 떡밥을 던지는 것도 잊고 있던 고기"가 떡밥을 던지는 다른 이의 낚시대에 결린
찌를 물게 된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당의 실책이 드러난다. 50대의 이탈이나 생각보다 강했던 2030 세대의 우경화는 결과적인 문제일 뿐이다. 민주당은 그들을 위한 떡밥을 제대로 던지는 데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은 절대 선"이고 "머리가 제대로 박힌 인간이라면 우리를 찍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거는 신앙 고백을 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뒤 그리스도 예수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선거는 아주 대표적인 게임이다. 참가자가 있고 룰이 있으며 보상, 즉 결과가 있다. 분명 상대가 존재하는 게임을 그들은 "절대 선인 자신들에 대한 인민 대중의 찬반투표"로 사고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은 선거가 끝난지 벌써 열흘이 다 되어가는 데에도 자신들의 선거 전략과 전술에서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들이 자신들을 절대선으로 치부하고 선거에서 상대방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정에서의 잘못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봐도 이길 선거를 진 것이 누구의 탓"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번 선거를 사고한 그들이 패배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2. 난 항상 당신보다 왼편에 있다.
있어 보이냐? 하나도 안 있어 보인다. 멋있으라고 한 소리라면 이런 소리를 쓰진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멋진 말이에요! 죽여요!"라고 하는 것을 즐기고자 했다면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썼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한 우리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개뿔!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이라니... 대선 결과를 가지고 멘탈이 붕괴된 사람들은 사실상 "대선이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많은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일 것이다. 미안하게도 난 그다지 크게 정신이 빠져나갔다거나 하진 않았다. 물론 당연히 1번이 아닌 2번이 당선되길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1번이 당선되었다는 사실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진 않았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넌 1번이 당선되든, 2번이 당선되든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냐?"
답은 어떤 면에서는 그렇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 않을까? 그 갈갈이 찢겨진, 심지어는 대중의 비웃음의 대상인 MBC 문화방송에 다니면서도 그 조직의 구성원인 것을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는 정의사회의 2인자 대멀에겐 자신이 가진 자부심이 더 이상 바닥을 뚫고 가는 일을 지켜만 볼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정권교체라는 것이 누구보다도 중요한, 심지어 그에게는 정권교체라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수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공화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의 구성원들에게 정권교체라는 것이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해서 공화국의 구성원 모두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한가지 면만을 볼 수는 없겠지만 "좀더 정직하고 착한 자본주의"라는 것에 대한 기대치와 혹은 그 것의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의해 정권교체가 엄청난 의미를 갖는가? 혹은 그 의미가 엄청나지는 않은가?가 나뉠 것이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자신들에겐 좀 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대선 후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항상 그랬듯, "그럴 각오로 살아라!"는 따위의 말은 하지 않겠다. 죽음 외엔 탈출구가 없다는 생각까지 간 사람에게 그런 입에 발린 잠언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리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정권교체라는 것이 무지하게 큰 의미는 아니었던 것은 "정권교체를 엄청나게 큰 의미로 받아들인 사람들에 비해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이 더 왼 쪽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의미가 아니라 하더라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도 정권을 누가 잡게 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엔 동의할 수 없다. 분명히 자신의 이익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이 요구했던 정권교체라는 구호는 타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3. 그 외 할 이야기들이 있지만...
12월 18일 명랑사회를 위한 대선 평가 및 독자적 계급정당의 앞날에 대한 평가를 위한 좌담회... 는 개뿔이고 오랜만에 술을 먹기 위해 마련한 모임에서 마지막까지 멀쩡한 정신으로 남았던 사람들 중 두 명이 내게 예의 정권교체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를 가지고 "다구리"를 했더랬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밝혔듯, 기본적으로 딴따라 마인드인 나는 내가 딴따라 짓을 하는 데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정치적인 발언을 그다지 즐기지 않,....기는 개뿔이지만, 어느 정도는 참아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내가 마음 잡고 딴따라 짓거리에 매진하기엔 아스트랄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늘 비교적 정치적인 현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이 정도로 줄인다. 줴길...
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아! 씨발 또 대통령 선거다.(개소리들)
공화국 인민들 중 자신들이 첨단의 진보적 지식인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환장한다는 놈 촘스키 할아버님은 경제영역 혹은 생산영역의 사회화의 정도가 강하고 국가의 힘보다 개인의 자유가 극대화된 사회를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계신 분이다. 물론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촘스키 할아버지의 문제는 현재의 사회적 지형에서 그런 사회-그냥 편의상 사회주의적 공동체가 지배적인 사회라 하자.-로의 이행이 수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현재의 정치투쟁에 대한 전망을 이야기할 때의 촘스키 옹의 지난한 오류...까지는 아니고 일종의 어긋남이라고 할까?...를 깔고 말씀하시게 된다.
지금 여기서 촘스키 옹의 생각이 과도하게 이상적이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벌써 앞에서 깔고 들어가지 않는가? 내 생각도 촘스키 옹의 생각과 흡사하다고... 물론 개인에 대한 내 생각이 더 리버럴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촘스키의 생각이 가지는 문제는 국가기관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선 국가기관을 장악해야 한다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토대는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라는 맑스의 말을 조금 더 완화해서 이야기한 알뛰세르의 "토대는 최종 심급에서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말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필요조건은 아닐 수 있을지언정 충분조건은 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빌어먹을 공화국에서 선거라는 것을 넋놓고 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알뛰세르주의자이건 아니건 간에, 작금의 현실에서 상부구조를 장악하지 않으면 그 어떤 정치적 이념을 관철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뛰세르 주의자이건 아니건 마오 주의자이건 아니건, 현대사회는 대단히 세련된 방식으로 고전적 의미의 "잉여가치의 착취"라는 것을 은폐하고 있으며 그런 이데올로기의 조작이라는 것이 사실상 사회의 상부구조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을 통해 이루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물론 개인적으로 마오가 중국의 혁명을 조직함에 있어서 그런 식의 주장을 한 것을 두고 현대의 그런 교묘한 착취의 은폐를 미리 예견한 결과라 할 수 없음은 분명하지만, 현재의 현상만을 놓고 본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상부구조가 가지는 상대적 자율성에 의한 사회구성체 혹은 정운영 선생이 좋아하는 용엉로 사회형성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명쾌한 일이라 할 것이다.
여기까지 쓰다가 관뒀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아서...
지금 여기서 촘스키 옹의 생각이 과도하게 이상적이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벌써 앞에서 깔고 들어가지 않는가? 내 생각도 촘스키 옹의 생각과 흡사하다고... 물론 개인에 대한 내 생각이 더 리버럴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촘스키의 생각이 가지는 문제는 국가기관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선 국가기관을 장악해야 한다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토대는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라는 맑스의 말을 조금 더 완화해서 이야기한 알뛰세르의 "토대는 최종 심급에서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말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필요조건은 아닐 수 있을지언정 충분조건은 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빌어먹을 공화국에서 선거라는 것을 넋놓고 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알뛰세르주의자이건 아니건 간에, 작금의 현실에서 상부구조를 장악하지 않으면 그 어떤 정치적 이념을 관철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뛰세르 주의자이건 아니건 마오 주의자이건 아니건, 현대사회는 대단히 세련된 방식으로 고전적 의미의 "잉여가치의 착취"라는 것을 은폐하고 있으며 그런 이데올로기의 조작이라는 것이 사실상 사회의 상부구조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을 통해 이루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물론 개인적으로 마오가 중국의 혁명을 조직함에 있어서 그런 식의 주장을 한 것을 두고 현대의 그런 교묘한 착취의 은폐를 미리 예견한 결과라 할 수 없음은 분명하지만, 현재의 현상만을 놓고 본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상부구조가 가지는 상대적 자율성에 의한 사회구성체 혹은 정운영 선생이 좋아하는 용엉로 사회형성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명쾌한 일이라 할 것이다.
여기까지 쓰다가 관뒀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아서...
2012년 12월 10일 월요일
내 첫 곡은 그랬다.(Soundless Music)
1.
"이건 뭐! 완전한 짜깁기잖아!!!"
지금은 정확한 날짜도 기억나지 않지만(사실은 기억한다. 그러나 나도 쪽팔림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에 대해선 아는 사람인 관계로 일부러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쓴 곡의 악보를 보여줬을 때 들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난 전혀 그 누구의 곡도 참조한 적이 없었더랬다. 그래서 억울했냐고? 물론 그렇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음으로 곡을 써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주변의-절대 우리 학교 새끼들은 아니었다.-이야기는 이런 것들이었다.
"네가 재능이 있고 없고를 떠나 걱정되는 건 네가 지나치게 많은 음악을 들었다는 점이다. 음악을 대단히 많이 들은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문제 중 가장 큰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혀 의도하지 않은 표절곡이 나온다는 거야."
지금처럼-물론 지금도 난 신서사이저가 없고 미디 프로그램도 없다. 전엔 썼지만- 장비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서 어떤 사운드가 나오는지 대략 확인해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저 머릿속의 곡과 겉으로 나오는 곡이 어느 정도 비슷하기만을 바라며 잘 쓰지도 못하는-아시겠지만 워낙 유명한 악필이고 악보를 그린다고 해서 악필이 명필이 되진 않는다.- 악보를 써가며 만든 내 첫 곡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맨 앞 문장 저거 딱 한 줄이었다는 말씀!
2.
우스개소리였을 것 같다면 미안하게도 절대 아니다. 실제 내가 처음 쓴 곡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이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내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가정한다면 굉장히 슬픈 일에 속한다고 할만한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때의 일은 지금도 뭔가 끄적거린 것을 절대 남한테 보여주지 않는 악습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은 앞서 이야기한 정도의 굴욕적인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시는 고삐리 시절 아닌가? 지금은 최소한 고삐리는 아니라는 점에서 자그마한 위안을 삼고자 한다. 고삐리인가? 아닌가?가 왜 중요하냐고?
물리적인 나이가 고삐리의 나이가 아니라는 것보다 고삐리들이 흔히 음악에 막 다이브했을 때 겪게되는 오류들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런 오류들이 어떤 지점에서 비롯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점이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음악은 가오에서 시작하지도 가오로 끝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전엔 하나도 모르던 화성의 진행이라는 문제에 대해 다소의 이해가 생기면서 말도 되지 않는 널뛰기 멜로디를 가지고 "곡을 썼다"는 말을 과감하게 할 용기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되시겠다.
나이를 처먹으면 처먹을수록 머릿속에 뭔가 좀 더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것이 뭔가 새로운 것의 재료가 되거나 하진 않는 것 같다. 항상 이야기하지 않는가? 경제에 대해 가장 미친 듯 떠들어제끼는 시기는 "막 경제원론 수강을 끝냈을 때"라고... 물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 따위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늙으면 늙을수록 쪽팔리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이야기다.
3. 물론 지금은 과거에 비하면 훨씬 더 매끄러운 뭔가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다. 순전히 미디 작업을 하기 힘들어 편곡까지 완성되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뭔가 막 떠오를 때 계속 기록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날아가는 것들도 굉장히 많고...
문제는 얼마나 뻔뻔해지는가....일 것이다. 하지만, 뻔뻔해지려면 쪽팔릴 것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 법... 그러나 이제 쪽팔림을 모르기엔 귀가 좀 발달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날이 느는 것은 다른 인간들의 곡들을 까대는 일일 것이다. 아! 넌 발표도 못했거나 네 말을 충분히 받아들여 안한 주제에 왜 남들을 까냐고? 허허허... 어째서 다른 사람들의 곡을 평가하는 시간만큼 자신이 뭔가 완전한 것들을 표본으로 삼고 "이 정도면 되겠지..." 가 아닌 "반드시 이런 것들은 충족시켜야 해..."라는 음악적 미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실까?
그냥 주저리 주저리...
"이건 뭐! 완전한 짜깁기잖아!!!"
지금은 정확한 날짜도 기억나지 않지만(사실은 기억한다. 그러나 나도 쪽팔림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에 대해선 아는 사람인 관계로 일부러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쓴 곡의 악보를 보여줬을 때 들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난 전혀 그 누구의 곡도 참조한 적이 없었더랬다. 그래서 억울했냐고? 물론 그렇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음으로 곡을 써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주변의-절대 우리 학교 새끼들은 아니었다.-이야기는 이런 것들이었다.
"네가 재능이 있고 없고를 떠나 걱정되는 건 네가 지나치게 많은 음악을 들었다는 점이다. 음악을 대단히 많이 들은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문제 중 가장 큰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혀 의도하지 않은 표절곡이 나온다는 거야."
지금처럼-물론 지금도 난 신서사이저가 없고 미디 프로그램도 없다. 전엔 썼지만- 장비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서 어떤 사운드가 나오는지 대략 확인해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저 머릿속의 곡과 겉으로 나오는 곡이 어느 정도 비슷하기만을 바라며 잘 쓰지도 못하는-아시겠지만 워낙 유명한 악필이고 악보를 그린다고 해서 악필이 명필이 되진 않는다.- 악보를 써가며 만든 내 첫 곡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맨 앞 문장 저거 딱 한 줄이었다는 말씀!
2.
우스개소리였을 것 같다면 미안하게도 절대 아니다. 실제 내가 처음 쓴 곡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이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내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가정한다면 굉장히 슬픈 일에 속한다고 할만한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때의 일은 지금도 뭔가 끄적거린 것을 절대 남한테 보여주지 않는 악습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은 앞서 이야기한 정도의 굴욕적인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시는 고삐리 시절 아닌가? 지금은 최소한 고삐리는 아니라는 점에서 자그마한 위안을 삼고자 한다. 고삐리인가? 아닌가?가 왜 중요하냐고?
물리적인 나이가 고삐리의 나이가 아니라는 것보다 고삐리들이 흔히 음악에 막 다이브했을 때 겪게되는 오류들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런 오류들이 어떤 지점에서 비롯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점이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음악은 가오에서 시작하지도 가오로 끝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전엔 하나도 모르던 화성의 진행이라는 문제에 대해 다소의 이해가 생기면서 말도 되지 않는 널뛰기 멜로디를 가지고 "곡을 썼다"는 말을 과감하게 할 용기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되시겠다.
나이를 처먹으면 처먹을수록 머릿속에 뭔가 좀 더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것이 뭔가 새로운 것의 재료가 되거나 하진 않는 것 같다. 항상 이야기하지 않는가? 경제에 대해 가장 미친 듯 떠들어제끼는 시기는 "막 경제원론 수강을 끝냈을 때"라고... 물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 따위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늙으면 늙을수록 쪽팔리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이야기다.
3. 물론 지금은 과거에 비하면 훨씬 더 매끄러운 뭔가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다. 순전히 미디 작업을 하기 힘들어 편곡까지 완성되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뭔가 막 떠오를 때 계속 기록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날아가는 것들도 굉장히 많고...
문제는 얼마나 뻔뻔해지는가....일 것이다. 하지만, 뻔뻔해지려면 쪽팔릴 것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 법... 그러나 이제 쪽팔림을 모르기엔 귀가 좀 발달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날이 느는 것은 다른 인간들의 곡들을 까대는 일일 것이다. 아! 넌 발표도 못했거나 네 말을 충분히 받아들여 안한 주제에 왜 남들을 까냐고? 허허허... 어째서 다른 사람들의 곡을 평가하는 시간만큼 자신이 뭔가 완전한 것들을 표본으로 삼고 "이 정도면 되겠지..." 가 아닌 "반드시 이런 것들은 충족시켜야 해..."라는 음악적 미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실까?
그냥 주저리 주저리...
2012년 11월 22일 목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41)
아님 말고 1000곡
141. Got my Mojo workin'-Muddy Waters(1956)-
당연히 머디 워터스를 이야기하면서 단 몇 줄의 끄적임과 한 곡을 가지고 "시마이~"라 선언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화를 낼 것이다. 당근 최소한 입에 "음악에 대한 존경심"이란 말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누를 범해선 안될 것이다. 그렇게 그냥 어물쩡 넘어가는 것은 고인이 되신 머디 워터스 할아버지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그가 중심이 되어 이룬 "블루스 일가"를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며, 그 무엇보다도 내가 그토록 피하고자 하는 누구들의 음악을 대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머디 워터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고자 한다. 게다가 이 개념도 없고 이슈도 없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끝없이 음악에 대한 문젱를 제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 아니면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라고 이야기하면 맞을 수도 있다.
보통의 경우 Rock and roll hall of fame이나 Blues hall of fame등의 경우엔 사람이 헌액이 된다. 물론 머디 워터스 할아버지도 두 명예의 전당에 다 올라가 계신다. 허나, 특이하게도 특정한 곡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 그 유명한 Grammy상의 Grammy hall of fame이다. 왜 그래미 명예의 전당을 이야기하는가? 라는 뻔한 질문에 뻔한 답을 한다면 이 곡은 2000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곡이기 때문이다. 또한 The rolling stone이 선정한 팝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곡에 359번째로 올라가 있는 곳 역시 이 곡이다. 그리고 이 곡은 처음 발표했던 1956년 당해에 벌써 리메이크되기 시작해서 2011년 Eric Clapton과 Johnny Winter에 의해 리메이크 될 때까지 공식적으로만 30차례 이상 리메이크된 곡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머디 워터스가 그저 대단한 아티스트가 아니라 전국적인 영향력을 지닌 아티스트로 자신의 입지를 굳힌 시기를 1953년 이후로 여긴다. 그 당시 스튜디오 세션에서 머디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이름만 거론하더라도 그 당시 머디의 성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곡이 녹음되던 당시의 머디 할아버지 혹은 머디 횽아의 팀의 라인업은 위키피디아를 참조하시든지 음반의 크레딧을 참조하기 바란다. 영타 쓰기 귀찮다. 아직도 영타는 기것해야 1분에 200타를 겨우 넘는 수준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빨리 치려다 오타를 남발하는 내 성격에는 자유롭게 쓰기 번거롭다 느낄 수밖에 없다. 또 잔소리가 길어졌다. 중요한 것은 블루스 신에서 머디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과 동시에 머디의 음악적인 역량에 대한 평가가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먼저 소개했던 곡이 Blues와 Rock and Roll의 중간 위치에서 머디가 얼마나 두 장르 모두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인가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면 이 곡은 리듬 & 블루스 장르에 대한 머디의 이해와 역량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보여주는 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정통의 블루스 곡이라 보기엔 soulful한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는 곡인데, 머디는 잉러한 형식의 곡을 자신의 블루스적 역량 하에서 보통의 소울이나 리듬 & 블루스 아티스트들과는 확연히 차별되는 방식으로 연주하고 있다. 물론 이 곡 자체가 머디의 곡이기 때문에 그가 자신에 맞춰 쓴 곡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버디의 당대의 흑인음악들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엿보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분명 각 장르마다 그런 인물들이 존재한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크로스오버적 시도를 통해 장르의 외연을 확장시킨 사람들 말이다. 물론 머디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은 그런 인물은 아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행했던 일련의 음악적 실험들은 재즈라는 장르의 외연을 확대시킨 것 이상으로 당대 대중음악의 트랜드 자체를 견인한 측면이 있다. 당연히 머디의 역할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디의 이야기를 하며 마일스 데이비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재즈나 블루스라는 장르의 후대의 흐름에 미친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각설하고 이 곡을 들으시면 대가의 풍모란 어떤 건지 쉽게 알게 되실 것이란 말씀이다. 자! 이제부터 아가리 닥치고 감상!!!
141. Got my Mojo workin'-Muddy Waters(1956)-
당연히 머디 워터스를 이야기하면서 단 몇 줄의 끄적임과 한 곡을 가지고 "시마이~"라 선언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화를 낼 것이다. 당근 최소한 입에 "음악에 대한 존경심"이란 말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누를 범해선 안될 것이다. 그렇게 그냥 어물쩡 넘어가는 것은 고인이 되신 머디 워터스 할아버지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그가 중심이 되어 이룬 "블루스 일가"를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며, 그 무엇보다도 내가 그토록 피하고자 하는 누구들의 음악을 대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머디 워터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고자 한다. 게다가 이 개념도 없고 이슈도 없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끝없이 음악에 대한 문젱를 제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 아니면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라고 이야기하면 맞을 수도 있다.
보통의 경우 Rock and roll hall of fame이나 Blues hall of fame등의 경우엔 사람이 헌액이 된다. 물론 머디 워터스 할아버지도 두 명예의 전당에 다 올라가 계신다. 허나, 특이하게도 특정한 곡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 그 유명한 Grammy상의 Grammy hall of fame이다. 왜 그래미 명예의 전당을 이야기하는가? 라는 뻔한 질문에 뻔한 답을 한다면 이 곡은 2000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곡이기 때문이다. 또한 The rolling stone이 선정한 팝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곡에 359번째로 올라가 있는 곳 역시 이 곡이다. 그리고 이 곡은 처음 발표했던 1956년 당해에 벌써 리메이크되기 시작해서 2011년 Eric Clapton과 Johnny Winter에 의해 리메이크 될 때까지 공식적으로만 30차례 이상 리메이크된 곡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머디 워터스가 그저 대단한 아티스트가 아니라 전국적인 영향력을 지닌 아티스트로 자신의 입지를 굳힌 시기를 1953년 이후로 여긴다. 그 당시 스튜디오 세션에서 머디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이름만 거론하더라도 그 당시 머디의 성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곡이 녹음되던 당시의 머디 할아버지 혹은 머디 횽아의 팀의 라인업은 위키피디아를 참조하시든지 음반의 크레딧을 참조하기 바란다. 영타 쓰기 귀찮다. 아직도 영타는 기것해야 1분에 200타를 겨우 넘는 수준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빨리 치려다 오타를 남발하는 내 성격에는 자유롭게 쓰기 번거롭다 느낄 수밖에 없다. 또 잔소리가 길어졌다. 중요한 것은 블루스 신에서 머디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과 동시에 머디의 음악적인 역량에 대한 평가가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먼저 소개했던 곡이 Blues와 Rock and Roll의 중간 위치에서 머디가 얼마나 두 장르 모두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인가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면 이 곡은 리듬 & 블루스 장르에 대한 머디의 이해와 역량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보여주는 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정통의 블루스 곡이라 보기엔 soulful한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는 곡인데, 머디는 잉러한 형식의 곡을 자신의 블루스적 역량 하에서 보통의 소울이나 리듬 & 블루스 아티스트들과는 확연히 차별되는 방식으로 연주하고 있다. 물론 이 곡 자체가 머디의 곡이기 때문에 그가 자신에 맞춰 쓴 곡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버디의 당대의 흑인음악들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엿보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분명 각 장르마다 그런 인물들이 존재한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크로스오버적 시도를 통해 장르의 외연을 확장시킨 사람들 말이다. 물론 머디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은 그런 인물은 아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행했던 일련의 음악적 실험들은 재즈라는 장르의 외연을 확대시킨 것 이상으로 당대 대중음악의 트랜드 자체를 견인한 측면이 있다. 당연히 머디의 역할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디의 이야기를 하며 마일스 데이비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재즈나 블루스라는 장르의 후대의 흐름에 미친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각설하고 이 곡을 들으시면 대가의 풍모란 어떤 건지 쉽게 알게 되실 것이란 말씀이다. 자! 이제부터 아가리 닥치고 감상!!!
2012년 10월 14일 일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40)
아님 말고 1000곡
140. Mannish Boy-Muddy Waters(1955)-
1. 머디 할아버지 인생의 최대 논란
1913년 4우월 4일 Mississippi주 Issaquena County 출생 1983년 4월 30일 Illinois주 Westmont시에서 사망, 이 것이 대중들이 알고있는 머디 워터스의 탄생과 사망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머디 할아버지는 후에 자신은 Mississippi주의 Rolling Fork이란 곳에서 1915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최근의 그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그의 실제 생년월일에 대한 몇 가지 증거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그의 결혼 증명서와 음악인 노조의 서류엔 그가 분명히 1913년 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다. 반면 1920년 3우월 6일에 실시된 인구 센서스엔 그가 5세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것을 근거로 그가 1914년 생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시카고에서 발행괸 그의 Social Security Card에는 또한 1913년 4월 4일 생으로 기록되어있다 한다. 이를 근거로 미루어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결혼을 많이 했던 사람치고 자신의 생년월일이 실제보다 일찍 기록되어있지 않다 하는 사람은 드물다."
2. 다음에 열거하는 것들은 머디 워터스의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나타내는 것들
The Rolling Stones의 밴드 이름은 머디 워터스의 1950년 곡인 Rolling Stone에서 따온 것이다. 이 곡은 또한 Catfish Blues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지미 헨드릭스에 의해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지미 헨드릭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가 최초로 인식하기 시작한 기타리스트는 바로 머디 워터스인데 내가 그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거의 죽을 것같은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즉, 그 정도로 그의 연주가 충격적이었다는 이야기 되시겠다. 머디 워터스의 노래 중 "You need love"란 곡목의 노래가 있는데 Led Zeppellin은 자신의 곡인 "Whole lotta love"의 가사를 머디의 이 곡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블로그를 보신 분들은 아실 윌리 딕슨이 "You need love"의 작곡자라는 사실! 그 외에도 머디 할배의 곡들이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리메이크된 곡에 대한 정보는 http://www.muddywaters.com 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이 다들 잘 아실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지(Martin Scorsese)는 자신의 영화에 머디의 곡을 많이 삽입하기로 유명하다. 특히나 노골적으로 머디의 곡을 삽입한 영화는-흘려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길게 삽입한 영화- Color of Money, Good fellas 그리고 Casino인데 이 영화엔 머디 할아버지가 자신의 50년대의 히트 송인 "I'm a man"으로도 알려진 "Mannish Boy"를 1970년대에 다시 연주하여 녹음한 곡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 곡은 Risky Business-이 영화엔 탐 크루즈 형아가 뽀송뽀송하던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의 첫 주연작이다. 대략 21세 때의 그의 모습을 보실 수 있다.-에도 수록되었고 그의 Rocumentary인 The Last Waltz에도 수록되어있는 곡이다.
다 아실테지만, The Beatles의 Come together엔 "He roller coaster/he got Muddy Waters"이란 가사가 나온다.
2006년 FAmily Guy의 "Saving Private Brian"이란 에피소드엔 머디 워터스가 자신의 신장결석을 몸 밖으로 배출하려 애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이게 재미있는 이야기였나 보다.)
1990년 유명한 텔레비전 시리즈인 Doogie Howser M.D.의 에피소드 중 하나였던 "Doogie Sings the Blues"에 Blind Otis Lemon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모델이 바로 머디 할아버지라 한다.
3. 오늘 소개할 곡은
I'm a man 이라고도 알려진 Mannish Boy란 곡인데, 이 곡은 앞서 소개한 곡에 비해 대단히 Rock and roll적인 요소들이 많이 가미된 곡이다. 머디 워터스가 후배 밴드나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그가 시카고 블루스의 완성자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가 블루스라는 음악이 Rock and roll로 확산되어 나가는 데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고 그가 없었다면 Chuck Berry나 Bo Diddley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인데 실제로 머디 워터스는 척 베리가 처음 음반사와 계약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140. Mannish Boy-Muddy Waters(1955)-
1. 머디 할아버지 인생의 최대 논란
1913년 4우월 4일 Mississippi주 Issaquena County 출생 1983년 4월 30일 Illinois주 Westmont시에서 사망, 이 것이 대중들이 알고있는 머디 워터스의 탄생과 사망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머디 할아버지는 후에 자신은 Mississippi주의 Rolling Fork이란 곳에서 1915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최근의 그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그의 실제 생년월일에 대한 몇 가지 증거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그의 결혼 증명서와 음악인 노조의 서류엔 그가 분명히 1913년 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다. 반면 1920년 3우월 6일에 실시된 인구 센서스엔 그가 5세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것을 근거로 그가 1914년 생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시카고에서 발행괸 그의 Social Security Card에는 또한 1913년 4월 4일 생으로 기록되어있다 한다. 이를 근거로 미루어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결혼을 많이 했던 사람치고 자신의 생년월일이 실제보다 일찍 기록되어있지 않다 하는 사람은 드물다."
2. 다음에 열거하는 것들은 머디 워터스의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나타내는 것들
The Rolling Stones의 밴드 이름은 머디 워터스의 1950년 곡인 Rolling Stone에서 따온 것이다. 이 곡은 또한 Catfish Blues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지미 헨드릭스에 의해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지미 헨드릭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가 최초로 인식하기 시작한 기타리스트는 바로 머디 워터스인데 내가 그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거의 죽을 것같은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즉, 그 정도로 그의 연주가 충격적이었다는 이야기 되시겠다. 머디 워터스의 노래 중 "You need love"란 곡목의 노래가 있는데 Led Zeppellin은 자신의 곡인 "Whole lotta love"의 가사를 머디의 이 곡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블로그를 보신 분들은 아실 윌리 딕슨이 "You need love"의 작곡자라는 사실! 그 외에도 머디 할배의 곡들이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리메이크된 곡에 대한 정보는 http://www.muddywaters.com 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이 다들 잘 아실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지(Martin Scorsese)는 자신의 영화에 머디의 곡을 많이 삽입하기로 유명하다. 특히나 노골적으로 머디의 곡을 삽입한 영화는-흘려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길게 삽입한 영화- Color of Money, Good fellas 그리고 Casino인데 이 영화엔 머디 할아버지가 자신의 50년대의 히트 송인 "I'm a man"으로도 알려진 "Mannish Boy"를 1970년대에 다시 연주하여 녹음한 곡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 곡은 Risky Business-이 영화엔 탐 크루즈 형아가 뽀송뽀송하던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의 첫 주연작이다. 대략 21세 때의 그의 모습을 보실 수 있다.-에도 수록되었고 그의 Rocumentary인 The Last Waltz에도 수록되어있는 곡이다.
다 아실테지만, The Beatles의 Come together엔 "He roller coaster/he got Muddy Waters"이란 가사가 나온다.
2006년 FAmily Guy의 "Saving Private Brian"이란 에피소드엔 머디 워터스가 자신의 신장결석을 몸 밖으로 배출하려 애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이게 재미있는 이야기였나 보다.)
1990년 유명한 텔레비전 시리즈인 Doogie Howser M.D.의 에피소드 중 하나였던 "Doogie Sings the Blues"에 Blind Otis Lemon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모델이 바로 머디 할아버지라 한다.
3. 오늘 소개할 곡은
I'm a man 이라고도 알려진 Mannish Boy란 곡인데, 이 곡은 앞서 소개한 곡에 비해 대단히 Rock and roll적인 요소들이 많이 가미된 곡이다. 머디 워터스가 후배 밴드나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그가 시카고 블루스의 완성자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가 블루스라는 음악이 Rock and roll로 확산되어 나가는 데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고 그가 없었다면 Chuck Berry나 Bo Diddley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인데 실제로 머디 워터스는 척 베리가 처음 음반사와 계약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2012년 10월 12일 금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9)
아님 말고 1000곡
139. Hoochie Coochie Man-Muddy Waters-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물론 대단히 어리석은 질문이긴 하지만 그 충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 때문에 고심에 고심을 하다 답을 해주긴 하는 그런 질문,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재즈 아티스트가 누구인가?" 이런 류의 질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보다도 훨씬 더 짜증나는 질문임을 이 블로그를 들락날락 하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어이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반발을 하거나 "네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 이야기를 못한다. 진정한 고수는 항상 하나인 법"이라는 류의 말을 해대는 새끼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답은 항상 '고심하는 척 하다'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적어도 내 대답은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눈물을 머금고 "듀크 엘링턴이 아닐까 합니다."다. 마찬가지로 (다행히도 사람들은 블루스에 대해선 재즈에 대해서보다 둔감하다.) 블루스 아티스트에 대해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역시 눈물을 머금고 대답해야 한다. "Muddy Waters"
물론 블루스의 초창기 멤버들이 대단히 훌륭한 음악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블루스 음악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시장에서의 상품이 되고 그 것을 소비자는 물론 다른 아티스트들까지 소비하게 되면서부터는 그 사람의 비중이라는 것을 음악의 완성도나 어떤 것의 최초... 라는 류의 기네스북적인 사고를 가준으로 판단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측면도 대단히 중요하고, 상업적인 성공이 있어야 그 사람의 영향력이 클 수 박에 없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음악적인 완성도는 계속해서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당대의 대중음악 신(Scene)이 질적인 동시에 양적인 변화가 가능했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블루스가 미국의 음악이고 지금 전세계의 대중음악을 미국 시장이 좌우하기 때문에 블루스라는 대중음악 장르에 숱한 대가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단 한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머디 워터스인 이유는 위의 세 조건을 동시에 가장 높은 정도로 충족하는 아티스트기 때문이다.
머디 워터스를 나타낼 수 있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이 게시물의 태그를 보시면 알 수 있겠지만, 블루스의 가장 대표적 이름이라 할 수 있는 Chicago Sound 혹은 Chicago Blues은 머디 할아버지에 의해 완성되고 만개한 블루스의 하위 장르일 것이다. 흔히들 이 불초 티렉스가 이 곳에서 소개할 정도의 인물들은 이미 10대에 비상한 재능을 보이면서 20대 초중반에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 대부분이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머디 할아버지는 30대가 넘어서면서 겨우 안정적인 전업 뮤지션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고 40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에게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안겨다준 "Hoochie Coochie Man" "I just to make love to you" "I'm ready"등이 연달아 차트의 상위권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만으로 40세가 되는 해였던 1953년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직 만으로 40이 되지 않았고 음악을 하며 상업적으로 히트한 곡이 없는 사람들은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되시겠다. 상업적인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겐 음악만 있으면 된다. 그런 자세로 열심히 음악에 매진하시면 머디 할아버지처럼 40이 넘어 휠을 잡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절대 비아냥거리는 이야기 아님을 아셨으면 한다. 워낙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다들 비아냥댄다고 해서...)
위에서 제시한 조건 중 대단한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부분은 바로 앞의 단락에서 어느 정도 제시를 했으니 이젠 그의 음악적인 완성도에 대해 이야기를 할 차례다. 이 점을 기억해보자. 음악사에 대한 사전을 편찬할 일이 생긴다면 다른 부분들에선 내 견해를 집어넣을 수 있더라도 이런 것들을 내 마음대로 뒤집거나 할 수는 없다. "시기적으로 델타 블루스는 시카고 블루스에 선행한다. 그리고 시카고 블루스라는 것은 델타 블루스에서 파생되어 나간 장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시카고 블루스의 완성자인 머디 할아버지의 음악적인 기반은 시카고 블루스가 아니라 델타 블루스 되시겠다는 말씀이다. 시카고 블루스를 그렇게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좀 더 서술 범위를 좁혀 이야기한다면 "머디 워터스의 사운드는 델타 블루스를 일렉트릭 악기에 맞도록 변형시킨, 혹은 일렉트릭 악기를 가지고 델타 블루스의 영역을 확대시킨 사운드"다.과거에 일렉트릭 기타나 일렉트릭 베이스를 블루스라는 장르에서 사용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머디의 일렉트릭 악기의 사용은 블루스에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것이 어떤 것이냐고?
머디 할아버지는 1958년 잉글랜드로 가게 되는데, 그 것이 얼마나 큰 일이 될지는 머디 할아버지가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잉글랜드로 가 잉글랜드의 청중들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트린 것이 계기가 되어 1960년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가 인기의 정점을 달리던 시절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소위 British Blues Explosion의 도화선이되었는데, 실제로 잉글랜드에서의 활약상이 어땠는지를 직접 귀로 확인하시고 싶으시면1960년 New Port의 Jazz Festival에서의 그의 연주가 실황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으니 어떤 식으로든지 들어보시길 권한다. 그의 잉글랜드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들을 몇가지 열거해본다면 The Yard birds의 출현, John Mayall and the Blues Breakeers의 출현 그 유명한 블라인드 페이스의 멤버가 되는 스티브 윈우드 릭 그레치, 에릭 클랩튼 등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 초중반을 휩쓸었던 영국의 Blues Rock의 출현 등이다. 만일 그들에게 머디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그들은 그런 음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내 이야기다.
머디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한 번 더 간다. 좀 가벼운 소재로...
139. Hoochie Coochie Man-Muddy Waters-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물론 대단히 어리석은 질문이긴 하지만 그 충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 때문에 고심에 고심을 하다 답을 해주긴 하는 그런 질문,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재즈 아티스트가 누구인가?" 이런 류의 질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보다도 훨씬 더 짜증나는 질문임을 이 블로그를 들락날락 하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어이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반발을 하거나 "네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 이야기를 못한다. 진정한 고수는 항상 하나인 법"이라는 류의 말을 해대는 새끼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답은 항상 '고심하는 척 하다'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적어도 내 대답은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눈물을 머금고 "듀크 엘링턴이 아닐까 합니다."다. 마찬가지로 (다행히도 사람들은 블루스에 대해선 재즈에 대해서보다 둔감하다.) 블루스 아티스트에 대해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역시 눈물을 머금고 대답해야 한다. "Muddy Waters"
물론 블루스의 초창기 멤버들이 대단히 훌륭한 음악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블루스 음악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시장에서의 상품이 되고 그 것을 소비자는 물론 다른 아티스트들까지 소비하게 되면서부터는 그 사람의 비중이라는 것을 음악의 완성도나 어떤 것의 최초... 라는 류의 기네스북적인 사고를 가준으로 판단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측면도 대단히 중요하고, 상업적인 성공이 있어야 그 사람의 영향력이 클 수 박에 없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음악적인 완성도는 계속해서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당대의 대중음악 신(Scene)이 질적인 동시에 양적인 변화가 가능했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블루스가 미국의 음악이고 지금 전세계의 대중음악을 미국 시장이 좌우하기 때문에 블루스라는 대중음악 장르에 숱한 대가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단 한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머디 워터스인 이유는 위의 세 조건을 동시에 가장 높은 정도로 충족하는 아티스트기 때문이다.
머디 워터스를 나타낼 수 있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이 게시물의 태그를 보시면 알 수 있겠지만, 블루스의 가장 대표적 이름이라 할 수 있는 Chicago Sound 혹은 Chicago Blues은 머디 할아버지에 의해 완성되고 만개한 블루스의 하위 장르일 것이다. 흔히들 이 불초 티렉스가 이 곳에서 소개할 정도의 인물들은 이미 10대에 비상한 재능을 보이면서 20대 초중반에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 대부분이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머디 할아버지는 30대가 넘어서면서 겨우 안정적인 전업 뮤지션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고 40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에게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안겨다준 "Hoochie Coochie Man" "I just to make love to you" "I'm ready"등이 연달아 차트의 상위권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만으로 40세가 되는 해였던 1953년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직 만으로 40이 되지 않았고 음악을 하며 상업적으로 히트한 곡이 없는 사람들은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되시겠다. 상업적인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겐 음악만 있으면 된다. 그런 자세로 열심히 음악에 매진하시면 머디 할아버지처럼 40이 넘어 휠을 잡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절대 비아냥거리는 이야기 아님을 아셨으면 한다. 워낙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다들 비아냥댄다고 해서...)
위에서 제시한 조건 중 대단한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부분은 바로 앞의 단락에서 어느 정도 제시를 했으니 이젠 그의 음악적인 완성도에 대해 이야기를 할 차례다. 이 점을 기억해보자. 음악사에 대한 사전을 편찬할 일이 생긴다면 다른 부분들에선 내 견해를 집어넣을 수 있더라도 이런 것들을 내 마음대로 뒤집거나 할 수는 없다. "시기적으로 델타 블루스는 시카고 블루스에 선행한다. 그리고 시카고 블루스라는 것은 델타 블루스에서 파생되어 나간 장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시카고 블루스의 완성자인 머디 할아버지의 음악적인 기반은 시카고 블루스가 아니라 델타 블루스 되시겠다는 말씀이다. 시카고 블루스를 그렇게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좀 더 서술 범위를 좁혀 이야기한다면 "머디 워터스의 사운드는 델타 블루스를 일렉트릭 악기에 맞도록 변형시킨, 혹은 일렉트릭 악기를 가지고 델타 블루스의 영역을 확대시킨 사운드"다.과거에 일렉트릭 기타나 일렉트릭 베이스를 블루스라는 장르에서 사용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머디의 일렉트릭 악기의 사용은 블루스에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것이 어떤 것이냐고?
머디 할아버지는 1958년 잉글랜드로 가게 되는데, 그 것이 얼마나 큰 일이 될지는 머디 할아버지가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잉글랜드로 가 잉글랜드의 청중들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트린 것이 계기가 되어 1960년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가 인기의 정점을 달리던 시절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소위 British Blues Explosion의 도화선이되었는데, 실제로 잉글랜드에서의 활약상이 어땠는지를 직접 귀로 확인하시고 싶으시면1960년 New Port의 Jazz Festival에서의 그의 연주가 실황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으니 어떤 식으로든지 들어보시길 권한다. 그의 잉글랜드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들을 몇가지 열거해본다면 The Yard birds의 출현, John Mayall and the Blues Breakeers의 출현 그 유명한 블라인드 페이스의 멤버가 되는 스티브 윈우드 릭 그레치, 에릭 클랩튼 등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 초중반을 휩쓸었던 영국의 Blues Rock의 출현 등이다. 만일 그들에게 머디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그들은 그런 음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내 이야기다.
머디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한 번 더 간다. 좀 가벼운 소재로...
2012년 10월 7일 일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8)
아님 말고 1000곡
138 Hey! Bo Diddley-Bo Diddley(1957)-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다니던 학교가 위치한 곳은 플로리다 주의 게인즈빌이라는 곳이었다. 플로리다 대학이 있는 것 외에 인구는 10만에도 훨씬 못미치는 이 시골 도시가 들썩거린 일이 일어난 것은 2008년 6월 7일에 있었던 이 사람의 장례식이 이 곳의 한 교회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그의 유명한 곡인 "Hey Bo Diddley"를 밴드와 함께 한 가스펠 합창단이 가스펠 풍으로 편곡하여 부르는 가운데 조지 소로굿, 탐 페티, 제리 리 루이스, 리틀 리처드 등 그가 투병 생활을 하던 시기에도 그의 파티에 초대되곤 했던 유명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뮤지션들이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초대되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 마틴 루터 킹 센터와 게인즈빌 두 곳에서 동시에 추모 공연이 벌어졌다. 그 추모 공연의 무대에 선 인사들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더라도 단락을 넘겨야 한다.
이 공연을 공식적으로 주최한 것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아들 부시와 미 하원이었다고 한다. 애니멀스의 보컬리스트였던 에릭 버든, 엘비스 코스텔로, 로니 호킨스, 믹 재거, B.B. 킹, 탐 페티, 로버트 플랜트, 보니 레이트, 조지 소로굿, 로버트 랜돌프 등이 무대에 올랐으며 세상에나! 믹 재거와 그의 팀인 롤링 스톤스가 엔딩 스테이지도 아닌 오프닝 스테이지에 섰다. 대체 그 짬밥의 롤링 스톤스를 자신의 추모 공연의 오프닝에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는 오프닝 무대에 앞서 일종의 추도사 비슷한 이야기를 거의 10분에 걸쳐 하면서-대체 믹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왔다고 보기엔 오글거림의 도가 지나치는 말들을 했다는 사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 장례식과 추모 공연의 주인공이 Bo Diddley였기 때문이라 한다.
사실 www.bodiddley.cim 이라는 그의 공식 사이트에 들어가게 되면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서 저 세상으로 떠났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과감하게 생략하도록 한다. Bo Diddley를 되도록이면 그의 음악적인 면에 대해 한정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 혹은 아티스트로서의 보를 세계적으로-이 말이 듣기 싫다면 역사적으로-유명하게 만든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인에 음악 외적인 동시에 음악적인 면 한 가지라 할 수 있는데, 한가지 음악적 요인과 음악적 요인이 아닌 동시에 음악적 요인인 한 가지는 비교적 짧게 이야기를 끝낼 수 있고 다른 한 가지는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일단 아주 사소한 것부터 이야기하자면 보 디들리는 당대의 Blues 혹은, Rock and roll 아티스트들 중 최초로 정식으로 여성 멤버를 자신의 밴드의 정규 멤버로 기용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중 한 명이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진 않지만 거의 최초 중 한 명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그를 대표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사실은 Gretche 사(이 회사는 비틀스 활동 당시 조지 해리슨이 그레치사의 기타만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한 회사다.)에서 특별히 제작해준 그의 Signature 모델이다. 그의 기타리스트로서의 뛰어남은 단지 그가 그 전에 쓴 적이 없었던 형태의 모델을 스스로 개발해서 쓴 데에 끝나지 않고, 그가 만들어낸 많은 수의 기타 effect에서도 그러나며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Z Top의 Billy Gibbons의 경우에는 보 디들리의 소위 Cadillac 디자인의 기타를 그대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뒤의 이야기와도 연결이 되는 이야기지만, 20세기에 태어난 보 디들리는 자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전통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상당수의 그의 곡의 가사의 내용과 음악의 형식에 흔히들 Hambone이라 이야기하는-이 것은 정말 뒤의 이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꼭 기억하기 바란다.-African Clapping Rhyme을 차용하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George Michael의 Faith이라는 곡을 기억하실 것이다.이 곡의 비트를 복기해보시면 "딴 따 단 따다 은따다 은따"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단히 흥미로운 비트는 조지 마이클의 독자적인 작품이 아니라 바로 Bo Diddley Beat 이라 불리는 보 디들리의 독자적 비트의 응용이다. "(Marie's the Name) His latest flame"이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1961년 곡이나 그 유명한 데이비드 보위의 1973년 곡 "Panic in Detroit" 1969년 스투지스(Stooges)이 발표한 "1969"((이런 실망스러운 곡목을 보았나... 1969년 발표한 1969라니!) Strangeloves의 "I want Candy"(이 역시 1969년 발표된 곡이다.) 이런 등등의 수많은 곡들이 세칭 보 디들리 비트를 차용한 곡이다. 앞 문단에서 이야기한 "Hambone"이라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의 일종의 민요라고 할 수도 있는 비트가 바로 보 디들리 비트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미국의 아프리카계 이민들이 그들의 교회에서 부르던 가스펠 음악과도 대단히 유사하다. 여러분들은 이 곡을 들으시면서 블루스와 rock and roll, 그리고 가스펠을 한꺼번에 경험하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 자부한다. 뭘?
138 Hey! Bo Diddley-Bo Diddley(1957)-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다니던 학교가 위치한 곳은 플로리다 주의 게인즈빌이라는 곳이었다. 플로리다 대학이 있는 것 외에 인구는 10만에도 훨씬 못미치는 이 시골 도시가 들썩거린 일이 일어난 것은 2008년 6월 7일에 있었던 이 사람의 장례식이 이 곳의 한 교회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그의 유명한 곡인 "Hey Bo Diddley"를 밴드와 함께 한 가스펠 합창단이 가스펠 풍으로 편곡하여 부르는 가운데 조지 소로굿, 탐 페티, 제리 리 루이스, 리틀 리처드 등 그가 투병 생활을 하던 시기에도 그의 파티에 초대되곤 했던 유명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뮤지션들이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초대되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 마틴 루터 킹 센터와 게인즈빌 두 곳에서 동시에 추모 공연이 벌어졌다. 그 추모 공연의 무대에 선 인사들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더라도 단락을 넘겨야 한다.
이 공연을 공식적으로 주최한 것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아들 부시와 미 하원이었다고 한다. 애니멀스의 보컬리스트였던 에릭 버든, 엘비스 코스텔로, 로니 호킨스, 믹 재거, B.B. 킹, 탐 페티, 로버트 플랜트, 보니 레이트, 조지 소로굿, 로버트 랜돌프 등이 무대에 올랐으며 세상에나! 믹 재거와 그의 팀인 롤링 스톤스가 엔딩 스테이지도 아닌 오프닝 스테이지에 섰다. 대체 그 짬밥의 롤링 스톤스를 자신의 추모 공연의 오프닝에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는 오프닝 무대에 앞서 일종의 추도사 비슷한 이야기를 거의 10분에 걸쳐 하면서-대체 믹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왔다고 보기엔 오글거림의 도가 지나치는 말들을 했다는 사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 장례식과 추모 공연의 주인공이 Bo Diddley였기 때문이라 한다.
사실 www.bodiddley.cim 이라는 그의 공식 사이트에 들어가게 되면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서 저 세상으로 떠났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과감하게 생략하도록 한다. Bo Diddley를 되도록이면 그의 음악적인 면에 대해 한정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 혹은 아티스트로서의 보를 세계적으로-이 말이 듣기 싫다면 역사적으로-유명하게 만든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인에 음악 외적인 동시에 음악적인 면 한 가지라 할 수 있는데, 한가지 음악적 요인과 음악적 요인이 아닌 동시에 음악적 요인인 한 가지는 비교적 짧게 이야기를 끝낼 수 있고 다른 한 가지는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일단 아주 사소한 것부터 이야기하자면 보 디들리는 당대의 Blues 혹은, Rock and roll 아티스트들 중 최초로 정식으로 여성 멤버를 자신의 밴드의 정규 멤버로 기용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중 한 명이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진 않지만 거의 최초 중 한 명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그를 대표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사실은 Gretche 사(이 회사는 비틀스 활동 당시 조지 해리슨이 그레치사의 기타만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한 회사다.)에서 특별히 제작해준 그의 Signature 모델이다. 그의 기타리스트로서의 뛰어남은 단지 그가 그 전에 쓴 적이 없었던 형태의 모델을 스스로 개발해서 쓴 데에 끝나지 않고, 그가 만들어낸 많은 수의 기타 effect에서도 그러나며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Z Top의 Billy Gibbons의 경우에는 보 디들리의 소위 Cadillac 디자인의 기타를 그대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뒤의 이야기와도 연결이 되는 이야기지만, 20세기에 태어난 보 디들리는 자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전통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상당수의 그의 곡의 가사의 내용과 음악의 형식에 흔히들 Hambone이라 이야기하는-이 것은 정말 뒤의 이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꼭 기억하기 바란다.-African Clapping Rhyme을 차용하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George Michael의 Faith이라는 곡을 기억하실 것이다.이 곡의 비트를 복기해보시면 "딴 따 단 따다 은따다 은따"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단히 흥미로운 비트는 조지 마이클의 독자적인 작품이 아니라 바로 Bo Diddley Beat 이라 불리는 보 디들리의 독자적 비트의 응용이다. "(Marie's the Name) His latest flame"이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1961년 곡이나 그 유명한 데이비드 보위의 1973년 곡 "Panic in Detroit" 1969년 스투지스(Stooges)이 발표한 "1969"((이런 실망스러운 곡목을 보았나... 1969년 발표한 1969라니!) Strangeloves의 "I want Candy"(이 역시 1969년 발표된 곡이다.) 이런 등등의 수많은 곡들이 세칭 보 디들리 비트를 차용한 곡이다. 앞 문단에서 이야기한 "Hambone"이라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의 일종의 민요라고 할 수도 있는 비트가 바로 보 디들리 비트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미국의 아프리카계 이민들이 그들의 교회에서 부르던 가스펠 음악과도 대단히 유사하다. 여러분들은 이 곡을 들으시면서 블루스와 rock and roll, 그리고 가스펠을 한꺼번에 경험하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 자부한다. 뭘?
2012년 10월 4일 목요일
정복자 싸이(Soundless Music)
다음 아고라를 우연히 들어갔다 "싸이가 지금 대학 축제에 다닐 때인가?"라는 쓰레기 같은 포스트를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서 뒷목을 잡고 넘어갈 뻔 하다 억지로 몸을 추스렸다. 그 이야기의 논지는 "지금 싸이는 빌보드 Hot 100 차트의 정상에 올라야하는 민좆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있는데 한가롭게 공화국에서 대학 축제나 돌아다녀야 하는가?"라는 이야기 되겠다. 물론 그 쓰레기엔 빠지지 않는 민족의 쾌거에서부터 국격이 어쩌고 국력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써먹고 또 써먹으셨다. 그에 대한 댓글이라는 것들은 더 가관인지라 아예 그 포스트의 링크를 하지 않으려 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일찍이 중극의 동북공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절대 그들과 같은 논리로 맞서서는 명분도 실리도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혹시라도 기억을 못하시거나 보지 못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여기서 그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 하도록 하자.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도 아니고 단지 그 당시 한반도와 그 주변부에 혹은 인접 지역에 근거를 두고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라는 이야기이다. 그 점에 대해 중국이 한국을 속국으로 여기고자 하는 수작이라 생각하여 그 반대로 고구려는 우리의 조상인데 그들이 지금의 중국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랴오닝이나 그 외의 지역들이 한국의 땅이 된다. 따라서 그 곳에 대한 한국의 소유권을 주장해야 한다. 하지만, 그 것은 그 반대의 논리가 아니다. 그 것은 주어와 목적어만 바꾼 동어 반복일 뿐이다. 이 것이 전에 내가 한 이야기였다.
싸이가 Hot 100 차트에서 1위를 하건 못하건 그 것은 그냥 싸이의 문제일 뿐이다. 싸이가 1위를 한다고 한민족의 우수성이 세계 만방에 널리 퍼지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한국의 음악에 미국을 본거지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의 음악이 무릎을 꿇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 것은 그저 2012년의 어느 시기에 한 주간 혹은 그 이상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란 곡이 미국 내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혹은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노래라는 것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싸이가 1위를 못한다고 해서 그 것이 "외부의 침략자에 대해 미국인들이 똘똘 뭉쳐 그 침략을 철저히 무너뜨린 결과"도 아니라는 것이다. 싸이의 곡이 1위가 된다고 공화국 인민들의 음악적 소양이 미국 인민들의 그 것을 압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공화국 인민들의 탁월한 음악적 소양이 미국인들의 강력한 힘에 굴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면 먼저 수 십년간 공화국의 대중음악과 영화 그리고 그 외의 많은 부분들은 미국에 의해 점령당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칼을 들고 덤비는 자들을 칼로 이기려면 절대적으로 쪽수가 중요한 것을 아직도 모르는 당신은 자가당착에 빠져있는 것이다.
또 하나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던 이야기는 "이런 장난 같은 음악으로 1위를 하는 것은 쪽팔린 일이다. 제대로 된 음악으로 1위를 해야 국격이 올라간다."는 개소리였다. 솔직히 그 사람이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가 나름대로의 음악관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하에 이런 이런 질문을 되돌리고 싶다. "당신은 어떤 음악을 질높은 음악이라 생각하는가?" 반복해서 하는 이야기지만, 대부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음악에는 고급스런 장르와 저급스런 장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상당수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렉트로니카와 힙합의 경계를 교묘하게 왔다 갔다하는 싸이의 음악은 저급한 음악이라 여기기에 딱 좋은 빌미를 제공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의 특성상 대부분 MR을 사용하고, 악기의 편성은 대단히 단순할 수 밖에 없다는 점!
이런 사람들에겐 대단히 애석한 일이지만, 힙합은 구린 장르, Rock 음악은 대단한 장르라는 수사는 없어도 잘만든 힙합 못만든 힙합이라는 수사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음악이라는 점을 미리 좀 공부했으면 한다. 음악의 장르엔 그 장르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고 그리고 그런 전제 하에서 음악의 완성도라는 것을 얼마든지 따질 수는 있다. 하지만, 클럽 음악이라는 것은 후지고 재즈는 훌륭하고 하는 식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 동네라는 이야기다. 싸이가 뜨기 위해 이 번에 특별히 우스꽝스러운 음악을 한 것도 아니고, 그는 항상 힙합을 바탕으로 일렉트로니카 편곡을 사용한 곡들을 만들어왔고, 가끔은 그런 공식에서 벗어난 곡들을 다른 가수들에게 주면서 자신의 프로듀서로서의 작곡가로서의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이다. 그는 항상 자신이 하던 것을 그대로 해왔을 뿐이다.
그런 그의 음악을 그런 식의 잣대로 판단해선 곤란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아니 개인적 생각라기 보단 업계에서 통용되는 생각이다. 다행히 이 포스팅을 조금 밍기적거리는 동안에 싸이가 자신은 국가대표가 아니라는 인터뷰를 했다.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그냥 아티스트일 뿐이라 했다. 음악의 질 운운하는 사람들이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 것이다. 싸이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공화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그는 그저 자신이 하던 것을 하는 것 뿐이라는 점! 그냥 자기가 하던 것을 한 사람에게 "당신의 것이 질이 떨어져 공화국을 대표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냥 초딩이 하는 이야기로 흘려 넘기기엔 대중음악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다.
그 어느 누구도 딴따라 싸이를 정복자 싸이로 만들어선 곤란하다. 그를 정복자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는 동안 우리는 꽤 훌륭한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이자 래퍼이자 가수 한 명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냥 관중들 앞에서 삘 받으면 물 뿌리고 미친 듯 무대에서 자기 나름대로 관중들을 가지고 노는 싸이를 보고 싶을 뿐이다.
이런 사람들에겐 대단히 애석한 일이지만, 힙합은 구린 장르, Rock 음악은 대단한 장르라는 수사는 없어도 잘만든 힙합 못만든 힙합이라는 수사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음악이라는 점을 미리 좀 공부했으면 한다. 음악의 장르엔 그 장르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고 그리고 그런 전제 하에서 음악의 완성도라는 것을 얼마든지 따질 수는 있다. 하지만, 클럽 음악이라는 것은 후지고 재즈는 훌륭하고 하는 식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 동네라는 이야기다. 싸이가 뜨기 위해 이 번에 특별히 우스꽝스러운 음악을 한 것도 아니고, 그는 항상 힙합을 바탕으로 일렉트로니카 편곡을 사용한 곡들을 만들어왔고, 가끔은 그런 공식에서 벗어난 곡들을 다른 가수들에게 주면서 자신의 프로듀서로서의 작곡가로서의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이다. 그는 항상 자신이 하던 것을 그대로 해왔을 뿐이다.
그런 그의 음악을 그런 식의 잣대로 판단해선 곤란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아니 개인적 생각라기 보단 업계에서 통용되는 생각이다. 다행히 이 포스팅을 조금 밍기적거리는 동안에 싸이가 자신은 국가대표가 아니라는 인터뷰를 했다.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그냥 아티스트일 뿐이라 했다. 음악의 질 운운하는 사람들이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 것이다. 싸이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공화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그는 그저 자신이 하던 것을 하는 것 뿐이라는 점! 그냥 자기가 하던 것을 한 사람에게 "당신의 것이 질이 떨어져 공화국을 대표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냥 초딩이 하는 이야기로 흘려 넘기기엔 대중음악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다.
그 어느 누구도 딴따라 싸이를 정복자 싸이로 만들어선 곤란하다. 그를 정복자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는 동안 우리는 꽤 훌륭한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이자 래퍼이자 가수 한 명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냥 관중들 앞에서 삘 받으면 물 뿌리고 미친 듯 무대에서 자기 나름대로 관중들을 가지고 노는 싸이를 보고 싶을 뿐이다.
2012년 9월 27일 목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7)
아님 말고 1000곡
13. Back door man etc. -Willie Dixon-
William James "Willie" Dixon은 대단히 반갑게도 돌아가신 우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동갑이다. 물론 외할머니에 대해서 실제 생년이 1914년이란 설도 존재하나 난 "법대로 하"겠다. 윌리 딕슨은 우리 외조부, 외조모니모가 동갑이다. 토달지 마시기 바란다. 이 할아버지가 대단하신 이유 중 하나는 Upright bass-통칭double bass라 불린다.-와 기타를 자신의 주된 연주 악기로 삼았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보통 베이시스트는 기타를 칠 줄 알기 마련이고 기타리스트들도 어느 정도는 베이스를 칠 줄 안다. 그러나, 더블 베이스를 연주하는 사람이 그와 유사한 렙벨의 연주력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밴드를 해보신 분들이라면 대번에 아실 수 있겠지만 윌리 딕슨과 같은 케이스를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엄마의 역할과 아빠의 역할을 한 사람이 동시에 수행하는 자웅동체 인간이라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만큼 음악적으로 완젹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는 사적인 이유에서 1915년 생이라 티렉스의 외조부 외조모님과 동갑이며 음악적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던 윌리 딕슨이라는 인물을 알게 됨에 대해 "끝없이" 감사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자 한다. 시카고 블루스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윌리 딕슨의 이름을 음악사를 다룬 책에서 의미있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작곡자와 프로듀서로서이다. 그는 20세가 막 지날 무렵까지는 헤비급 복서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그 와중에 드의 평생의 은인과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는 Leonard Caston을 만나 음악을 하게 되었다. 윌리 딕슨은 자신의 인생의 커리어를 촉망받는 헤비급 복서이자 그 유명한 조 루이스의 스파링 파트너로서로 한 부분, Chess Record와 Checker Record의 전임 프로듀서로서로서 한 부분, 연주자와 보컬리스트 그리고 작곡가로서로서의 한 부분 이렇게 세 부분의 서로 다른 인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Muddy Waters와 함께 시카고 블루스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머디 웥터스와 그의 음악적 커리어를 분명하게 구분지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윌리 딕슨은 Chuck Berry, Bo Diddley와의 공동 작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 초창기 Rock and Roll 음악의 정립에 크나큰 역할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윌리 딕슨은 척 베리나 보 디들리와의 친분과 음악적인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항상 블루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생전에 그가 한 말을 원문 그대로 옮기자면 "The Blues are the roots and the other musics are the fruits. It's better keeping the roots alive, because it means better fruits from now on. The blues are the roots of all American music. As long as American music survives, so will the blues" 즉 그의 생각은 블루스는 미국 음악의 뿌리인 관계로 블루스라는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확고한 의지가 있었으며 블루스의 발전이 미국 음악의 발전을 이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 말씀이다.
그런 그의 블루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꽃을 피운 것은 Blues Heaven Foundation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그가 설립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체는 블루스 음악의 유산을 보존하고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저작권과 인세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인데, 블루스 음악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이나 초창기의 블루스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고, 후발의 다른 장르의 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고 재녹음되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많은 블루스 아티스트들을 위해 그 리고 블루스 음악 그 자체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면서 그의 수많은 팬들이 윌리 딕슨을 아티스트인 동시에 사외운동가로서도 기억하게끔 하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그저 Fact을 소개하는 선에서 끝내려 한다. 아마 당신들도 이런 문제에 대해선 할 말이 산더미 같을 것이다.
"Little red rooster" "Hoochie coochie man" "Evil" "Spoonful" "Back door man" "I just to want to make love to you" "I ain't superstitious" "My babe" "Wang Dang doodle" "Bring it on home"등의 주옥같은 곡들의 원작자가 바로 윌리 딕슨이다. 또한 레드 제플린의 저 유명한 "Whole lotta love"의 경우엔 법정까지 간 끝에 윌리 딕슨의 곡을 심각한 수준으로 도용했음이 인정되어 지금은 이 곡의 credit에 윌리 딕슨의 이름을 같이 쓰고 있다. 또한 밥 딜런, 크림, 지미 헨드릭스,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포갓(Foghat), 야드버즈, 도어스 올맨 브라더스 밴드, 에어로스미스, 그레이트풀 데드 등은 윌리 딕슨 원작의 커버 버전을 자신의 앨범에 실었던 수많은 팀들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팀들일 것이다. 그의 곡을 감상하면서 특히나 그의 더블 베이스-업라이트 베이스-연주에 귀를 과도하게 기울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한다.
13. Back door man etc. -Willie Dixon-
William James "Willie" Dixon은 대단히 반갑게도 돌아가신 우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동갑이다. 물론 외할머니에 대해서 실제 생년이 1914년이란 설도 존재하나 난 "법대로 하"겠다. 윌리 딕슨은 우리 외조부, 외조모니모가 동갑이다. 토달지 마시기 바란다. 이 할아버지가 대단하신 이유 중 하나는 Upright bass-통칭double bass라 불린다.-와 기타를 자신의 주된 연주 악기로 삼았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보통 베이시스트는 기타를 칠 줄 알기 마련이고 기타리스트들도 어느 정도는 베이스를 칠 줄 안다. 그러나, 더블 베이스를 연주하는 사람이 그와 유사한 렙벨의 연주력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밴드를 해보신 분들이라면 대번에 아실 수 있겠지만 윌리 딕슨과 같은 케이스를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엄마의 역할과 아빠의 역할을 한 사람이 동시에 수행하는 자웅동체 인간이라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만큼 음악적으로 완젹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는 사적인 이유에서 1915년 생이라 티렉스의 외조부 외조모님과 동갑이며 음악적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던 윌리 딕슨이라는 인물을 알게 됨에 대해 "끝없이" 감사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자 한다. 시카고 블루스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윌리 딕슨의 이름을 음악사를 다룬 책에서 의미있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작곡자와 프로듀서로서이다. 그는 20세가 막 지날 무렵까지는 헤비급 복서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그 와중에 드의 평생의 은인과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는 Leonard Caston을 만나 음악을 하게 되었다. 윌리 딕슨은 자신의 인생의 커리어를 촉망받는 헤비급 복서이자 그 유명한 조 루이스의 스파링 파트너로서로 한 부분, Chess Record와 Checker Record의 전임 프로듀서로서로서 한 부분, 연주자와 보컬리스트 그리고 작곡가로서로서의 한 부분 이렇게 세 부분의 서로 다른 인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Muddy Waters와 함께 시카고 블루스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머디 웥터스와 그의 음악적 커리어를 분명하게 구분지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윌리 딕슨은 Chuck Berry, Bo Diddley와의 공동 작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 초창기 Rock and Roll 음악의 정립에 크나큰 역할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윌리 딕슨은 척 베리나 보 디들리와의 친분과 음악적인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항상 블루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생전에 그가 한 말을 원문 그대로 옮기자면 "The Blues are the roots and the other musics are the fruits. It's better keeping the roots alive, because it means better fruits from now on. The blues are the roots of all American music. As long as American music survives, so will the blues" 즉 그의 생각은 블루스는 미국 음악의 뿌리인 관계로 블루스라는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확고한 의지가 있었으며 블루스의 발전이 미국 음악의 발전을 이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 말씀이다.
그런 그의 블루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꽃을 피운 것은 Blues Heaven Foundation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그가 설립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체는 블루스 음악의 유산을 보존하고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저작권과 인세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인데, 블루스 음악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이나 초창기의 블루스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고, 후발의 다른 장르의 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고 재녹음되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많은 블루스 아티스트들을 위해 그 리고 블루스 음악 그 자체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면서 그의 수많은 팬들이 윌리 딕슨을 아티스트인 동시에 사외운동가로서도 기억하게끔 하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그저 Fact을 소개하는 선에서 끝내려 한다. 아마 당신들도 이런 문제에 대해선 할 말이 산더미 같을 것이다.
"Little red rooster" "Hoochie coochie man" "Evil" "Spoonful" "Back door man" "I just to want to make love to you" "I ain't superstitious" "My babe" "Wang Dang doodle" "Bring it on home"등의 주옥같은 곡들의 원작자가 바로 윌리 딕슨이다. 또한 레드 제플린의 저 유명한 "Whole lotta love"의 경우엔 법정까지 간 끝에 윌리 딕슨의 곡을 심각한 수준으로 도용했음이 인정되어 지금은 이 곡의 credit에 윌리 딕슨의 이름을 같이 쓰고 있다. 또한 밥 딜런, 크림, 지미 헨드릭스,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포갓(Foghat), 야드버즈, 도어스 올맨 브라더스 밴드, 에어로스미스, 그레이트풀 데드 등은 윌리 딕슨 원작의 커버 버전을 자신의 앨범에 실었던 수많은 팀들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팀들일 것이다. 그의 곡을 감상하면서 특히나 그의 더블 베이스-업라이트 베이스-연주에 귀를 과도하게 기울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한다.
2012년 8월 20일 월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6)
아님 말고 1000곡
136. Carmina Burana-Carl Orff(1935-36)-
독일의 작곡가인 칼 오르프(Carl Orff)이 이 작품을 쓴 것이 1935년에서 1936년 2년에 걸친 기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혹시 이 음반을 소장하고 계신다거나 구매 의사가 있어 검색을 해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클래시컬 음악 중에서도 고대 음악으로 분류된다. 그에는 당연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당연히 여기서 기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닥치고 감상하라는 이야기는 맨 마지막에나 할 말이니 아무트튼 이 작품에 대해 한참을 떠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일단 카르미나 부라나라는 말이 어떤 것을 지칭하는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시작!
Carmina Burana의 영어 뜻은 Songs from Bueren이라고 한다. Burana라는 말은 이탤리의 Bueren지방의 라틴어식 표기라고 한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중세나 그 이전엔 음악이라는 것 혹은 노래라는 것이 시와 따로 구별되지 않는 시기였고 즉 Bueren 지방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발견된 세속시를 바탕으로 완성된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이들 노래 혹은 시들은 대체적으로 네 가지의 내용 혹은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것은 1) 도덕적 풍자적 내용의 시, 2) 연애시, 3) 술잔치 혹은 좀 더 큰 의미로 유희에 관한 시, 4)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극시라 한다. 칼 오르프는 부아렌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발견된 시들 중 24편을 골라 곡으로 만들었으며 이 것이 오늘소개하려하는 카르미나 부라나이다. 클래식 음악에 정통한 사람들 혹은 음악학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작품이 가지는 돋보이는 음악적 특징은 이전의 화성이나 대위법 등을 무시하고 단선율과 리듬을 중요시하는 작품으로서 최대한 간결하고 단순하게 만든 작품이라는 점이라 한다.
아마 공화국의 인민들이 카르미나 부라나에 익숙한 이유는 나름의 열렬한 지지자들을 보유했던 1981년도 영화 <엑스칼리버>에 이 작품 중 O'fortuna(이 단어를 영어로 표현하면 Wheel of fortune이라 하는데 "운명의 수레바퀴" 정도로 옮기면 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엔 같은 이름의 퀴즈쇼가 있기도 하다.)라는 곡이 장엄하게 삽입되면서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라 자신있게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사실상 영국의 중세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카르미나 부라나를 통해 공화국에선 아서왕 시절의 영국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예는 굳이 무언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영화 <불의 전차>의 메인 테마가 메달 시상식을 진행하는 동안 흘러나왔다. 그리고 실제로 이 곡은 영국 영화의 주제곡이긴 하지만, 작곡자인 반겔리스는 그리스인 아니던가?
공화국에선 보기 힘들겠지만, 카르미나 부라나의 전 곡이 무대에 올려지는 광경을 보는 것은 커다란 감동을 준다고도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카르미나 부라나를 설명할 때 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탈피라는 설명을 많이 하나 그에 대해선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카르미나 부라나가 기록된 시기엔 고전음악 시대에 고착된 기보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기록되던 시대일 것이고, 그 당시의 방법들이 후대에 전해진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당시의 음악과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 사이엔 그 간극을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이 시대의 음악을 지금까지 내려오는 기보법에 의해 표기된 이후의 음악과의 연속선상에서 보려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본다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로 울림이 있는 곡이니 잘 들어보시도록
참고:런던 올림픽 드립은 나중에 삽입한 것입니다.
136. Carmina Burana-Carl Orff(1935-36)-
독일의 작곡가인 칼 오르프(Carl Orff)이 이 작품을 쓴 것이 1935년에서 1936년 2년에 걸친 기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혹시 이 음반을 소장하고 계신다거나 구매 의사가 있어 검색을 해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클래시컬 음악 중에서도 고대 음악으로 분류된다. 그에는 당연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당연히 여기서 기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닥치고 감상하라는 이야기는 맨 마지막에나 할 말이니 아무트튼 이 작품에 대해 한참을 떠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일단 카르미나 부라나라는 말이 어떤 것을 지칭하는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시작!
Carmina Burana의 영어 뜻은 Songs from Bueren이라고 한다. Burana라는 말은 이탤리의 Bueren지방의 라틴어식 표기라고 한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중세나 그 이전엔 음악이라는 것 혹은 노래라는 것이 시와 따로 구별되지 않는 시기였고 즉 Bueren 지방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발견된 세속시를 바탕으로 완성된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이들 노래 혹은 시들은 대체적으로 네 가지의 내용 혹은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것은 1) 도덕적 풍자적 내용의 시, 2) 연애시, 3) 술잔치 혹은 좀 더 큰 의미로 유희에 관한 시, 4)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극시라 한다. 칼 오르프는 부아렌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발견된 시들 중 24편을 골라 곡으로 만들었으며 이 것이 오늘소개하려하는 카르미나 부라나이다. 클래식 음악에 정통한 사람들 혹은 음악학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작품이 가지는 돋보이는 음악적 특징은 이전의 화성이나 대위법 등을 무시하고 단선율과 리듬을 중요시하는 작품으로서 최대한 간결하고 단순하게 만든 작품이라는 점이라 한다.
아마 공화국의 인민들이 카르미나 부라나에 익숙한 이유는 나름의 열렬한 지지자들을 보유했던 1981년도 영화 <엑스칼리버>에 이 작품 중 O'fortuna(이 단어를 영어로 표현하면 Wheel of fortune이라 하는데 "운명의 수레바퀴" 정도로 옮기면 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엔 같은 이름의 퀴즈쇼가 있기도 하다.)라는 곡이 장엄하게 삽입되면서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라 자신있게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사실상 영국의 중세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카르미나 부라나를 통해 공화국에선 아서왕 시절의 영국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예는 굳이 무언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영화 <불의 전차>의 메인 테마가 메달 시상식을 진행하는 동안 흘러나왔다. 그리고 실제로 이 곡은 영국 영화의 주제곡이긴 하지만, 작곡자인 반겔리스는 그리스인 아니던가?
공화국에선 보기 힘들겠지만, 카르미나 부라나의 전 곡이 무대에 올려지는 광경을 보는 것은 커다란 감동을 준다고도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카르미나 부라나를 설명할 때 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탈피라는 설명을 많이 하나 그에 대해선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카르미나 부라나가 기록된 시기엔 고전음악 시대에 고착된 기보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기록되던 시대일 것이고, 그 당시의 방법들이 후대에 전해진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당시의 음악과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 사이엔 그 간극을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이 시대의 음악을 지금까지 내려오는 기보법에 의해 표기된 이후의 음악과의 연속선상에서 보려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본다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로 울림이 있는 곡이니 잘 들어보시도록
참고:런던 올림픽 드립은 나중에 삽입한 것입니다.
2012년 8월 7일 화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5)
아님 말고 1000곡(135)
So called the Beatles medley-2012런던 올림픽을 기념하여-
(언젠가 이 카테고리의 게시물로 올리기 위해 미리 작성했던 것을 일부 첨삭하여 게시하는 것입니다.)
12년 전에 어딘가에 썼던 이 곡들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 부분을 기억나는 대로 옮기는 것으로부터 시작해본다. "1968년 조지 마틴이 아닌 필 스펙터와 Let it be 앨범의 작업을 마친 폴 매카트니는 조지 마틴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했다. 조지! 우리는 한 장의 앨범 작업에 즉시 들어갈거에요. 그리고 그 앨범은 마지막이 될 거에요... 라고 말이다." 그렇다. 공식적으로 시장에 릴리즈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은 "Let it be"이지만 가장 나중에 스튜디오 작업을 끝낸 앨범을 마지막 앨범으로 한다면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은 바로 "Abbey Road"이 될 것이다. 언어권이 다른-예컨데 같은 언어는 아니지만 일본과 한국은 거의 같은 언어권으로 취급된다.- 문화를 한 단계 걸쳐 받아들이게 될 경우 이른바 중간 기착지의 습성을 답슶하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일본을 통해 팝음악을 받아들인 부분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보니 이런 경우도 겪게 된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물론 공화국 인민들도 상당히 좋아하긴 하지만- 순위를 정한다거나3대니 5대니 하는 따위의 클래스를 정하는 경우인데, 일본인들은 비틀스의 앨범에도 그런 짓을 하길 즐겨했다. 이른바 "비틀스의 3대 앨범" 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것인데, White album이라 흔히 불리는 The Beatles 앨범, 그리고 그 유명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그리고 이 앨범이다. 그냥 참고삼아 이야기하자면, 대중음악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기로 유명한 스웨덴을 위시한 북유럽쪽의 인민들은 Revolver 앨범을 가장 선호한다고 알려져있다.(물론 이 것 역시 스웨덴의 비틀스 팬들을 상대로 한 투표의 결과이긴 하다.) 아무튼, 한국이라는 나라에서의 비틀스의 앨범에 대한 선호도의 차이는 영국이나 미국의 영향보다는 일본의 영향을 좀 더 크게 받았다는 이야기다.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엔 조금 더 rock and roll에 가까운 곡들이 많이 수록된 앨범에 대한 선호가 높고 북유럽 쪽에선 상당히 어두운 음악들로 가득한 Revolver이나Rubbersoul에 대한 선호가 대단히 높은 등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일종의 문화적 차이로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굳이 객관적으로 어느 앨범이 더 좋으니 마니 그런 거 따지지 말자는 말씀!
한가지 또 덧붙이자면, 비틀매니아라 자부하는 부류에 속하지 않는 비틀스의 팬이나 혹은 비틀스에 대해 대단히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 대중음악 팬들이 이 브틀스 메들리라 불리는 시퀀스에 대해 그다지 높은 선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체로 두 가지 정도로 예상해 볼 수 있는데 첫째, 흔히들 비틀스의 "명곡"이라고 이야기되는 곡들에 비해 한 곡 한 곡의 스케일이 대단히 작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두번째는 이 메들리를 접하는 사람이 비틀매니아가 아니라면 비틀매닝나들은 느낄 수 있는 팀의 해체를 기정 사실화하고 시작한 스튜디오 작업에서 멤버간의 불화와 비틀스에 대한 애정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the end에는 그런 폴의 양가적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고 보는 것이 큰 무리가 없다. 아! 물론 이 역시 사람들마다 느끼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물론 그런 양가적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른바 비틀스의 명곡들이나 대곡들에 비하자면 대단히 소품에 가까운 곡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가볍게 보지 않을 필요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우리가 흔히 The Beatles medley라 부르는 것은 최초의 Vynil 음반 버전을 기준으로 Abbey Road 앨범의 Side B의 세번째 트랙-즉, Beacose 다음 트랙인 "You never give me your money"-에서 10번째 트랙-히든 트랙인 11번째 트랙 "Her majesty"앞의 트랙-인 "The end"까지의 곡들을 일컫는다. 이 여덟곡을 메들리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는 이 여덟 곡이 Vynil 음반 상에서 커트 없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는 "Her Majesty"까지를 포함사키기도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그 트랙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위키백과에선 아주 단호하게 Her Majesty는 메들리에서 빼는 과감함을 보이고 있다. 왜 넌 그 곡을 메들리에 포함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보느냐?라는 질문을 듣는다면 분명히 Her Majesty의 경우엔 메들리의 에필로그 혹은 앨범 전체의 에필로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곡으로 어차피 The end이라는 장엄한 내용은 물론 곡목 자체도 장엄한 곡으로 앨범이 끝난 후의 커튼 콜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곡이라면 메들리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물론 아님 말고...
물론 나중에 계관시인의 지위를 주느냐 마느냐 하는 논쟁까지 불러왔을 정도의 폴 매카트니의 다양한 행적은 이미 비틀스 시절에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유명한 페퍼 상사 앨범부터 폴은 꾸준히 자신의 곡들을 통해 내러티브의 확장을 시도했다. 페퍼상사에 수록된 폴의 거의 모든 곡들이 그랬고, 그 뒤의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에서도 더 비틀스 앨범의 Honey pie 등의 곡에서도 "아! 이래서 이 사람이 나중에 오페라까지 쓸 수 있게 되었구나"라는 근거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내러티브에 충실한 곡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메들리의 폴의 곡들에선 그런 폴의내러티브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존의 곡이나 폴의 곡들은 음악의 모티프를 유럽 지역의 민담이나 전설에까지 그 폭을 넓히는 대단히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한다. 아마 이런 지식이 없는 경우엔 조금 재미없는 곡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 인정한다. 하지만 비틀스 메들리를 단순히 소품들의 이어 붙이기로 보기엔 폴과 존의 음악적인 협력과 경쟁의 마지막 장을 엿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리고 마지막 곡이라 할 수 있는 the end를 들으시면 조지와 존 폴의 네마디씩의 기타 솔로의 연결을 들으실 수 있다. 하하하...
So called the Beatles medley-2012런던 올림픽을 기념하여-
(언젠가 이 카테고리의 게시물로 올리기 위해 미리 작성했던 것을 일부 첨삭하여 게시하는 것입니다.)
12년 전에 어딘가에 썼던 이 곡들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 부분을 기억나는 대로 옮기는 것으로부터 시작해본다. "1968년 조지 마틴이 아닌 필 스펙터와 Let it be 앨범의 작업을 마친 폴 매카트니는 조지 마틴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했다. 조지! 우리는 한 장의 앨범 작업에 즉시 들어갈거에요. 그리고 그 앨범은 마지막이 될 거에요... 라고 말이다." 그렇다. 공식적으로 시장에 릴리즈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은 "Let it be"이지만 가장 나중에 스튜디오 작업을 끝낸 앨범을 마지막 앨범으로 한다면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은 바로 "Abbey Road"이 될 것이다. 언어권이 다른-예컨데 같은 언어는 아니지만 일본과 한국은 거의 같은 언어권으로 취급된다.- 문화를 한 단계 걸쳐 받아들이게 될 경우 이른바 중간 기착지의 습성을 답슶하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일본을 통해 팝음악을 받아들인 부분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보니 이런 경우도 겪게 된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물론 공화국 인민들도 상당히 좋아하긴 하지만- 순위를 정한다거나3대니 5대니 하는 따위의 클래스를 정하는 경우인데, 일본인들은 비틀스의 앨범에도 그런 짓을 하길 즐겨했다. 이른바 "비틀스의 3대 앨범" 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것인데, White album이라 흔히 불리는 The Beatles 앨범, 그리고 그 유명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그리고 이 앨범이다. 그냥 참고삼아 이야기하자면, 대중음악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기로 유명한 스웨덴을 위시한 북유럽쪽의 인민들은 Revolver 앨범을 가장 선호한다고 알려져있다.(물론 이 것 역시 스웨덴의 비틀스 팬들을 상대로 한 투표의 결과이긴 하다.) 아무튼, 한국이라는 나라에서의 비틀스의 앨범에 대한 선호도의 차이는 영국이나 미국의 영향보다는 일본의 영향을 좀 더 크게 받았다는 이야기다.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엔 조금 더 rock and roll에 가까운 곡들이 많이 수록된 앨범에 대한 선호가 높고 북유럽 쪽에선 상당히 어두운 음악들로 가득한 Revolver이나Rubbersoul에 대한 선호가 대단히 높은 등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일종의 문화적 차이로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굳이 객관적으로 어느 앨범이 더 좋으니 마니 그런 거 따지지 말자는 말씀!
한가지 또 덧붙이자면, 비틀매니아라 자부하는 부류에 속하지 않는 비틀스의 팬이나 혹은 비틀스에 대해 대단히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 대중음악 팬들이 이 브틀스 메들리라 불리는 시퀀스에 대해 그다지 높은 선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체로 두 가지 정도로 예상해 볼 수 있는데 첫째, 흔히들 비틀스의 "명곡"이라고 이야기되는 곡들에 비해 한 곡 한 곡의 스케일이 대단히 작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두번째는 이 메들리를 접하는 사람이 비틀매니아가 아니라면 비틀매닝나들은 느낄 수 있는 팀의 해체를 기정 사실화하고 시작한 스튜디오 작업에서 멤버간의 불화와 비틀스에 대한 애정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the end에는 그런 폴의 양가적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고 보는 것이 큰 무리가 없다. 아! 물론 이 역시 사람들마다 느끼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물론 그런 양가적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른바 비틀스의 명곡들이나 대곡들에 비하자면 대단히 소품에 가까운 곡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가볍게 보지 않을 필요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우리가 흔히 The Beatles medley라 부르는 것은 최초의 Vynil 음반 버전을 기준으로 Abbey Road 앨범의 Side B의 세번째 트랙-즉, Beacose 다음 트랙인 "You never give me your money"-에서 10번째 트랙-히든 트랙인 11번째 트랙 "Her majesty"앞의 트랙-인 "The end"까지의 곡들을 일컫는다. 이 여덟곡을 메들리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는 이 여덟 곡이 Vynil 음반 상에서 커트 없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는 "Her Majesty"까지를 포함사키기도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그 트랙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위키백과에선 아주 단호하게 Her Majesty는 메들리에서 빼는 과감함을 보이고 있다. 왜 넌 그 곡을 메들리에 포함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보느냐?라는 질문을 듣는다면 분명히 Her Majesty의 경우엔 메들리의 에필로그 혹은 앨범 전체의 에필로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곡으로 어차피 The end이라는 장엄한 내용은 물론 곡목 자체도 장엄한 곡으로 앨범이 끝난 후의 커튼 콜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곡이라면 메들리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물론 아님 말고...
물론 나중에 계관시인의 지위를 주느냐 마느냐 하는 논쟁까지 불러왔을 정도의 폴 매카트니의 다양한 행적은 이미 비틀스 시절에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유명한 페퍼 상사 앨범부터 폴은 꾸준히 자신의 곡들을 통해 내러티브의 확장을 시도했다. 페퍼상사에 수록된 폴의 거의 모든 곡들이 그랬고, 그 뒤의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에서도 더 비틀스 앨범의 Honey pie 등의 곡에서도 "아! 이래서 이 사람이 나중에 오페라까지 쓸 수 있게 되었구나"라는 근거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내러티브에 충실한 곡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메들리의 폴의 곡들에선 그런 폴의내러티브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존의 곡이나 폴의 곡들은 음악의 모티프를 유럽 지역의 민담이나 전설에까지 그 폭을 넓히는 대단히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한다. 아마 이런 지식이 없는 경우엔 조금 재미없는 곡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 인정한다. 하지만 비틀스 메들리를 단순히 소품들의 이어 붙이기로 보기엔 폴과 존의 음악적인 협력과 경쟁의 마지막 장을 엿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리고 마지막 곡이라 할 수 있는 the end를 들으시면 조지와 존 폴의 네마디씩의 기타 솔로의 연결을 들으실 수 있다. 하하하...
2012년 8월 6일 월요일
우리가 싸이의 성공에 대해 잊어선 안될 것들(Soundless Music)
1. 싸이는 절대적으로 저평가된 아티스트다.
잘 기억할지는 모르지만, 싸이가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처음 알린 것은 조PD를 통해서였다. 조PD의 두번째 앨범의 인트로에는 여러 아티스트들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중에 Psycho라는 이름을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가 박재상 혹은 2001년 이후로는 싸이(Psy)으로 알려진 오늘 내가 말하려는 그 사람이다. 당시 휠을 잡고 있던(이제는 이 표현에 대략 익숙해지셨으리라...) 이정현이 보컬로 참여한 것으로 화제가 되었던 Fever이라는 곡이 수록된 바로 그 앨범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대단히 늦은 나이인 스물 다섯에 데뷔한(그 이듬해인 2001년에 싸이가 데뷔하지 않았던가?) 싸이는 이미 전에 조PD와 비슷한 힙합 프로듀서들에게는 이름이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싸이 역시 프로듀서였다. 싸이가 지난 해에 발매한 앨범을 구매하신 분들이라면 싸이가 어떤 상황에서 가수로 데뷔하게 된지는 아실 것이라 믿는다. 아주 짧게 설명하자면, 자신의 곡을 다른 아티스트들이 선호하지 않아 아니면 말고 식으로 자신이 자신의 곡을 발표하고 프로듀싱도 했다는 이야기...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이미 11년 전에 그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더랬다. 그 것도 그냥 성공 정도가 아니라 당시 싸이의 데뷔와 대중적인 성공은 거의 "사회적인 현상"에 가까웄다. 2001년 당시 서울의-당시에 지방엔 가본 적이 없어서- 서울에서 거리를 향해 스피커를 틀어놓고 영업을 하는 거의 모든 영업장에서 그의 노래가 나왔고 텔레비전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싸이의 춤을 추지 않는 연예인들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충격적인 데뷔를 했던 싸이에게 붙었던 수식어는 "엽기 가수"였다. 싸이의 성공이 사회적인 현상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의 막강한 임팩트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싸이의 그러한 성공의 요인을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찾으려고 노력했고 결국 그런 시도를 통해 얻어진 결론은 당시 유행하던 "엽기"라는 단어였다. 그리고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11년 전의 싸이의 기록적인 성공에 대해선 음악적 평가 자체를 삼가(?)고 계신 중이다. 과연 그에 대한 이런 평가가 공정한 일일까? 글쎄... 내 생각은 다르다. 내 생각은 이 꼭지의 제목과 같다. 싸이는 음악적으로 절대적으로 저평가되었다.
2. 오빤 강남 스타일
지금 싸이의 비디오 클립이 공화국을 넘어 미국에서까지 화제가 되고있다는 팩트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고... 자꾸 공화국의 언론들은 이 비디오 클립에 나오는 싸이의 춤과 1994년 당시 전 세계를 엿먹였던 "마카레나"를 비교하려고 한다. 일단 한 가지 의문, 과연 마카레나의 세계적인 성공에 음악적인 요인은 없었을까? 자 봅시다. 물론 마카레나가 음악적으로 대단한가?라고 내게 묻는다면 "그런 걸 뭘 굳이 음악적으로 보려고 하냐?"라고 답할테지만, 하나의 단서조항이 붙는다. "대단히 쉽고 보편성을 가진 멜로디의 곡이긴 하다."는 것! 쉽고 보편적이라는 것이 음악적 완성도를 높게 평가학 수 있는 근거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쉽고 보편적인 멜로디라는 것은 당연히 음악적인 요인이다. 마카레나의 성공이 오로지 예의 마카레나 춤외엔 없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대단히 오만할 수 있는, 혹은 무지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멜로디가 귀에 꽂히지 않는데 쉽고 따라하기 쉬운 머리어깨무릎발... 과 같은 동작 때문에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쉽게 동의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싸이의 비디오 클립이 미국에서 화제가 된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홍철의 새로운 업그레이드된 저질 댄스도 싸이가 줄곧 춰대는 말의 걸음걸이를 모방한 듯한 춤도 싸이의 비디오 클립을 대단히 돋보이게 하는 요소임에 분명하다. 물론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중반부에 포미닛에 현아가 나오는 순간 아저씨들의 환상이 실현된다고 할 수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단히 애석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이 것만으로 싸이의 비디오 클립이 화제가 되고있다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아마, 미국이나 유럽의 댄스 음악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란 곡이 클럽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주류 댄스 음악"의 틀에 대단히 가까운 음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것은 단지 멜로디의 측면에서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대단히 세련된 멜로디에 덧붙여 단지 MPC만으로 저렇게 대단히 정교한 비트가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리듬 파트도 굉장히 세련된 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결론일아 할만한 것은...
강남 스타일 한 곡에 대해 음악적 분석의 장을 이양기하자는 것이 이 게물의 목적이 이니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왜 굳이 싸이와 같은 류의 성공에 대해 음악적 분석은 뒷전이거나 아예 안중에도 없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무리 비디오 클립에 대한 인기가 높다 하더라도 일단 비디오 클립 역시 대중 음악의 컨텐츠인 이상 음악적인 부분에서 요인을 찾고 그래도 정 성공 요인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을 때 다른 것에서 성공의 원인을 찾는 것은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적 요인이 가장 뒤로 밀리고 신 K=Pop 열풍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소리를 한다는 것은 음악이라는 필드에서 음악을 조연으로 혹은 스튜디오의 세트 정도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도대체 누가 음악을 하고 싶어하겠나 말이다. 물론 컨텐츠가 비평담론을 풍부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평담론이 컨텐츠를 견인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들이 누벨 바그를 주도하고 주벨 바그가 까이에 뒤 씨네마의 황금기를 견인하고 하는 식의 상호 관계를 가졌던 것이 그 증거다. 롤링 스톤과 대중음악 전반의 관계도 그렇다. 스스로 일하기 귀찮은 비평가가 되려하면 편한가? 그게 사는건가?
잘 기억할지는 모르지만, 싸이가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처음 알린 것은 조PD를 통해서였다. 조PD의 두번째 앨범의 인트로에는 여러 아티스트들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중에 Psycho라는 이름을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가 박재상 혹은 2001년 이후로는 싸이(Psy)으로 알려진 오늘 내가 말하려는 그 사람이다. 당시 휠을 잡고 있던(이제는 이 표현에 대략 익숙해지셨으리라...) 이정현이 보컬로 참여한 것으로 화제가 되었던 Fever이라는 곡이 수록된 바로 그 앨범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대단히 늦은 나이인 스물 다섯에 데뷔한(그 이듬해인 2001년에 싸이가 데뷔하지 않았던가?) 싸이는 이미 전에 조PD와 비슷한 힙합 프로듀서들에게는 이름이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싸이 역시 프로듀서였다. 싸이가 지난 해에 발매한 앨범을 구매하신 분들이라면 싸이가 어떤 상황에서 가수로 데뷔하게 된지는 아실 것이라 믿는다. 아주 짧게 설명하자면, 자신의 곡을 다른 아티스트들이 선호하지 않아 아니면 말고 식으로 자신이 자신의 곡을 발표하고 프로듀싱도 했다는 이야기...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이미 11년 전에 그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더랬다. 그 것도 그냥 성공 정도가 아니라 당시 싸이의 데뷔와 대중적인 성공은 거의 "사회적인 현상"에 가까웄다. 2001년 당시 서울의-당시에 지방엔 가본 적이 없어서- 서울에서 거리를 향해 스피커를 틀어놓고 영업을 하는 거의 모든 영업장에서 그의 노래가 나왔고 텔레비전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싸이의 춤을 추지 않는 연예인들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충격적인 데뷔를 했던 싸이에게 붙었던 수식어는 "엽기 가수"였다. 싸이의 성공이 사회적인 현상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의 막강한 임팩트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싸이의 그러한 성공의 요인을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찾으려고 노력했고 결국 그런 시도를 통해 얻어진 결론은 당시 유행하던 "엽기"라는 단어였다. 그리고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11년 전의 싸이의 기록적인 성공에 대해선 음악적 평가 자체를 삼가(?)고 계신 중이다. 과연 그에 대한 이런 평가가 공정한 일일까? 글쎄... 내 생각은 다르다. 내 생각은 이 꼭지의 제목과 같다. 싸이는 음악적으로 절대적으로 저평가되었다.
2. 오빤 강남 스타일
지금 싸이의 비디오 클립이 공화국을 넘어 미국에서까지 화제가 되고있다는 팩트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고... 자꾸 공화국의 언론들은 이 비디오 클립에 나오는 싸이의 춤과 1994년 당시 전 세계를 엿먹였던 "마카레나"를 비교하려고 한다. 일단 한 가지 의문, 과연 마카레나의 세계적인 성공에 음악적인 요인은 없었을까? 자 봅시다. 물론 마카레나가 음악적으로 대단한가?라고 내게 묻는다면 "그런 걸 뭘 굳이 음악적으로 보려고 하냐?"라고 답할테지만, 하나의 단서조항이 붙는다. "대단히 쉽고 보편성을 가진 멜로디의 곡이긴 하다."는 것! 쉽고 보편적이라는 것이 음악적 완성도를 높게 평가학 수 있는 근거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쉽고 보편적인 멜로디라는 것은 당연히 음악적인 요인이다. 마카레나의 성공이 오로지 예의 마카레나 춤외엔 없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대단히 오만할 수 있는, 혹은 무지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멜로디가 귀에 꽂히지 않는데 쉽고 따라하기 쉬운 머리어깨무릎발... 과 같은 동작 때문에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쉽게 동의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싸이의 비디오 클립이 미국에서 화제가 된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홍철의 새로운 업그레이드된 저질 댄스도 싸이가 줄곧 춰대는 말의 걸음걸이를 모방한 듯한 춤도 싸이의 비디오 클립을 대단히 돋보이게 하는 요소임에 분명하다. 물론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중반부에 포미닛에 현아가 나오는 순간 아저씨들의 환상이 실현된다고 할 수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단히 애석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이 것만으로 싸이의 비디오 클립이 화제가 되고있다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아마, 미국이나 유럽의 댄스 음악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란 곡이 클럽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주류 댄스 음악"의 틀에 대단히 가까운 음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것은 단지 멜로디의 측면에서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대단히 세련된 멜로디에 덧붙여 단지 MPC만으로 저렇게 대단히 정교한 비트가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리듬 파트도 굉장히 세련된 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결론일아 할만한 것은...
강남 스타일 한 곡에 대해 음악적 분석의 장을 이양기하자는 것이 이 게물의 목적이 이니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왜 굳이 싸이와 같은 류의 성공에 대해 음악적 분석은 뒷전이거나 아예 안중에도 없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무리 비디오 클립에 대한 인기가 높다 하더라도 일단 비디오 클립 역시 대중 음악의 컨텐츠인 이상 음악적인 부분에서 요인을 찾고 그래도 정 성공 요인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을 때 다른 것에서 성공의 원인을 찾는 것은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적 요인이 가장 뒤로 밀리고 신 K=Pop 열풍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소리를 한다는 것은 음악이라는 필드에서 음악을 조연으로 혹은 스튜디오의 세트 정도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도대체 누가 음악을 하고 싶어하겠나 말이다. 물론 컨텐츠가 비평담론을 풍부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평담론이 컨텐츠를 견인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들이 누벨 바그를 주도하고 주벨 바그가 까이에 뒤 씨네마의 황금기를 견인하고 하는 식의 상호 관계를 가졌던 것이 그 증거다. 롤링 스톤과 대중음악 전반의 관계도 그렇다. 스스로 일하기 귀찮은 비평가가 되려하면 편한가? 그게 사는건가?
2012년 8월 4일 토요일
아직까지 티아라 사태를 통해 나오지 않은 이야기(Soundless Music)
1. 일단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부터
아직까지 알려진 것만으로도 2004년 SG워너비라는 팀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이 팀의 앨범이 5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지 못하면 이 바닥을 떠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당시 엠넷 미디어 지금은 코어 콘텐츠 미디어의 김광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 그 어느 동네보다도 갑과 을의 관계에서 절대적으로 갑의 힘이 대단한 쇼비지니스 계에서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아이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의 이야기만을 일방적으로 뿌려대면서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반박성의 이야기가 돌면 그에 대한 사실 반박이 아니라 내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는 전부 자신의 위치나 신분을 속인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들을 필요가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 한 명의 멤버가 자신에게 와서 사과했다는 이야기도 자신의 일방적인 이야기 아니던가? 자신은 티아라라는 이름의 팀에 소속된 아이들이 내분이 있을 때 한 명의 희생양을 찾아 그를 조지는 위치나 권한을 부여받기 이전에 그들 사이에 내분이 있었다면 그에 개입하여 되도록이면 원만하게 해결해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티아라라는 팀은 그가 언제나 주장하듯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스타" 아니던가? 그들이 자생적으로 결성된 팀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내분 역시 그들의 책임인 동시에 김광수의 책임인 것이다. 일단 누구나 할 수 있고 했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2. 이젠 내 이야기를 좀 합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현재 공화국의 아이돌 육성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자 하는 아이들에게서 "음악을 하는 것은 즐거움이라는 생각" 혹은 "음악 그 자체를 하는 즐거움"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어린 폴 매카트니는 존에게 작곡을 하는 법을 가르쳐주며 "작곡을 하지 못하면 매니저들에게 휘둘릴 수 있다.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곡을 써야 한다."리는 대사를 한다는 것은 이미 두 번 더 이야기하면 대낮에 총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 되어버렸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도 신선한 것인 양 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음악을 하는 즐거움과 곡을 쓰는 법을 안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이야기다. 물론 공화국의 아이돌들에서도 "이번 앨범엔 우리의 자작곡이 들어가 있다"라는 이야기를 듣거나 "요즘 곡 쓰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는 일반적이다. 난 이 둘의 차이가 그다지 크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곡을 쓰는 법은 어떤 이에겐 정말 자연스럽지만 어떤 이에겐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배움이 없이는 되지 않는 일이기도 하며 어떤 이에겐 태어나서부터의 재능이지만 어떤 이에겐 그렇지 않으며 곡을 언제부터 쓸 수 있었는가가 음악을 하는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 큰 차이를 제공한다고 보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많은 아이들이 찌질거리듯이 "진정한 가수"니 "진정한 뮤지션"이니 하는 단어를 써서 어떤 음악은 품위가 있고 우아하며 어떤 음악은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금 공화국의 아이돌 육성 시스템에서 한가지 우려되는 것은 아이돌을 만들어내는 에이전트들이 아이들을 관리하는 시스템은 곡을 쓰건 연주를 하건 노래를 하건 기본적으로 그 것이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 "대단히 힘드는 일"이 되게 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슨 일을 하건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말을 자조적인 자세와 더불어 대단한 우월감을 가지고도 말하는 공화국의 이중성에 대해서다 시언 급하고 싶진 않다. 물론 남들보다 경쟁이 훨씬 심한 필드에 있으면서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노력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씁쓸하긴 하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노력을 해야한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굉장히 재미있는 일"인 음악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그 아이들은 모를 수 있거나 심지어 음악이라는 것이 나를 괴롭히기도 하는 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아주 간단핟.그토록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 음악이지만 그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음악이 싫어지거나 귀찮고 곁에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자주 생긴다. 이 경우에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럴 경우엔 그저 잠시 음악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으면 된다. 이 것이 음악이 귀찮아지고 싫어진 문제를 자연스레 해결해준다. 하지만, 공화국의 아이돌 시스템에 의해 키워진 아이들은 그럴 시간이 없다. 자신들의 에이전시가 정한 스케줄이 있고 그 것이 자신의 사이클과 맞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자신의 사이클이 아닌 회사의 스케줄을 따라야 한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음악이라는 대중예술을 하는 아이들에게 회사원의 삶을 강요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술을 하는 사람과 조직의 일원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같은 패턴의 삶을 강요해선 곤란하다. 예술적인 작업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을 때 가장 효율적인 작업을 할 수 있으며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남들이 부러워하지만 항상 힘들 수밖에 없는 예술이라는 작업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일하고 싶을 때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유일한 특권일 수도 있고 그 특권이 그들의 성과의 바탕이 될 수 있다.
그냥 안타까운 일이다.
아직까지 알려진 것만으로도 2004년 SG워너비라는 팀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이 팀의 앨범이 5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지 못하면 이 바닥을 떠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당시 엠넷 미디어 지금은 코어 콘텐츠 미디어의 김광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 그 어느 동네보다도 갑과 을의 관계에서 절대적으로 갑의 힘이 대단한 쇼비지니스 계에서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아이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의 이야기만을 일방적으로 뿌려대면서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반박성의 이야기가 돌면 그에 대한 사실 반박이 아니라 내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는 전부 자신의 위치나 신분을 속인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들을 필요가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 한 명의 멤버가 자신에게 와서 사과했다는 이야기도 자신의 일방적인 이야기 아니던가? 자신은 티아라라는 이름의 팀에 소속된 아이들이 내분이 있을 때 한 명의 희생양을 찾아 그를 조지는 위치나 권한을 부여받기 이전에 그들 사이에 내분이 있었다면 그에 개입하여 되도록이면 원만하게 해결해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티아라라는 팀은 그가 언제나 주장하듯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스타" 아니던가? 그들이 자생적으로 결성된 팀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내분 역시 그들의 책임인 동시에 김광수의 책임인 것이다. 일단 누구나 할 수 있고 했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2. 이젠 내 이야기를 좀 합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현재 공화국의 아이돌 육성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자 하는 아이들에게서 "음악을 하는 것은 즐거움이라는 생각" 혹은 "음악 그 자체를 하는 즐거움"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
인터넷에서 많은 아이들이 찌질거리듯이 "진정한 가수"니 "진정한 뮤지션"이니 하는 단어를 써서 어떤 음악은 품위가 있고 우아하며 어떤 음악은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금 공화국의 아이돌 육성 시스템에서 한가지 우려되는 것은 아이돌을 만들어내는 에이전트들이 아이들을 관리하는 시스템은 곡을 쓰건 연주를 하건 노래를 하건 기본적으로 그 것이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 "대단히 힘드는 일"이 되게 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슨 일을 하건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말을 자조적인 자세와 더불어 대단한 우월감을 가지고도 말하는 공화국의 이중성에 대해서다 시언 급하고 싶진 않다. 물론 남들보다 경쟁이 훨씬 심한 필드에 있으면서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노력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씁쓸하긴 하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노력을 해야한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굉장히 재미있는 일"인 음악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그 아이들은 모를 수 있거나 심지어 음악이라는 것이 나를 괴롭히기도 하는 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아주 간단핟.그토록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 음악이지만 그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음악이 싫어지거나 귀찮고 곁에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자주 생긴다. 이 경우에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럴 경우엔 그저 잠시 음악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으면 된다. 이 것이 음악이 귀찮아지고 싫어진 문제를 자연스레 해결해준다. 하지만, 공화국의 아이돌 시스템에 의해 키워진 아이들은 그럴 시간이 없다. 자신들의 에이전시가 정한 스케줄이 있고 그 것이 자신의 사이클과 맞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자신의 사이클이 아닌 회사의 스케줄을 따라야 한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음악이라는 대중예술을 하는 아이들에게 회사원의 삶을 강요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술을 하는 사람과 조직의 일원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같은 패턴의 삶을 강요해선 곤란하다. 예술적인 작업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을 때 가장 효율적인 작업을 할 수 있으며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남들이 부러워하지만 항상 힘들 수밖에 없는 예술이라는 작업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일하고 싶을 때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유일한 특권일 수도 있고 그 특권이 그들의 성과의 바탕이 될 수 있다.
그냥 안타까운 일이다.
2012년 8월 1일 수요일
그래도 공화국 내에서 지속되어야 할 것들(개소리들)
1. 항상 들어온 이야기들
1987년에도 그랬다. "지금은 정권을 바꾸는 것이 큰 목표다. 이 대의에 성공하면 너희들의 운신의 폭이 넓어질 공간을 확보해 주겠다." 그 두에 정확하게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때는 정권교체는 실패했고 운신의 폭이 넓어지기는 개뿔...이었다. 1992년엔 "범만주 단일 후보로 대옫 단결"을 하자며 범 만주 단일 후보라 지들이 지치칭하던 김대중에게 모든 것을 올인하지 않는 새끼들은 "미제의 첩자"라고 까지 이야기하는 주둥이 지랄들을 해댔다. 졸지에 나는 김대중에 의해 "주사파"도 되었다가, 주사파들에 의해 "미제의 첩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 때도 정권교체라는 그들의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대의"는 이루지 못했고 김대중도 지들도 "좆됐다." 1997년 대선에서 드디어 김대중이 당선되고 과거부터 김대중에게 목을 메던 주사파들이 국회에 나름대로 많은 수가 입성하기도 했는데, 문제는 이미 그들은 무장해제한 상태로 김대중과 그의 당의 일원이 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을 그 뒤로도 15년 씩이나 지난 지금에도 듣는다. "아! 씨발 일단 박그네 댙총령 되는 것은 저지해야하지 않겠냐?" 그리고 "그리 되기만 한다면 너거들도 활동하기 편해진다. 내 좆을 걸고 맹세한다." 왜 내게 늬들 맹세에 내 정치적 지향을 접어야 하니? 이런 이야기는 소용 없다. 20년 전에 주사위들에 의해 "미제의 첩자"로 몰렸다면 20년 후엔 "박그네 첩자"로 몰면 그만일테니...
2. 진부한 이야기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아니고 잡소리
정말 대단히 힘든 이야기다. 25년간 같은 이야기들을 해대며 발목을 잡으려 노력했던 자들이 있었다면, 그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25년간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즉 독자후보 전술-을 이야기했던 측에도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진보정당 활동 혹은 진보정당 운동을 하고 있는 김종철 같은 활동가들은 그들이 20년 전 PD의 틀에 머물러 있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내부적으로 구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PD이라는 단어가 틔미하는 바인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의한 정권들이 무너짐과 동시에 더 이상 그 단어는 유효하지 않거나 집착해서는 안되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 것은 선언적인 의미에 불고할 수도 있다. 과거 민중민주 혹은 인민민주주의 계열의 과거 진학련이나 진정추 혹은 전학특연 출신들이 모여 시작한 정당은 확실히 그들의 과거 활동방식과 무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처음 창당했을 무렵을 회고하자면 학생운동 조직에서 곧바로 학연 등의 인맥으로 민주노동당의 활동가가 된 사람들은 가장 익숙한 방향의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민주당 창당 당시 당원을 모집하뎐-자발적으로 추후에 가입한 사람들이 대거 생기기 전엔- 방법은 주로 대인 면접에 가까운 방법이었다. 차창당 과정에서 활발히 당에 참여한 활동가들이 자신이 학생운동을 하던 혹은 노동운동을 하던 당시의 지인들에게 입당원서를 내밀고 그 자리에서 사인을 받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파벌"이라는 책을 보게 되면 알겠지만, 애초에 NL 계열의 활동가들이 민조노동당에 참여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을 대거 받아들이게 된 것 역시 학생운동 시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정당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던 NL 계열은 그들 중에서 비주류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애초-앞에서의 설명과 연결되는 이야기지만- NL의 주류들은 독자적인 정당도 대선에서의 독자적인 후보도 필요가 없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2002년에서 2003년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NL 주류들이 대거 당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 과정이 바로 여러분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경기 동부연합"과 "광주 전남 연합"이 "용맹스럽게(?)" 당에 입성하던 시기였다. 사실 그들이 특정 지역부터 장악하기 시작해 중앙당까지 장악하던 일련의 과정은 이미 학생운동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익숙하게 당하던 과정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친 자책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당운동은 과거의 학생운동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좀 더 강력하게 그들이 당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했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 진보신당으로 갈아탈 것이었다면 분당도 그 당시에 이뤄졌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회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애초부터 진보정당 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했던 사람들은 "보수정당의 지지자들과 NL주사계열의 진부한 공격"에 당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진보정당 운동의 초창기부터 활동해온 사람들에게 "반성"이 필요하다는 언사는 유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미 90년대 초 더 이상 PD이라는 말을 하지 말자는 그 시간부터 역설적으로 과거 PD의 틀에 갇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강산이 변했을 20년 동안 과거의 이야기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 정돋가 덧붙여진 것이 현실이라면 더 이상 그들의 주장엔 현재성 혹은 동시대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야말로 대중적인 언어를 사용해 이야기하자면 "더 이상 이념이 유효하지 않은 시대에 이념의 과잉상태"에 있던 집단이 차뤄야할 대가를 치루는 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가를 치루기만 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조금 억울하지 않겠나? 위의 세 문단은 그냥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쪽으로 하고 이젠 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전술에 대해 생각해 봐야할 시간이 되었다고 본다.
3. 대통령 선거를 어찌하리요?
사실 위에서 한 이야기는 하나마나 한 이야기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주사의들에게 당하고 산 것이 한 두해의 일이며 노빠나 민주당 지지자들이 호구라 생각한 것이 어디 한 두해의 일이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뭐? 뭘 어쩌라고? 갑자기 홍대지하철역 앞에서 다함께의 활동가와 말싸움을 하던 2010년 초의 일이 떠오른다. 그 때 그 친구는 "선거가 다가오는데 선거연합을 하지 않을거냐?"라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걸 왜 꼭 해야 하는건데?"라는 내 대답은 당연히 언쟁을 2라운드에 이르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고... 그러나 일행에 의해 내 전의는 한풀 꺾였고 술처먹으러 가느라 그 활동가와 더 이상 논쟁은 붙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항상 그렇지만, 선거가 있기 때문에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기 위해" 선거연대를 해야한다는 그들의 논리엔 그다지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선거연대를 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연대의 상대로 생각하는 집단 혹은 정치세력과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접점이 있는가? 있다면 그 것은 무엇인가? 그 최소한의 접점이라는 것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을 서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선에서 어느 정도 덮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따져 연대의 득이 실보다 크다는 정세분석의 도출이다.
그 후의 문제는 전술적인 문제인 관계로 연대를 성사시킨 혹은 합의한 후에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이라 본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문제는 선결 조건이다. 그리고 어느 선까지를 양보할 것이고 어느 선 이상은 양보할 수 없는가를 정할 기준이다.만일 민주당의 후보가 되든 안철수가 되든 그 쪽의 후보의 선거운동을 해주러 다니면서 "아! 니미! 이번엔 제발 새누리당 찍지 마삼!"이런 소리나 하고 다닐거라면 선거연대라든지 좀 더 거창한 단어로 범야권 단일후보라든지 하는 정치적 수사 자체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노동부 장관 자리를 달라든지, 혹은 복지 관계 부처의 장관 자리를 달라든지 하는 식의 구체적인 약속이라도 없는데 머릿수나 채워주고 자빠질 일이라면 그런 빌어먹을 선거연대를 하는 것은 과거 전국체전할 때 고등학생들이 매스게임에 동원되던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 새악이긴 하나 선거라는 정치공간에 들어가기 전에 타협의 최하선이 정리되지 않는다면 연대라는 말 자체를 쓰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미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무원칙적이고 탈이념적인 선거연대에 목을 멘 나머지 지금의 통합 진보당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더라도 절대다수의 반이명박 주의자-그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말이다.-들에게 독자후보를 내는 것조차 "시건방을 떠는 일" 정도로 보이기에 딱 좋은 환경을 알아저 조성했다 .물론 통합진보당의 주류라 할 수 있는 구 민주노동당의 당권파들을 보면 이런 상황이 조성된 것 자체가 그다지 이상하진 않겠지만, 문제는 지금의 통합진보당이 과연 독자적인 정당으로서 대통령 선거에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단히 부정적인 대답 자체가 좌파들이 대선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지 자체를 축소시켰다는 점이다. 사싱상 지금 상황에서 현재의 통합진보당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대통령 선거에 개입할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라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물론 "진보당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런 현실이 오히려 좌파들에겐 기회가 될 수 있다" 따위의 낭만적 언사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이유도 없고 그래선 더욱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개인적인 제안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4. 명랑한 선거를 맞이하려면?
지금까지 횡설수설 그지 발싸개같은 게시물을 싸지르고도 아직까지 무슨 멋있는 말을 해야하긴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기도 하고 "이런 답 없는 문제를 왜 싸지르고 있을까?"라는 생각도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럴수록 기본으로 돌아간다면 의외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마오도 항상 계급투쟁에 대해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복지의 문제건 경제민주화의 문제건 (개인적인 결론으로는) 계급간 세력의 불균형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문제는 조금 좁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노동계급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 이전에 어떤 지점에서 연대라는 틀을 구성할 것인지를 찾는 것이 기본이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이라 생각된다. 지금 당장 어떤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좌파들이 대선에 개입할 지점이 바로 노동계급의 세력확장과 노동계급의 연대라는 대단히 추상적인 것이 아닐까? 빌어먹을 선거...
1987년에도 그랬다. "지금은 정권을 바꾸는 것이 큰 목표다. 이 대의에 성공하면 너희들의 운신의 폭이 넓어질 공간을 확보해 주겠다." 그 두에 정확하게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때는 정권교체는 실패했고 운신의 폭이 넓어지기는 개뿔...이었다. 1992년엔 "범만주 단일 후보로 대옫 단결"을 하자며 범 만주 단일 후보라 지들이 지치칭하던 김대중에게 모든 것을 올인하지 않는 새끼들은 "미제의 첩자"라고 까지 이야기하는 주둥이 지랄들을 해댔다. 졸지에 나는 김대중에 의해 "주사파"도 되었다가, 주사파들에 의해 "미제의 첩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 때도 정권교체라는 그들의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대의"는 이루지 못했고 김대중도 지들도 "좆됐다." 1997년 대선에서 드디어 김대중이 당선되고 과거부터 김대중에게 목을 메던 주사파들이 국회에 나름대로 많은 수가 입성하기도 했는데, 문제는 이미 그들은 무장해제한 상태로 김대중과 그의 당의 일원이 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을 그 뒤로도 15년 씩이나 지난 지금에도 듣는다. "아! 씨발 일단 박그네 댙총령 되는 것은 저지해야하지 않겠냐?" 그리고 "그리 되기만 한다면 너거들도 활동하기 편해진다. 내 좆을 걸고 맹세한다." 왜 내게 늬들 맹세에 내 정치적 지향을 접어야 하니? 이런 이야기는 소용 없다. 20년 전에 주사위들에 의해 "미제의 첩자"로 몰렸다면 20년 후엔 "박그네 첩자"로 몰면 그만일테니...
2. 진부한 이야기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아니고 잡소리
정말 대단히 힘든 이야기다. 25년간 같은 이야기들을 해대며 발목을 잡으려 노력했던 자들이 있었다면, 그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25년간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즉 독자후보 전술-을 이야기했던 측에도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진보정당 활동 혹은 진보정당 운동을 하고 있는 김종철 같은 활동가들은 그들이 20년 전 PD의 틀에 머물러 있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내부적으로 구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PD이라는 단어가 틔미하는 바인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의한 정권들이 무너짐과 동시에 더 이상 그 단어는 유효하지 않거나 집착해서는 안되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 것은 선언적인 의미에 불고할 수도 있다. 과거 민중민주 혹은 인민민주주의 계열의 과거 진학련이나 진정추 혹은 전학특연 출신들이 모여 시작한 정당은 확실히 그들의 과거 활동방식과 무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처음 창당했을 무렵을 회고하자면 학생운동 조직에서 곧바로 학연 등의 인맥으로 민주노동당의 활동가가 된 사람들은 가장 익숙한 방향의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민주당 창당 당시 당원을 모집하뎐-자발적으로 추후에 가입한 사람들이 대거 생기기 전엔- 방법은 주로 대인 면접에 가까운 방법이었다. 차창당 과정에서 활발히 당에 참여한 활동가들이 자신이 학생운동을 하던 혹은 노동운동을 하던 당시의 지인들에게 입당원서를 내밀고 그 자리에서 사인을 받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파벌"이라는 책을 보게 되면 알겠지만, 애초에 NL 계열의 활동가들이 민조노동당에 참여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을 대거 받아들이게 된 것 역시 학생운동 시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정당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던 NL 계열은 그들 중에서 비주류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애초-앞에서의 설명과 연결되는 이야기지만- NL의 주류들은 독자적인 정당도 대선에서의 독자적인 후보도 필요가 없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2002년에서 2003년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NL 주류들이 대거 당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 과정이 바로 여러분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경기 동부연합"과 "광주 전남 연합"이 "용맹스럽게(?)" 당에 입성하던 시기였다. 사실 그들이 특정 지역부터 장악하기 시작해 중앙당까지 장악하던 일련의 과정은 이미 학생운동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익숙하게 당하던 과정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친 자책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당운동은 과거의 학생운동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좀 더 강력하게 그들이 당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했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 진보신당으로 갈아탈 것이었다면 분당도 그 당시에 이뤄졌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회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애초부터 진보정당 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했던 사람들은 "보수정당의 지지자들과 NL주사계열의 진부한 공격"에 당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진보정당 운동의 초창기부터 활동해온 사람들에게 "반성"이 필요하다는 언사는 유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미 90년대 초 더 이상 PD이라는 말을 하지 말자는 그 시간부터 역설적으로 과거 PD의 틀에 갇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강산이 변했을 20년 동안 과거의 이야기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 정돋가 덧붙여진 것이 현실이라면 더 이상 그들의 주장엔 현재성 혹은 동시대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야말로 대중적인 언어를 사용해 이야기하자면 "더 이상 이념이 유효하지 않은 시대에 이념의 과잉상태"에 있던 집단이 차뤄야할 대가를 치루는 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가를 치루기만 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조금 억울하지 않겠나? 위의 세 문단은 그냥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쪽으로 하고 이젠 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전술에 대해 생각해 봐야할 시간이 되었다고 본다.
3. 대통령 선거를 어찌하리요?
사실 위에서 한 이야기는 하나마나 한 이야기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주사의들에게 당하고 산 것이 한 두해의 일이며 노빠나 민주당 지지자들이 호구라 생각한 것이 어디 한 두해의 일이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뭐? 뭘 어쩌라고? 갑자기 홍대지하철역 앞에서 다함께의 활동가와 말싸움을 하던 2010년 초의 일이 떠오른다. 그 때 그 친구는 "선거가 다가오는데 선거연합을 하지 않을거냐?"라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걸 왜 꼭 해야 하는건데?"라는 내 대답은 당연히 언쟁을 2라운드에 이르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고... 그러나 일행에 의해 내 전의는 한풀 꺾였고 술처먹으러 가느라 그 활동가와 더 이상 논쟁은 붙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항상 그렇지만, 선거가 있기 때문에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기 위해" 선거연대를 해야한다는 그들의 논리엔 그다지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선거연대를 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연대의 상대로 생각하는 집단 혹은 정치세력과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접점이 있는가? 있다면 그 것은 무엇인가? 그 최소한의 접점이라는 것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을 서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선에서 어느 정도 덮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따져 연대의 득이 실보다 크다는 정세분석의 도출이다.
그 후의 문제는 전술적인 문제인 관계로 연대를 성사시킨 혹은 합의한 후에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이라 본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문제는 선결 조건이다. 그리고 어느 선까지를 양보할 것이고 어느 선 이상은 양보할 수 없는가를 정할 기준이다.만일 민주당의 후보가 되든 안철수가 되든 그 쪽의 후보의 선거운동을 해주러 다니면서 "아! 니미! 이번엔 제발 새누리당 찍지 마삼!"이런 소리나 하고 다닐거라면 선거연대라든지 좀 더 거창한 단어로 범야권 단일후보라든지 하는 정치적 수사 자체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노동부 장관 자리를 달라든지, 혹은 복지 관계 부처의 장관 자리를 달라든지 하는 식의 구체적인 약속이라도 없는데 머릿수나 채워주고 자빠질 일이라면 그런 빌어먹을 선거연대를 하는 것은 과거 전국체전할 때 고등학생들이 매스게임에 동원되던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 새악이긴 하나 선거라는 정치공간에 들어가기 전에 타협의 최하선이 정리되지 않는다면 연대라는 말 자체를 쓰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미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무원칙적이고 탈이념적인 선거연대에 목을 멘 나머지 지금의 통합 진보당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더라도 절대다수의 반이명박 주의자-그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말이다.-들에게 독자후보를 내는 것조차 "시건방을 떠는 일" 정도로 보이기에 딱 좋은 환경을 알아저 조성했다 .물론 통합진보당의 주류라 할 수 있는 구 민주노동당의 당권파들을 보면 이런 상황이 조성된 것 자체가 그다지 이상하진 않겠지만, 문제는 지금의 통합진보당이 과연 독자적인 정당으로서 대통령 선거에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단히 부정적인 대답 자체가 좌파들이 대선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지 자체를 축소시켰다는 점이다. 사싱상 지금 상황에서 현재의 통합진보당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대통령 선거에 개입할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라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물론 "진보당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런 현실이 오히려 좌파들에겐 기회가 될 수 있다" 따위의 낭만적 언사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이유도 없고 그래선 더욱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개인적인 제안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4. 명랑한 선거를 맞이하려면?
지금까지 횡설수설 그지 발싸개같은 게시물을 싸지르고도 아직까지 무슨 멋있는 말을 해야하긴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기도 하고 "이런 답 없는 문제를 왜 싸지르고 있을까?"라는 생각도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럴수록 기본으로 돌아간다면 의외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마오도 항상 계급투쟁에 대해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복지의 문제건 경제민주화의 문제건 (개인적인 결론으로는) 계급간 세력의 불균형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문제는 조금 좁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노동계급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 이전에 어떤 지점에서 연대라는 틀을 구성할 것인지를 찾는 것이 기본이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이라 생각된다. 지금 당장 어떤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좌파들이 대선에 개입할 지점이 바로 노동계급의 세력확장과 노동계급의 연대라는 대단히 추상적인 것이 아닐까? 빌어먹을 선거...
2012년 7월 2일 월요일
그냥 보고만 있기엔 너무 아름다운...(월드컵의 역사)
드디어 3주간 이상을 주활야활하게 만들었던 유럽축구선수권 유로 2012 대회가 스페인의 사상초유의 메이저 대회 3연속 우승이라는 기록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물론 이전 프랑스가 1998년 월드컵과 2000년 유럽선수권 유로 2000 그리고 2001년의 인터컨티넨털 대회를 연속으로 우승한 적이 있으나, 인터컨티넨털 대회라는 것은 일종의 친선대회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대회이므로 당분간 이 기록은 적어도 유럽대륙에서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그다지 무리한 생각은 아닐 것이라 본다. 애초 이 대회는 "만인의 스페인에 대한 투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스페인은 모두의 유일한 목표였으며 전통의 강호라 일컬어지는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스페인의 독주를 막기 위해 각기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전술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모두가 외쳤던 "타도 스페인"이란 구호는 스페인의 클래스가 다른 팀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1. 전술적 측면에서의 유로 2012
항상 유럽축구선수권은 월드컵이 열리기 2년 전에 개최되면서 다음 월드컵에서의 전술적 변화 혹은 유행을 점쳐보는 척도가 되곤 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유로 2012 대회는 전술적인 면에서 그다지 많은 것을 남긴 대회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애초 스스로가 8강권 이상의 전력이라 생각했던 팀들은 몇 팀을 제외하곤 모두 "스페인에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스페인의 전술적 약점을 찾아 그 지점을 공략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대회에 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프랑스 정도를 제외하고는 스페인의 그 엄청난 "처음부터 끝까지 볼을 소유하는 축구"에 저항할만한 볼 소유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스페인에 대항할 유일한 팀이 프랑스라는 것은 "스페인과 가장 유사한 플레이 패턴을 가지고 있는 팀"이 프랑스라는 이야기다. 프랑스의 기량이 스페인과 견줄 유일한 수준에 올라와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의 기억을 4년 전으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 2006년 이탤리가 월드컵에서 네번째 우승을 한 후 당시 2008년 유로대회가 가지고 있던 축구의 전술적인 면에서의 최대 과제는 "코트의 전방에서 행해지는 압박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 것인가?"였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번 대회도 그랬지만, 각국의 팀들은 "더 크고 강한 압박"을 하는 데엔 커다란 성공을 거뒀지만 그 것을 어떻게 깰 것인가?에 대해선 답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론적으로 4년전의 대회에서 그에 가장 유사한 답을 가지고 있던 팀은 아라고네스가 이끌던 스페인 팀이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볼을 소유하면서 빠른 패스를 돌리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상대방의 수비의 빈틈을 노리다가 한 번의 패스와 드리블을 통해 상대의 수비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상대했던 팀들이 자신들을 향해 엄처청나게 걸어오던 압박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의 기본적인 전형은 실질적으로는 원톱의 공격수를 세우고 9명이 공격을 하고 10명이 수비를 하는 4-3-3 포메이션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실질적으로는 다비드 비야라는 걸출한 공격수를 측면 공격수와 쉐도우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함으로 투톱을 가지는 포메이션이 빠지기 쉬운 공격수의 고립이나 공격수의 스피드 부족으로 인한 느린 수비전환이라는 약점이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 공이 빠르게 움직이는 축구"로 자신들의 상대를 무력화시키며 1964년 이후 44년 만에 유럽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자칫 잘못하면 고립되어 무력화 될 수 있는 원톱 공격수를 두는 포메이션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고자 했고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언론에 많이 오르내린 제로톱의 전술을 들고 새로운 유로대회에 나섰다.
다른 팀들도 제로톰의 포메이션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스페인조차 완전한 성공을 거뒀다고 하기엔 어려운 전술적 실험인 제로톱 전형의 전제조건은 "상대방을 압도하는 볼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었음을 스스로 보여주기도 했다. 프랑스의 카림 벤제마는 스스로의 활동 범위를 미드필드까지 넓히는 방식으로 이런 전형에 적응하려 했고 볼의 소유능력에 있어서는 두말할 나위 없는 능력을 지닌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수비능력을 극대화 시키면서도 공격수의 고립을 막을 수 있는 이런 제로톱의 전형에 녹아들어갔으나 이니에스타와 다비드 실바 등의 최전방 공격수 못지 않은 해결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피드와 볼의 소유능력을 보유한 선수들이 포진해있는 스페인과 같은 완성도를 가지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에휴~ 더 길어지기 전에 이 쯤에서 끊어 가자...)
1. 전술적 측면에서의 유로 2012
항상 유럽축구선수권은 월드컵이 열리기 2년 전에 개최되면서 다음 월드컵에서의 전술적 변화 혹은 유행을 점쳐보는 척도가 되곤 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유로 2012 대회는 전술적인 면에서 그다지 많은 것을 남긴 대회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애초 스스로가 8강권 이상의 전력이라 생각했던 팀들은 몇 팀을 제외하곤 모두 "스페인에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스페인의 전술적 약점을 찾아 그 지점을 공략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대회에 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프랑스 정도를 제외하고는 스페인의 그 엄청난 "처음부터 끝까지 볼을 소유하는 축구"에 저항할만한 볼 소유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스페인에 대항할 유일한 팀이 프랑스라는 것은 "스페인과 가장 유사한 플레이 패턴을 가지고 있는 팀"이 프랑스라는 이야기다. 프랑스의 기량이 스페인과 견줄 유일한 수준에 올라와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의 기억을 4년 전으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 2006년 이탤리가 월드컵에서 네번째 우승을 한 후 당시 2008년 유로대회가 가지고 있던 축구의 전술적인 면에서의 최대 과제는 "코트의 전방에서 행해지는 압박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 것인가?"였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번 대회도 그랬지만, 각국의 팀들은 "더 크고 강한 압박"을 하는 데엔 커다란 성공을 거뒀지만 그 것을 어떻게 깰 것인가?에 대해선 답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론적으로 4년전의 대회에서 그에 가장 유사한 답을 가지고 있던 팀은 아라고네스가 이끌던 스페인 팀이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볼을 소유하면서 빠른 패스를 돌리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상대방의 수비의 빈틈을 노리다가 한 번의 패스와 드리블을 통해 상대의 수비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상대했던 팀들이 자신들을 향해 엄처청나게 걸어오던 압박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의 기본적인 전형은 실질적으로는 원톱의 공격수를 세우고 9명이 공격을 하고 10명이 수비를 하는 4-3-3 포메이션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실질적으로는 다비드 비야라는 걸출한 공격수를 측면 공격수와 쉐도우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함으로 투톱을 가지는 포메이션이 빠지기 쉬운 공격수의 고립이나 공격수의 스피드 부족으로 인한 느린 수비전환이라는 약점이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 공이 빠르게 움직이는 축구"로 자신들의 상대를 무력화시키며 1964년 이후 44년 만에 유럽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자칫 잘못하면 고립되어 무력화 될 수 있는 원톱 공격수를 두는 포메이션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고자 했고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언론에 많이 오르내린 제로톱의 전술을 들고 새로운 유로대회에 나섰다.
다른 팀들도 제로톰의 포메이션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스페인조차 완전한 성공을 거뒀다고 하기엔 어려운 전술적 실험인 제로톱 전형의 전제조건은 "상대방을 압도하는 볼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었음을 스스로 보여주기도 했다. 프랑스의 카림 벤제마는 스스로의 활동 범위를 미드필드까지 넓히는 방식으로 이런 전형에 적응하려 했고 볼의 소유능력에 있어서는 두말할 나위 없는 능력을 지닌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수비능력을 극대화 시키면서도 공격수의 고립을 막을 수 있는 이런 제로톱의 전형에 녹아들어갔으나 이니에스타와 다비드 실바 등의 최전방 공격수 못지 않은 해결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피드와 볼의 소유능력을 보유한 선수들이 포진해있는 스페인과 같은 완성도를 가지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에휴~ 더 길어지기 전에 이 쯤에서 끊어 가자...)
2012년 6월 3일 일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3)
아님말고 1000곡
133. Death on two legs, I'm in love with my car, Sweet lady-(Queen, 1975)-
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팀에 대해 가장 잘못된 선입견은 지금의 40대 후반 이상의 세대들에게 "퀸이 어떤 음악을 한 팀인가?"라는 질문을하면 곧장 튀어나오게 된다. 그들 중 상당수는 퀸의 음악을 "Operatic rock"이라 말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것은 절대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용어가 아니며 이 역시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굳이 그들의 음악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하드록과 글램 록에 바탕을 둔 rock음악이라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워낙 글램 록이란 장르를 이야기함에 있어 티렉스와 데이비드 보위의 비중이 도저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커서 그렇지 글램 록 계열의 음악을 했던 팀들 중 퀸의 비중은 마냥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프레디 머큐리의 퍼포먼스를 보면 그들을 왜 글램 록 밴드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따위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워낙 그들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Bohemian Rhapsody"의 그늘이 강한 탓에 그런 비합리적인 담론이 판치는 것은 이해할 수도 있고 애교로 봐줄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 그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Bohemian Rhapsody"의 범주를 벗어나는 퀸의 곡들에 대해서 "그들이 음악적 배신을 했다"든지 혹은 "기존의 퀸의 음악과는 다른"이라는 설명을 붙이거나 그런 딱지를 붙이는 행위들일 것이다. 허나, 이 팀은 Bohemian Rhapsody를 하나의 prototype으로 놓고 다른 음악들을 평가해서는 정말 많은 것을 놓치기 쉽다는 점을 분명히 해둬야만 한다. 한참 후에 나오게 되는 이들의 앨범인 "Jaz"이라든지 "The works"같은 앨범은 흔히 당시 국내의 팝음악 전문가들에 의해 일종의 bias 정도로 취급당했는데 그런 류의 앨범들은 퀸의 음악에서 돌연변이나 변태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들의 과거 음악을 감안했을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음악이라는 점이다.
퀸이라는 팀에 대한 그런 무시무시한 편견을 가져오게 한 Bohemian Rhapsody이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는 앨범이 바로 이 "A night at the opera"다. 이 앨범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트랙이 바로 Bohemian Rhapsody인데, 사실 이 앨범은 오히려 You are my best friend와 Bohemian Rhapsody이두드러지게돌출된 곡에 가깝다.그 전에도 그랬듯, 이들의 곡들은 여전히 hard하고 글램 록의 범주에 묶어도 상관없는 곡들로 가득차 있다. 물론, 공화국의 아마추어 합창단들이 가장 좋아하는 넘버라 불리는 Seaside Randez vous와 같은 훌륭한 소품도 있지만, Sweet Lady와 같은 정말 하드한 곡들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서양의 거의 모든 팝저널들은 이 앨범을 반드시 들어보고 저 세상에 가야할 앨범 중 하나로 꼽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물론 그런 생각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에 주저함이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이 앨범에 이전까지의 퀸의 음악들을 집대성한드샇ㄴ 그런 스케일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보통 기타리스트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자신만의 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좋은 기타리스트는 그 것이 전제되어야 한단다. 물론내 생각은 좀 다르다. 좋은 기타리스트라면 오히려 여러가지 톤을 구사할 수 잇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브라이언 메이는 그 톤의 독특함에 있어서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따라가기 힘들 것이다. 물론 프레디의 보컬에 대해선 두 말 하게 되면 입에 쥐가 날 것이라 더 마랗지 않는 것이 낫다고 보고... 중요한 것은 로저 테일러의 드럼인데, 아마 Rock band의 드러머들 중 에머슨, 레이크 & 파머의 칼 파머를 제외한다면 로저 테일러의 드럼 세트가 가장 화려할 것이다. 그처럼 많은 하이햇을 쓰는 사람도 드물고 그처럼 많은 수의 탐탐을 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마음에 드는 것은 그는 절대로 더블 베이스 드럼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물론 이 것은 개인적 취향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더블 베이스 드럼을 이용해서 비트 수를 늘리는 데에 대한 음악적 불신이 있다.) 존 디콘 역시 베이시스트 중 뛰어난 피킹을 하는 거승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그들에게 오페레틱 록이니 하는 굴레를 씌우는 것이 불공정하다면 좀 오버일 수는 있지만 전혀 무시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어지간하면 앨범 전체를 들어보시길...
133. Death on two legs, I'm in love with my car, Sweet lady-(Queen, 1975)-
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팀에 대해 가장 잘못된 선입견은 지금의 40대 후반 이상의 세대들에게 "퀸이 어떤 음악을 한 팀인가?"라는 질문을하면 곧장 튀어나오게 된다. 그들 중 상당수는 퀸의 음악을 "Operatic rock"이라 말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것은 절대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용어가 아니며 이 역시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굳이 그들의 음악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하드록과 글램 록에 바탕을 둔 rock음악이라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워낙 글램 록이란 장르를 이야기함에 있어 티렉스와 데이비드 보위의 비중이 도저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커서 그렇지 글램 록 계열의 음악을 했던 팀들 중 퀸의 비중은 마냥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프레디 머큐리의 퍼포먼스를 보면 그들을 왜 글램 록 밴드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따위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워낙 그들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Bohemian Rhapsody"의 그늘이 강한 탓에 그런 비합리적인 담론이 판치는 것은 이해할 수도 있고 애교로 봐줄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 그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Bohemian Rhapsody"의 범주를 벗어나는 퀸의 곡들에 대해서 "그들이 음악적 배신을 했다"든지 혹은 "기존의 퀸의 음악과는 다른"이라는 설명을 붙이거나 그런 딱지를 붙이는 행위들일 것이다. 허나, 이 팀은 Bohemian Rhapsody를 하나의 prototype으로 놓고 다른 음악들을 평가해서는 정말 많은 것을 놓치기 쉽다는 점을 분명히 해둬야만 한다. 한참 후에 나오게 되는 이들의 앨범인 "Jaz"이라든지 "The works"같은 앨범은 흔히 당시 국내의 팝음악 전문가들에 의해 일종의 bias 정도로 취급당했는데 그런 류의 앨범들은 퀸의 음악에서 돌연변이나 변태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들의 과거 음악을 감안했을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음악이라는 점이다.
퀸이라는 팀에 대한 그런 무시무시한 편견을 가져오게 한 Bohemian Rhapsody이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는 앨범이 바로 이 "A night at the opera"다. 이 앨범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트랙이 바로 Bohemian Rhapsody인데, 사실 이 앨범은 오히려 You are my best friend와 Bohemian Rhapsody이두드러지게돌출된 곡에 가깝다.그 전에도 그랬듯, 이들의 곡들은 여전히 hard하고 글램 록의 범주에 묶어도 상관없는 곡들로 가득차 있다. 물론, 공화국의 아마추어 합창단들이 가장 좋아하는 넘버라 불리는 Seaside Randez vous와 같은 훌륭한 소품도 있지만, Sweet Lady와 같은 정말 하드한 곡들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서양의 거의 모든 팝저널들은 이 앨범을 반드시 들어보고 저 세상에 가야할 앨범 중 하나로 꼽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물론 그런 생각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에 주저함이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이 앨범에 이전까지의 퀸의 음악들을 집대성한드샇ㄴ 그런 스케일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보통 기타리스트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자신만의 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좋은 기타리스트는 그 것이 전제되어야 한단다. 물론내 생각은 좀 다르다. 좋은 기타리스트라면 오히려 여러가지 톤을 구사할 수 잇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브라이언 메이는 그 톤의 독특함에 있어서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따라가기 힘들 것이다. 물론 프레디의 보컬에 대해선 두 말 하게 되면 입에 쥐가 날 것이라 더 마랗지 않는 것이 낫다고 보고... 중요한 것은 로저 테일러의 드럼인데, 아마 Rock band의 드러머들 중 에머슨, 레이크 & 파머의 칼 파머를 제외한다면 로저 테일러의 드럼 세트가 가장 화려할 것이다. 그처럼 많은 하이햇을 쓰는 사람도 드물고 그처럼 많은 수의 탐탐을 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마음에 드는 것은 그는 절대로 더블 베이스 드럼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물론 이 것은 개인적 취향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더블 베이스 드럼을 이용해서 비트 수를 늘리는 데에 대한 음악적 불신이 있다.) 존 디콘 역시 베이시스트 중 뛰어난 피킹을 하는 거승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그들에게 오페레틱 록이니 하는 굴레를 씌우는 것이 불공정하다면 좀 오버일 수는 있지만 전혀 무시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어지간하면 앨범 전체를 들어보시길...
2012년 5월 7일 월요일
왜 역사가 자꾸 반복되고 지랄인거냐?
기억조차 까마닥흔 중딩시절, 우리 동네엔 대단히 다양한 메뉴를 구비하고 있었고 우동 종류가 특히나 맛있었던 분식집이 있었다. 지금은 모 병원의 산부인과 의사 선생인 동시에 국내 최고의 대학이라는 모 대학 의대의 교수가 된 친구 녀석과 한참 탁구에 미쳐 돌아다니던 가슴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대체적으로 그 녀석이 나보다 탁구를 더 잘쳤기 때문이다. 그 어느 날, 바로 그 분식집에서 탁구를 진 사람이 냄비우동을 사기로 하고 내기 탁구를 친 적이 있었더랬다. 3:1로 패배... 그러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내가 땡깡을 부리고 탁구는 계속 되었고 결국 네시간이나 탁구를 치다가 (당시 세트 스코어를 따지면 대략 3:1의 페이스로 내가 뒤지고 있었을 것이다. 네 시간 동안 몇 세트를 쳤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고...) 마지막 한 세트를 이기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하기로 하고 탁구장을 나서기로 했다. 정말 운 좋게도 내가 이겼고 탁구비는 같이 냈지만 난 돈을 들이지 않고 나름 근처 최고의 맛이었던 냄비우동을 처묵처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난 그 탁구 게임을 "내가 이기는 시점까지 하고 그 때 이긴 사람이 최후 승자가 되는 것"으로 할 생각이었다. 이 이야기인 즛, 어차피 난 땡깡을 써서 그 날의 탁구 경기를 끝내려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놈은 그런 내 마음 속의 생각을 알 턱이 없다.
답은 간단하다. 이석기와 김재연이 사퇴하고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의석을 잃더라도 최소한 환골탈태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이면 된다. 물론 그 정도로는 진보의 외연의 확대라는 목표는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진보의 외연의 확대라는 통합진보당이 가지고 있던 목표는 사건이 터졌을 때부터 불가능해진 목표였다. 하지만, 주사위들을 제외한 통합진보당의 다른 당원들은 설득할 수 잇을 것이고 극적으로 정파가 뭔지도 모르고 통합진보당에 입당하거나 그들을 지지한 뉴비들은 조금이나마 돌려세울 수 잇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과거부터 주사위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나름 극적인 "만화적 해피엔딩"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주사위들은 항상 "이길 때까지 한 번 더!"를 언제 어디서나 전후맥락과 아무 상관없이 외치던 사람들이다. 애초에 룰은 그들이 만든 것이었다. 아무리 양보해서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의중이 가장 많이 반영된 것이 경선에 들어가기 전에 만든 룰이었다. 그러나, 그 룰을 어긴 것도 그들 자신이다. 그리고는 룰을 안지킨 것이 너희들이라 하니 믿을 수 없단다. 그리고 이젠 또 다른 룰을 제시한다.
그래! 바로 그 것이다. 그들은 1985년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스포츠 머리를 하고 다니던 중딩 시절에 나보다 탁구 실력이 객관적으로 우위에 있던 친구 녀석과 탁구 게임을 했을 때 내가 했던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어... 하다 결국 내게 냄비우동을 사고야 말았던 한 때 가장 친했던 내 친구녀석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사고체계 하에서 "그런 식의 지 꼴리는 대로의 승부"라는 것은 존재할 리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두 가지의 길이 가능하다. 하나는 "내 친구처럼 어리바리하게 결국 당"하거나 "이 색히들 버릇을 고쳐놔야지"라고 그들에게 날선 대응을 하거나... 그러나, 여기서 1985년 그 날의 나와 지금의 사태는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질 수 있다. "결국 내가 이기는 것"외에 다른 선택지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제 심지어 자기 하나를 위해 총당원 투표를 하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쿼바디스 도미네... 니미 어디로 가잔 말이냐? 어차피 주사위들은 어디로 갈 것인지 따위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자신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만큼의 당내에서의 지분을 잃지 않는 것! 그 것을 위해서라면 이리로 저리로 어디든지 끌고 다닐 각오는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언제 끊어질 것이냐고? 이미 20년 이상 주사위들을 겪어본 나같은 사람들이나 2000년 이후라도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대립각을 세워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자식들은 애초 그런 놈들이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외에 딱히 깔쌈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내가 2000년 민주노동당 입당원서를 쓰던 시점에 원서를 가져왔던 그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주사위들은 절대 끌어들이지 말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던 것은 선배의 충고나 좀 더 산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경험칙에 의한 권고사항 따위가 아니라 그저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내가 궁극적으로 하게 될 것은 걔들은 애초부터 그런 놈들인데 뭐..."라는 냉소돋는 넋두리를 하게 될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지금 내가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주변에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기존의 정당들에겐 별 희망이 보이지 않고 진보를 이야기하는 정당은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지고 통합진보당에 입당한 "뉴비"들 때문이다. 가장 큰 상처를 입을 사람들은 그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들 같은 "나름 선수"들이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다독일 수 잇는 선의 어떤 것일 것이다.
실망하지 말자느니, 그래도 희망은 있다느니, 언젠간 주사위들도 바뀔 것이라느니 하는 따위의 하나마나한 이야기들은 그냥 닥치고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런 것이야 말로 <모여라 꿈동산>식의 결말 아니던가? 다만 진보정당이라는 것의 Representation이 가지는 상투성을 무엇을 통해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은 가장 큰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이니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어렵더라도 지금 통합진보당 내에서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지 이석기와 김재연을 솎아내는 방식으로 해결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만지감으로 한 가지 이야기하자. 솔직한 내 심정? 그래... 솔직한 내 심정은 노심조가 진보신당을 나갈 때 심정적으로도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았던 내 자신이 얼마나 대견스러운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만일 법적으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라도 통합진보당에 소속감이 잇었다면 겼고 있을지 모르는 악몽을 벗어날 수 있는 것만으로 세상은 가끔은 내게 우호적인 것 같기도 하지 않은가? 빌어먹을...
* 이 포스트는 팀블로그인 스케줄의 가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팀블로그엔 구리좌사 한계인간과 행구교주 노토리의 주옥같은 글들도 함께 있습니다. 물론 많지는 않습니다.
답은 간단하다. 이석기와 김재연이 사퇴하고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의석을 잃더라도 최소한 환골탈태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이면 된다. 물론 그 정도로는 진보의 외연의 확대라는 목표는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진보의 외연의 확대라는 통합진보당이 가지고 있던 목표는 사건이 터졌을 때부터 불가능해진 목표였다. 하지만, 주사위들을 제외한 통합진보당의 다른 당원들은 설득할 수 잇을 것이고 극적으로 정파가 뭔지도 모르고 통합진보당에 입당하거나 그들을 지지한 뉴비들은 조금이나마 돌려세울 수 잇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과거부터 주사위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나름 극적인 "만화적 해피엔딩"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주사위들은 항상 "이길 때까지 한 번 더!"를 언제 어디서나 전후맥락과 아무 상관없이 외치던 사람들이다. 애초에 룰은 그들이 만든 것이었다. 아무리 양보해서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의중이 가장 많이 반영된 것이 경선에 들어가기 전에 만든 룰이었다. 그러나, 그 룰을 어긴 것도 그들 자신이다. 그리고는 룰을 안지킨 것이 너희들이라 하니 믿을 수 없단다. 그리고 이젠 또 다른 룰을 제시한다.
그래! 바로 그 것이다. 그들은 1985년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스포츠 머리를 하고 다니던 중딩 시절에 나보다 탁구 실력이 객관적으로 우위에 있던 친구 녀석과 탁구 게임을 했을 때 내가 했던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어... 하다 결국 내게 냄비우동을 사고야 말았던 한 때 가장 친했던 내 친구녀석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사고체계 하에서 "그런 식의 지 꼴리는 대로의 승부"라는 것은 존재할 리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두 가지의 길이 가능하다. 하나는 "내 친구처럼 어리바리하게 결국 당"하거나 "이 색히들 버릇을 고쳐놔야지"라고 그들에게 날선 대응을 하거나... 그러나, 여기서 1985년 그 날의 나와 지금의 사태는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질 수 있다. "결국 내가 이기는 것"외에 다른 선택지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제 심지어 자기 하나를 위해 총당원 투표를 하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쿼바디스 도미네... 니미 어디로 가잔 말이냐? 어차피 주사위들은 어디로 갈 것인지 따위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자신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만큼의 당내에서의 지분을 잃지 않는 것! 그 것을 위해서라면 이리로 저리로 어디든지 끌고 다닐 각오는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언제 끊어질 것이냐고? 이미 20년 이상 주사위들을 겪어본 나같은 사람들이나 2000년 이후라도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대립각을 세워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자식들은 애초 그런 놈들이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외에 딱히 깔쌈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내가 2000년 민주노동당 입당원서를 쓰던 시점에 원서를 가져왔던 그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주사위들은 절대 끌어들이지 말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던 것은 선배의 충고나 좀 더 산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경험칙에 의한 권고사항 따위가 아니라 그저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내가 궁극적으로 하게 될 것은 걔들은 애초부터 그런 놈들인데 뭐..."라는 냉소돋는 넋두리를 하게 될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지금 내가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주변에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기존의 정당들에겐 별 희망이 보이지 않고 진보를 이야기하는 정당은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지고 통합진보당에 입당한 "뉴비"들 때문이다. 가장 큰 상처를 입을 사람들은 그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들 같은 "나름 선수"들이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다독일 수 잇는 선의 어떤 것일 것이다.
실망하지 말자느니, 그래도 희망은 있다느니, 언젠간 주사위들도 바뀔 것이라느니 하는 따위의 하나마나한 이야기들은 그냥 닥치고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런 것이야 말로 <모여라 꿈동산>식의 결말 아니던가? 다만 진보정당이라는 것의 Representation이 가지는 상투성을 무엇을 통해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은 가장 큰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이니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어렵더라도 지금 통합진보당 내에서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지 이석기와 김재연을 솎아내는 방식으로 해결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만지감으로 한 가지 이야기하자. 솔직한 내 심정? 그래... 솔직한 내 심정은 노심조가 진보신당을 나갈 때 심정적으로도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았던 내 자신이 얼마나 대견스러운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만일 법적으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라도 통합진보당에 소속감이 잇었다면 겼고 있을지 모르는 악몽을 벗어날 수 있는 것만으로 세상은 가끔은 내게 우호적인 것 같기도 하지 않은가? 빌어먹을...
* 이 포스트는 팀블로그인 스케줄의 가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팀블로그엔 구리좌사 한계인간과 행구교주 노토리의 주옥같은 글들도 함께 있습니다. 물론 많지는 않습니다.
2012년 4월 29일 일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2)
아님 말고 1000곡
132. Walk on the wild side-Lou Reed(1972)-
1972년 루 리드는 자신의 두번째 솔로 앨범인 Transformer을 발매한다. 그리고 이 앨범엔 바로 이 곡인 Walk on the wild side이 수록되어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그 곡이 그 앨범에 들어있지 않으면 할 일이 없어 그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까? 위키피디아나 MTV 사이트의 검색을 통해서 루 리드에 대한 내용을 보게 되면 그의 음악을 포괄할 수 있는 장르를 나열해도 무려 10가지 이상이 된다. 그 중에서 조금 생소한 장르라 생각될만한 것들을 이야기하자면, Noise Music, Drone Music, Protopunk, Spoken Word 정도? 나름 전문가라 할만한 사람들도 음악들 들려주면 "그게 그거야?"라는 말을 하게되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특히나 Spoken Word이라는 장르를 빌어 루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주류 음악의 평단에서 루의 음악을 "시적인 음악"이라는 것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이 Spoken Word이라는 이름의 장르에 대해 조금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기원을 굳이 이야기하자면 1920년대에서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당시 뉴욕의 할렘가를 중심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크나큰 파급력을 가진 시대의 조류가 되었는데 이를 "할렘 르네상스"라 한다. 이 때 문학과 음악에 걸친 융합적 장르의 Spoken word poetry라 하는 새로운 장르의 운문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이 스포큰 워드 포에트리에 1900년대 초반부터 미국 전체에 전해져 내려오던 블루스 음악의 전통이 더해진 것이 Spoken Word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장르다.
루 리드의 곡들을 세심히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많이들 느꼈겠지만, 루 리드의 곡들은 가사 자체가 시적 요소-힙합에서 이야기하는 라임이 아닌 문학적 의미에서의 라임-로 가득 채워진 곡들이지만, 레너드 코헨이나 그 외의 American modern folk 계열의 아티스트들과는 상당히 다른 음악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애매한 표현이 "정말 애매하"긴 하지만, 루 리드의 곡들은 대단히 멜로딕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비트가 대단히 강하다는 느낌을 주다가도 또 그렇지 않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전혀 대중적인 요소들은 없이 오로지 실험성을 강조한 음악을 하는가 싶다가도 어떤 곡들은 또 특별히 대중적으로 들리는 곡들도 있기도 하고...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음악의 "양가적 가치"를 뛰어넘는 "다츠층적 가치"를 추구하거나 혹은 실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다.
이 곡은 루 리드의 솔로 곡들 중에선 대중적으로 대단히 성공을 거둔 곡인 동시에 여러분들이 루 리드가 연주하는 Spoken Word이라는 장르가 어떤 특성을 가지는가에 대해 여러 긴 설명 필요없이 간단하게 깨달을 기회를 제공하는 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루 리드가 태어난 곳이 뉴욕의 부르클린이다. 지금이야 부르클린보다도 브롱스가 더 뉴욕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대표하는 지역이지만, 루 리드는 태어나면서부터 할렘 르네상스의 문화적 세례를 받을 기회를 가졌던 사람이고 그로 인해 어찌 본다면 스포큰 워드가 루 리드에겐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리라는 점을 부연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루 리드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대해선 나중에 더 설명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2012년 4월 9일 월요일
이건대박이다(Soundless Music)
Some Night-Fun(2012)-
어휘력이 이 것밖에 안되는 점 정말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이 앨범 대박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정말 대박이다. 2009년 Aim and Ignite로 정식 데뷔를 했을 때 이 팀이 이 정도의 팀이 될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은 아마 그 자신들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100% 그럴 것이다. 빌보드 차트는 분명 상업적 성공의 척도이긴 하지만, 그 것은 Hot100 싱글 차크나 빌보드 200 앨범 차트의 경우고 장르 차트의 경우는 모든 차트에서의 진입이 그 자체로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한다. 예컨데 흑인음악과 관련된 차트나 컨트리 & 웨스턴 차트에서 50위 안에 든다면 그 것은 나름 상업적으로 그다지 꿀리지 않는 성공이라 할 수 있으나 Rock 차트에서 50위권이라 하면 대단히 애매모호한 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팀도 그랬다. 데뷔 앨범인 Aim and Ignite은 앨범 차트에서 71위 Art 차트에서 20위 Rock 차트에서 23위 정도의 애매모호한 성적을 냈던 팀이다. 주료 Mainstream을 벗어난 음악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리뷰를 싣는 웹진인 Allmusic에서는 이 앨범을 일컬어 "Progressive but possible way"이라는 평을 했다. 물론 앨범을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실제로 이 팀의 음악에 대해 이처럼 간결한 평가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 팀의 데뷔 앨범은 전 곡을 다 듣지 못해 사적인 견해를 100% 밝힐 수는 없는 입장이다. 다만, 그들의 음악이 데뷔 앨범에서 그다지 크게 변한 것이 아니라면 "가능한 방법으로서의 프로그레시브한 음악"이라는 문제의식에 대해 동의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 본다.
이 팀이 요즘 주목받는 이유는 저스틴 비버가 첫 주에 무려 2위로 싱글 차트를 치고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1위를 지켰기 때문이고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이 팀의 We are young이 싱글차트의 정상에 올라갔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이 팀의 음악은 정말 "가능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팀은 스티브 하우나 트레버 레빈같은 현란한 기타리스트가 있는 것도, 릭 웨이크먼이나 키스 에머슨 같은 "천재적인 건반 연주자"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분명히 동시대의 Rock음악들에 비해 대단히 폭이 넓은 스탠스를 가지고 있는 음악을 들려준다. 팀의 구성이 화려하지 못한 나름의 단점을 대대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이나 비트의 보완으로 해결한다.
오케스트레이션이라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 팀이 만드는 비트의 방식은 주목할만하다. 탐탐이나 하이햇을 현란하게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흔히들 킥이라고도 하는 베이스 드럼을 대단히 현란하고 현명하게 사용한다. 분명히 정박의 드럼을 치고 있다고 생각할 때짬 미묘한 변화를 주는 식으로 자신들의 음악에 화려한 색을 입히는 것이다. 이는 킥의 강도의 미묘한 변화나 한 마디에 들어가는 킥의 횟수의 미묘한 변화 등으로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작업에 임하기 전 사전적으로 생각하기엔 쉽지 않은 방식"을 사용한다 할 것이다. 나중에 처죽기 전에 들어야할 1000곡에 들어가야할 수도 있을만한 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잉런 재기발라랗ㄴ 팀의 음악을 즐겨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2012년 4월 6일 금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1)
아님 말고 1000곡
131.Tapestry-Carole King(1971)-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The Beatles의 폴 매카트니가 필 스펙터와 Let it be의 작업을 마친 후 조지 마틴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는 마지막 앨범을 녹음할 것"이라는 말을 하며 Abbey Road의 작업에 들어가던 그 순간 팝음악은 하나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전환점에 서있던 것이다. 1970년은 그래서 중요한 해다. 실질적으로 비틀스는 그 해부터 자신들의 팀의 이름을 걸고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고 이른바 팝음악계에 새로운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잉른바 비틀스 키드라 불릴 수 있는 세대들이 팝신의 전면에 나설 토대가 마련되기도 했거니와 그간 비틀스에 눌려 2인자 그룹을 형성하던 아티스트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기기도 한 해가 바로 1970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님 말고...
흔히들 이야기하는 Rock음악의 르네상스 시대의 토대는 이렇게 열리게 되지만 그 르네상스라는 것은 단지 Rock음악이라는 장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어찌 본다면 American modern folk이라 불리는 장르는 위에서 이야기한 "틈새"라는 것을 가장 잘 비집고 들어가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는 작업에 가장 수월하게 성공한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문제는 American modern folk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가?라는 점이 되겠지만 애초에 포크라는 것은 특정한 음악적 형식이나 기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잉런 주장을 하면서 크게 죄책감을 느끼거나 할 필요는 없다고 자위해도 괜찮을 듯하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곡이야말로 미국의 모던 포크라는 장르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보여준 결과물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곡이기 때문에 적어도 캐롤 킹의 성공에 국한해서 이야기해도 이런 주장은 무리없이 통할 듯하다는 생각이다.
상업적인 측면만을 이야기하더라도 캐롤 킹의 Tapestry 앨범은 빌보드지가 창간되고 차트를 발표하기 시작한 후 차트를 가장 화려하게 달궜던 몇 안되는 앨범의 하나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1971년 1월에 A&M 스튜이오에서 작업해서(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1개월까지 걸렸던 작업은 아니었던 듯하다.) 1971년 2월 10일에 Ode라는 그다지 크지 않은 레이블에서 발매된, Lou Adler(아들러라는 이름에 흥분하시는 분들... 제발 좀 참아주시기 바란다. 이 아들러는 당신들이 아는 그 아들러가 아니다.) 빌보드 앨범 200 차트에서 무려 15주 연속 1위를 차지했으며 이 기록은 그 후로 만 40년을 조금 넘게 여성 솔로 아티스트의 앨범으로는 가장 오랜기간 차트의 정상에 머물렀던 앨범으로 기록된다. 이 기록을 깬 것은 여러분들의 예상과는 달리 마돈나도, 위트니 휴스턴도, 머라이어 캐리나 토니 브랙스턴도 아닌 아델에 의해 작년에 비로소 깨지게 된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비틀스의 팝음악에서의 공헌 중 하나로 Singer-Siongwriter의 시대를연 것을 꼽는다. 그건이론의 여지 없이 당연한 이야기지만,그 것을 공고하게 만든 대표적인 주자 중 한명이 바로 캐롤 킹이다. 1942년 2월 생으로 올해 만으로 70세가 된 캐롤 킹은 폴 매카트니와 동갑인 것은 물론이고 아직 만으로 19세도 되기 전인 1961년 1월에 "Will you love me tomorrow"로 데뷔했으니 비틀스 키드라기 보다는 비틀스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했던 아티스트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출생지가 미국의 뉴욕시라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그 것은 그야말로 새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캐롤 킹이 뉴욕시 출신이라는 것이 왜 중요하냐고? 뉴욕은 과거 대도시였던 시카고나 뉴올리언즈 그리고 서부의 도시들과는 달리 "그들을 대표하는 음악"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도시다. 물론 모던 포크라는 장르 자체에 대해 뉴욕이 대표성을 가진다고 할 수는 없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시 거주의 청년들의 삶이 하나의 음악적 주제로 부상하게 된 것과 뉴욕 그리고 모던 포크라는 장르의 확장 이런 요소들이 어느 정도는 유기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많은 이들이 이 앨범의 대표곡을 "It's too late"이라 생각하지만, 물론 말도 한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이 앨범의 대표곡은 이 Tapestry라는 것이 사적인 견해다. 가사의 문학성 혹은 상징성이나 캐롤의 보컬, 그리고 연주 등을 모두 고려햇을 때 이 앨범에서 단 한 곡을 들어야 한다면, 이 곡을 들어야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이 앨범을 사서 전체를 다 들어보시는 것이리라...정확하게 61년에 완성된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는 캐롤의 곡이지만 캐롤이 가장 먼저 세상에 발표한 "자신이 작곡한 곡"이니 혼돈이 없으시길...
2012년 4월 3일 화요일
집에 모든 것을 집중하라!(영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씀드릴 것이 있다. "첫사랑이 어쩌고"하는 류의 이야기라든지 "수지가 예쁘다"든지 하는 류의 이야기를 기대하신 분들이라면 잽싸게 이 블로그를 나가실 것을 권한다. 굳이 튀려고 해서도 아니고 내가 잘낫다는 이야기도 아니라 <건축학개론>을 이야기함에 있어 미숙하고 어려 오해로 떠나보낸 첫사랑과 다시 찾아온 첫사랑을 마주한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대단히 상투적일 뿐더러 아주 자랑스럽게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한 강명석의 글조차도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성장영와 어쩌고 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문장의 질이나 게시물의 완성도를 떠나 다른 측면에서 볼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나저나 강명석에겐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기 위해 제주도 고향집으로 내려와 사는 것"이 고전적인 여성상으로의 회귀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일까? 사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자신만 할 수 있는 이야기"로 포장하려면 그런 수고가 필요했을 수 있기도 하겠다. 이런 어설픈 패미니즘이라니...참고적으로 경향신문에 이용주 감독의 인터뷰가 실렸으니 그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미리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용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의 관계 혹은 사랑이라는 것이 집을 짓는 과정과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 이 영화는 그런 비유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고 집을 짓는다는 행위나 집 그 자체에 대해 굉장히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단순히 주인공들의 감정의 흐름이나 관계에 대한 비유로서가 아니라 이 영화에선 집이라는 것 자체가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풀어가는 열쇠인 동시에 건축학개론 자체가 하나의 집을 짓는 과정을 통해 영화의 주된 소재를 풀어나가기 때문이다.다른 많은 리뷰에서 했던 이야기들은생략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한다. 물론 다른 리뷰들이 제시했던 문제들에 대해선 마지막에 추신의 형식으로 이야기하려 한다.
우선 간단히 끝낼 수 있는 것들부터 이야기하도록 하자. 집이란 것은 승민과 서연의 사이를 이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둘은 집이 같은 동네라는 이유로 건축학개론의 과제를 같이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동네인 성북동의 한 빈 한옥을 그들만의 공간으로 만들게 된다. 그 공간에 대한 애착은 승민보다 서연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데, 서연은 좀 거차창하게 이야기하자면 경계인-누가 이 표현을 썼더라?-이며 한 때 유행하던 튜니티 시리즈의 제목을 빌어 말하자면 무숙자인 셈이다. 서연은 자신의 집이 필요했고 누군가에게 얹혀 사는 것이 아닌 반지하라도 좋으니 자신만의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만한 물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승민이 빈 집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주저할 때 서연은 승민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던 것이리 할 수 있다.(여기서 그렇게 쉽게 문을 열 수 있는 빈 집이 동네 아이들의 차지가 아닌 그들의 차지가 되는 것이 가지는 비현실성은 슬쩍 눈감아 주도록 하자.) 그 집을 둘이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관계는 같은 수업을 듣는 동기생의 수준을 벗어났음을 말해준다.
둘의사이가 가까워지며 서연이 승민에게 털어놓는 것도 결국 "자신의 집"이 없거나 "자신의 집이라 여길만한 그 어떤 것이 없음"에서 비롯되는 서연의 자의식들이다. 그렇게 집이라는 것이 가지는 현실적 그리고 상징적 의미에 대해 승민보다 일찍 눈을 뜨게 된 서연이 강남의 반지하 방에 기뻐하고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서울 명문대학교의 음악대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이러한 자의식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서연이 자신의 마음을 우회적으로 승민에게 털어놓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싶은 집"의 그림을 그리고 그런 집을 "네가 공짜로 지어달라"는 것으로 대신한다. 여기서 또 이렇게 생각하자.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집을 공짜로 지어달라"는 이야기를 못알아 듣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물론 그 정도 눈치가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비현실적이긴 하다. 그러나, 이 것은 영화 아닌가?
15년이 흐른 뒤 그들에게 집이란 것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확인하는 과정"이다. 집이란 것으로 인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그들의 과거의 관계에 대한 복기의 역할을 하는 것이 15년이 지난 2011년 서연의 집짓기인 것이다. 15년이란 시간만큼 그들의 관계는 매끄럽지 못하다. 그 것을 보여주는 것이 승민의 디자인에 대한 서연의 계속적인 거절을 통해 관객에게 제시하고 있는 "과거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의 차이" 혹은 "현재 시점에서 두 사람의 둘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다. 결국 서연은 애초 자신이 살던 집을 개축하는 것이 아닌 증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그에 동의하면서 비로소 승민 또한 과거 서연과의 관계에 대한 기억들을 복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보고 "두 사람이 옛날의 감정을 떠올리며 과연 그들의 첫사랑이 이루어질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이 영화를 읽어내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왜 그런지 이제부터 설명하고자 한다는 말씀!
주의깊게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애초 서연이 그린 그리고 그 것을 기초로 승민이 만들었던 집의 모형과 실제로 완성된 서연의 집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승민은 서연의 제주도 집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서연의 과거를 전혀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리고그 과정에서그 둘은 과거에 대해 조금씩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물롱 애초에 서연은 둘의 과거에 대해 진지한 자세로 승밍을 찾아왔을 것이다.그 둘이 알아낸 것은 그들의 현재의 상대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15년전그 둘의 감정이다. 관객들은 서연의 그림과 승민이 증축한 서귀포의 서연의 집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며 그들의 첫사랑이 결코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과거의 그들은 승민이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서연이 이야기한 집의 모형을 선물하려 했고 결국 그는 그 것을 버렸지만 서연은 그 것을 받았고 서연은 그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을 포터블 CD 플레이어를 사실은 승민이 받았다는 것과 그 사실을 마지막에 확인하는 것이다. 그 둘의 현재의 관계는 연인도 아니고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그들이 확인한 것은 그 둘의 과거의 첫사랑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신>
유독 강명석의 리뷰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이유는 강명석의 지적한 "전통적인 젠더의 문제"로 회귀한 것은 서연이라는 점에 대해 절대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병들어 시한부의 삶을 사는 아버지르 따라 고향에서 사는 것이 전통적인 여성상으로의 회귀라면 상대방 여성의 순결에 집착하고 상대방을 "쌍년"으로 만드는 승민은 젠더의 문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점에 대해선 주간경향의 허지웅의 리뷰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니 그의 리뷰를 찾아보시기 바란다.
2012년 3월 2일 금요일
1992-2012 벌써 20년? 아직 20년!(2)
1992년 대선을 치루고 그리고 그 후에도 1992년 대선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던 사람들은 NL 주사위들도 그리고 흔히 이야기하는 범PD 계열도 사태를 대단히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결국 그 것이 패착이었던 것만은 분명한데 그러한 혐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문제는 그 것이다. 머릿속에서 얼마든지 작동할 줄로만 알았던 새로운 체계가 현실에서 실제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 지금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바로 그 점이다. NL 주사위들은 정권을 곧 교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PD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대중적 정당이 생긴다면 반자본주의적 논의를 공론의 장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금방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이두 가지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992년에 실패했으나 주사위들의 염원대로 1997년 정권교체는 성공했다. 물론 그 형태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이었던가에 대해선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장 대부분과 국회의 제 1당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집권이란 것이 얼마나 불완정한 동시에 불안정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라면 나름 이름있는 정치 평론가 혹은 시사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주구장창 이야기해댄 것이었으니 나까지 그에 뭔가를 보탤 이유는 없다고 본다. 중요한 문제는 과연 주사위들의 바람대로 정권교체를 통해 그들이 무엇인가를 얻었는가?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야할 것이다. 만일 임종석이나 이인영 오영식 우상호 등이 원내에 진출했다는 것을 성공이라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분명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전대협의 초창기 간부들인 그들이 원내에 진출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본다면 1992년 대통령 선거부터 김대중이 알아주건 그렇지 않건 간에 오매불망 김대중을 바라봤던 주사위들에겐 나름의 떡고물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앗! 그러고 보니 오영식은 한 번도 국회의원이 된 적이 없군... 그러나 그들이 국회에 진출한 것으로 인해 김대중 혹은 그 후의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서 주사위들의 영향력이 유의할 수준으로 행사되었는가?랄 되짚어본다면 과연 긍정적인 답을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해선 끝까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임종석이나 우상호나 이인영 등은 민주당으로 떠다는 순간 그냥 주사위들과는 빠이빠이를 한 상태였다 할 것이다. 그들의 전대협 경력은 그저 경령에 불과했고 그들은 의뢰라는 공간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나 그 외 자신들이 전대협 시절에 했던 이야기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 주사위가 아님을 이야기하기 바빴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주사위가 아닌 과거 운동권들이 최소한 원론적으로 원했던 것은 반자본주의 선전의 공론화였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 것을 통해 그들이 굳건히 믿어왔던 "국가독점 자본주의"론에 대해 철저히 깨져야 했음이 옳은 일이었다.(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피노체트 정권을 지원한 미국에 대해 비판을 했으나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이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의 시작이었음에 대해선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졌던 점에 대해 "그 것은 사회주의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무지하게 하고 싶었겠지만, 레이건이, 대처가 노동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일삼으며 자국에 완성시키려했던 신자유주의가 현실 사회주의(이택광의 표현을 빌자면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에 대단히 큰 역할을 했음을 비판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이론적으론 "국가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을 정도로 시장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전세계를 호령할 동안 공화국의 좌파들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채택할 경우 많은 문제들이 명확하고 쉽게 풀린다.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이 바로 반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이고 좌파의 대단히 중요한 과제인 국제주의 과제도 대단히 명확하게 풀릴수 있다. 하지만, 1992년 이후남한사회는 단순히 신식민지의 자국의 지위를 떠나 국제적 노동착취국가의반열에 서게 되었고, 레닌이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의 단계라 생각했던 것처럼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세계화라는 양상을 띄며 자본의 경계 자체를 허물어버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별대란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적어도 국내에서는 말이다.)
국가가 자본을 독점해서 노동계급을 착취한다는 생각에 대한 수정이 필요했다. 실제로 신자본주의는 "국가라는 것이 사실상 필요없는 것일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표면적인 주장과는 달리 신자유주의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명제를 확인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국가권력을 이용해왔다. 하지만, 그 것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이론과는 다른 양상이었으며 더 결정적으로는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특정 모델을 가지고 그 모델에 맞춰 국가나 자본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대전제만을 설정해 놓은 상태로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맞춰 노동계급의 탄압에 최우선적인 정책적인 가치를 둔다거나 자유무역을 통한 제 3세계의 강제적 편입 등 그들의 전제에 다른 모든 것을 맞춰나가는 식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했던 것이다. 빌어먹을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2012년 2월 29일 수요일
스케줄에 대한 짧은 이야기 하나
명랑사회를 논함에 있어 스케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함은 말할 필오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팀블로그의 제목이 말하듯 스케줄에 대한 탁월한
이해 수준을 우리의 행구교주나 구리좌사가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의심의 여지가 0.00000001g도 남아있지 않을 테지만, 이 팀블로그가 현재
공개로 되어있는 까닭에 이에 대해 한 번 정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생각되는 바,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스케줄의 어원
스케줄이란 단어를 쓰게된 것은 어언 16년 전인 1996년의 일이다. 일정거사 과도하게 일찍 등교하여 1교시 순업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레닌 선생의 호출이 있었다. 레닌 선생이 생존해 계시지 않은 관계로 레닌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일정거사의 꿈을 통하여 선생의 가르침을 현시하시고 긴 뒷머리를 날리시며 사라지셨고 일정거사는 그에 과도하게 감동하여 눈물과 함께 타액까지 흘리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레닌 선생의 현시하신 진리를 얻는데는 굉장한 비용이 필오했으니 그 것은 1교시 수업의 결석이었다는 설이 있다. 대부분 범인들은 지각이나 결석을 게으름의 산물로 여긴다. 그러나, 그 것은 범인의 이야기이고 때로는 과도한 부지런함이 지각이나 결석의 원인이 된다는 점을 일정거사는 그 사건을 계기로 깨달았다 한다. 심지어 일설에 의하면 레닌 선생의 가르침이 바로 그 것이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한가지 생각할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왜 사회적 통념, 혹은 도덕률과도 같이 여겨지던 "게으름이 지각이나 결석의 원인이다."라는 것이 현실을 100%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가? 만일 일정거사가 그 날 레닌 선생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레닌 선생의 호출을 거부했다면 일정거사는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 사건이 있은 후 무려 일주일간 일정거사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위해 식음에 전념하며 고민했다 한다. 무려 일주일을 식음에 전념하며 고민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그 날의 수업은 어차피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일정거사의 일생에서 1996년 늦가을의 그 어느 날 아침의 1교시 수업은 애초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일정거사는 그 날의 수업이 그 자신에게 없었다는 것을 미리 예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의 일생 전체에서 그 날의 1교시 수업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각이라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스케줄은 이 시점에 일정거사의 머리에 들어오기 시자갛ㄴ 것이다. 자신의 운명은 밤손님과도 같이 소리소문 없이 대가와 일생의 중요한 순간에 극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그 것을 거스를 수 없다. 평소에도 당연히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이지만 그 누구도 그 중요성은 커녕 존재도 깨닫지 몫하다가 그 어느 순간에 존재의 위대함을 개인에게 알려주는 바로 그 것! 그 것을 일정거사는 스케줄이라 부리그로 했다. 스혹자는 이 걳이 주역을 바탕으로 한 팔자와 다른 점이 도대체 무엇인가?라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팔자는 인간의 운명이 여덟가지의 요인에 의해 정해진다고 보는 반면에 스케줄은 항상 지 꼴리는 바 그대로의 경로를 통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케줄은 운명과는 도대체 무슨 차이점을 가지는가? 라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케줄은 존재 자체가 어마어마한 무게감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운명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운명은 문학이나 예술의 소재가 될만한 극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반면 스케줄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운명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1. 스케줄의 어원
스케줄이란 단어를 쓰게된 것은 어언 16년 전인 1996년의 일이다. 일정거사 과도하게 일찍 등교하여 1교시 순업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레닌 선생의 호출이 있었다. 레닌 선생이 생존해 계시지 않은 관계로 레닌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일정거사의 꿈을 통하여 선생의 가르침을 현시하시고 긴 뒷머리를 날리시며 사라지셨고 일정거사는 그에 과도하게 감동하여 눈물과 함께 타액까지 흘리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레닌 선생의 현시하신 진리를 얻는데는 굉장한 비용이 필오했으니 그 것은 1교시 수업의 결석이었다는 설이 있다. 대부분 범인들은 지각이나 결석을 게으름의 산물로 여긴다. 그러나, 그 것은 범인의 이야기이고 때로는 과도한 부지런함이 지각이나 결석의 원인이 된다는 점을 일정거사는 그 사건을 계기로 깨달았다 한다. 심지어 일설에 의하면 레닌 선생의 가르침이 바로 그 것이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한가지 생각할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왜 사회적 통념, 혹은 도덕률과도 같이 여겨지던 "게으름이 지각이나 결석의 원인이다."라는 것이 현실을 100%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가? 만일 일정거사가 그 날 레닌 선생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레닌 선생의 호출을 거부했다면 일정거사는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 사건이 있은 후 무려 일주일간 일정거사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위해 식음에 전념하며 고민했다 한다. 무려 일주일을 식음에 전념하며 고민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그 날의 수업은 어차피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일정거사의 일생에서 1996년 늦가을의 그 어느 날 아침의 1교시 수업은 애초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일정거사는 그 날의 수업이 그 자신에게 없었다는 것을 미리 예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의 일생 전체에서 그 날의 1교시 수업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각이라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스케줄은 이 시점에 일정거사의 머리에 들어오기 시자갛ㄴ 것이다. 자신의 운명은 밤손님과도 같이 소리소문 없이 대가와 일생의 중요한 순간에 극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그 것을 거스를 수 없다. 평소에도 당연히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이지만 그 누구도 그 중요성은 커녕 존재도 깨닫지 몫하다가 그 어느 순간에 존재의 위대함을 개인에게 알려주는 바로 그 것! 그 것을 일정거사는 스케줄이라 부리그로 했다. 스혹자는 이 걳이 주역을 바탕으로 한 팔자와 다른 점이 도대체 무엇인가?라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팔자는 인간의 운명이 여덟가지의 요인에 의해 정해진다고 보는 반면에 스케줄은 항상 지 꼴리는 바 그대로의 경로를 통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케줄은 운명과는 도대체 무슨 차이점을 가지는가? 라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케줄은 존재 자체가 어마어마한 무게감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운명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운명은 문학이나 예술의 소재가 될만한 극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반면 스케줄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운명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2012년 2월 5일 일요일
1992-2012 벌써 20년? 아직 20년!
일생을 살면서 개인에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살았던 1992년같은 한 해를 경험하기란 귀운 일이 아닐 것이라 장담한다. 데이비드 하비는 "초보적인 수준의 논쟁조차 벌일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은 운동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어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자본주의와 그 적들"-돌베게- p.152) 사실이 그렇다. 정말 초보적인 수준의 논쟁조차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게다가 그 사람이 자타가 공인하는 운동가 혹은 활동가라면-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의 일이 아니라 짜증을 유발하는 일이다. 하지만 1992년엔 절대다수인 그들과 멘땅에 헤딩을 하듯 하면서 1년의 2/3을 허비했다. 87년 세대를 사람들에겐 자랑스러운 기억이라도 있지만 나같은 사람에게 1992년이란 그저 내가 얼마나 "절대적 소수"인가를 스스로 깨닫는 과정외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목표는 거창했다. 오세철 교수의 총선 당선, 진보정당 창당을 위한 민중회의의 출범과활동의 가시화, 백기완 후보의 100만표 득표, 이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엔오세철 교수의 국회의원 당선외에 나머지는 모두 가능한 목표라 생각했다. 결과야 다들 알고 계실테니 굳이 반복해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당시 경험을 토대로 20년이 지난 오늘날의 이야기를 곁들여보도록 하자는 것이 내 이야기라는 말씀! 난 인간적으로 이른바 "운동가 혹은 활동가"라 불리는 사람이 범민주 단일후보(난 이를 범만주 단일후보라 했다)론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를 분열주의자 혹은 종파주의자로 몰아붙이기 시작하는 것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1992년이 시작되자마자 남민전에선 "당선가능한 후보에 대한 애국시민과 청년학생의 지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주사위들은 그에 충실할 것이라는 것 정도는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독자정당이라든지 독자후보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매도할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동을 이야기하고, 스스로 활동가라 이야기하면서 별다른 고민도 없이-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보수정당의 후보를 암묵적으로(심지어는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이란 말인가?(김어준같은 사람들에겐 이런 것 정도는 문제거리도 되지 않겠지만...) 보수들이 절대다수를 선점하고 있는 정치판에서 선거라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해야 할 것인가?라든지 선거라는 계기를 이용해서 노동계급이 어떻게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동력을 얻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라는 점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로선 "또 민자당이 집권하게되면 다 너희들이 책임져야할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어이없는 공격을 받았을 땐 그냥 확 한번 성질 제대로 부리고 남은 인생을 국가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하며 보내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92년도엔 주사위 후배 하나를 곤죽이 되도록 패버려서 학교를 꽤 오랜 기간 멀리한 적도 있었다.
92년 백기완 후보의 득표수는 27만표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에 백기완 후보가 대선을 완주하지 않았더라면 2004년에 민주노동당이 총 10석을 확보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자부한다. 92년 이후 민주노동당이 정식으로 창당을 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8년이었는데, 92년과 비슷한 형태의 독자후보 선거대책본부 형식으로 97년 대선을 치룬 후 비로소 정당이 탄생하게 되기까지도 엄처청난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꼭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2008년 선거에선 2004년의 결과보다는 상당히 "후진" 결과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또 정치의 해가 오고야 말았다. 92년처럼 두 선거가 동시에 행해지는 해로...4월 총선, 12월 대선 공교롭게도 정말 정확하게 20년 만이다.
1992년에 어렴풋이 생각했던 2012년은 이런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때 뭔가를 구체적으로 생가갛진 않았으나 최소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좌파정당돠 유의미한 득표수를 기록하는 독자후보 정도는 상식적으로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지금 현실은 어떠냐고? 늬들도 눈이 있으면 처보면 알 것 아닌가? 또 빌어먹게 옛날 이야기가 길어졌다. 하나의 상징적인 예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애증의 박용진씨가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민주통합당으로 갔고 그는 그 곳에서 당대표 및 최고윈원 경선에 출마했다. 그의 득표율은 대략 2.67% 1인 2표제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루미 많이 봐줘야 그가 첫번째 선택이었던 투표자는 기껏해야 2*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진보진영을 대표하여 야권 대통합에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던 것이다.
(하나에 다 쓰려 했더니 엄청 길어져서 나눠야겠다는... 바로 다음 게시물에 이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목표는 거창했다. 오세철 교수의 총선 당선, 진보정당 창당을 위한 민중회의의 출범과활동의 가시화, 백기완 후보의 100만표 득표, 이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엔오세철 교수의 국회의원 당선외에 나머지는 모두 가능한 목표라 생각했다. 결과야 다들 알고 계실테니 굳이 반복해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당시 경험을 토대로 20년이 지난 오늘날의 이야기를 곁들여보도록 하자는 것이 내 이야기라는 말씀! 난 인간적으로 이른바 "운동가 혹은 활동가"라 불리는 사람이 범민주 단일후보(난 이를 범만주 단일후보라 했다)론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를 분열주의자 혹은 종파주의자로 몰아붙이기 시작하는 것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1992년이 시작되자마자 남민전에선 "당선가능한 후보에 대한 애국시민과 청년학생의 지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주사위들은 그에 충실할 것이라는 것 정도는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독자정당이라든지 독자후보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매도할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동을 이야기하고, 스스로 활동가라 이야기하면서 별다른 고민도 없이-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보수정당의 후보를 암묵적으로(심지어는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이란 말인가?(김어준같은 사람들에겐 이런 것 정도는 문제거리도 되지 않겠지만...) 보수들이 절대다수를 선점하고 있는 정치판에서 선거라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해야 할 것인가?라든지 선거라는 계기를 이용해서 노동계급이 어떻게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동력을 얻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라는 점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로선 "또 민자당이 집권하게되면 다 너희들이 책임져야할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어이없는 공격을 받았을 땐 그냥 확 한번 성질 제대로 부리고 남은 인생을 국가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하며 보내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92년도엔 주사위 후배 하나를 곤죽이 되도록 패버려서 학교를 꽤 오랜 기간 멀리한 적도 있었다.
92년 백기완 후보의 득표수는 27만표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에 백기완 후보가 대선을 완주하지 않았더라면 2004년에 민주노동당이 총 10석을 확보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자부한다. 92년 이후 민주노동당이 정식으로 창당을 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8년이었는데, 92년과 비슷한 형태의 독자후보 선거대책본부 형식으로 97년 대선을 치룬 후 비로소 정당이 탄생하게 되기까지도 엄처청난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꼭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2008년 선거에선 2004년의 결과보다는 상당히 "후진" 결과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또 정치의 해가 오고야 말았다. 92년처럼 두 선거가 동시에 행해지는 해로...4월 총선, 12월 대선 공교롭게도 정말 정확하게 20년 만이다.
1992년에 어렴풋이 생각했던 2012년은 이런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때 뭔가를 구체적으로 생가갛진 않았으나 최소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좌파정당돠 유의미한 득표수를 기록하는 독자후보 정도는 상식적으로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지금 현실은 어떠냐고? 늬들도 눈이 있으면 처보면 알 것 아닌가? 또 빌어먹게 옛날 이야기가 길어졌다. 하나의 상징적인 예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애증의 박용진씨가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민주통합당으로 갔고 그는 그 곳에서 당대표 및 최고윈원 경선에 출마했다. 그의 득표율은 대략 2.67% 1인 2표제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루미 많이 봐줘야 그가 첫번째 선택이었던 투표자는 기껏해야 2*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진보진영을 대표하여 야권 대통합에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던 것이다.
(하나에 다 쓰려 했더니 엄청 길어져서 나눠야겠다는... 바로 다음 게시물에 이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2012년 1월 30일 월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0)
아님 말고 1000곡
130. 그들의 최고의 시퀀스
이 제목의 게시물을 주루룩 올리면서 이렇게 간단하게 끝내게 될 게시물은 처음일 것이다.
지금 이런저런 이유로 게시물들이 늦어지고 있는데 복잡한 사정은 여러분들이 아실 필요는 절대 없으니 그냥 넘어가 주시기 바라고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자.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인류가 음반이라는 매체를 통해 음악을 듣게 시작한 후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음반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초창기의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누적 판매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최소한 2000만장 이상이 팔렸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라 하니 얼마나 대단한 성공을 거둔 음반인지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앨범일 것이다.
빌보드 차트는 싱글은 100위까지 집계하고 앨범은 200위까지 집계하는데이 음반은 200앨범 차트에올라있던 기간이 over 700 consecutive weeks이라 한다.즉, 처음 차트에 올라온 이후 700주가 넘는 기간동안 200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게 되겠지만이 음반은 흔히들 핑크 플로이드의 3대 명반이라고 불린다는 사실 정도는 어느 정도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익히 아실 것이다.
이 앨범의 모든 곡들이 특별히 처지거나 하는 곡 없이 비교적 고른 음악적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히이 앨범 전체를다 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으나그 중에서도 반드시 들어야 하는 곡들이 있다면 커트 없이 이어지는 On the run에서 The great gig in the sky로 이어지는 시퀀스라고 여러분들께 권하고 싶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시퀀스를 통해 여러분들은 흔히들 "Progressive rock의 창시자"라는 찬사를 들으며 대중들이 열광하는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음반이 발매되기 전의 핑크 플로이드는 그들의 음악적 출발이 사이키델릭이라는 점을 큰 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상태였고 그에 더해 아방 가르드적인 요소들을 계속해서 시도하던 중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음반을 통해 흔히 속세에서 이야기하는 Progressive rock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완성하게 되는지를 알게 된다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란 말씀이다. 나중에 또 반드시 이야기하겠지만 개인적으로 progressive rock이라는 일음보다 progressive music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하는데 이 시퀀스를 들으신 후 눈치가 빠른 분들은 그 이야기도 무슨 의미인지 아시게 될 것이다.
이번엔 유투브의 링크를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늬들이 찾아 들어야하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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