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0일 일요일

그래도 우리는 음악을 포기할 수 없다.(Soundless Music)

3. 똘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앞에서 이야기했던 똘똘한 사람들은 어찌 보면 잉여들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밥도 되지 않는 일에 미친 듯한 재능을 보인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말씀이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 용어로 보자면 일종의 잉여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주 근사하게 이야기한다면 음악가인 동시에 예술가가 될 것이다. 물론 그 중에서는 장인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사람도 있을테지만 말이다. 일본에서 샤미센을 처음 만든 사람도 그런 부류일 것이고 아프리카의 그 수없이 많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진 타악기들을 만든 사람도 그런 부류에 속할 것이고 구전되어 오다 근세에 이르러 악보로 정리된 수많은 중세 이전의 곡들을 만들었던 사람들도 그런 부류에 속할 것이다. 아래를 한 번 보자.

이런 씽크빅 돋는 인물들 중 역사상 가장 먼저 이름이 튀어 나오는 인물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피타고라스 할아버지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가 음악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의 체계를 처음 세운 사람이었을 뿐이지 피타고라스 이전에 씽크빅 돋는 생활을 했던 사람들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건 뭐 한도 끝도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가까운 중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중국 음악의 공식적 기원을 기원전 6600년에서 7000년 사이로 보는 견해가 거의 학계의 공식적인 설로 인정받고 있다.  심지어 메소포타미아 지역 근처에선 기원전 1400년 경 일종의 악보를 표기한 증거가 출토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시면 아니된다. 지금까지 인간이 발견한 최고(最古)의 악기로 추정되는 Divje Babe Flute의 경우엔 그 연대가 무려 기원전 40000년으로 추정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씽크빅 돋는 행위들을 했던 똘똘한 형님들은 세계 도처에 계시다. 세계 도처라는 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인 "가장 발달한 형태의 음악이 발달한 곳은 서부유럽" 이라는 식의 어이없는 사고를 배격하기 위해서임은 두 말하면 숨소리가 되는 말씀 되시겠다. 세계 도처라는 것이 중요한 다른 이유는 "음악이라는 것을 하는 행위"가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게 되는 일종의 문화적인 욕구 혹은 예술적인 욕구이며 각 지역마다 음악이 조금씩 혹은 확연히 다른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은 해당 지역 혹은 그 지역 문화, 예술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해있던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기본적으로 음악이라는 형태를 빌어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모든 음악은 본질적으로 동질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세계 도처에 널려있는 씽크빅 돋는 행위를 한 형님들은 모조리 다 위대한 분들이라는 이야기다.



2013년 1월 17일 목요일

박명수가 아닌 방배동 살쾡이를 보는 두 개의 눈(Soundless Music)

두 개의 눈이 아니라 네 개의 눈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서로 다른 관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음이니 알아서들 이해하시기 바라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혹시 이 사실을 아는가 모르겠다. 소녀시대의 새 앨범이 정식으로 발매된 나라들 중 음원 차트에서 발매 첫 주에 1위를 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는 한국이다. 지금 지상에서건 지하에서건 박명수가 곡을 쓰고 정형돈이 부른 "강북 멋쟁이"에 대한 논란이 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소녀시대가 한국에서 음원 발매 첫 주에 1위를 했으면" 아무런 문젲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이야기에선 공화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포털 사이트들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인 "모 에이전트의 언론 플레이"에 대한 논의는 배제하고자 한다. 이 경우 이야기가 원치 않게 산으로 올라가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 이런 사람들은 줄창 이야기한다. "선택은 대중의 몫이며 대중은 우매하지 않다." 게다가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한 가지의 말을 덧붙인다. "박명수가 저작권과 인접권으로 생기는 수익을 사적인 치부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일에 쓰도록 기부한다는데 무슨 지랄이냐?" 그리고 또 한가지 결정적인 이야기를 한다. "거대 에이전트들로부터 대중이 선택권을 돌려 받아야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한다. "거대 음반 제작업자들 혹은 에이전트들이 아이돌들의 음악을 줄창 밀어대다보니 대중의 선택권이 위축된 상황에서 이런 시도는 충분히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한 커멘트는 뒤에 몰아서 하도록 하자.

문제가 된다.
연제협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이런 것들이다. "좋은 음악을 죽어라 하고 만들고도 발표학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는 창작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허접한 노래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방송국의 횡포다." 또 이런 것, "무도빨을 이용해서, 무도 도전의 시청자들은 충성도가 높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이런 것까지 시장에 내놓는 것은 시장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방송국의 횡포 아닌가?" "따라서 이 것은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에 존나 위배되는 일 아닌가?" "씨발 뭐 음악이 장난이냐?" "앞으로도 방송국이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이용해서 이런 짓을 한다면 저질 음악들이 판을 치게 될 것 아닌가? 이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런 등등의 이야기들...

내 얘기.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서로가 상대방을 "시장에서의 강자"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뭐 이런 종류의 문제에서 일반적으로 나오는 말들이긴 하지만 "당사자들 서로가 자신은 약자고 상대방은 강자"임을 내세워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가 정당함을 호소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근간은 바로 여기 있다. 그래서 과연 박명수의 곡들이 음악적으로 훌륭한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박명수의 곡이 음악적으로 어떠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흐릴 뿐 아니라 지금의 대결 국면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돌들의 음악은 다 쓰레기인데 뭐..."라 하실 분들은 그냥 평생 그 수준에서 생각하면서 그 수준으로 살라고 하면 된다. 어차피 내가 하는 이야기는 그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이니...

이 문제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여지껏 대중음악에 대해 대중의 선호를 조작하는 데에 의기투합하여 같이 잘 해처먹던 것들이 서로의 이해관계가 어긋나게 되어 생긴 분쟁" 미리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이로 인해 "씨발 넌 양비론이냐? 듣기 싫어! 양비론 따위"라 한다 하더라도,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분쟁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한 쪽은 흔히 이야기 해서 "한 쪽으로 편중된 음악을 자꾸 만들어내어 대중의 선호를 조작하던 집단"이고 또 다른 한 쪽은 "그런 음악을 계속해서 대중에게 노출해서 그들의 돈벌이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집단"이다. 그리고 가요시장에서 이 둘의 힘은 어느 쪽이 더 강한지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상태에서 서로 이해의 균형을 맞줘 온 사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반성을 하고 가야 한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평론가 집단은 가요시장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아무튼... 그렇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둘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요시작에서 대중들의 판단이 좋은 음악을 살아남게 하고 그렇지 않은 음악은 퇴출시킨다."라는 말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개뻥인지 말이다. 그리고 그 점을 이용해서 알아서 공존공생한 집단들 아닌가? 그들이 서로의 이해관계가 부합해서 여지껏 문제 없이 지내다 지금 문제가 커진 것은 하필이면 현재의 대중음악 제작 시스템의 상징적 존재인 "소녀시대의 신곡"이 음원차트에서 1위를 하지 못한 것 때문이다. 소녀시대를 박명수가 밀어냈다는 사실이 가지는 상징성은 대단하다.

앞으로도 이런 문제가 생기면 이들은 또 이런 식의 다툼을 벌이게 될 것이다. 서로가 "대중음악의 주인은 대중"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위의 정언 명제를 팔아 처먹으면서 말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지금 심정은 "이런 과정에서 진정한 피해자는 가요시장에서의 소비자인 대중"이라는 말도 별로 하고 싶지 않다. 항상 이야기해 왔듯 현재 가요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집단은 수요자인 대중들이라는 생각을 거두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자신의 이름이 함부로 팔리는 것에 대해 경멸의 눈초리 정도는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이런 일은 또 생길 것이며 그 때마다 분쟁의 당사자들은 "오류가 없는 위대한 대중"을 팔던가 "지상파를 장악한 이들에 의해 자신의 선택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 불쌍한 대중들"을 팔 것이기 때문이다.



2013년 1월 16일 수요일

그래도 우리는 음악은 포기할 수 없다.(Soundless Music)

1. 태초에 음악이 있었다.
이 무슨 웃기는 짬뽕같은 소리? 맞다. 웃기는 짬뽕같은 소리다. 하지만, 인간이 나름 체계적인 언어의 틀을 가지기 전의 의사소통 방법은 언어라기 보다는-당연하다. 앞에서 언어 이전이라 전제했는데- 차라리 음악에 가까웠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음의 장단과 고저가 발음기관이 진화하고 머릿속에서 단어라는 것을 만들어 그 것을 통용하고 문법이라는 체계를 만들기 전엔 음악적인 요소들이 언어적 요소에 우선한다고 확신한다. 이 점을 나한테 증명해 보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해 드리리다. "그 정도의 지식을 내게서 얻길 원한다면 내게 연구지원을 해주고 정식 논문을 출간하길 기다려라. 그렇게 해주겠다." 하지만 늬들이 그렇게 해줄 이유가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정도 선에서 소설을 쓰는 것으로 대신하고 그냥 그렇다고 생각을 좀 해주길 바란다.

2. 언젠가부터 언어가 음악을 대신했다.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특정 단계에서 분명히 서로의 의사소통체계가 현재 언어라 부르는 어떤 것에 가까워젺을 것이라 본다. 그렇다. 그 때부터 "음악적인 어떤 것으로 소통하던 시기"를 졸업하고 지금 우리가 언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그 "음악적인 것"을 대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은 "음악적인 것"들이 결코 진정 자리를 잡게 된 "언어체계"에 대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진정 이 이야기의 반전이다. "음악적인 것에 가까운 요소"를 통해 인간이 의사소통을 했다면 "언어 혹은 언어 체계라 불릴만한 어떤 것"이 독립적으로 생김으로 인해 "음악적인 요소"들도 스스로 독립하여 이제 후대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예술행위로서의 음악"이 발달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게 된 역사적 사건일 것이다.

소리의 높낮이나 리듬의 장단(長短)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기존의 방법이었다면 각자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던 이 방법을 이젠 다른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 같은 것을 가지고 "내가 지금 배가 고파 사냥을 하가고자 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같이 갈래?"라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다면 이젠 같은 것을 가지고 다른 것을 떠올리게끔 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기가막힌 것은 그 것을 듣는 사람들이 반드시 "사냥에 동참하겠냐?"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점이고, 그 것이 크게 문제가 되거나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이런 방식이 이 새로운 체계를 대하는 데에 있어 오히려 권장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드디어 음악은 "진정으로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게 되는 과정"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음악"이라는 것이 독립해나가는 과정이란 것을 알게 된 똑똑한 사람들은 이 음악이라는 놈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하려다 보니 이 쯤에서 끊어가야겠다는 느낌이 팍팍 온다. 3번 부터는 조금 후에...




2013년 1월 6일 일요일

이제 그들의 역사는 끝났다.(개소리들)

박찬호가 처음 던지는 것을 본 건 1989년이었다. 그 유명한 휘문고의 박정혁이 3타석 연속 3점 홈런을 치던 그 날, 상대는 공주 고등학교였고 상대 투수가 바로 박찬호였다. 지금은 상샅도 하지 못할 일이겠지만 당시 박찬호는 키만 삐쭉하게 크고 몸은 유난히 왜소한 아주 앳된 얼굴의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그 날 박찬호는 말 그대로 가루가 되도록 얻어 터졌으며 아마도 어지간한 선수였다면,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도 그가 공화국 최초의 메이저 리그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박찬호라는 이름을 "공화국 최고"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이며 기억하진 않았다. 그가 고등학교 3년이던 1991년에도 그는 최고의 자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있었다. 1996년 그 해 최고의 선수가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게 되는 김병현이 아니라 봉중근이었 듯, 미래의 메이저 리거는 사람들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던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것은 휘문 고등학교의 임선동도 아니고 경기 고등학교의 손경수도 아닌 신일 고등학교의 조성민과 설종진이었다. 설종진과 조성민이 3번과 4번을 치던 신일 고등학교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초고교급이라 일컬어지던 임선동이나 손경수의 휘문고나 경기고는 전력이 약해 전국대회의 4강까지는 어찌어찌 올라갈 수 있는 행운의 팀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경기는 마산역 대합실에서 보던 봉황대기 결승전인 신일고와 광주제일고의 경기였다. 야구를 본 구력이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은 상상이 불가능하겠지만, 당시 광주제일고의 에이스 투수는 박재홍이었다. 그리고 광주제일고의 동문과 팬들에겐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날 박재홍은 신일고 타자들에게 복날의 개 맞듯이 두드려 맞았고 전국대회 결승이라 하기엔 조금 미안한 수준의 일방적인 경기였다.

유독 92학번엔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 임선동, 손경수, 조성민 이 세 명의 투수는 일단 넘사벽의 수준이었고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수준의 투수로 꼽히던 선수들이 경남상고의 차명주와 공주고의 박찬호 대구상고의 전병호 등이었다. 그 외에 설종진, 김종국, 홍원기, 그리고 나중에 대학에 사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송지만, 아까 이야기했던 광주일고의 만능 선수였던 박재홍-대학 때 그의 별명은 리틀 쿠바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아마도 한 해에 이런 뛰어난 투수둘이 왕창 쏟아져 나온 것은 77학번의 최동원 김시진 김용남, 89학번의 김홍집, 구대성, 이상훈 이후로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대단한 92학번 선수들이 세계대회 급의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적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가만 내버려두진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박찬호는 잘하건 못하건 그 후에도 미국에 가기 전까지 몇 번의 경기를 직접 관람한 적이 있다. 그 때마다 저 엄청난 패스트볼에 저렇게 아쉬운 컨트롤이라니!라는 생각을 무진장하긴 했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안정감이 있던 선수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임선동과 조성민이었다. 그들은 각각 문동환과 이상훈이라는 걸출한 선배와 마운드를 함께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학야구의 쓰디쓴 맛 같은 것은 크게 볼 일이 없었다. 물론 박재홍은 임선동이라는 걸출한 선수를 같은 학번 친구로 둔 덕에 연세대 시절 타격에 전념해서 지금까지 이를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임선동과 조성민이 대학에 간 후로 그들이 같은 경기에서 서로 상대 투수로 뛰는 걸 보진 못했다. 그런 경기가 없진 않았지만, 내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는 말씀이다.

아무튼 내가 다니던 그 빌어먹을 학교에서 조선민이란 이름은 꽤나 오랜 시간동안 "구세주"와 동의어였다. 1학년 때는 주로 경기 후반에 이상훈의 승리를 지켰으나 2학년 때부터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팀의 에이스였으며, 심지어는 한 학년 후배인 손민한이 입학한 후에도 그 빌어먹을 학교의 재학생 혹은 졸업생들은 조성민의 이름을 더 큰 소리로 불러제꼈다. 그리고 언제나 조성민은 자신에게 집중된 기대치를 큰 무리없이 감당해냈다.(그렇다고 그가 천하무적이었단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지금도 조성민 보다는 임선동이 훨씬 더 뛰어난 투수였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임선동은 재수가 없게도 일본에 갈 수 없었던 반면, 서울의 두 구단이 서로 눈치를 보다 고 3때 지명하지 못했던 조성민은 아무런 문제 없이 일본에 진출할 수 있었다.

조성민이 일본에서 어떤 선수였나에 대해선 인터넷을 이용하시기 바란다. 아쉬웠던 점은 그 엄청난 투수들이 즐비했던 92학번들 중에서 해외에 나갔던 선수는 박찬호와 조성민 둘 뿐이었다는 점이다. 그게 어째서 아쉬운 일인가?라 질문한다면 두 가지 측면에서 대답할 수 있다. 하나는 박찬호 때문에 해외진출 선수의 국내 복귀에 대한 조항이 생겼을 만큼 당시엔 해외 진출잉라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선수들이 밀어붙일 수 있는 여지가 그 후보다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가지 이유는 당시의 국내 프로야구의 수준은 지금에 비하면 한참 허섭했기 때문에 "일단 국내에서 인정 받은 후에"라는 따위의 이야기를 발라버릴 수 있는 분위기였다는 점이다.

조성민 개인의 인성이나 그의 행동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은 아니라 생각해서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한다. 정작 조성민의 죽음을 보며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은 "이제는 좋건 싫건 그들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92학번들 중 아직까지 송지만이 확실하게 현역 선수로 남아있고 박재홍은 이번 시즌 선수생활을 이어가게 될지 아닐지에 대한 확신도 없는 상태긴 하지만 아직은 현역 신분이긴 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박찬호 만큼의 박수를 받으며 야구판을 떠날 수 있는 시기"는 놓친 것이 분명하다. 분명 2012 시즌에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박찬호도 마찬가지였지만, 박재홍이나 송지만은 그의 은퇴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할 정도의 처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야구판을 관심있게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손경수 못지 않게 가장 불우한 선수생활을 보낸 조성민은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야구 선수로서의 생활이 아닌 진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이젠 92학번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이 정도의 언론의 주목은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 한 가지 까먹은 것이 있다. 임종석과 정민철도 그들과 동기지만, 그들은 92학번이라는 수사를 택하는 대신 92년도 한국 프로야구 신인선수가 되는 길을 택했기 때문에 오늘의 이야기에서 빼버렸다. 박찬호와 조성민이 다르다면, 박찬호는 자신의 주도 하에 언론에 노축된 반면 조성민이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노출된 것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어찌 보면 92학번의 시대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주위를 둘러보니 극히 몇몇을 제외하곤 70년대 생으로서 정상의 위치에 있는 선수들도 보이지 않는다. 조성민의 비극으로 최소한 야구판에서는 한 시대가 확실하게 마감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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