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6일 일요일

이제 그들의 역사는 끝났다.(개소리들)

박찬호가 처음 던지는 것을 본 건 1989년이었다. 그 유명한 휘문고의 박정혁이 3타석 연속 3점 홈런을 치던 그 날, 상대는 공주 고등학교였고 상대 투수가 바로 박찬호였다. 지금은 상샅도 하지 못할 일이겠지만 당시 박찬호는 키만 삐쭉하게 크고 몸은 유난히 왜소한 아주 앳된 얼굴의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그 날 박찬호는 말 그대로 가루가 되도록 얻어 터졌으며 아마도 어지간한 선수였다면,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도 그가 공화국 최초의 메이저 리그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박찬호라는 이름을 "공화국 최고"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이며 기억하진 않았다. 그가 고등학교 3년이던 1991년에도 그는 최고의 자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있었다. 1996년 그 해 최고의 선수가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게 되는 김병현이 아니라 봉중근이었 듯, 미래의 메이저 리거는 사람들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던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것은 휘문 고등학교의 임선동도 아니고 경기 고등학교의 손경수도 아닌 신일 고등학교의 조성민과 설종진이었다. 설종진과 조성민이 3번과 4번을 치던 신일 고등학교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초고교급이라 일컬어지던 임선동이나 손경수의 휘문고나 경기고는 전력이 약해 전국대회의 4강까지는 어찌어찌 올라갈 수 있는 행운의 팀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경기는 마산역 대합실에서 보던 봉황대기 결승전인 신일고와 광주제일고의 경기였다. 야구를 본 구력이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은 상상이 불가능하겠지만, 당시 광주제일고의 에이스 투수는 박재홍이었다. 그리고 광주제일고의 동문과 팬들에겐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날 박재홍은 신일고 타자들에게 복날의 개 맞듯이 두드려 맞았고 전국대회 결승이라 하기엔 조금 미안한 수준의 일방적인 경기였다.

유독 92학번엔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 임선동, 손경수, 조성민 이 세 명의 투수는 일단 넘사벽의 수준이었고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수준의 투수로 꼽히던 선수들이 경남상고의 차명주와 공주고의 박찬호 대구상고의 전병호 등이었다. 그 외에 설종진, 김종국, 홍원기, 그리고 나중에 대학에 사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송지만, 아까 이야기했던 광주일고의 만능 선수였던 박재홍-대학 때 그의 별명은 리틀 쿠바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아마도 한 해에 이런 뛰어난 투수둘이 왕창 쏟아져 나온 것은 77학번의 최동원 김시진 김용남, 89학번의 김홍집, 구대성, 이상훈 이후로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대단한 92학번 선수들이 세계대회 급의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적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가만 내버려두진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박찬호는 잘하건 못하건 그 후에도 미국에 가기 전까지 몇 번의 경기를 직접 관람한 적이 있다. 그 때마다 저 엄청난 패스트볼에 저렇게 아쉬운 컨트롤이라니!라는 생각을 무진장하긴 했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안정감이 있던 선수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임선동과 조성민이었다. 그들은 각각 문동환과 이상훈이라는 걸출한 선배와 마운드를 함께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학야구의 쓰디쓴 맛 같은 것은 크게 볼 일이 없었다. 물론 박재홍은 임선동이라는 걸출한 선수를 같은 학번 친구로 둔 덕에 연세대 시절 타격에 전념해서 지금까지 이를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임선동과 조성민이 대학에 간 후로 그들이 같은 경기에서 서로 상대 투수로 뛰는 걸 보진 못했다. 그런 경기가 없진 않았지만, 내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는 말씀이다.

아무튼 내가 다니던 그 빌어먹을 학교에서 조선민이란 이름은 꽤나 오랜 시간동안 "구세주"와 동의어였다. 1학년 때는 주로 경기 후반에 이상훈의 승리를 지켰으나 2학년 때부터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팀의 에이스였으며, 심지어는 한 학년 후배인 손민한이 입학한 후에도 그 빌어먹을 학교의 재학생 혹은 졸업생들은 조성민의 이름을 더 큰 소리로 불러제꼈다. 그리고 언제나 조성민은 자신에게 집중된 기대치를 큰 무리없이 감당해냈다.(그렇다고 그가 천하무적이었단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지금도 조성민 보다는 임선동이 훨씬 더 뛰어난 투수였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임선동은 재수가 없게도 일본에 갈 수 없었던 반면, 서울의 두 구단이 서로 눈치를 보다 고 3때 지명하지 못했던 조성민은 아무런 문제 없이 일본에 진출할 수 있었다.

조성민이 일본에서 어떤 선수였나에 대해선 인터넷을 이용하시기 바란다. 아쉬웠던 점은 그 엄청난 투수들이 즐비했던 92학번들 중에서 해외에 나갔던 선수는 박찬호와 조성민 둘 뿐이었다는 점이다. 그게 어째서 아쉬운 일인가?라 질문한다면 두 가지 측면에서 대답할 수 있다. 하나는 박찬호 때문에 해외진출 선수의 국내 복귀에 대한 조항이 생겼을 만큼 당시엔 해외 진출잉라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선수들이 밀어붙일 수 있는 여지가 그 후보다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가지 이유는 당시의 국내 프로야구의 수준은 지금에 비하면 한참 허섭했기 때문에 "일단 국내에서 인정 받은 후에"라는 따위의 이야기를 발라버릴 수 있는 분위기였다는 점이다.

조성민 개인의 인성이나 그의 행동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은 아니라 생각해서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한다. 정작 조성민의 죽음을 보며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은 "이제는 좋건 싫건 그들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92학번들 중 아직까지 송지만이 확실하게 현역 선수로 남아있고 박재홍은 이번 시즌 선수생활을 이어가게 될지 아닐지에 대한 확신도 없는 상태긴 하지만 아직은 현역 신분이긴 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박찬호 만큼의 박수를 받으며 야구판을 떠날 수 있는 시기"는 놓친 것이 분명하다. 분명 2012 시즌에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박찬호도 마찬가지였지만, 박재홍이나 송지만은 그의 은퇴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할 정도의 처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야구판을 관심있게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손경수 못지 않게 가장 불우한 선수생활을 보낸 조성민은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야구 선수로서의 생활이 아닌 진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이젠 92학번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이 정도의 언론의 주목은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 한 가지 까먹은 것이 있다. 임종석과 정민철도 그들과 동기지만, 그들은 92학번이라는 수사를 택하는 대신 92년도 한국 프로야구 신인선수가 되는 길을 택했기 때문에 오늘의 이야기에서 빼버렸다. 박찬호와 조성민이 다르다면, 박찬호는 자신의 주도 하에 언론에 노축된 반면 조성민이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노출된 것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어찌 보면 92학번의 시대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주위를 둘러보니 극히 몇몇을 제외하곤 70년대 생으로서 정상의 위치에 있는 선수들도 보이지 않는다. 조성민의 비극으로 최소한 야구판에서는 한 시대가 확실하게 마감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댓글 5개:

  1. 조성민은 공던지는 폼이나 그런게 꽤 멋졌습니다. 포텐이야 임선동이 정말 좋았지만.. 조성민의 야구센스도 좋았던 기억입니다. 야구만화의 주인공 같은 그런 느낌도 있었고. 일본이 아닌 메이저로 진출할 수 있었으면.. 거기서 2~3년 정도 몸을 만들면서 올라왔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어쨌거나 여러모로 안타까운 비극. 야구재능을 제대로 쓰지도 못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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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나저나 박찬호는 은퇴한 지금도 저평가를 받는 것 같아서 좀 안타깝더군요. 해설자나 기자들이 말하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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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나 소나 메이저가 어쩌고 하다보니...
      박사장의 엄청난 노력은 아마 류현진이 고전해봐야 평가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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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갔네요. 매우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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