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Muddy Waters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Muddy Waters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2년 11월 22일 목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41)

아님 말고 1000곡

141. Got my Mojo workin'-Muddy Waters(1956)-

당연히 머디 워터스를 이야기하면서 단 몇 줄의 끄적임과 한 곡을 가지고 "시마이~"라 선언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화를 낼 것이다. 당근 최소한 입에 "음악에 대한 존경심"이란 말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누를 범해선 안될 것이다. 그렇게 그냥 어물쩡 넘어가는 것은 고인이 되신 머디 워터스 할아버지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그가 중심이 되어 이룬 "블루스 일가"를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며, 그 무엇보다도 내가 그토록 피하고자 하는 누구들의 음악을 대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머디 워터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고자 한다. 게다가 이 개념도 없고 이슈도 없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끝없이 음악에 대한 문젱를 제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 아니면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라고 이야기하면 맞을 수도 있다.

보통의 경우 Rock and roll hall of fame이나 Blues hall of fame등의 경우엔 사람이 헌액이 된다. 물론  머디 워터스 할아버지도 두 명예의 전당에 다 올라가 계신다. 허나, 특이하게도 특정한 곡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 그 유명한 Grammy상의 Grammy hall of fame이다. 왜 그래미 명예의 전당을 이야기하는가? 라는 뻔한 질문에 뻔한 답을 한다면 이 곡은 2000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곡이기 때문이다. 또한 The rolling stone이 선정한 팝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곡에 359번째로 올라가 있는 곳 역시 이 곡이다. 그리고 이 곡은 처음 발표했던 1956년 당해에 벌써 리메이크되기 시작해서 2011년 Eric Clapton과  Johnny Winter에 의해 리메이크 될 때까지 공식적으로만 30차례 이상 리메이크된 곡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머디 워터스가 그저 대단한 아티스트가 아니라 전국적인 영향력을 지닌 아티스트로 자신의 입지를 굳힌 시기를 1953년 이후로 여긴다. 그 당시 스튜디오 세션에서 머디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이름만 거론하더라도 그 당시 머디의 성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곡이 녹음되던 당시의 머디 할아버지 혹은 머디 횽아의 팀의 라인업은 위키피디아를 참조하시든지 음반의 크레딧을 참조하기 바란다. 영타 쓰기 귀찮다. 아직도 영타는 기것해야 1분에 200타를 겨우 넘는 수준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빨리 치려다 오타를 남발하는 내 성격에는 자유롭게 쓰기 번거롭다 느낄 수밖에 없다. 또 잔소리가 길어졌다. 중요한 것은 블루스 신에서 머디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과 동시에 머디의 음악적인 역량에 대한 평가가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먼저 소개했던 곡이 Blues와 Rock and Roll의 중간 위치에서 머디가 얼마나 두 장르 모두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인가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면 이 곡은 리듬 & 블루스 장르에 대한 머디의 이해와 역량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보여주는 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정통의 블루스 곡이라 보기엔 soulful한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는 곡인데, 머디는 잉러한 형식의 곡을 자신의 블루스적 역량 하에서 보통의 소울이나 리듬 & 블루스 아티스트들과는 확연히 차별되는 방식으로 연주하고 있다. 물론 이 곡 자체가 머디의 곡이기 때문에 그가 자신에 맞춰 쓴 곡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버디의 당대의 흑인음악들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엿보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분명 각 장르마다 그런 인물들이 존재한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크로스오버적 시도를 통해 장르의 외연을 확장시킨 사람들 말이다. 물론 머디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은 그런 인물은 아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행했던 일련의 음악적 실험들은 재즈라는 장르의 외연을 확대시킨 것 이상으로 당대 대중음악의 트랜드 자체를 견인한 측면이 있다. 당연히 머디의 역할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디의 이야기를 하며 마일스 데이비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재즈나 블루스라는 장르의 후대의 흐름에 미친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각설하고 이 곡을 들으시면 대가의 풍모란 어떤 건지 쉽게 알게 되실 것이란 말씀이다. 자! 이제부터 아가리 닥치고 감상!!!





2012년 10월 14일 일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40)

아님 말고 1000곡

140. Mannish Boy-Muddy Waters(1955)-

1. 머디 할아버지 인생의 최대 논란
1913년 4우월 4일 Mississippi주 Issaquena County 출생 1983년 4월 30일  Illinois주 Westmont시에서 사망, 이 것이 대중들이 알고있는 머디 워터스의 탄생과 사망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머디 할아버지는 후에 자신은 Mississippi주의 Rolling Fork이란 곳에서 1915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최근의 그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그의 실제 생년월일에 대한 몇 가지 증거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그의 결혼 증명서와 음악인 노조의 서류엔 그가 분명히 1913년 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다. 반면 1920년 3우월 6일에 실시된 인구 센서스엔 그가 5세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것을 근거로 그가 1914년 생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시카고에서 발행괸 그의 Social Security Card에는 또한 1913년 4월 4일 생으로 기록되어있다 한다. 이를 근거로 미루어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결혼을 많이 했던 사람치고 자신의 생년월일이 실제보다 일찍 기록되어있지 않다 하는 사람은 드물다."

2. 다음에 열거하는 것들은 머디 워터스의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나타내는 것들

The Rolling Stones의 밴드 이름은 머디 워터스의 1950년 곡인 Rolling Stone에서 따온 것이다. 이 곡은 또한 Catfish Blues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지미 헨드릭스에 의해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지미 헨드릭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가 최초로 인식하기 시작한 기타리스트는 바로 머디 워터스인데 내가 그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거의 죽을 것같은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즉, 그 정도로 그의 연주가 충격적이었다는 이야기 되시겠다. 머디 워터스의 노래 중 "You need love"란 곡목의 노래가 있는데 Led Zeppellin은 자신의 곡인 "Whole lotta love"의 가사를 머디의 이 곡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블로그를 보신 분들은 아실 윌리 딕슨이 "You need love"의 작곡자라는 사실! 그 외에도 머디 할배의 곡들이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리메이크된 곡에 대한 정보는 http://www.muddywaters.com 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이 다들 잘 아실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지(Martin Scorsese)는 자신의 영화에 머디의 곡을 많이 삽입하기로 유명하다. 특히나 노골적으로 머디의 곡을 삽입한 영화는-흘려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길게 삽입한 영화- Color of Money, Good fellas 그리고 Casino인데 이 영화엔 머디 할아버지가 자신의 50년대의 히트 송인 "I'm a man"으로도 알려진 "Mannish Boy"를 1970년대에 다시 연주하여 녹음한 곡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 곡은 Risky Business-이 영화엔 탐 크루즈 형아가 뽀송뽀송하던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의 첫 주연작이다. 대략 21세 때의 그의 모습을 보실 수 있다.-에도 수록되었고 그의 Rocumentary인 The Last Waltz에도 수록되어있는 곡이다.

다 아실테지만, The Beatles의 Come together엔 "He roller coaster/he got Muddy Waters"이란 가사가 나온다.

2006년 FAmily Guy의 "Saving Private Brian"이란 에피소드엔 머디 워터스가 자신의 신장결석을 몸 밖으로 배출하려 애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이게 재미있는 이야기였나 보다.)

1990년 유명한 텔레비전 시리즈인 Doogie Howser M.D.의 에피소드 중 하나였던 "Doogie Sings the Blues"에 Blind Otis Lemon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모델이 바로 머디 할아버지라 한다.

3. 오늘 소개할 곡은

I'm a man 이라고도 알려진 Mannish Boy란 곡인데, 이 곡은 앞서 소개한 곡에 비해 대단히 Rock and roll적인 요소들이 많이 가미된 곡이다. 머디 워터스가 후배 밴드나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그가 시카고 블루스의 완성자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가 블루스라는 음악이 Rock and roll로 확산되어 나가는 데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고 그가 없었다면 Chuck Berry나 Bo Diddley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인데 실제로 머디 워터스는 척 베리가 처음 음반사와 계약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2012년 10월 12일 금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9)

아님 말고 1000곡

139. Hoochie Coochie Man-Muddy Waters-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물론 대단히 어리석은 질문이긴 하지만 그 충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 때문에 고심에 고심을 하다 답을 해주긴 하는 그런 질문,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재즈 아티스트가 누구인가?" 이런 류의 질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보다도 훨씬 더 짜증나는 질문임을 이 블로그를 들락날락 하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어이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반발을 하거나 "네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 이야기를 못한다. 진정한 고수는 항상 하나인 법"이라는 류의 말을 해대는 새끼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답은 항상 '고심하는 척 하다'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적어도 내 대답은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눈물을 머금고 "듀크 엘링턴이 아닐까 합니다."다. 마찬가지로 (다행히도 사람들은 블루스에 대해선 재즈에 대해서보다 둔감하다.) 블루스 아티스트에 대해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역시 눈물을 머금고 대답해야 한다. "Muddy Waters"

물론 블루스의 초창기 멤버들이 대단히 훌륭한 음악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블루스 음악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시장에서의 상품이 되고 그 것을 소비자는 물론 다른 아티스트들까지 소비하게 되면서부터는 그 사람의 비중이라는 것을 음악의 완성도나 어떤 것의 최초... 라는 류의 기네스북적인 사고를 가준으로 판단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측면도 대단히 중요하고, 상업적인 성공이 있어야 그 사람의 영향력이 클 수 박에 없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음악적인 완성도는 계속해서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당대의 대중음악 신(Scene)이 질적인 동시에 양적인 변화가 가능했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블루스가 미국의 음악이고 지금 전세계의 대중음악을 미국 시장이 좌우하기 때문에 블루스라는 대중음악 장르에 숱한 대가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단 한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머디 워터스인 이유는 위의 세 조건을 동시에 가장 높은 정도로 충족하는 아티스트기 때문이다.

머디 워터스를 나타낼 수 있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이 게시물의 태그를 보시면 알 수 있겠지만, 블루스의 가장 대표적 이름이라 할 수 있는 Chicago Sound 혹은 Chicago Blues은 머디 할아버지에 의해 완성되고 만개한 블루스의 하위 장르일 것이다.  흔히들 이 불초 티렉스가 이 곳에서 소개할 정도의 인물들은 이미 10대에 비상한 재능을 보이면서 20대 초중반에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 대부분이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머디 할아버지는 30대가 넘어서면서 겨우 안정적인 전업 뮤지션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고 40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에게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안겨다준 "Hoochie Coochie Man" "I just to make love to you" "I'm ready"등이 연달아 차트의 상위권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만으로 40세가 되는 해였던 1953년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직 만으로 40이 되지 않았고 음악을 하며 상업적으로 히트한 곡이 없는 사람들은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되시겠다. 상업적인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겐 음악만 있으면 된다. 그런 자세로 열심히 음악에 매진하시면 머디 할아버지처럼 40이 넘어 휠을 잡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절대 비아냥거리는 이야기 아님을 아셨으면 한다. 워낙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다들 비아냥댄다고 해서...)

위에서 제시한 조건 중 대단한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부분은 바로 앞의 단락에서 어느 정도 제시를 했으니 이젠 그의 음악적인 완성도에 대해 이야기를 할 차례다. 이 점을 기억해보자. 음악사에 대한 사전을 편찬할 일이 생긴다면 다른 부분들에선 내 견해를 집어넣을 수 있더라도 이런 것들을 내 마음대로 뒤집거나 할 수는 없다. "시기적으로 델타 블루스는 시카고 블루스에 선행한다. 그리고 시카고 블루스라는 것은 델타 블루스에서 파생되어 나간 장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시카고 블루스의 완성자인 머디 할아버지의 음악적인 기반은 시카고 블루스가 아니라 델타 블루스 되시겠다는 말씀이다. 시카고 블루스를 그렇게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좀 더 서술 범위를 좁혀 이야기한다면 "머디 워터스의 사운드는 델타 블루스를 일렉트릭 악기에 맞도록 변형시킨, 혹은 일렉트릭 악기를 가지고 델타 블루스의 영역을 확대시킨 사운드"다.과거에 일렉트릭 기타나 일렉트릭 베이스를 블루스라는 장르에서 사용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머디의 일렉트릭 악기의 사용은 블루스에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것이 어떤 것이냐고?

머디 할아버지는 1958년 잉글랜드로 가게 되는데, 그 것이 얼마나 큰 일이 될지는 머디 할아버지가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잉글랜드로 가 잉글랜드의 청중들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트린 것이 계기가 되어 1960년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가 인기의 정점을 달리던 시절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소위 British Blues Explosion의 도화선이되었는데, 실제로 잉글랜드에서의 활약상이 어땠는지를 직접 귀로 확인하시고 싶으시면1960년 New Port의 Jazz Festival에서의 그의 연주가 실황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으니 어떤 식으로든지 들어보시길 권한다. 그의 잉글랜드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들을 몇가지 열거해본다면 The Yard birds의 출현,  John Mayall and the Blues Breakeers의 출현 그 유명한 블라인드 페이스의 멤버가 되는 스티브 윈우드 릭 그레치, 에릭 클랩튼 등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 초중반을 휩쓸었던 영국의 Blues Rock의 출현 등이다. 만일 그들에게 머디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그들은 그런 음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내 이야기다.

머디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한 번 더 간다. 좀 가벼운 소재로...


2012년 9월 27일 목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7)

아님 말고 1000곡

13. Back door man etc.  -Willie Dixon-

William James "Willie" Dixon은 대단히 반갑게도 돌아가신 우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동갑이다. 물론 외할머니에 대해서 실제 생년이 1914년이란 설도 존재하나 난 "법대로 하"겠다. 윌리 딕슨은 우리 외조부, 외조모니모가 동갑이다. 토달지 마시기 바란다. 이 할아버지가 대단하신 이유 중 하나는 Upright bass-통칭double bass라 불린다.-와 기타를 자신의 주된 연주 악기로 삼았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보통 베이시스트는 기타를 칠 줄 알기 마련이고 기타리스트들도 어느 정도는 베이스를 칠 줄 안다. 그러나, 더블 베이스를 연주하는 사람이 그와 유사한 렙벨의 연주력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밴드를 해보신 분들이라면 대번에 아실 수 있겠지만 윌리 딕슨과 같은 케이스를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엄마의 역할과 아빠의 역할을 한 사람이 동시에 수행하는 자웅동체 인간이라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만큼 음악적으로 완젹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는 사적인 이유에서 1915년 생이라 티렉스의 외조부 외조모님과 동갑이며 음악적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던 윌리 딕슨이라는 인물을 알게 됨에 대해 "끝없이" 감사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자 한다. 시카고 블루스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윌리 딕슨의 이름을 음악사를 다룬 책에서 의미있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작곡자와 프로듀서로서이다. 그는 20세가 막 지날 무렵까지는 헤비급 복서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그 와중에 드의 평생의 은인과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는 Leonard Caston을 만나 음악을 하게 되었다. 윌리 딕슨은 자신의 인생의 커리어를 촉망받는 헤비급 복서이자 그 유명한 조 루이스의 스파링 파트너로서로 한 부분, Chess Record와 Checker Record의 전임 프로듀서로서로서 한 부분, 연주자와 보컬리스트 그리고 작곡가로서로서의 한 부분 이렇게 세 부분의 서로 다른 인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Muddy Waters와 함께 시카고 블루스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머디 웥터스와 그의 음악적 커리어를 분명하게 구분지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윌리 딕슨은 Chuck Berry, Bo Diddley와의 공동 작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 초창기 Rock and Roll 음악의 정립에 크나큰 역할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윌리 딕슨은 척 베리나 보 디들리와의 친분과 음악적인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항상 블루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생전에 그가 한 말을 원문 그대로 옮기자면 "The Blues are the roots and the other musics are the fruits. It's better keeping the roots alive, because it means better fruits from now on. The blues are the roots of all American music. As long as American music survives, so will the blues" 즉 그의 생각은 블루스는 미국 음악의 뿌리인 관계로 블루스라는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확고한 의지가 있었으며 블루스의 발전이 미국 음악의 발전을 이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 말씀이다.

그런 그의 블루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꽃을 피운 것은 Blues Heaven Foundation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그가 설립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체는 블루스 음악의 유산을 보존하고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저작권과 인세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인데, 블루스 음악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이나 초창기의 블루스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고, 후발의 다른 장르의 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고 재녹음되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많은 블루스 아티스트들을 위해 그 리고  블루스 음악 그 자체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면서 그의 수많은 팬들이  윌리 딕슨을 아티스트인 동시에 사외운동가로서도 기억하게끔 하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그저 Fact을 소개하는 선에서 끝내려 한다. 아마 당신들도 이런 문제에 대해선 할 말이 산더미 같을 것이다.

"Little red rooster" "Hoochie coochie man" "Evil" "Spoonful" "Back door man" "I just to want to make love to you" "I ain't superstitious" "My babe" "Wang Dang doodle" "Bring it on home"등의 주옥같은 곡들의 원작자가 바로 윌리 딕슨이다. 또한 레드 제플린의 저 유명한 "Whole lotta love"의 경우엔 법정까지 간 끝에 윌리 딕슨의 곡을 심각한 수준으로 도용했음이 인정되어 지금은 이 곡의 credit에 윌리 딕슨의 이름을 같이 쓰고 있다. 또한 밥 딜런, 크림, 지미 헨드릭스,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포갓(Foghat), 야드버즈, 도어스 올맨 브라더스 밴드, 에어로스미스, 그레이트풀 데드 등은 윌리 딕슨 원작의 커버 버전을 자신의 앨범에 실었던 수많은 팀들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팀들일 것이다. 그의 곡을 감상하면서 특히나 그의 더블 베이스-업라이트 베이스-연주에 귀를 과도하게 기울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한다.




2010년 8월 8일 일요일

아님 말고 1000곡(117)







듣거나 말거나 1000곡

117. Country Blues, I Be's Trouble(Muddy Waters Etc. 1941)

McKinley Morganfield... 이게 뭐냐고? 다 아시면서 내숭을 떠시는건가? 다소 평범하고 영국식의 뉘앙스의 이 이름이 바로 Muddy Waters의 본명이다. 또한 이 것은 거의 확실한 이야기라 전해지는데 그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1915년 생이 아닌 1913년 생이라 한다. 실제 그는 1913년 미시시피주의 Issaquena County 근교의 Jug's Corner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 아! 물론 아님 말고...이런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사후에 발견된 그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들 중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그가 사용하던 결혼신고서와 음악인 협회 회원증의 기록이 발견되면서부터다. 뭐 사실 그가 자신의 생년을 1913년이라 착각했던 것일 수도 있고... 그러니 아님 말고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1913년 생이라는 것조차 확실히 믿을 수 없는 이유로 제시되는 것 중 하나는 1920년대의 미국 인구 총조사(US Popularity Census)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1914년 생이란다. 빌어먹을! 도대체 왜 한 사람의 나이에 대해 이리도 설이 많다는 것인가! 아무튼 그는 출생 후 주로 그의 할머니인 Della Grant에 의해 자랐다고 하는데 당시 그가 가장 좋아하던 놀이가 진흙탕에서 뒹굴며 노는 것이었다 한다. 그가 후에 자신의 이름을 "Muddy"라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것이었다나 뭐라나...(출생 연도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의 애칭에 대한 유례라고 확실할까 싶다.) 즉,흙탕물에서 뒹굴었다고 해서 Muddy Water이고 그의 가족들이 다 그렇다 해서 Waters라는 이야기!!!!(머디 할배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 게시물에선 여기까지만...)

머디 할배가 진지하게 블루스 음악가가 되려는 생각을 가진 후 맨 처음 연주하던 악기는 하모니카였다. 사실, 일렉트릭 기타가 본격적으로 블루스에 들어오기 전엔 하모키가는, 마치 포크 음악에서 그런 것처럼 혹은 일렉트릭 기타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재즈 음악에서 우클렐레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처럼, 블루스 음악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악기다. 아마 이 것은 포크 음악의 경우에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하모니카라는 악기를 자신의 노래 중간중간 애들립으로 연주하는 것을 상상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갈 것이다. 언젠가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하고 없으면 말겠지만 초창기에 블루스 음악과 포크 음악은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여러분들은 머디 워터스가 하모니카를 연주했다ㅓ는 사실을 받아들이기힘드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래서 그는 당황해하실 여러분들을 위해 17세가 되던 해에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 후 그의 기타가 어떠했는지는 머디를 아시는 분들이라면 굳이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머디의 기타가 어땠냐고?" 뭐 답은 그렇다. 들어보면 알 것이고, 들어도 왜 그의 기타가 훌륭한지 모르겠다면 네 귀를 수술하든지, 음악을 더 이상 듣지 말든지 하시고...

또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개지만 그는 1932년 대단히 어린 나이에-아무리 나이를 많이 잡아봤자 열아홉이니 얼마나 까진 인간인가?- MAbel Berry(설마 이 이름을 "마벨 베리"라 읽으시는 분은 없으시리라 확신한다.)와 결혼하는데 그의 결혼식 피로연-영화를 보시면 얼겠지만 그들은 조그마한 밴드나 피아노 4중주 혹은 5중주 팀을 초청해서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파티를 하며, 그 것이 동양과는 다른 피로연 문화라 할 수 있다.-에서 Robrtd Nighthawk(로버트 밤매)라는 사람이 밴드의 기타를 치게 되는데 전해지기로는 그 파티가 워낙 와일드했던 나머지 피로연장의 마루가 꺼지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상황은 악몽으로 기억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우리의 머디 선생께서는 그 광경에 크나큰 감동을 받으신 나머지 자신의 일생을 기타에 바치리라는 결심을 하셨다나 무라나... 아무튼, 이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을지는 모르겟으나 최소한 그 엄처난 광란으 밤에 결혼식 피로연을 열던 장소의 마루가 주저앉았다는 것만은 fact으로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라 한다. 아! 힘들다...

물론 이 게시물을 읽으시는 여러분들이 티렉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본디 Country Blues이라는 것은 특정한 곡의 명칭이 아니라 19세기 말 미국에서 시작된-이런 줴길, 블루스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미국이란 단어를 이렇게 고민 없이 쓰다니!- 블루스 음악의 한 형식이다. 즉, 같은 곡명의 곡을 녹음한 사람이 머디 많이 아니라 흔히 자주 쓰는 표현으로 Various Artists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의 곡들이 블루스의 형식으로서의 Country Blues이라는 차원에선 다 같은 곡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역시 같은 논리로-various artists라는 이유?-다 다른 곡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되시고 돈 되시면 ㅇAmazon U.S에서 Country Blues으로 검색해서 다 구입해서 들어보시고 평가를 하시면 대단히 도움이 되실 것이다. 뭐 음악에 목숨을 걸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으신 분들에겐 절대 권해드리고 싶은 방법은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마디! 하고 싶으면 하고 싫음 말고!

자! 오늘 여러분들께 소개해드리는 두 곡 모두 그가 본격적으로 성공가도를 향해 치닫기도 훨씬 전인-즉 그가 Chicago로 이주하기 전인-1940년 이전에 녹음된 곡들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늘 여러분들께-아! 찔린다. 기껏해야 두 세명 들어오는 이 블로그에 "여러분"이라는 단어를 눈썹하나 찡그리지 않고 뱉어대다니- 소개하고 있는 두 곡은 모두가 다 머디 워터스라는 이름으로 흔히들 떠올리는 음악과는 상당히 다른 음악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겐 전성기 혹은 완숙기의 머디의 음악과는 다소 다른듯한 이 곡들에서 머디 워터스의 음악적 일관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이 되었든지 간에 이 두 곡을 여러분들이 들어보시는 것은 길고 긴, 그리고 끝없는 재미를 선사할 블루스라는 즐거운 탐험의 길로 가는 데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한 걸음이 될 것이라 장담한다.(아! 씨발! 이 비릿한 멘트느 또 뭐냐!!!!)






2010년 8월 5일 목요일

아님 말고 1000곡(115)







듣거나 말거나 1000곡
115. They call me Muddy Waters(Muddy Waters. 1971)

시절이 좆같고 세상이 엿같아 응당 가누가 나갔어야 하는 음악 프로그램에 빙상의 여왕씨가 나와 초등학교 학예회 분위기를 만들며 세 곡이나 부른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면 그 가수가 "국민 여동생을 건드린 죄"로 빙상의 여왕씨를 그리며 두루마리 휴지를 밤새 애용했을 찌질이들에게 욕을 먹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으니 티렉스라 해서 어찌 키보드를 두드릴 힘이 생기리요? 허나 이런 좆같은 상황일수록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다름 아닌 "음악"이요 그 중에서도 티렉스와 제일 친하다 할 수 있는 "블루스"아니겠는가? 빙상의 여왕씨와 서울방송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어도 음악은 절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씀!

먼저 사적인 이야기 하나 쌔우시겠다. 오늘 말씀드리려는 분과 같은 1915년생인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이 빌어먹을 세상에 계시지 않아 가끔 "고아가 된 우리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쌓여가고 있는데 웅리 외할아버지 보다는 24년 외할머니 보다는 무려 26년 씩이나 먼저 저 세상 사람이 디ㅚ셨으나 살아있는 그 어떤 뮤지션들 보다도 후대의 모든 뮤지션들에게 장르 불문하고 수없이 영감을 주셨고 지금도 그러고 계신 분, 어떤 새끼들은 운이 좋은지 실력이 좋은 것인지 20대부터 그래미상을 휩쓸고 개 난리를 치지만 56세 되시던 해인 197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래미 트로피가 어떻게 생겨먹은 물건인지를 육안으로 확인하신 분, 그 이후로는 1970년대에만 다섯 번의 그래미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받으셨던 그 분, 심지어 1993년엔 미국의 우표에까지 얼굴을 내미셨던 그 분이 바로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Muddy Waters 할배 되시겠다.

일단 머디 워터스의 1950년ㄴ에서부터 60년대 말에 이르는 수많은 히트 싱글들을 뒤로 하고 오늘의 이 곡인 "They call me Muddy Waters"을 고른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 Rollin' Stone, Rollin and Tumblin, Country Blues, I am your hoochie coaching man 등등등의 수많은 주옥같은 싱글들이 아닌 어찌 보면 전성기가 지난 50대에 발표했던 곡이냐? 우리가 머디 워터스도 모르는 바보로 아느냐?라고 하시더라도 난 꿋꿋이 할 이야기가 있다. "ㄴThey call me Muddy Waters"을 자신의 앨범의 타이틀이자 곡명으로 할만한 개건방을 떨어도 욕을 먹지 않을 정도의 클래스에 있는 뮤지션이 대중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몇 명이나 될 것 같은가? 누가 뭐래도 머디 워터스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이고 이런 개건방으로 인해 욕먹지 않아도 될 인간이라는 점 밝히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머디 워터스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지겹게 할 기회가 많을테니 오늘은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해 보도록 하자. "머디 워터스가 왜 수많은 블루스 뮤지션들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문장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당연히 rock and roll이 블루스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만큼 그 어느 클래시컬한 블루스의 대가도 백인들의 음악에 영향을 안미친 경우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머디 워터스의 경우는 특별한데 그가 1958년 43세의 나이에 미국을 떠나 잉글랜드에 가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잉글랜드에서 대중 앞에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Sonny Terry & Brownie Mcghee Big Bill Broonzy등 어쿠스틱 기타를 사용하던 블루스 혹은 포크 뮤지션들 외에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잉글랜드의 무대에 섰던 "정통 아프리카계 미국인 블루스 뮤지션"으로서는 머디 워터스가 최초였고 그의 공연은 수많은 잉글랜드의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게 된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백인 믈루스"가 어쩔 수 없는 음악적 환경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장르였다면, 잉글랜등-ㅔ서 "백인 블루스"가 발전하게 된 데에 최우선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 머디 워터스 할배라는 사실이 대중음악사에서 그의 위치를 특별하게 하는 "그만이 할 수 있던 음악적 기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혹은 잉글랜드의 "백인 블루스"도, 머디 워터스의 음악과 그의 음반들도 워낙 할 이야기가 많아 오늘은 머디 워터스의 일생에 있어 가장 드람마틱했던 사건들 중 하나로 불리는 일인 그의 1958년 잉글랜드 행에 대한 운을 띄우면서 여러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에서 이 게시물을 마쳐도괜찮을까요? 뭐 괜찮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이 게시물은 내가 끝내고 싶으면 내가 끝내는 것이니 말이다...

팔로어

프로필

내 사진
궁금해? 내가 당신 프로필이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당신도 내 프로필을 궁금해하지 마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