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1일 월요일

53회 Grammy Awards 그리고 잡담들

1. National Academy of Recording Arts and Science and Grammophones Awards
흔히 줄여서 Grammy라 언급되는 이 상의 권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단서가 되는 것은 위의 두 단어다. National Academy of Recording Arts and Science의 회원이 되는 자격은 Musician, Producer, Engineer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반산업의 발전에 현격한 공헌을 했다고 인정되는 음반산업과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다. 흔히 Oscar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아카데미 영화상에 비해 이 상이 조금 더 권위를 가지게 되는 이유는 투표권을 가지게 되는 회원의 자격요건이 대단히 까다롭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각기 다른 성향의 직업군들이 동시에 투표를 함으로 인해 보수적이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이 상에 정말 가끔 의외의 결과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비교적 이 상이 미국 음반산업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단체인 RIAA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 점 대단히 중요하다.)

2. 보수성, 뒷북, 절충
그래미의 성향을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내라고 한다면 위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적어도 나는그렇게 생각한다는 뜻!) 미국 음악계의 가장 권위있는 상이지만 미국 음반산업과 무관한 사람들이 주관하는 행사가 아닌 관계로 과거 쌍벽을 (이룬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두자) 이루던 American Music Awards에 비하면 대단히 보수적인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AMA는 절대적으로 Cash Box Chart에 의존하던 상이었으나 그래미는 그런 점에서는 자류로웠으므로 음악성 혹은 작품성이란 말에 그만큼 민감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미의 뒷북에 대해선 뭐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요 몇년간 그래미를 휩쓸었던 대가들에게 상 몰아주기 열풍의 뒷면엔 그들이 전성기에 남긴 일생일대의 명작에 상을 수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 선에서 퉁칩시다."라는 제스쳐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는 그래미 역시 미국이 주관하는 상이다 보니 (캐나다의 주노 상과는 달리) 외국의 아티스트들에게 관대한 듯 보이나 다분이 미국화된 외국의 아티스트들에게만 시상이 집중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그래미의 고충일 수도 있지만 이 부분이 "그래미 수상자가 절대적으로 당대 세계 최고라 인정받을 아티스트라 이야기하기엔 뭔가 부족한 점"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공화국 언론의 가벼움
그래미 이야기에서 어찌하여 갑자기 공화국 언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가? 너 바보 아니냐? 라고 이야기한다면 믿거나 말거나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공화국 언론에서 대서특필한 것은 캐나다의 Indie Rock Band인(언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린 것이다.)Arcade Fire의 Album of the year 수상에 집중되고 있는 중이다. 일단 이 팀의 수상에 대한 보도의 문제점을 짚어보자면 우선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을 뽑는 것이 그래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발 그래미의 공식 홈 페이지에 한 번 정도라도 들어가 보길 권한다. 이른바 그래미의 4대 Major는 홈페이지의 순서대로 1. Record of the year 2. Album of the year 3. Song of the year 4. Best new artist of the year인데 그래미 상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NARAS의 구성으로 인한 특성이다.(이 점을 납득 시키려면 게시물을 하나 통째로 써야할텐데 나도 귀찮고 당신들도 지겨운 일이다.) 물론 맨 마지막에 시상하는 부붑도 Record of the year이다. 물론 이해한다. 미국인들의 잔치에 대단히 대중적이지도 않은 캐나다의 밴드가 대어를 낚았다는 것 자체가 특종일 수 있다는 점...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과연 "Canadian Pop"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혹은 "Canadian Rock"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라는 캐나다 음악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물론 이 점은 분명하다. 영어권의 대중음악 애호가들 중 (만일 그들을 집단화한다면) 캐나다의 대중음악 애호가들이 가장 까다로운 감상자이며 막말로 "엄청나게 수준높은 음악을 요구하는" 감상자라는 점! 그러나 그들 역시 미국 대중음악이 자라온 자양분을 기초로한 음악들 중 "작품성을 갖춘"음악을 즐겨찾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가장 미국의 영향력을 빠르게 체험하고 있는 캐나다의 밴드에게 "반미국적인 혹은 비미국적인 음악의 대표자"라는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그래미의 절충적 특성 중 하나가 이런 팀들에게 가끔 엄청난 대어를 낚을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음악이 훌륭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나 그들이 미국 팀이 아니라는 이유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미국 팀이 아니라 하더라도 Arcade Fire은 영어권의 팀이라는 점도...

4. 진짜 파격은?!
그렇다고 이번 그래미가 가장 미국적인 음악인 Country and Western 팀에게 Record of the year을 안겨줬다 해서 100% 그간 그래미가 보였던 무난한 결과를 보여주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국내 언론이 간과하고 있는, 국내의 대중음악 애호가들도 많이 간과하는, 예측불허의 수상자는 따로 있다 할 수 있다. 그 것도 Major 상들 중에서 말이다. 전통적으로 Best new artist of the year이야 말로 "가장 상업적인 성과가 중요시 되는" 분야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공화국으로 치자면 "이승기" 정도 된다고 보면 얼추 통할 듯한 미국판 "국민 남동생"인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에게 돌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올해 27세가 되는, 미국에선 결코 메이저 장르가 보긴 힘든, 보사노바에 기반을 둔 재즈, 소울 아티스트인 Esperanza Spalding(농구공을 떠올리셨다고? 나도 그랬다.)가 신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게다가 무대에서 주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진짜 재즈 아티스트"라는 점에서 53회 그래미의 정점을 찍기에 손색없는 신인이었던 것이다. 좀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저스틴 비버가 아니라 스팔딩에게 이 상을 수여한 그래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011년 2월 13일 일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27)







아님 말고 1000곡

127. Broken Silence-Dean Magraw(1994)-

가끔 지나치게 원칙을 고집하면 안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나이를 처먹을수록 느끼게 되는데 이번 경우도 그렇다. 애초에 곡의 배정을 연대기적 순서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려 했으나 사실 처죽을 때까지 1000이란 숫자를 채울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자꾸 시간이 지체될수록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1990년대 이후의 음악들이 과도하게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끔 이런 식으로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음반이나 아티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그 때 그 때 해주지 않으면 안된 것 같다. 물론 오늘의 게시물은 순서맡 좀 앞당겨졌다 뿐이지 반드시 1000이라는 엔트리 안에 들어왔을 것이다.(급조한 것은 아니니 그냥 아닥하고 계시란 말씀!)

혹시나 나중에 음반을 구입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물론 나 말고 댁들이... 이미 난 구입했다는 말씀!) Broken Silence이라는 것은 트랙의 타이틀이 아니라 Dean Magraw의 1994년 데뷔 음반의 타이틀이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의 엔트리에 이 사람이 있지도 않고 이 앨범의 Booklet은 달랑 두 페이지에 불과하고 웹페이지를 통해 찾아낼 수 있는 Dean Magraw에 대한 정보가 있는 페이지나 사이트들은 대부분 영어가 아니라 독어라는 점! 오프라인 매장에선 어떤지 모르겠으나 온라인 매장의 경우 이 앨범을 구하는 데에만 3일 이상 소요된다는 사실 등등... 분명히 공화국에서 대중성을 가지고 있는 기타리스트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나마 Dean Magraw에 대한 가장 확실한 정보를찾을 수 있는 곳은 You Tube일 것이다. 유투브에 올라와있는 동영상들은 그의 연주 동영상들이다. "확실한"이란 수식어를 쓸 수 있는 이유도 어떤 기타리스트를 판단하는 데에 있어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은 바로 그의 연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물론 지금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영상을 통해 볼 수 있는 그의 연주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정말 "대단하다"는 탄성이 쉴 사이 없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는 기타리스트라는 이야기가 가장 적합할 것이란 생각이다.

대중음악에 일렉트릭 기타가 도입되면서 크게 보아 이펙터와 앰플리파이어를 통한 다양한 주법과 효과를 얻은 대신 프랫을 운지하는 손이 아닌 반대쪽 손이 구사할 수 있는 여러가지의 주법을 다소 (관점에 따라선 꽤 많이)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피킹을 통해서 나일론 기타나 스틸 스트링 어쿠스틱 기타에선 표현이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해졌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예컨데 흔히들 Funky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연주는 나일론 기타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지만 반때쪽 손의 다섯 손가락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다양한 리듬은 피킹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라 할 것이다.

이 Dean Magraw이라는 이름의 기타리스트는 피킹을 통해 핑거링이 가질 수 있는 장점에 근접한 연주를 할 수 있는 현재 활동하는 몇 안되는 기타리스트들 중 하나라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동영상을 통해 확인해보실 수 있겠지만 그는 기타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패턴의 리듬을 연주하는 것이 가능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되도록이면 직접 들어보길 권한다. 고로 오늘은 동영상 링크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는 말씀! 이 게시물을 쓰고 있는 나로서도 아직 많은 연구나 자료 수집이 필요한 기타 플레이어지만 정말 운좋게도 대단한 기타리스트를 만났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2011년 2월 7일 월요일

Boys will be back in town(Soundless Music)

Gary Moore passed away...
영어를 모르는 관계로 저 문장의 뜻이 어떤 것인지 모르므로 아시는 분들은 가르쳐 주시길...하지만 무식한 것은 죄가 아니니 욕설은 삼가해주시길 바란다. 여지껏 1954년 생으로 알고있던 게리 무어는 1952년에 태어났다. 왜 잘못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과거 중앙일보사에서 나오던 팝음악 잡지에 게리 무어가 1954년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쓴 기사가 실렸던 기억은 확실하다. 걔네들 하는 일이야 원체 그러려니 하는 관계로 그들을 욕하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 것도 휴가차 스페인에 갔다 호텔방에서 사인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말이다.

한 때 그에겐 "철새"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만큼 그는 한 팀에 오래 있지 못하고 이 팀 저 팀을 옮겨다니길 밥먹듯 했다는 것을 비우호적인 태도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그는 유독 공화국의 팬들에겐 Thin Lizzy의 기타리스트로서 기억된다. 일본과 공화국에서 유난히 인기있는 "Parisienne Walkway"와 "Spanish Guitar"이 그 시절에 발표된 곡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곡이 유난히 인기있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일본과 공화국에서 그의 음악적 여정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국내 언론의 기사 제목처럼 "전설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라 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니다.

물론 그가 30대 후반 이후엔 블루스라는 장르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곡 작업을 할 때 블루스를 염두에 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본격적인 블루스 음악의 감상자들에게 과연 그가 "블루스라는 장르의 대가"로 비춰질지는 의문이다. 항상 그의 곡들은 "정통적인 블루스"라는 잣대에서 본다면 "게리 무어는 애초에 블루스를 접한 것 자체가 백인 블루스를 통해서가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기 대문이다. 하지만, 그가 항상 블루스라는 장르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자신을 블루스 뮤지션"으로 포지셔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사실 자체는 대단히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의 노력까지 부정할 정도로 매정한 사람이 있을까?

공화국의 언론은 7080세대에게 인기가 많은 뮤지션이라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는 80년대 중후반에서 90년대 초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밴드를 했던 이들에게 우상이자 목표였던 인물이었다.(물론 공화국 내에서) 수많은 rock and roll kids들은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의 합주실에서 그의 Parisienne Walkway를 카피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가 무대에서 그리고 음반에서 들려줬던 만큼의 Feed-back에 도달하지 못한 수많은 아해들에게 짜증의 시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시절의 이해들이 에디 반 할런과 잉위 맘스틴을 카피하면서 그들의 테크닉을 따라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면 게리의 경우는 그의 연주에서 당시의 아해들이 테크닉이 아닌 다른 것을 익히려 노력했덛랬다.

아마 80년대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게리 무어와 함께 떠오르는 이름 하나가 Virgin Record일 것이다. 그는 Mike Oldfield와 함께 버진 레코드의 구세주로 여겨졌고 한 때는 버진과 게리무어는 서로 동의어였던 시기도 있었다. 아마 작년에 내한공연을 했을 때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무대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쯤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때늦은 후회를 하며자판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게시물의 제목을 저렇게 적은 것은 애써 게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서라 이해해주면 대단히 감사하겠다.(살짝 문장을 바꾼 이유가 거기에 있기도 하다.) 물론 아님 말고...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퀴즈 하나! 아래의 동영상에서 게리 무어와 함께 기타를 치는 사람은 누굴까요?



2011년 2월 2일 수요일

아님 말고 100곡(126)







듣거나 말거나 1000곡

126. A piece of my heart-Janis Joplin(1967)-

Janis Joplin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식상할 수도 있고 어쩌면 "저 새끼 음악 더럽게 안 들었나 보네... 이 누나 이야기나 하고..."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기껏 음악 듣는 척 가오는 다 잡아놓고 개나 고등어나 다 아는 Janis의 이야기를 하냐?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이야기를 해야한다. 대단히 미안하게도 지난 19일이 Janis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살아있었으면 그 날 She turns 68!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린다는 이야기부터 게시물을 시작해야겠다. 생일날 살아계셨어도 되는데 왜 굳이 돌아가셨수? 생일 축하 치곤 좀 불손한가?

어쨌거나 대중음악계에 있어 가장 불운한 기운이 감돌던 해로 기억될 해는 1970년일 것이다. 그 해 (물론 법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가 결정된 것은 1972년이지만) 비틀스가 해채되었으며 도어스의 짐 모리슨을 저 세상으로 보냈고 지미 헨드릭스 역시 1970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으며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Janis 역시 1970년 운명을 달리했다. 비틀스의 해체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불행한 사건들의 원인이 약물이었음은 다들 잘 알 것이다. 그 해 그나마 슬프지 않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면 Isle of Whight에서의 Rock Festival에서 ELP가 그 유명한 "Pictures at an exibition"을 공식적으로 처음 연주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해에 태어난 누군가는 그런 나쁜 일들이 있더 해에 태어난 것이 원인인지는 몰라도 항상 불만에 가득차있고 냉소적이며 "우울함"이라는 단어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간 자신의 더러운 성격과 운명이 자신이 태어난 해에 그런 나쁜 일들이 줄줄이 일어났던 때문인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오다 이제서야 그 원인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의 개인적인 불행이 100% 1970년의 일련의 사건들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분명한 것은 Janis Joplin을 잃었다는 것 자체고 전세계의 팝음악계는 그 자체로 수십년의 시간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Janis와 같은 여성보컬을 다시 발견해내는 일도 그처럼 짧은 시간에 많은 음악적 성취를 이뤄낼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일도 아직은 요원해보이기 때문이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Janis가 소속되어있던 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에서부터 시작하여 Kozmic Blues Band, Full Tilt Boogie Band까지 그 유명한 Pearl 앨범이 발매되기 전까지 Janis의 활동은 항상 밴드의 보컬리스트였으며 이전에도 이후에도 Janis처럼 Full Band의 음악에 능했던 여성보컬은 극히 드물었다.(사실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Full Band 음악이라는 단어엔 사실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음악의 모든 작업을 밴드를 전제로 하여 만들어지는 음악을 지칭한다고 할 것이다. 이 것보다 조금 더 긴 설명을 하자면 조금이 아니라 심하게 많이 길어지는 관계로 정말 궁금하시다면 전화를 걸어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든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든지 해야하지 않을까 한다.

Janis joplin의 이야기를 단 하나의 게시물로 이야기할 수 도 없고 그건 예의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단히 많은 게시물을 그에게 할애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이 곡 A piece of my heart은 그가 불렀던 곡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인 동시에 가장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곡이기도 하며 곡의 발표년도를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의 음악적 커리어에 있어 비교적 초창기라 할 수 있는...이라기 보다는 전성기의 초창기라 할 수 있는 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 시절에 발표했던 곡이기도 하다. 그냥 연휴를 시작하는 날에 닥치고 즐감들 하기 바란다.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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