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님 말고 1000곡
140. Mannish Boy-Muddy Waters(1955)-
1. 머디 할아버지 인생의 최대 논란
1913년 4우월 4일 Mississippi주 Issaquena County 출생 1983년 4월 30일 Illinois주 Westmont시에서 사망, 이 것이 대중들이 알고있는 머디 워터스의 탄생과 사망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머디 할아버지는 후에 자신은 Mississippi주의 Rolling Fork이란 곳에서 1915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최근의 그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그의 실제 생년월일에 대한 몇 가지 증거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그의 결혼 증명서와 음악인 노조의 서류엔 그가 분명히 1913년 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다. 반면 1920년 3우월 6일에 실시된 인구 센서스엔 그가 5세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것을 근거로 그가 1914년 생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시카고에서 발행괸 그의 Social Security Card에는 또한 1913년 4월 4일 생으로 기록되어있다 한다. 이를 근거로 미루어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결혼을 많이 했던 사람치고 자신의 생년월일이 실제보다 일찍 기록되어있지 않다 하는 사람은 드물다."
2. 다음에 열거하는 것들은 머디 워터스의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나타내는 것들
The Rolling Stones의 밴드 이름은 머디 워터스의 1950년 곡인 Rolling Stone에서 따온 것이다. 이 곡은 또한 Catfish Blues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지미 헨드릭스에 의해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지미 헨드릭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가 최초로 인식하기 시작한 기타리스트는 바로 머디 워터스인데 내가 그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거의 죽을 것같은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즉, 그 정도로 그의 연주가 충격적이었다는 이야기 되시겠다. 머디 워터스의 노래 중 "You need love"란 곡목의 노래가 있는데 Led Zeppellin은 자신의 곡인 "Whole lotta love"의 가사를 머디의 이 곡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블로그를 보신 분들은 아실 윌리 딕슨이 "You need love"의 작곡자라는 사실! 그 외에도 머디 할배의 곡들이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리메이크된 곡에 대한 정보는 http://www.muddywaters.com 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이 다들 잘 아실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지(Martin Scorsese)는 자신의 영화에 머디의 곡을 많이 삽입하기로 유명하다. 특히나 노골적으로 머디의 곡을 삽입한 영화는-흘려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길게 삽입한 영화- Color of Money, Good fellas 그리고 Casino인데 이 영화엔 머디 할아버지가 자신의 50년대의 히트 송인 "I'm a man"으로도 알려진 "Mannish Boy"를 1970년대에 다시 연주하여 녹음한 곡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 곡은 Risky Business-이 영화엔 탐 크루즈 형아가 뽀송뽀송하던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의 첫 주연작이다. 대략 21세 때의 그의 모습을 보실 수 있다.-에도 수록되었고 그의 Rocumentary인 The Last Waltz에도 수록되어있는 곡이다.
다 아실테지만, The Beatles의 Come together엔 "He roller coaster/he got Muddy Waters"이란 가사가 나온다.
2006년 FAmily Guy의 "Saving Private Brian"이란 에피소드엔 머디 워터스가 자신의 신장결석을 몸 밖으로 배출하려 애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이게 재미있는 이야기였나 보다.)
1990년 유명한 텔레비전 시리즈인 Doogie Howser M.D.의 에피소드 중 하나였던 "Doogie Sings the Blues"에 Blind Otis Lemon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모델이 바로 머디 할아버지라 한다.
3. 오늘 소개할 곡은
I'm a man 이라고도 알려진 Mannish Boy란 곡인데, 이 곡은 앞서 소개한 곡에 비해 대단히 Rock and roll적인 요소들이 많이 가미된 곡이다. 머디 워터스가 후배 밴드나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그가 시카고 블루스의 완성자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가 블루스라는 음악이 Rock and roll로 확산되어 나가는 데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고 그가 없었다면 Chuck Berry나 Bo Diddley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인데 실제로 머디 워터스는 척 베리가 처음 음반사와 계약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2012년 10월 14일 일요일
2012년 10월 12일 금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9)
아님 말고 1000곡
139. Hoochie Coochie Man-Muddy Waters-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물론 대단히 어리석은 질문이긴 하지만 그 충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 때문에 고심에 고심을 하다 답을 해주긴 하는 그런 질문,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재즈 아티스트가 누구인가?" 이런 류의 질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보다도 훨씬 더 짜증나는 질문임을 이 블로그를 들락날락 하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어이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반발을 하거나 "네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 이야기를 못한다. 진정한 고수는 항상 하나인 법"이라는 류의 말을 해대는 새끼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답은 항상 '고심하는 척 하다'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적어도 내 대답은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눈물을 머금고 "듀크 엘링턴이 아닐까 합니다."다. 마찬가지로 (다행히도 사람들은 블루스에 대해선 재즈에 대해서보다 둔감하다.) 블루스 아티스트에 대해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역시 눈물을 머금고 대답해야 한다. "Muddy Waters"
물론 블루스의 초창기 멤버들이 대단히 훌륭한 음악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블루스 음악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시장에서의 상품이 되고 그 것을 소비자는 물론 다른 아티스트들까지 소비하게 되면서부터는 그 사람의 비중이라는 것을 음악의 완성도나 어떤 것의 최초... 라는 류의 기네스북적인 사고를 가준으로 판단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측면도 대단히 중요하고, 상업적인 성공이 있어야 그 사람의 영향력이 클 수 박에 없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음악적인 완성도는 계속해서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당대의 대중음악 신(Scene)이 질적인 동시에 양적인 변화가 가능했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블루스가 미국의 음악이고 지금 전세계의 대중음악을 미국 시장이 좌우하기 때문에 블루스라는 대중음악 장르에 숱한 대가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단 한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머디 워터스인 이유는 위의 세 조건을 동시에 가장 높은 정도로 충족하는 아티스트기 때문이다.
머디 워터스를 나타낼 수 있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이 게시물의 태그를 보시면 알 수 있겠지만, 블루스의 가장 대표적 이름이라 할 수 있는 Chicago Sound 혹은 Chicago Blues은 머디 할아버지에 의해 완성되고 만개한 블루스의 하위 장르일 것이다. 흔히들 이 불초 티렉스가 이 곳에서 소개할 정도의 인물들은 이미 10대에 비상한 재능을 보이면서 20대 초중반에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 대부분이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머디 할아버지는 30대가 넘어서면서 겨우 안정적인 전업 뮤지션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고 40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에게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안겨다준 "Hoochie Coochie Man" "I just to make love to you" "I'm ready"등이 연달아 차트의 상위권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만으로 40세가 되는 해였던 1953년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직 만으로 40이 되지 않았고 음악을 하며 상업적으로 히트한 곡이 없는 사람들은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되시겠다. 상업적인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겐 음악만 있으면 된다. 그런 자세로 열심히 음악에 매진하시면 머디 할아버지처럼 40이 넘어 휠을 잡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절대 비아냥거리는 이야기 아님을 아셨으면 한다. 워낙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다들 비아냥댄다고 해서...)
위에서 제시한 조건 중 대단한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부분은 바로 앞의 단락에서 어느 정도 제시를 했으니 이젠 그의 음악적인 완성도에 대해 이야기를 할 차례다. 이 점을 기억해보자. 음악사에 대한 사전을 편찬할 일이 생긴다면 다른 부분들에선 내 견해를 집어넣을 수 있더라도 이런 것들을 내 마음대로 뒤집거나 할 수는 없다. "시기적으로 델타 블루스는 시카고 블루스에 선행한다. 그리고 시카고 블루스라는 것은 델타 블루스에서 파생되어 나간 장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시카고 블루스의 완성자인 머디 할아버지의 음악적인 기반은 시카고 블루스가 아니라 델타 블루스 되시겠다는 말씀이다. 시카고 블루스를 그렇게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좀 더 서술 범위를 좁혀 이야기한다면 "머디 워터스의 사운드는 델타 블루스를 일렉트릭 악기에 맞도록 변형시킨, 혹은 일렉트릭 악기를 가지고 델타 블루스의 영역을 확대시킨 사운드"다.과거에 일렉트릭 기타나 일렉트릭 베이스를 블루스라는 장르에서 사용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머디의 일렉트릭 악기의 사용은 블루스에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것이 어떤 것이냐고?
머디 할아버지는 1958년 잉글랜드로 가게 되는데, 그 것이 얼마나 큰 일이 될지는 머디 할아버지가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잉글랜드로 가 잉글랜드의 청중들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트린 것이 계기가 되어 1960년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가 인기의 정점을 달리던 시절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소위 British Blues Explosion의 도화선이되었는데, 실제로 잉글랜드에서의 활약상이 어땠는지를 직접 귀로 확인하시고 싶으시면1960년 New Port의 Jazz Festival에서의 그의 연주가 실황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으니 어떤 식으로든지 들어보시길 권한다. 그의 잉글랜드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들을 몇가지 열거해본다면 The Yard birds의 출현, John Mayall and the Blues Breakeers의 출현 그 유명한 블라인드 페이스의 멤버가 되는 스티브 윈우드 릭 그레치, 에릭 클랩튼 등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 초중반을 휩쓸었던 영국의 Blues Rock의 출현 등이다. 만일 그들에게 머디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그들은 그런 음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내 이야기다.
머디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한 번 더 간다. 좀 가벼운 소재로...
139. Hoochie Coochie Man-Muddy Waters-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물론 대단히 어리석은 질문이긴 하지만 그 충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 때문에 고심에 고심을 하다 답을 해주긴 하는 그런 질문,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재즈 아티스트가 누구인가?" 이런 류의 질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보다도 훨씬 더 짜증나는 질문임을 이 블로그를 들락날락 하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어이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반발을 하거나 "네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 이야기를 못한다. 진정한 고수는 항상 하나인 법"이라는 류의 말을 해대는 새끼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답은 항상 '고심하는 척 하다'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적어도 내 대답은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눈물을 머금고 "듀크 엘링턴이 아닐까 합니다."다. 마찬가지로 (다행히도 사람들은 블루스에 대해선 재즈에 대해서보다 둔감하다.) 블루스 아티스트에 대해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역시 눈물을 머금고 대답해야 한다. "Muddy Waters"
물론 블루스의 초창기 멤버들이 대단히 훌륭한 음악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블루스 음악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시장에서의 상품이 되고 그 것을 소비자는 물론 다른 아티스트들까지 소비하게 되면서부터는 그 사람의 비중이라는 것을 음악의 완성도나 어떤 것의 최초... 라는 류의 기네스북적인 사고를 가준으로 판단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측면도 대단히 중요하고, 상업적인 성공이 있어야 그 사람의 영향력이 클 수 박에 없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음악적인 완성도는 계속해서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당대의 대중음악 신(Scene)이 질적인 동시에 양적인 변화가 가능했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블루스가 미국의 음악이고 지금 전세계의 대중음악을 미국 시장이 좌우하기 때문에 블루스라는 대중음악 장르에 숱한 대가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단 한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머디 워터스인 이유는 위의 세 조건을 동시에 가장 높은 정도로 충족하는 아티스트기 때문이다.
머디 워터스를 나타낼 수 있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이 게시물의 태그를 보시면 알 수 있겠지만, 블루스의 가장 대표적 이름이라 할 수 있는 Chicago Sound 혹은 Chicago Blues은 머디 할아버지에 의해 완성되고 만개한 블루스의 하위 장르일 것이다. 흔히들 이 불초 티렉스가 이 곳에서 소개할 정도의 인물들은 이미 10대에 비상한 재능을 보이면서 20대 초중반에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 대부분이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머디 할아버지는 30대가 넘어서면서 겨우 안정적인 전업 뮤지션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고 40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에게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안겨다준 "Hoochie Coochie Man" "I just to make love to you" "I'm ready"등이 연달아 차트의 상위권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만으로 40세가 되는 해였던 1953년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아직 만으로 40이 되지 않았고 음악을 하며 상업적으로 히트한 곡이 없는 사람들은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되시겠다. 상업적인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겐 음악만 있으면 된다. 그런 자세로 열심히 음악에 매진하시면 머디 할아버지처럼 40이 넘어 휠을 잡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절대 비아냥거리는 이야기 아님을 아셨으면 한다. 워낙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다들 비아냥댄다고 해서...)
위에서 제시한 조건 중 대단한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부분은 바로 앞의 단락에서 어느 정도 제시를 했으니 이젠 그의 음악적인 완성도에 대해 이야기를 할 차례다. 이 점을 기억해보자. 음악사에 대한 사전을 편찬할 일이 생긴다면 다른 부분들에선 내 견해를 집어넣을 수 있더라도 이런 것들을 내 마음대로 뒤집거나 할 수는 없다. "시기적으로 델타 블루스는 시카고 블루스에 선행한다. 그리고 시카고 블루스라는 것은 델타 블루스에서 파생되어 나간 장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시카고 블루스의 완성자인 머디 할아버지의 음악적인 기반은 시카고 블루스가 아니라 델타 블루스 되시겠다는 말씀이다. 시카고 블루스를 그렇게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좀 더 서술 범위를 좁혀 이야기한다면 "머디 워터스의 사운드는 델타 블루스를 일렉트릭 악기에 맞도록 변형시킨, 혹은 일렉트릭 악기를 가지고 델타 블루스의 영역을 확대시킨 사운드"다.과거에 일렉트릭 기타나 일렉트릭 베이스를 블루스라는 장르에서 사용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머디의 일렉트릭 악기의 사용은 블루스에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것이 어떤 것이냐고?
머디 할아버지는 1958년 잉글랜드로 가게 되는데, 그 것이 얼마나 큰 일이 될지는 머디 할아버지가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잉글랜드로 가 잉글랜드의 청중들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트린 것이 계기가 되어 1960년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가 인기의 정점을 달리던 시절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소위 British Blues Explosion의 도화선이되었는데, 실제로 잉글랜드에서의 활약상이 어땠는지를 직접 귀로 확인하시고 싶으시면1960년 New Port의 Jazz Festival에서의 그의 연주가 실황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으니 어떤 식으로든지 들어보시길 권한다. 그의 잉글랜드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들을 몇가지 열거해본다면 The Yard birds의 출현, John Mayall and the Blues Breakeers의 출현 그 유명한 블라인드 페이스의 멤버가 되는 스티브 윈우드 릭 그레치, 에릭 클랩튼 등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 초중반을 휩쓸었던 영국의 Blues Rock의 출현 등이다. 만일 그들에게 머디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그들은 그런 음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내 이야기다.
머디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한 번 더 간다. 좀 가벼운 소재로...
2012년 10월 7일 일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38)
아님 말고 1000곡
138 Hey! Bo Diddley-Bo Diddley(1957)-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다니던 학교가 위치한 곳은 플로리다 주의 게인즈빌이라는 곳이었다. 플로리다 대학이 있는 것 외에 인구는 10만에도 훨씬 못미치는 이 시골 도시가 들썩거린 일이 일어난 것은 2008년 6월 7일에 있었던 이 사람의 장례식이 이 곳의 한 교회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그의 유명한 곡인 "Hey Bo Diddley"를 밴드와 함께 한 가스펠 합창단이 가스펠 풍으로 편곡하여 부르는 가운데 조지 소로굿, 탐 페티, 제리 리 루이스, 리틀 리처드 등 그가 투병 생활을 하던 시기에도 그의 파티에 초대되곤 했던 유명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뮤지션들이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초대되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 마틴 루터 킹 센터와 게인즈빌 두 곳에서 동시에 추모 공연이 벌어졌다. 그 추모 공연의 무대에 선 인사들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더라도 단락을 넘겨야 한다.
이 공연을 공식적으로 주최한 것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아들 부시와 미 하원이었다고 한다. 애니멀스의 보컬리스트였던 에릭 버든, 엘비스 코스텔로, 로니 호킨스, 믹 재거, B.B. 킹, 탐 페티, 로버트 플랜트, 보니 레이트, 조지 소로굿, 로버트 랜돌프 등이 무대에 올랐으며 세상에나! 믹 재거와 그의 팀인 롤링 스톤스가 엔딩 스테이지도 아닌 오프닝 스테이지에 섰다. 대체 그 짬밥의 롤링 스톤스를 자신의 추모 공연의 오프닝에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는 오프닝 무대에 앞서 일종의 추도사 비슷한 이야기를 거의 10분에 걸쳐 하면서-대체 믹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왔다고 보기엔 오글거림의 도가 지나치는 말들을 했다는 사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 장례식과 추모 공연의 주인공이 Bo Diddley였기 때문이라 한다.
사실 www.bodiddley.cim 이라는 그의 공식 사이트에 들어가게 되면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서 저 세상으로 떠났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과감하게 생략하도록 한다. Bo Diddley를 되도록이면 그의 음악적인 면에 대해 한정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 혹은 아티스트로서의 보를 세계적으로-이 말이 듣기 싫다면 역사적으로-유명하게 만든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인에 음악 외적인 동시에 음악적인 면 한 가지라 할 수 있는데, 한가지 음악적 요인과 음악적 요인이 아닌 동시에 음악적 요인인 한 가지는 비교적 짧게 이야기를 끝낼 수 있고 다른 한 가지는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일단 아주 사소한 것부터 이야기하자면 보 디들리는 당대의 Blues 혹은, Rock and roll 아티스트들 중 최초로 정식으로 여성 멤버를 자신의 밴드의 정규 멤버로 기용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중 한 명이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진 않지만 거의 최초 중 한 명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그를 대표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사실은 Gretche 사(이 회사는 비틀스 활동 당시 조지 해리슨이 그레치사의 기타만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한 회사다.)에서 특별히 제작해준 그의 Signature 모델이다. 그의 기타리스트로서의 뛰어남은 단지 그가 그 전에 쓴 적이 없었던 형태의 모델을 스스로 개발해서 쓴 데에 끝나지 않고, 그가 만들어낸 많은 수의 기타 effect에서도 그러나며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Z Top의 Billy Gibbons의 경우에는 보 디들리의 소위 Cadillac 디자인의 기타를 그대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뒤의 이야기와도 연결이 되는 이야기지만, 20세기에 태어난 보 디들리는 자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전통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상당수의 그의 곡의 가사의 내용과 음악의 형식에 흔히들 Hambone이라 이야기하는-이 것은 정말 뒤의 이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꼭 기억하기 바란다.-African Clapping Rhyme을 차용하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George Michael의 Faith이라는 곡을 기억하실 것이다.이 곡의 비트를 복기해보시면 "딴 따 단 따다 은따다 은따"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단히 흥미로운 비트는 조지 마이클의 독자적인 작품이 아니라 바로 Bo Diddley Beat 이라 불리는 보 디들리의 독자적 비트의 응용이다. "(Marie's the Name) His latest flame"이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1961년 곡이나 그 유명한 데이비드 보위의 1973년 곡 "Panic in Detroit" 1969년 스투지스(Stooges)이 발표한 "1969"((이런 실망스러운 곡목을 보았나... 1969년 발표한 1969라니!) Strangeloves의 "I want Candy"(이 역시 1969년 발표된 곡이다.) 이런 등등의 수많은 곡들이 세칭 보 디들리 비트를 차용한 곡이다. 앞 문단에서 이야기한 "Hambone"이라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의 일종의 민요라고 할 수도 있는 비트가 바로 보 디들리 비트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미국의 아프리카계 이민들이 그들의 교회에서 부르던 가스펠 음악과도 대단히 유사하다. 여러분들은 이 곡을 들으시면서 블루스와 rock and roll, 그리고 가스펠을 한꺼번에 경험하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 자부한다. 뭘?
138 Hey! Bo Diddley-Bo Diddley(1957)-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다니던 학교가 위치한 곳은 플로리다 주의 게인즈빌이라는 곳이었다. 플로리다 대학이 있는 것 외에 인구는 10만에도 훨씬 못미치는 이 시골 도시가 들썩거린 일이 일어난 것은 2008년 6월 7일에 있었던 이 사람의 장례식이 이 곳의 한 교회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그의 유명한 곡인 "Hey Bo Diddley"를 밴드와 함께 한 가스펠 합창단이 가스펠 풍으로 편곡하여 부르는 가운데 조지 소로굿, 탐 페티, 제리 리 루이스, 리틀 리처드 등 그가 투병 생활을 하던 시기에도 그의 파티에 초대되곤 했던 유명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뮤지션들이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초대되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 마틴 루터 킹 센터와 게인즈빌 두 곳에서 동시에 추모 공연이 벌어졌다. 그 추모 공연의 무대에 선 인사들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더라도 단락을 넘겨야 한다.
이 공연을 공식적으로 주최한 것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아들 부시와 미 하원이었다고 한다. 애니멀스의 보컬리스트였던 에릭 버든, 엘비스 코스텔로, 로니 호킨스, 믹 재거, B.B. 킹, 탐 페티, 로버트 플랜트, 보니 레이트, 조지 소로굿, 로버트 랜돌프 등이 무대에 올랐으며 세상에나! 믹 재거와 그의 팀인 롤링 스톤스가 엔딩 스테이지도 아닌 오프닝 스테이지에 섰다. 대체 그 짬밥의 롤링 스톤스를 자신의 추모 공연의 오프닝에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는 오프닝 무대에 앞서 일종의 추도사 비슷한 이야기를 거의 10분에 걸쳐 하면서-대체 믹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왔다고 보기엔 오글거림의 도가 지나치는 말들을 했다는 사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 장례식과 추모 공연의 주인공이 Bo Diddley였기 때문이라 한다.
사실 www.bodiddley.cim 이라는 그의 공식 사이트에 들어가게 되면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서 저 세상으로 떠났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과감하게 생략하도록 한다. Bo Diddley를 되도록이면 그의 음악적인 면에 대해 한정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 혹은 아티스트로서의 보를 세계적으로-이 말이 듣기 싫다면 역사적으로-유명하게 만든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인에 음악 외적인 동시에 음악적인 면 한 가지라 할 수 있는데, 한가지 음악적 요인과 음악적 요인이 아닌 동시에 음악적 요인인 한 가지는 비교적 짧게 이야기를 끝낼 수 있고 다른 한 가지는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일단 아주 사소한 것부터 이야기하자면 보 디들리는 당대의 Blues 혹은, Rock and roll 아티스트들 중 최초로 정식으로 여성 멤버를 자신의 밴드의 정규 멤버로 기용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중 한 명이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진 않지만 거의 최초 중 한 명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그를 대표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사실은 Gretche 사(이 회사는 비틀스 활동 당시 조지 해리슨이 그레치사의 기타만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한 회사다.)에서 특별히 제작해준 그의 Signature 모델이다. 그의 기타리스트로서의 뛰어남은 단지 그가 그 전에 쓴 적이 없었던 형태의 모델을 스스로 개발해서 쓴 데에 끝나지 않고, 그가 만들어낸 많은 수의 기타 effect에서도 그러나며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Z Top의 Billy Gibbons의 경우에는 보 디들리의 소위 Cadillac 디자인의 기타를 그대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뒤의 이야기와도 연결이 되는 이야기지만, 20세기에 태어난 보 디들리는 자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전통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상당수의 그의 곡의 가사의 내용과 음악의 형식에 흔히들 Hambone이라 이야기하는-이 것은 정말 뒤의 이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꼭 기억하기 바란다.-African Clapping Rhyme을 차용하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George Michael의 Faith이라는 곡을 기억하실 것이다.이 곡의 비트를 복기해보시면 "딴 따 단 따다 은따다 은따"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단히 흥미로운 비트는 조지 마이클의 독자적인 작품이 아니라 바로 Bo Diddley Beat 이라 불리는 보 디들리의 독자적 비트의 응용이다. "(Marie's the Name) His latest flame"이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1961년 곡이나 그 유명한 데이비드 보위의 1973년 곡 "Panic in Detroit" 1969년 스투지스(Stooges)이 발표한 "1969"((이런 실망스러운 곡목을 보았나... 1969년 발표한 1969라니!) Strangeloves의 "I want Candy"(이 역시 1969년 발표된 곡이다.) 이런 등등의 수많은 곡들이 세칭 보 디들리 비트를 차용한 곡이다. 앞 문단에서 이야기한 "Hambone"이라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의 일종의 민요라고 할 수도 있는 비트가 바로 보 디들리 비트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미국의 아프리카계 이민들이 그들의 교회에서 부르던 가스펠 음악과도 대단히 유사하다. 여러분들은 이 곡을 들으시면서 블루스와 rock and roll, 그리고 가스펠을 한꺼번에 경험하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 자부한다. 뭘?
2012년 10월 4일 목요일
정복자 싸이(Soundless Music)
다음 아고라를 우연히 들어갔다 "싸이가 지금 대학 축제에 다닐 때인가?"라는 쓰레기 같은 포스트를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서 뒷목을 잡고 넘어갈 뻔 하다 억지로 몸을 추스렸다. 그 이야기의 논지는 "지금 싸이는 빌보드 Hot 100 차트의 정상에 올라야하는 민좆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있는데 한가롭게 공화국에서 대학 축제나 돌아다녀야 하는가?"라는 이야기 되겠다. 물론 그 쓰레기엔 빠지지 않는 민족의 쾌거에서부터 국격이 어쩌고 국력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써먹고 또 써먹으셨다. 그에 대한 댓글이라는 것들은 더 가관인지라 아예 그 포스트의 링크를 하지 않으려 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일찍이 중극의 동북공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절대 그들과 같은 논리로 맞서서는 명분도 실리도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혹시라도 기억을 못하시거나 보지 못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여기서 그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 하도록 하자.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도 아니고 단지 그 당시 한반도와 그 주변부에 혹은 인접 지역에 근거를 두고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라는 이야기이다. 그 점에 대해 중국이 한국을 속국으로 여기고자 하는 수작이라 생각하여 그 반대로 고구려는 우리의 조상인데 그들이 지금의 중국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랴오닝이나 그 외의 지역들이 한국의 땅이 된다. 따라서 그 곳에 대한 한국의 소유권을 주장해야 한다. 하지만, 그 것은 그 반대의 논리가 아니다. 그 것은 주어와 목적어만 바꾼 동어 반복일 뿐이다. 이 것이 전에 내가 한 이야기였다.
싸이가 Hot 100 차트에서 1위를 하건 못하건 그 것은 그냥 싸이의 문제일 뿐이다. 싸이가 1위를 한다고 한민족의 우수성이 세계 만방에 널리 퍼지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한국의 음악에 미국을 본거지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의 음악이 무릎을 꿇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 것은 그저 2012년의 어느 시기에 한 주간 혹은 그 이상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란 곡이 미국 내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혹은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노래라는 것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싸이가 1위를 못한다고 해서 그 것이 "외부의 침략자에 대해 미국인들이 똘똘 뭉쳐 그 침략을 철저히 무너뜨린 결과"도 아니라는 것이다. 싸이의 곡이 1위가 된다고 공화국 인민들의 음악적 소양이 미국 인민들의 그 것을 압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공화국 인민들의 탁월한 음악적 소양이 미국인들의 강력한 힘에 굴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면 먼저 수 십년간 공화국의 대중음악과 영화 그리고 그 외의 많은 부분들은 미국에 의해 점령당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칼을 들고 덤비는 자들을 칼로 이기려면 절대적으로 쪽수가 중요한 것을 아직도 모르는 당신은 자가당착에 빠져있는 것이다.
또 하나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던 이야기는 "이런 장난 같은 음악으로 1위를 하는 것은 쪽팔린 일이다. 제대로 된 음악으로 1위를 해야 국격이 올라간다."는 개소리였다. 솔직히 그 사람이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가 나름대로의 음악관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하에 이런 이런 질문을 되돌리고 싶다. "당신은 어떤 음악을 질높은 음악이라 생각하는가?" 반복해서 하는 이야기지만, 대부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음악에는 고급스런 장르와 저급스런 장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상당수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렉트로니카와 힙합의 경계를 교묘하게 왔다 갔다하는 싸이의 음악은 저급한 음악이라 여기기에 딱 좋은 빌미를 제공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의 특성상 대부분 MR을 사용하고, 악기의 편성은 대단히 단순할 수 밖에 없다는 점!
이런 사람들에겐 대단히 애석한 일이지만, 힙합은 구린 장르, Rock 음악은 대단한 장르라는 수사는 없어도 잘만든 힙합 못만든 힙합이라는 수사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음악이라는 점을 미리 좀 공부했으면 한다. 음악의 장르엔 그 장르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고 그리고 그런 전제 하에서 음악의 완성도라는 것을 얼마든지 따질 수는 있다. 하지만, 클럽 음악이라는 것은 후지고 재즈는 훌륭하고 하는 식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 동네라는 이야기다. 싸이가 뜨기 위해 이 번에 특별히 우스꽝스러운 음악을 한 것도 아니고, 그는 항상 힙합을 바탕으로 일렉트로니카 편곡을 사용한 곡들을 만들어왔고, 가끔은 그런 공식에서 벗어난 곡들을 다른 가수들에게 주면서 자신의 프로듀서로서의 작곡가로서의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이다. 그는 항상 자신이 하던 것을 그대로 해왔을 뿐이다.
그런 그의 음악을 그런 식의 잣대로 판단해선 곤란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아니 개인적 생각라기 보단 업계에서 통용되는 생각이다. 다행히 이 포스팅을 조금 밍기적거리는 동안에 싸이가 자신은 국가대표가 아니라는 인터뷰를 했다.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그냥 아티스트일 뿐이라 했다. 음악의 질 운운하는 사람들이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 것이다. 싸이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공화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그는 그저 자신이 하던 것을 하는 것 뿐이라는 점! 그냥 자기가 하던 것을 한 사람에게 "당신의 것이 질이 떨어져 공화국을 대표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냥 초딩이 하는 이야기로 흘려 넘기기엔 대중음악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다.
그 어느 누구도 딴따라 싸이를 정복자 싸이로 만들어선 곤란하다. 그를 정복자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는 동안 우리는 꽤 훌륭한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이자 래퍼이자 가수 한 명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냥 관중들 앞에서 삘 받으면 물 뿌리고 미친 듯 무대에서 자기 나름대로 관중들을 가지고 노는 싸이를 보고 싶을 뿐이다.
이런 사람들에겐 대단히 애석한 일이지만, 힙합은 구린 장르, Rock 음악은 대단한 장르라는 수사는 없어도 잘만든 힙합 못만든 힙합이라는 수사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음악이라는 점을 미리 좀 공부했으면 한다. 음악의 장르엔 그 장르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고 그리고 그런 전제 하에서 음악의 완성도라는 것을 얼마든지 따질 수는 있다. 하지만, 클럽 음악이라는 것은 후지고 재즈는 훌륭하고 하는 식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 동네라는 이야기다. 싸이가 뜨기 위해 이 번에 특별히 우스꽝스러운 음악을 한 것도 아니고, 그는 항상 힙합을 바탕으로 일렉트로니카 편곡을 사용한 곡들을 만들어왔고, 가끔은 그런 공식에서 벗어난 곡들을 다른 가수들에게 주면서 자신의 프로듀서로서의 작곡가로서의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이다. 그는 항상 자신이 하던 것을 그대로 해왔을 뿐이다.
그런 그의 음악을 그런 식의 잣대로 판단해선 곤란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아니 개인적 생각라기 보단 업계에서 통용되는 생각이다. 다행히 이 포스팅을 조금 밍기적거리는 동안에 싸이가 자신은 국가대표가 아니라는 인터뷰를 했다.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그냥 아티스트일 뿐이라 했다. 음악의 질 운운하는 사람들이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 것이다. 싸이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공화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그는 그저 자신이 하던 것을 하는 것 뿐이라는 점! 그냥 자기가 하던 것을 한 사람에게 "당신의 것이 질이 떨어져 공화국을 대표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냥 초딩이 하는 이야기로 흘려 넘기기엔 대중음악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다.
그 어느 누구도 딴따라 싸이를 정복자 싸이로 만들어선 곤란하다. 그를 정복자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는 동안 우리는 꽤 훌륭한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이자 래퍼이자 가수 한 명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냥 관중들 앞에서 삘 받으면 물 뿌리고 미친 듯 무대에서 자기 나름대로 관중들을 가지고 노는 싸이를 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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