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껏해야 나는 꼼수다를 들으면서 이 세상의 음모런적 이야기들을 알고 그런 선정적 호기심들을 자신들의 정치의식이라 착각하며 "너희 좌파 먹물 새끼들은 하는 게 무뭔데?"라는 새끼들...
2. 아무 것도 필요없고 한나라당과 이명박만 몰아내면 이 세상이 졸라 좋아질거라 생각하는 새끼들...
3. 제발 살려 달라면 24시간 이내에 한국군을 철수 시키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테니 제발 철군을 해달라는 사람을 두고 24시간이 채 1/4도 가기 전인 5시간 만에 "테러와는 타협없다! 절대 철군 불가"라고 단호히 이야기했던 그를 "우리 마음 속의 유일한 대통령이십니다."라며 질질 싸는 정신 나간 새끼들...
4. 다른 사람의 계급의식이라든지 당파성과 같은 점은 개무시하면서 너희들이그 분을 돌아가시게 했다고 지랄을 해대는 새끼들...
5. 다른 사람들의 당파성에 대해 처청취할 생각 따위는 없이 그저 닥치라고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하면서 기껏 그의 결론은 문재인인그 새끼... 게다가그 새끼는 자기가 황빠짓한 것에 대해서도 사과할줄 모른다. 어찌 보면그 새끼야 말로 가장 역겨운 새끼일지 모른다.
6. 이 게시물을 보고 "이 좆같은 먹물 새끼야!"라고 이야기할 너같은 새끼들...
2011년 11월 30일 수요일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29)
아님 말고 1000곡
128. Gracias a la vida-(Mercedes Spsa 1971)-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질문 중 하나가(항상 애석하게 이 가장 싫은 이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것들의 수가 세자리를 넘어간다는 것이 문제다.) "하나의 앨범을 고르라면?" "하나의 곡을 고르라면?" "한 명의 아티스트를 고른다면?"이라는 질문인데, 도대체 이런 질문을 날리는 인간들의 뇌구조는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들은 가볍게 날리는 질문일지 모르나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하는 사람의 경우 심한 경우엔 그 질문으로 인해 한 주 이상 잠을 못이룰 경우도 있다는 생각을 좀 하셔야할 것이다. 알겠냐? 이 포스트를 보는 사람들 중 제발 찔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한 번 알겠냐? 알겠어?
버뜨 그러나, 가끔은 흔쾌히 "단 하나"를 꼽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야할 경우도 있다.(이 경우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없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주시기 바란다. 문맥상, 그리고 의무감으로 동의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 취향을 뒤로 하고 "여지껏 아르헨티나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음악을 했던 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을 한 명 꼽으라면 누구를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신다면 클래식 애호가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아르게리히(아르헤리히가 맞나?)도 대단한 연주가임을 부정할 수 없고 음악사에 대단한 위치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를 강조하게 된다면 내 손을 묶고 인두를 이용해 몸을 지질 것이란 협박을 하더라도... 심지어 목에 칼이 실제로 들어온다 하더라도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라고 소리높여 외칠 것이다. 요즘 기준으로 "겨우 74세"에 유명을 달리한 그를 알리는 데에 이 포스트가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그 기쁨을 달게 받으리라는 말씀이다.
이 정말 햏햏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메르세데스 소사를 이야기하려면 누에바 깐치온(Nueva Cancion)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역사가 티렉스에게 부여한 사명일 것이 틀림 없으나 포스트가 지나치게 길어지면 곤란하므로 적당한 선에서 조절할 것임을 말씀드리며, 혹 이 포스트에서 부족하다면 다른 게시물을 통해 이야기해야할 것이다. 참! 또 한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겠지... "소사의 음반 중 어떤 음반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가?" "상관없다 모두 다!!!" "소사의 곡 중 어떤 곡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가?" "상관없다. 그의 곡이라면 모두 다! 순서는 상관 없다." "가장 훌륭한 음반은?" "닥쳐!" "가장 훌륭한 곡은?" "닥쳐!" 비틀스라는 이름이 단지 가장 유명한 밴드가 아니라 서구의 20세기 역사의 한 부분이듯, 20세기 남미대륙을 이야기할 때 소사도 남미 대륙 그 자체의 한 부분이다. 그러니 요상한 질문질들 할 생각은 하지 말도록!!!! 부탁한다.
노래 한 곡을 이야기하기 위해 길고, 할 이야기도 많은 소사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도 없으니 크게 두 가지 이야기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애초 메르세데스 소사는 페론주의자였다. 그의 정치적 여정은 페론주의자로서 시작되었으나 (이 점이 아르헨티나 지식인들 혹은 활동가들의 대단히 불가사의한 점들 중 하나인데) 좌파의 대의명분에 대한 지지를 평생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삶에 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호르헤 비델라(Jorge Videla)의 군부가 아르헨티나에서 집권하게 된 1976년부터 시작된다.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은 페론주의자이며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던 메르세데스 소사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노골화했으며 그러한 군사정원의 소사에 대한 탄압이 정점에 이르렀던 사건은 1979년 소사의 La Plata 공연에서 소사는 물론이고 공연장의 관객들까지 경찰에 의해 구속된 것이었다. 그리고 당근 소사는 그 일 이후 아르헨티나에서 추방되었고 군사정권이 무너진 1982년에 다시 귀국한 뒤로도 정권과 그다지 매끄러운 관계를 유지하진 못했다 할 수 있다.
카를로스 메넴(Carlos Menem)은 1989년부터 1999년에 이르는 10년간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을 지낸 인물인데 그의 집권기에도 메르세데스 소사는 아르헨티나 정부와 그다지 매끄러운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정치적으로 Néstor Kirchner의 지지자였으며 그는 메넴 대통령의 정적, 이 표현이 심하다면, 혹은 라이벌 관계에 있었으며 소사의 그에 대한 공개적 지지는 메넴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라 보여진다. 물론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 메넴의 집권기에 소사는 음악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하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소사의 활동을 일일이 예시하며 "이래도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다고 할 참이냐?"고 한다면 뭐 아님 말고... 라는 답을 할 수밖엔 없지만 Kirchner가 집권한 2003년 이후의 소사의 활동이 더 두듣러진 것은 나를 패고 싶은 사람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소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아르헨티나에서는 Nuevo Cancionero라 불리는 남미 남미 대륙의 Modern folk movement라 할 수 있는 Nueva Cancion Movement이다. 메르세데스 소사와 그의 첫 남편인 마누엘 오스카 마투스가 주도한 이 포크 운동의 정점은 아르헨티나의 포크 음악들을 집대성하여 출반한 소사의 두번째 앨범인 Canciones con Fundamento에서 정점을 이룬다. 1960년대 남미를 휩쓴 이 포크 운동의 핵심은 미국 자본과 그의 꼭두각시 놀음을 하는 당시 남미의 정권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매장되었던 (남미의 포크 음악의 말살과정은 사실상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미의 문화-특히 그들의 포크 음악 또는 민속 음악-을 있는 그대로 발굴하여 음악적인 색을 찾자는 것이었다. 아! 또 이야기가 길어진다. 아무튼 소사는 위대하고 오늘 소개할 곡은 소사의 Signature Song이라 불리는 Gracias a la vida이다. 궁금한 점 있으면 gmail을 통해 질문하시고 그 중 참한 녀석이 있으면 게시물을 통해 답변 드리겠다.
128. Gracias a la vida-(Mercedes Spsa 1971)-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질문 중 하나가(항상 애석하게 이 가장 싫은 이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것들의 수가 세자리를 넘어간다는 것이 문제다.) "하나의 앨범을 고르라면?" "하나의 곡을 고르라면?" "한 명의 아티스트를 고른다면?"이라는 질문인데, 도대체 이런 질문을 날리는 인간들의 뇌구조는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들은 가볍게 날리는 질문일지 모르나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하는 사람의 경우 심한 경우엔 그 질문으로 인해 한 주 이상 잠을 못이룰 경우도 있다는 생각을 좀 하셔야할 것이다. 알겠냐? 이 포스트를 보는 사람들 중 제발 찔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한 번 알겠냐? 알겠어?
버뜨 그러나, 가끔은 흔쾌히 "단 하나"를 꼽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야할 경우도 있다.(이 경우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없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주시기 바란다. 문맥상, 그리고 의무감으로 동의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 취향을 뒤로 하고 "여지껏 아르헨티나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음악을 했던 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을 한 명 꼽으라면 누구를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신다면 클래식 애호가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아르게리히(아르헤리히가 맞나?)도 대단한 연주가임을 부정할 수 없고 음악사에 대단한 위치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를 강조하게 된다면 내 손을 묶고 인두를 이용해 몸을 지질 것이란 협박을 하더라도... 심지어 목에 칼이 실제로 들어온다 하더라도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라고 소리높여 외칠 것이다. 요즘 기준으로 "겨우 74세"에 유명을 달리한 그를 알리는 데에 이 포스트가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그 기쁨을 달게 받으리라는 말씀이다.
이 정말 햏햏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메르세데스 소사를 이야기하려면 누에바 깐치온(Nueva Cancion)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역사가 티렉스에게 부여한 사명일 것이 틀림 없으나 포스트가 지나치게 길어지면 곤란하므로 적당한 선에서 조절할 것임을 말씀드리며, 혹 이 포스트에서 부족하다면 다른 게시물을 통해 이야기해야할 것이다. 참! 또 한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겠지... "소사의 음반 중 어떤 음반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가?" "상관없다 모두 다!!!" "소사의 곡 중 어떤 곡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가?" "상관없다. 그의 곡이라면 모두 다! 순서는 상관 없다." "가장 훌륭한 음반은?" "닥쳐!" "가장 훌륭한 곡은?" "닥쳐!" 비틀스라는 이름이 단지 가장 유명한 밴드가 아니라 서구의 20세기 역사의 한 부분이듯, 20세기 남미대륙을 이야기할 때 소사도 남미 대륙 그 자체의 한 부분이다. 그러니 요상한 질문질들 할 생각은 하지 말도록!!!! 부탁한다.
노래 한 곡을 이야기하기 위해 길고, 할 이야기도 많은 소사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도 없으니 크게 두 가지 이야기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애초 메르세데스 소사는 페론주의자였다. 그의 정치적 여정은 페론주의자로서 시작되었으나 (이 점이 아르헨티나 지식인들 혹은 활동가들의 대단히 불가사의한 점들 중 하나인데) 좌파의 대의명분에 대한 지지를 평생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삶에 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호르헤 비델라(Jorge Videla)의 군부가 아르헨티나에서 집권하게 된 1976년부터 시작된다.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은 페론주의자이며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던 메르세데스 소사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노골화했으며 그러한 군사정원의 소사에 대한 탄압이 정점에 이르렀던 사건은 1979년 소사의 La Plata 공연에서 소사는 물론이고 공연장의 관객들까지 경찰에 의해 구속된 것이었다. 그리고 당근 소사는 그 일 이후 아르헨티나에서 추방되었고 군사정권이 무너진 1982년에 다시 귀국한 뒤로도 정권과 그다지 매끄러운 관계를 유지하진 못했다 할 수 있다.
카를로스 메넴(Carlos Menem)은 1989년부터 1999년에 이르는 10년간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을 지낸 인물인데 그의 집권기에도 메르세데스 소사는 아르헨티나 정부와 그다지 매끄러운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정치적으로 Néstor Kirchner의 지지자였으며 그는 메넴 대통령의 정적, 이 표현이 심하다면, 혹은 라이벌 관계에 있었으며 소사의 그에 대한 공개적 지지는 메넴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라 보여진다. 물론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 메넴의 집권기에 소사는 음악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하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소사의 활동을 일일이 예시하며 "이래도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다고 할 참이냐?"고 한다면 뭐 아님 말고... 라는 답을 할 수밖엔 없지만 Kirchner가 집권한 2003년 이후의 소사의 활동이 더 두듣러진 것은 나를 패고 싶은 사람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소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아르헨티나에서는 Nuevo Cancionero라 불리는 남미 남미 대륙의 Modern folk movement라 할 수 있는 Nueva Cancion Movement이다. 메르세데스 소사와 그의 첫 남편인 마누엘 오스카 마투스가 주도한 이 포크 운동의 정점은 아르헨티나의 포크 음악들을 집대성하여 출반한 소사의 두번째 앨범인 Canciones con Fundamento에서 정점을 이룬다. 1960년대 남미를 휩쓴 이 포크 운동의 핵심은 미국 자본과 그의 꼭두각시 놀음을 하는 당시 남미의 정권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매장되었던 (남미의 포크 음악의 말살과정은 사실상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미의 문화-특히 그들의 포크 음악 또는 민속 음악-을 있는 그대로 발굴하여 음악적인 색을 찾자는 것이었다. 아! 또 이야기가 길어진다. 아무튼 소사는 위대하고 오늘 소개할 곡은 소사의 Signature Song이라 불리는 Gracias a la vida이다. 궁금한 점 있으면 gmail을 통해 질문하시고 그 중 참한 녀석이 있으면 게시물을 통해 답변 드리겠다.
2011년 9월 26일 월요일
낭만의 종언(Soundless Music)
우리의 한계인간군은장효조와 최동원의 죽음, 너바나의 베스트 앨범, 그리고 R.E.M.의 해체라는 작금의 이 상서로운 일들의 연쇄를 두고 이제 낭만은 없다고 선언했다. 낭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으나 지금과는 굉장히 달랐던 90년대 후반의 인사동 일대를 뒤지며 맛있는 음식과 밀주를 들이키며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한계인간과 나누며 늦은 시간까지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던 종류의 비생산적 일들을 낭만이라 정의할 수 있다면 빌어먹을 2011년은 이미 낭만이 없어진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꿈극장도 검은 안식도 소리정원도 이젠 현재진행형의 일반명사가 아니라 과거완료형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을 낭만의 종언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밀주라 해서 대단한 것을 떠올리시진 말라! 그냥 지금은인사동에도얼마 남지 않았지만 인사동의 오래된 전통찻집에서는 직접 담은 과일주등을 파는 곳이 있었다. 그 것을 우리는 밀주라 일컬었다. 그리고 그 맛은 밀주가 아닌 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면 약오르시려나?
그냥 보내기는 억울하고 그렇다고 지금 시점에서 이들이 서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고 해서 울고불고 한다면 심하게 오글거릴 일이라 30년, 정확하게는 31년만에 해체한이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는데 결론적으로 위키피디아를 쳐보면, 혹은 구글링을 해보면다 나올 이들의 프로파일에 대해긴 이야기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음악적으로는 마이클 스타이프에 의해 American Punk Rock이 Alteernative Rock이라는 장르로 재편되었다는 이야기라든지 대학교 교내방송을 통해 전국적인-급기야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비교적 양심적인 신문사들의 수준을 넘지 않는 것일테니 심히 가오 떨어지는 일이라할 것이다.한계인간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가쓴 "낭만은 끝났다"는 문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Alternative의 조상인 이들을보내며 해야할 이야기 중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이 "낭만"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야기는 1991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적인 이야기를 좀 하자면 대학이라는 곳은 갈수록 흥미를 잃게 만들고 있었으나 딱히 그 곳을 떠날 정도로 용기가 있거나 그 정도로 싫진 않았던 시기였다. 물론 그 다음 해 학교라는 공간에서 그렇게 많은 일이 터질 줄 알았다면 그렇게 무기력하진 않았을 것이다. 1991년 1학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강경대는 빌어먹을 전경 새끼들의 쇠파이프에 맞아 저 세상으로 갔고 그 뒤로 전남대생 한 명이(이름이 얼핏 기억나나 틀리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분신이라는 방법으로 유명을 달리 했고 강경대의 죽음 이후에 이어지던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시위가 계속되던 중 내가 전경들에게 쫓기던 을지로와충무로가 견결되는 도로의 바로 옆 블럭에서 김귀정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 때 대학을 다니던 사람이라면 섣불리 "혁명의 달콤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내 손에 의해 혁명이 다가올 것이란 생각을 충분히 할만한 상황이라 판단하고 있었고 그런 역사의 대오에서 이탈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역사상 처음으로 물에 최루액과 형광용액이 들어간 살수차가 처음 등장했을 정도로 치열했던 1991년은-당연히 당시에 윗옷을 두벌 가지고 다니는 것은 적들에 대한 일종의 예의이기도 했다.-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뭐 아름다운 이야기씩이나 된다고 그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겠는가? 누군가에겐 1991년 늦봄이 추억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추억이니 어쩌니 했으면 하는 자그마한 바람이 있다. 그 후로는 급기야 소비에트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무거워지는 이야기들만 들렸을 뿐이니 여지껏 장독의 맨 밑에 숨어있던 맹독성의 자그마한 항아리 하나를 개봉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2학기는 시작되고 여전히 우울하기 짝이 없고 심지어 술도 맛없는(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지만...) 이상한 현상까지 벌어지지 않았던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1989년 6월의 어느날 서울광진구(당시는 성동구)에 위치했던 S 모 초등학교 동창인 L모와 함께 대학로의 그 유명한 MTV이라는 곳을 알게된 후로 모든 것이 귀찮고 심지어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지고 결정적으로 대인관계를 일종의 게임처럼 풀어나갈 수 없을 때엔 그 곳에서 당시 3000원 하던 병맥주 하나를 시켜놓고-지금도 기억나는 그 이름은 스타우트였다.- 청순한 긴 생머리를 자랑하는 기타치고 노래하는 밴드 형들에게 꼽사리 껴서 담배도 같이 피우고 미친듯이...까지는 아니고 적당한 수준의 헤드뱅잉을 하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사실 거기 오는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맥주 두 병을 마시면서 12시에 문을 여는 MTV에서 밤 11시까지 시간을 보내는 인간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즈음 어머니 생신 무렵이었으니 대략 11월 초순이었던 것 같다. 최소한 나를 때리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형 한 명이 내게 테입을 전해주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메탈은 아니지만 한 번 들어봐봐 뭔가 남는 것이 있을 거다."
그 형도 아는 형으로부터 어렵사리 얻은 미국에서 비행기 타고온 CD를 오리지널 테입으로 만든 것인데 내가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카피했다면서 특유의 담배 쩐내를 내게 풍기며 테입을 전해줬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난
"형 제가 돈이 없어 형 맥주 한 병 더 사드릴 수는 없지만(그 곳은 선불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형에 대한 사랑을 과도하게 느끼고 있는 것 아시죠?"
"닥치고 잘 듣기나 해..."
그 앨범이 바로 R.E.M.의 Automatic for the people이었고 그 앨범이 발매된 것이 1991년 10월 초였으니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감상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물론 그런 행운이 인생에서 항상 나와 함께 했던 것은 아니지만...
"Everybody hurts" 이 단순하기 짝이 없고 심지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정직한 연주에 아주 소박한 오케스트레이션이 가미된그 곡을 듣고난 R.E.M.이라는 팀을 그리고 그들의 프런트맨이었던 마이클 스타이프를 동경하지 않을수 없었다. 혁명이 저만치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그에 대한 분노건 아니면 더 이상 맹목적인 애정을 쏟을 대상이 없어진 것에 대한 회한이건 술을 처먹으며 R.E.M.의 음악을 듣거나 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분명히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1991년과 1992년을 거치며 지금도 심하게 앓고있는 "냉소주의"라는 병을 떨치고는 살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분명히 말하건데 아마도 그 당시에 R.E.M.의 "Everybody hurts"이 없었다면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보물을 손에 넣었다는 것을 동생에겐 말하지 않은 것을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사과하지만, 그 때는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해줄 것이라 믿는다.
정말 한계인간의 말대로 이제 낭만은 없어진 것일까?
R.E.M.의 해체라는 것으로 그런 큰 담론을 꺼낼 수 있는 것일까?
최소한 1990년대라는 시기는 이제 내게서 거의 완벽하게 사라져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Everybody hurts 요 곡은 과도하게 많이 들었을테니 다른 곡을 들어보시길...
이 곡은 작성자 권한으로 소스코드를 제공하지 않는단다.
빌어먹을!!!!
http://youtu.be/xQN7A6Vl1H4
그냥 보내기는 억울하고 그렇다고 지금 시점에서 이들이 서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고 해서 울고불고 한다면 심하게 오글거릴 일이라 30년, 정확하게는 31년만에 해체한이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는데 결론적으로 위키피디아를 쳐보면, 혹은 구글링을 해보면다 나올 이들의 프로파일에 대해긴 이야기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음악적으로는 마이클 스타이프에 의해 American Punk Rock이 Alteernative Rock이라는 장르로 재편되었다는 이야기라든지 대학교 교내방송을 통해 전국적인-급기야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비교적 양심적인 신문사들의 수준을 넘지 않는 것일테니 심히 가오 떨어지는 일이라할 것이다.한계인간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가쓴 "낭만은 끝났다"는 문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Alternative의 조상인 이들을보내며 해야할 이야기 중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이 "낭만"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야기는 1991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적인 이야기를 좀 하자면 대학이라는 곳은 갈수록 흥미를 잃게 만들고 있었으나 딱히 그 곳을 떠날 정도로 용기가 있거나 그 정도로 싫진 않았던 시기였다. 물론 그 다음 해 학교라는 공간에서 그렇게 많은 일이 터질 줄 알았다면 그렇게 무기력하진 않았을 것이다. 1991년 1학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강경대는 빌어먹을 전경 새끼들의 쇠파이프에 맞아 저 세상으로 갔고 그 뒤로 전남대생 한 명이(이름이 얼핏 기억나나 틀리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분신이라는 방법으로 유명을 달리 했고 강경대의 죽음 이후에 이어지던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시위가 계속되던 중 내가 전경들에게 쫓기던 을지로와충무로가 견결되는 도로의 바로 옆 블럭에서 김귀정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 때 대학을 다니던 사람이라면 섣불리 "혁명의 달콤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내 손에 의해 혁명이 다가올 것이란 생각을 충분히 할만한 상황이라 판단하고 있었고 그런 역사의 대오에서 이탈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역사상 처음으로 물에 최루액과 형광용액이 들어간 살수차가 처음 등장했을 정도로 치열했던 1991년은-당연히 당시에 윗옷을 두벌 가지고 다니는 것은 적들에 대한 일종의 예의이기도 했다.-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뭐 아름다운 이야기씩이나 된다고 그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겠는가? 누군가에겐 1991년 늦봄이 추억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추억이니 어쩌니 했으면 하는 자그마한 바람이 있다. 그 후로는 급기야 소비에트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무거워지는 이야기들만 들렸을 뿐이니 여지껏 장독의 맨 밑에 숨어있던 맹독성의 자그마한 항아리 하나를 개봉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2학기는 시작되고 여전히 우울하기 짝이 없고 심지어 술도 맛없는(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지만...) 이상한 현상까지 벌어지지 않았던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1989년 6월의 어느날 서울광진구(당시는 성동구)에 위치했던 S 모 초등학교 동창인 L모와 함께 대학로의 그 유명한 MTV이라는 곳을 알게된 후로 모든 것이 귀찮고 심지어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지고 결정적으로 대인관계를 일종의 게임처럼 풀어나갈 수 없을 때엔 그 곳에서 당시 3000원 하던 병맥주 하나를 시켜놓고-지금도 기억나는 그 이름은 스타우트였다.- 청순한 긴 생머리를 자랑하는 기타치고 노래하는 밴드 형들에게 꼽사리 껴서 담배도 같이 피우고 미친듯이...까지는 아니고 적당한 수준의 헤드뱅잉을 하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사실 거기 오는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맥주 두 병을 마시면서 12시에 문을 여는 MTV에서 밤 11시까지 시간을 보내는 인간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즈음 어머니 생신 무렵이었으니 대략 11월 초순이었던 것 같다. 최소한 나를 때리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형 한 명이 내게 테입을 전해주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메탈은 아니지만 한 번 들어봐봐 뭔가 남는 것이 있을 거다."
그 형도 아는 형으로부터 어렵사리 얻은 미국에서 비행기 타고온 CD를 오리지널 테입으로 만든 것인데 내가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카피했다면서 특유의 담배 쩐내를 내게 풍기며 테입을 전해줬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난
"형 제가 돈이 없어 형 맥주 한 병 더 사드릴 수는 없지만(그 곳은 선불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형에 대한 사랑을 과도하게 느끼고 있는 것 아시죠?"
"닥치고 잘 듣기나 해..."
그 앨범이 바로 R.E.M.의 Automatic for the people이었고 그 앨범이 발매된 것이 1991년 10월 초였으니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감상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물론 그런 행운이 인생에서 항상 나와 함께 했던 것은 아니지만...
"Everybody hurts" 이 단순하기 짝이 없고 심지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정직한 연주에 아주 소박한 오케스트레이션이 가미된그 곡을 듣고난 R.E.M.이라는 팀을 그리고 그들의 프런트맨이었던 마이클 스타이프를 동경하지 않을수 없었다. 혁명이 저만치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그에 대한 분노건 아니면 더 이상 맹목적인 애정을 쏟을 대상이 없어진 것에 대한 회한이건 술을 처먹으며 R.E.M.의 음악을 듣거나 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분명히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1991년과 1992년을 거치며 지금도 심하게 앓고있는 "냉소주의"라는 병을 떨치고는 살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분명히 말하건데 아마도 그 당시에 R.E.M.의 "Everybody hurts"이 없었다면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보물을 손에 넣었다는 것을 동생에겐 말하지 않은 것을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사과하지만, 그 때는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해줄 것이라 믿는다.
정말 한계인간의 말대로 이제 낭만은 없어진 것일까?
R.E.M.의 해체라는 것으로 그런 큰 담론을 꺼낼 수 있는 것일까?
최소한 1990년대라는 시기는 이제 내게서 거의 완벽하게 사라져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Everybody hurts 요 곡은 과도하게 많이 들었을테니 다른 곡을 들어보시길...
이 곡은 작성자 권한으로 소스코드를 제공하지 않는단다.
빌어먹을!!!!
http://youtu.be/xQN7A6Vl1H4
2011년 9월 20일 화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28)
아님 말고 1000곡(128)
128. The Freinds of Mr. Cairo-Jon and Vangelis-
이 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앞서 몇가지 던져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우선, 이제 더 이상 연주력을 가진 Synthesizer 연주자는 사라진 것인가? 라는 점이다. 신서사이저라는 악기는 처음 팝음악 신에 도입되었을 때를 회상해본다면 현재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보편적인 악기가 되었고, 심지어 곡 작업을 하면서 신서사이저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찾는 일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보편적인 악기가 되었다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과연 신서사이저가 보편적이 되었다고 해서 신서사이저의 쓰임이 더 효율적이 되었는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신서사이저 연주자들의 연주력이 과연 신서사이저가 도입되어 사용되던 처창기에 비해 월등해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선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힌다.
질문 2라 할 수 있는 것은 좀 더 본질적일 수 있는 이야기인데, 과연 신서사이저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것과 통할 수 있을만한 이야기인데, 신서사이저와 여타의 건반악기. 특히나 피아노,는 어느 정도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꼭 피아노를 칠 줄 알아야 신서사이저를 다룰 수 있는가? 이 이야기는 신서사이저를 대중음악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것인가와도 연관된 문제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질문이기 하나, 이에 대해선 두 사람의 전혀 상반된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을 대신하려 한다. 우선 반겔리스의 경우엔 "피아노를 전혀 다룰 줄 올라도 신서아이저를 사용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고 릭 웨이크먼이나 키스 에머슨의 경우엔 "자신의 클래식 피아노에 대한 학습이 신서아이저 연주자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냥 사족을 달자면, 하몬드 오르간이나 파으프 오르간과는 달리 신서사이저의 핵심은 모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퀀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있다고 보는 것이 내 견해라는 이야기.,..
이런 구질구질하며 허섭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반겔리스 파파사나시우라는 신서사이저의 대가를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함이다. 이미 알고 있으니 소개 따위는 필요 없다고? 당연하다. 공화국에서 문맹이 아닌 이상 반겔리스를 모르는 일은 대단히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를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따라서 반겔리스 파파사나시우(Evangelis Papathanassiou)라는 사람이 위에서 지저분하게 이야기한 신서사이저라는 악기의 대가 중의 대가로 꼽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대가, yes의 보컬리스트로 유명한 존 앤더슨이 있다. 존 앤더슨 역시 두 말하면 입만 아픈 British Rock Scene의 불세출의 보컬리스트지만, 70년대의 그 험난한 rock scene을 거쳐오며 다른 보컬리스트들은 누리지 못한 독특한 위치를 누린 인물이다. 어떤 부분에 보컬리스트의 음악적 가치를 두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존 앤더슨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보컬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가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의 fact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인물임엔 틀림없을 것이다.
에반겔리스 파파사나시우와 존 앤더슨이 처음 함께 작업하기로 결심을 한 것은 존이 처음으로 YES을 탈퇴했던 시기인 1979년으로 올라간다. 아! 물론 애석하게도 이들은 더 이상 Jon and Vangelis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그 시기는 존 앤더슨인 예스를 떠나고 예스는 전설적인 테크노 듀오인 버글스의 죠프리 다운스와 후에 예스의 프로듀서로 자신의 음악적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트래버 혼-트레버 레빈과 혼돈하지 말 것!-을 통째로(?) 받아들여, 이미 여러차례 밝혔듯 개인적으로는 예스의 최고 앨범으로 평가하는 "Drama"를 위한 작업에 돌입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두 명의 대가는 1980년에 그들의 첫번째 앨범인 "Short Stones"을 발매하게 된다. 물론 그들의 활동시기를 1979년에서 1991년으로 이야기하는 데에는 1980년 그들의 정규앨범이 나오기 전 해에 "I hear you now"이라는 타이틀의 싱글을 발매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당신들이 처죽기 전에 반드시 듣고 죽어야할 128번째의 곡은 그들의 두번째 앨범인 "The friends of Mr. Cairo"(1981)의 동명의 타이틀 곡이다. 만일 "작품성도 인정받고 싶고 대중적으로도 성공할만한 곡"을 쓰고 싶은 작곡가가 있다면 무조건 이 곡에 대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착실하게 분석하라는 말을 자신있게 권해주고 싶을만큼 이 곡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정도로 좋은 곡이다. 대중적으로도 작품의 측면에서도 성공하려면 동시에 갖춰야할 몇가지 욧소가 있는데 이 곡은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곡이라 할 것이다. 전문가라 불리는 혹은 스스로를 칭하는 사람마다 그 반드시 갖춰야할 요소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의견이 있을테고 반드시 그 것이 일치하진 않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사가 가지는 서사성의 완벽함, 가사가 가지는 서사성을 받춰줄 수 있는 곡의 형식적 구성, 마지막으로 보컬과 그 외의 인스트루먼트들을 동시에 지칭할 수 있는 "연주력"이 갖춰진다면 작품이나 인지도라는 두 가지의 측면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것은 개인적 견해다. 아니면 말고...
12분 11초에 달하는 이 대곡은-물론 대곡이라는 것이 곡의 연주시간만으로 이야기할 수있는 부분은 아니다. 당연히!-가상의 영화속의 대화를 중신으로 곡의 파트가 바뀌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우선 도입부에 이 곡이, 그리고 이 곡 속의 영화가 어떻게 전개되어갈지를 암시하는 첫번째 대사들이 나온 다음, 베이스 스케일과 함께 곡의 도입부로 들어간다. 곡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베이스의 스케일은 존 앤더슨의 보컬과 Paralell하게 진행되며 지나치게 단순하지도 지나치게 난해해자도 않은-반겔리스의 솔로 앨범들이 이 음반이 나오기 전엔 서구의 대중음악 음반 중 가장 난해한 작품에 속했던 것에 비한다면 이는 놀라운 변화라 할 것이다.- 편곡과 yes의 보컬로 대중에게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있으나 대중음악의 mainstream과는 이질적인 존 앤더슨의 보컬 역시 yes에서의 보컬에 비해선 대단히 대중적인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12분 11초라는 곡의 연주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둘의 chemistry는 기대한 것 이상이다. 닐 션과 얀 해머의 션$해머 프로젝트가 저니의 음반이나 얀 해머의 솔로 음반보다도 더 본격적인 작품성을 추구했던 것에 비하면 (물론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나) Jon & Vangelis의 프로젝트는 자신들의 본래 작업보다 훠씬 더 대중적이고 직설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지만 결코 유치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그러나 실상 이 곡이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곡에서 들을 수 있는 그들의 연주력 보다는 곡의 구성이다. 이 곡은 특이하게도 도입부에서 전개 그리고 발전으로 연결되다가 발전부의 변형이 한 번 더 연주된 후 대단원이 없이 그 상태에서 곧바로 심하게 하강해버리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곡 안의 영화 혹은 곡 자체에서 미스터 카이로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언급 등은 생략한 채 결국 곡의 종결을 맞이하게 된다. 이 것은 가사 뿐 아니라 이 곡 안에서 대단히 유용하게 사용되는 보이스 트랙으로 곡을 끝내며 미스터 카이로의 대사가 결국 영사기의 테입이 결말을 들려주지 못한 채, 끝까지 감기며 결국 미스터 카이로의 마지막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생략한 채 곡의 종결을 마무리한다. 앞서 뭔가 휠을 잡고 싶은 작곡가는 이 곡을 철저하게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했으나, 이 곡의 구성이나 편곡 방식 등을 그대로 따라하게 되면 거덜날 수도 있을 것이다. 12분 11초의 긴 시간을 이토록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도 없이 타이트한 구성을 통해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은 보통의 능력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여러분들은 곡의 마지막에서 테입이 끝까지 감기는 것을 듣게 되는 마지막 순간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아님 말고...
뱀발> 보노소년님께서 존 & 반겔리스의 궁합 또는 파트너쉽이 기가막힌 것 같다 하신 말씀에 나는 이런 저질 답변을 드렸다. "그들은 곡 작업은 철저하게 둘이 공동으로 존의 작사에 대해선 반겔리스가 절대 관여하지 않고 반겔리스의 편곡에 대해선 존이 절대 관여하지 않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분업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이 최상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비결"이라고... 솔직히 좀 허섭한 답변이긴 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핵심엔 어느 정도 접근한 답변이었다는 생각이다.
128. The Freinds of Mr. Cairo-Jon and Vangelis-
이 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앞서 몇가지 던져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우선, 이제 더 이상 연주력을 가진 Synthesizer 연주자는 사라진 것인가? 라는 점이다. 신서사이저라는 악기는 처음 팝음악 신에 도입되었을 때를 회상해본다면 현재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보편적인 악기가 되었고, 심지어 곡 작업을 하면서 신서사이저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찾는 일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보편적인 악기가 되었다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과연 신서사이저가 보편적이 되었다고 해서 신서사이저의 쓰임이 더 효율적이 되었는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신서사이저 연주자들의 연주력이 과연 신서사이저가 도입되어 사용되던 처창기에 비해 월등해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선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힌다.
질문 2라 할 수 있는 것은 좀 더 본질적일 수 있는 이야기인데, 과연 신서사이저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것과 통할 수 있을만한 이야기인데, 신서사이저와 여타의 건반악기. 특히나 피아노,는 어느 정도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꼭 피아노를 칠 줄 알아야 신서사이저를 다룰 수 있는가? 이 이야기는 신서사이저를 대중음악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것인가와도 연관된 문제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질문이기 하나, 이에 대해선 두 사람의 전혀 상반된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을 대신하려 한다. 우선 반겔리스의 경우엔 "피아노를 전혀 다룰 줄 올라도 신서아이저를 사용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고 릭 웨이크먼이나 키스 에머슨의 경우엔 "자신의 클래식 피아노에 대한 학습이 신서아이저 연주자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냥 사족을 달자면, 하몬드 오르간이나 파으프 오르간과는 달리 신서사이저의 핵심은 모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퀀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있다고 보는 것이 내 견해라는 이야기.,..
이런 구질구질하며 허섭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반겔리스 파파사나시우라는 신서사이저의 대가를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함이다. 이미 알고 있으니 소개 따위는 필요 없다고? 당연하다. 공화국에서 문맹이 아닌 이상 반겔리스를 모르는 일은 대단히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를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따라서 반겔리스 파파사나시우(Evangelis Papathanassiou)라는 사람이 위에서 지저분하게 이야기한 신서사이저라는 악기의 대가 중의 대가로 꼽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대가, yes의 보컬리스트로 유명한 존 앤더슨이 있다. 존 앤더슨 역시 두 말하면 입만 아픈 British Rock Scene의 불세출의 보컬리스트지만, 70년대의 그 험난한 rock scene을 거쳐오며 다른 보컬리스트들은 누리지 못한 독특한 위치를 누린 인물이다. 어떤 부분에 보컬리스트의 음악적 가치를 두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존 앤더슨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보컬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가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의 fact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인물임엔 틀림없을 것이다.
에반겔리스 파파사나시우와 존 앤더슨이 처음 함께 작업하기로 결심을 한 것은 존이 처음으로 YES을 탈퇴했던 시기인 1979년으로 올라간다. 아! 물론 애석하게도 이들은 더 이상 Jon and Vangelis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그 시기는 존 앤더슨인 예스를 떠나고 예스는 전설적인 테크노 듀오인 버글스의 죠프리 다운스와 후에 예스의 프로듀서로 자신의 음악적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트래버 혼-트레버 레빈과 혼돈하지 말 것!-을 통째로(?) 받아들여, 이미 여러차례 밝혔듯 개인적으로는 예스의 최고 앨범으로 평가하는 "Drama"를 위한 작업에 돌입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두 명의 대가는 1980년에 그들의 첫번째 앨범인 "Short Stones"을 발매하게 된다. 물론 그들의 활동시기를 1979년에서 1991년으로 이야기하는 데에는 1980년 그들의 정규앨범이 나오기 전 해에 "I hear you now"이라는 타이틀의 싱글을 발매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당신들이 처죽기 전에 반드시 듣고 죽어야할 128번째의 곡은 그들의 두번째 앨범인 "The friends of Mr. Cairo"(1981)의 동명의 타이틀 곡이다. 만일 "작품성도 인정받고 싶고 대중적으로도 성공할만한 곡"을 쓰고 싶은 작곡가가 있다면 무조건 이 곡에 대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착실하게 분석하라는 말을 자신있게 권해주고 싶을만큼 이 곡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정도로 좋은 곡이다. 대중적으로도 작품의 측면에서도 성공하려면 동시에 갖춰야할 몇가지 욧소가 있는데 이 곡은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곡이라 할 것이다. 전문가라 불리는 혹은 스스로를 칭하는 사람마다 그 반드시 갖춰야할 요소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의견이 있을테고 반드시 그 것이 일치하진 않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사가 가지는 서사성의 완벽함, 가사가 가지는 서사성을 받춰줄 수 있는 곡의 형식적 구성, 마지막으로 보컬과 그 외의 인스트루먼트들을 동시에 지칭할 수 있는 "연주력"이 갖춰진다면 작품이나 인지도라는 두 가지의 측면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것은 개인적 견해다. 아니면 말고...
12분 11초에 달하는 이 대곡은-물론 대곡이라는 것이 곡의 연주시간만으로 이야기할 수있는 부분은 아니다. 당연히!-가상의 영화속의 대화를 중신으로 곡의 파트가 바뀌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우선 도입부에 이 곡이, 그리고 이 곡 속의 영화가 어떻게 전개되어갈지를 암시하는 첫번째 대사들이 나온 다음, 베이스 스케일과 함께 곡의 도입부로 들어간다. 곡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베이스의 스케일은 존 앤더슨의 보컬과 Paralell하게 진행되며 지나치게 단순하지도 지나치게 난해해자도 않은-반겔리스의 솔로 앨범들이 이 음반이 나오기 전엔 서구의 대중음악 음반 중 가장 난해한 작품에 속했던 것에 비한다면 이는 놀라운 변화라 할 것이다.- 편곡과 yes의 보컬로 대중에게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있으나 대중음악의 mainstream과는 이질적인 존 앤더슨의 보컬 역시 yes에서의 보컬에 비해선 대단히 대중적인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12분 11초라는 곡의 연주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둘의 chemistry는 기대한 것 이상이다. 닐 션과 얀 해머의 션$해머 프로젝트가 저니의 음반이나 얀 해머의 솔로 음반보다도 더 본격적인 작품성을 추구했던 것에 비하면 (물론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나) Jon & Vangelis의 프로젝트는 자신들의 본래 작업보다 훠씬 더 대중적이고 직설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지만 결코 유치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그러나 실상 이 곡이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곡에서 들을 수 있는 그들의 연주력 보다는 곡의 구성이다. 이 곡은 특이하게도 도입부에서 전개 그리고 발전으로 연결되다가 발전부의 변형이 한 번 더 연주된 후 대단원이 없이 그 상태에서 곧바로 심하게 하강해버리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곡 안의 영화 혹은 곡 자체에서 미스터 카이로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언급 등은 생략한 채 결국 곡의 종결을 맞이하게 된다. 이 것은 가사 뿐 아니라 이 곡 안에서 대단히 유용하게 사용되는 보이스 트랙으로 곡을 끝내며 미스터 카이로의 대사가 결국 영사기의 테입이 결말을 들려주지 못한 채, 끝까지 감기며 결국 미스터 카이로의 마지막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생략한 채 곡의 종결을 마무리한다. 앞서 뭔가 휠을 잡고 싶은 작곡가는 이 곡을 철저하게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했으나, 이 곡의 구성이나 편곡 방식 등을 그대로 따라하게 되면 거덜날 수도 있을 것이다. 12분 11초의 긴 시간을 이토록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도 없이 타이트한 구성을 통해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은 보통의 능력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여러분들은 곡의 마지막에서 테입이 끝까지 감기는 것을 듣게 되는 마지막 순간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아님 말고...
뱀발> 보노소년님께서 존 & 반겔리스의 궁합 또는 파트너쉽이 기가막힌 것 같다 하신 말씀에 나는 이런 저질 답변을 드렸다. "그들은 곡 작업은 철저하게 둘이 공동으로 존의 작사에 대해선 반겔리스가 절대 관여하지 않고 반겔리스의 편곡에 대해선 존이 절대 관여하지 않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분업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이 최상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비결"이라고... 솔직히 좀 허섭한 답변이긴 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핵심엔 어느 정도 접근한 답변이었다는 생각이다.
2011년 8월 29일 월요일
이것저것 다 귀찮으니...(월드컵의 역사!)
1. 시작은 축구와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부터...
물론 공화국의 각 언론엔 통한의 패배니 어쩌니 하며 일요일의 한국과 중국의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대회 결승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냉정해지자. 통한은 개뿔! 얼어죽을 석패! 빌어먹을 심판의 편파판정! 다 웃기는 이야기다. 사실상 신기한 것은 아직 70년대의 패러다임에서 전혀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한국 대표팀을 상대로 중국이 그렇게 고전을 했다는 사실이다.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양 손으로 밀어 던지며 "제발 내 슛을 블락해주세요!"라고 외치는 미들 슛과 삼점 슛! 그 어느 상황에서도 벌의 진행방향의 앞에서 상대를 수비해야 한다는 농구의 기본 중의 기본은 다 밥말아먹은 듯한 엉성한 수비! 공보다는 사람을 먼저 지키는 것이 수비라는 것을 무시한 공만 우루루 따라다니는 수비! 상대방의 뒤에서 수비를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혹은 기량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수비를 할 때 필요 이상으로 손을 쓰는 플레이... 이런 것들에 대한 지적은 1mm도 하지 못하는 중계 아나운서와 해설자! 전엔 21세기가 낼모렌데... 라는 표현을 썼지만... 지금은 "21세기가 밝아온지 벌써 몇해인데 아직도 이런 명랑하지 못한 농구를 하는 것인가?"
2. 축구에 정의가 살아있다면...
항상 이야기한다. 축구라는 스포츠에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축구라는 단어와 정의라는 단어를 동시에 사용할 때는 "만일 축구에 정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이라는 문장 안에 두 단어를 가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단기전-토너먼트-이 아닌 리그전에서는 대체적으로 우승할만한 팀이 우승을 하는 것이 상례였던 것 같다. 물론 그 역시도 정의 운운하기엔 좀 애매한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다. 사회적 정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렴지점이 있을 것이란 생각하지만 축구에서의 정의라는 것은 용어 자체를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기가 대단히 애매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경기"를 축구에 있어서 정의라 할 것이고 축구를 조금 더 느긋하게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조금 다른 정의를 내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축구에 있어서의 정의를 정의하자면 한 마디로 "선수들이 쓸 데없이 많이 움직이지 않는 대신 축구공이 계속해서 빠르게 움직이는 축구"라 할 수 있다. 성경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했지만 축구에선 축구공이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한다는 말씀!
근본적으로 켈트족의 축구에선 이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그 유명한 보스만 평결 이후 실질적으로 유럽의 각 리그가 "축구가 가지고 있는 인종적 혹은 민족적 특징"을 고수하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한다면 섣불리 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를 정도로 각 리그의 특성이 많이 퇴색된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런 인종적 색채가 축구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야기해두고 싶다. 뭐 당연한 이야기이다. 공화국처럼 프로축구라는 것이 "일종의 자선사업"이 아니라 이익을 내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유럽축구기 때문에 각국의 관중들이 좋아하는 축구의 스타일을 추구하게 되어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조제 무리뉴가 축구 감독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에 비하면 "어딜가나 환영받는 사람"이 아닌 것 역시 그의 축구는 리그 특유의 스타일보다는 승리를 위해 효율적인 전술을 추구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유럽축구를 보며 드는 생각은 이번 시즌엔 유럽축구 전체에 "축구공이 강물처럼 흐르게 되어 결국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축구에 대한 내 바람의 제 1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까가 우승을 하지 않아도 좋다.(물론 난 그 팀의 팬이 아니기도 하다.) 스페인 리그에선 어느 팀이 우승을 하든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다만 레알이 우승을 하게 된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상대방의 주력 공격수를 (수비수의 개인기로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미드필드에서 고립시키는 것을 작전의 최우선으로 삼는 레알 마드리드의 축구는 정말 내가 생각하는 스페인의 축구와는 아주 조금 다르다. 아무튼 특정 팀을 응원... 하기는 한다. 하지만 난 절대 그 팀이 우승하지 못한다고 "청문회를 해야한다"거나 선수들 앞에서 "정신 차리고 축구해라"라고 할 생각은 없다.
이제 가슴 벅찬 유럽 축구가 시작되었단 말이다. 서울 트윈스의 한 경기 한 경기에 웃고 울고하는 시기는 이제 안녕이라는 말씀!!!! 핫핫핫!!!
물론 공화국의 각 언론엔 통한의 패배니 어쩌니 하며 일요일의 한국과 중국의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대회 결승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냉정해지자. 통한은 개뿔! 얼어죽을 석패! 빌어먹을 심판의 편파판정! 다 웃기는 이야기다. 사실상 신기한 것은 아직 70년대의 패러다임에서 전혀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한국 대표팀을 상대로 중국이 그렇게 고전을 했다는 사실이다.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양 손으로 밀어 던지며 "제발 내 슛을 블락해주세요!"라고 외치는 미들 슛과 삼점 슛! 그 어느 상황에서도 벌의 진행방향의 앞에서 상대를 수비해야 한다는 농구의 기본 중의 기본은 다 밥말아먹은 듯한 엉성한 수비! 공보다는 사람을 먼저 지키는 것이 수비라는 것을 무시한 공만 우루루 따라다니는 수비! 상대방의 뒤에서 수비를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혹은 기량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수비를 할 때 필요 이상으로 손을 쓰는 플레이... 이런 것들에 대한 지적은 1mm도 하지 못하는 중계 아나운서와 해설자! 전엔 21세기가 낼모렌데... 라는 표현을 썼지만... 지금은 "21세기가 밝아온지 벌써 몇해인데 아직도 이런 명랑하지 못한 농구를 하는 것인가?"
2. 축구에 정의가 살아있다면...
항상 이야기한다. 축구라는 스포츠에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축구라는 단어와 정의라는 단어를 동시에 사용할 때는 "만일 축구에 정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이라는 문장 안에 두 단어를 가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단기전-토너먼트-이 아닌 리그전에서는 대체적으로 우승할만한 팀이 우승을 하는 것이 상례였던 것 같다. 물론 그 역시도 정의 운운하기엔 좀 애매한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다. 사회적 정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렴지점이 있을 것이란 생각하지만 축구에서의 정의라는 것은 용어 자체를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기가 대단히 애매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경기"를 축구에 있어서 정의라 할 것이고 축구를 조금 더 느긋하게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조금 다른 정의를 내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축구에 있어서의 정의를 정의하자면 한 마디로 "선수들이 쓸 데없이 많이 움직이지 않는 대신 축구공이 계속해서 빠르게 움직이는 축구"라 할 수 있다. 성경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했지만 축구에선 축구공이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한다는 말씀!
근본적으로 켈트족의 축구에선 이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그 유명한 보스만 평결 이후 실질적으로 유럽의 각 리그가 "축구가 가지고 있는 인종적 혹은 민족적 특징"을 고수하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한다면 섣불리 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를 정도로 각 리그의 특성이 많이 퇴색된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런 인종적 색채가 축구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야기해두고 싶다. 뭐 당연한 이야기이다. 공화국처럼 프로축구라는 것이 "일종의 자선사업"이 아니라 이익을 내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유럽축구기 때문에 각국의 관중들이 좋아하는 축구의 스타일을 추구하게 되어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조제 무리뉴가 축구 감독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에 비하면 "어딜가나 환영받는 사람"이 아닌 것 역시 그의 축구는 리그 특유의 스타일보다는 승리를 위해 효율적인 전술을 추구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유럽축구를 보며 드는 생각은 이번 시즌엔 유럽축구 전체에 "축구공이 강물처럼 흐르게 되어 결국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축구에 대한 내 바람의 제 1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까가 우승을 하지 않아도 좋다.(물론 난 그 팀의 팬이 아니기도 하다.) 스페인 리그에선 어느 팀이 우승을 하든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다만 레알이 우승을 하게 된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상대방의 주력 공격수를 (수비수의 개인기로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미드필드에서 고립시키는 것을 작전의 최우선으로 삼는 레알 마드리드의 축구는 정말 내가 생각하는 스페인의 축구와는 아주 조금 다르다. 아무튼 특정 팀을 응원... 하기는 한다. 하지만 난 절대 그 팀이 우승하지 못한다고 "청문회를 해야한다"거나 선수들 앞에서 "정신 차리고 축구해라"라고 할 생각은 없다.
이제 가슴 벅찬 유럽 축구가 시작되었단 말이다. 서울 트윈스의 한 경기 한 경기에 웃고 울고하는 시기는 이제 안녕이라는 말씀!!!! 핫핫핫!!!
2011년 7월 25일 월요일
가끔은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하는 일이 있다네(Soundless Music)
일단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는 아가리를 함부로 놀리지 말아야한다. 최소한 내 아가리로 "나름 문학적인" 이야기를 처해대면 안된다. 절대 그런 일은 앞으로 없어야만 한다. 2008년 그래미를 싹쓸이한 Amy Winehouse을 보며 이런 개소리를 짓거렸다.
"그는 분명히 21세기의 제니스 조플린이 될 것이다."
니미... 결국 제니스 조플린이 갔듯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그렇게 갔다. 아직 공식 발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거의 같은 사인으로...
어제 하루는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죽었다는 것,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생각나지 않는 하루였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재능은 정말 특별했다. 제니스 조플린과 같은 성격의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여성 보컬리스트로서 제니스 조플린이 후대에 끼쳤던 수준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음에 틀림없던 아티스트였다. 아마 그가 가진 재능은 많은 사람들이 오래 누려선 안될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라도 개소리를 지껄여야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다. 아! 니미...
제니스 조플린이나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과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모두 만으로 27세에 죽었다 하여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27세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는 병맛같은 영국 언론에 대해서는 그저 가운데 손가락을 힘차게 올려주면 그만이다.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약 50일정도면 만으로 28세가 될 예정이었다. 공연히 억지로 들이대면서 이상한 분위기 조성하지 말기 바란다. 언론이라 불리는 일을 하는 놈들은 그저 그런 식으로 단어 하나 사건 하나 만들면 그들의 자위행위로서의 값어치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은 천재적인 아티스트의 자리를 채워줄만한 능력도, 그럴 의사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들도 나처럼 그저 아닥하고 있기 바란다.
http://youtu.be/TJAfLE39ZZ8
다시는 아가리를 함부로 놀리지 말아야한다. 최소한 내 아가리로 "나름 문학적인" 이야기를 처해대면 안된다. 절대 그런 일은 앞으로 없어야만 한다. 2008년 그래미를 싹쓸이한 Amy Winehouse을 보며 이런 개소리를 짓거렸다.
"그는 분명히 21세기의 제니스 조플린이 될 것이다."
니미... 결국 제니스 조플린이 갔듯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그렇게 갔다. 아직 공식 발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거의 같은 사인으로...
어제 하루는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죽었다는 것,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생각나지 않는 하루였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재능은 정말 특별했다. 제니스 조플린과 같은 성격의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여성 보컬리스트로서 제니스 조플린이 후대에 끼쳤던 수준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음에 틀림없던 아티스트였다. 아마 그가 가진 재능은 많은 사람들이 오래 누려선 안될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라도 개소리를 지껄여야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다. 아! 니미...
제니스 조플린이나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과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모두 만으로 27세에 죽었다 하여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27세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는 병맛같은 영국 언론에 대해서는 그저 가운데 손가락을 힘차게 올려주면 그만이다.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약 50일정도면 만으로 28세가 될 예정이었다. 공연히 억지로 들이대면서 이상한 분위기 조성하지 말기 바란다. 언론이라 불리는 일을 하는 놈들은 그저 그런 식으로 단어 하나 사건 하나 만들면 그들의 자위행위로서의 값어치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은 천재적인 아티스트의 자리를 채워줄만한 능력도, 그럴 의사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들도 나처럼 그저 아닥하고 있기 바란다.
http://youtu.be/TJAfLE39ZZ8
2011년 7월 8일 금요일
자유에 대한 갈망? 히틀러 이즈 대드?(Soundless Music)
그러니까 앞에서 이야기했던 보컬 Y라는 인간은 자신의 첫 무대가 길이 역사에 남을 수 있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까?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무대의 마지막에 기타에 신나를 뿌리고 기타에 불을 붙여 스트랩을 손으로 잡고 공중에서 두 바퀴 돌린 뒤 바닥에 버리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불이 안붙었냐?" "기타를 공중에서 두바퀴 돌리는 데 실패했냐?" "네가 불에 데일 뻔 했냐?" 이런 질문은 받지 않겠다. 그런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의 참담한 결과였으니까... 사실 그 때 Y는 자신이 무대에 서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한심한 짓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그 무대가 마지막은 아니었다는 이야기... 아무튼 그 사건 이후 절대로 Y는 Ending Perfomance이라 불리는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건 뭐 웃기지도 않고 감동적이지도 않은 짓거리였으니 말이다.
Y의 친구...까지는 아니고 같이 놀러다니다가 알게 된 Y를 능가하는 쓰레기의 경우엔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은 후 빨강색 식용색소를 잔뜩 풀어 무대의 중간에 객석을 향해 뿌려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두 팀이 장소를 빌려 했던 그 날의 공연은 대부분의 경우 아마추어 밴드들이 가지고 있는 동원력의 한계로 인해 자신의 친구들 아니면 다른 팀의 친구들이 관객의 99.999%인데 공교롭게도 그가 뿌린 "피를 연상ㅇ시키려 했던" 그 식용색소를 탄 물은 다른 팀 멤버들의 지인이 대부분인 쪽으로 날아갔고 자신들의 친구들보다 수만배는 거친 다른 팀의 친구들이 난리 부르스를 추다 지쳐 돌아갈 때까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공연장에서 나올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 쓰레기 역시 다시는 그딴 잔재주로 인간의 눈을 현혹시키려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잔재주는 잔재주로 끝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나 뭐라나...
사실 처음 이 게시물을 쓰기 시작했을 땐 아주 따끈따끈한 이슈였더랬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위의 두 문단을 적어놓고 놔둬 버렸더니 이젠 뒷북이 되고야 말았으나, 이왕 시작한 일은 끝을 내야하지 않을까? 라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에서 이 게시물을 마루리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 바로 그거다. 퍼포먼스는 공연의 일부분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연이라고 이름 붙이는 그 어떤 것이 절대 훼손해선 안되는 가 자체로 존재하는 선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퍼포먼스는 공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하니 아닥하고 자빠져라는 이야기를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그 것은 "이런 퍼포먼스는 해선 되고 저런 퍼포먼스는 절대 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앞의 두 단락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은 아마추어들의 공연 중 퍼포먼스가 아니고 프로페셔널들의 공연에서 행해진 퍼포먼스였다ㅣ면 그 퍼포먼스가 성공적이었는가 아닌가라는 것은 그 것을 기획했던 사람들 자신들이 가장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마추어들도 그 정도의 감각은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의 공연이 언론의 취재대상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프로페셔널들의 공연과는 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당연히도!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이다. 정작 진중권 본인은 그런 퍼포먼스를 해선 안되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의 찌질이들이 환호했던" 김형석의 반론이라는 것 역시 결국은 "네가 뭔데 공연 중의 퍼포먼스를 하라 하지 말아라 하느냐?"에 불과한 이야기인 것이다. 내가 갈무리하긴 귀찮으니 당신들이 검색해서 찾아보기 바란다. 진중권은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찬반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터넷에 존재하는 찌질이들은 이야기를 더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 버렸다. "임재범의 퍼포먼스엔 보여진 것보다 더 심오한 뜻이 있단다 아해들아! 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너희들이 캐병신이다." 이건 또 뭔 지랄이란 말이냐? 자신들이 "음악의 절대성을 판단할 귀를 가졌"고 그래서 "임재범이란 가수"를 택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이제 와서 대중문화의 한 축을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것인가? 니미 개자식들... 대중의 선택은 절대적이라 이야기했던 새끼들이 이제 와선 불가지론을 설파하고 자빠졌으니 이 이런 상황에 대해 웃어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울면서 이런 상황을 봐야 한다는 것인가?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재범느님이 하시는 그 어떤 일에도 반대해서는 안되며 재범느님은 도덕적으로도 완벽하신 분이다." 이따위 말들을 하고 싶은가?
당신들이 어떤 가수를 좋아하고 아니고의 문제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할 주제는 못되겠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한 공연에서 어떠너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 것이 무지하게 구렸다거나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대단히 뛰어난 보컬리스트일지는 모르나 생각이 좀 짧을 수도 있고 다소 개념이 업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것이 문제가 되는가? 마약을 한 연예인의 팬이 되는 것, 구린 퍼포먼스를 한 가수의 팬이 되는 것, 병역기피를 한으로 의심되는 가수의 팬이 되는 것... 이런 일들이 창피하고 문제가 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깔아두기 때문에 논란을 이상한 쪽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물론 아님 말고... 네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Y의 친구...까지는 아니고 같이 놀러다니다가 알게 된 Y를 능가하는 쓰레기의 경우엔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은 후 빨강색 식용색소를 잔뜩 풀어 무대의 중간에 객석을 향해 뿌려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두 팀이 장소를 빌려 했던 그 날의 공연은 대부분의 경우 아마추어 밴드들이 가지고 있는 동원력의 한계로 인해 자신의 친구들 아니면 다른 팀의 친구들이 관객의 99.999%인데 공교롭게도 그가 뿌린 "피를 연상ㅇ시키려 했던" 그 식용색소를 탄 물은 다른 팀 멤버들의 지인이 대부분인 쪽으로 날아갔고 자신들의 친구들보다 수만배는 거친 다른 팀의 친구들이 난리 부르스를 추다 지쳐 돌아갈 때까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공연장에서 나올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 쓰레기 역시 다시는 그딴 잔재주로 인간의 눈을 현혹시키려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잔재주는 잔재주로 끝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나 뭐라나...
사실 처음 이 게시물을 쓰기 시작했을 땐 아주 따끈따끈한 이슈였더랬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위의 두 문단을 적어놓고 놔둬 버렸더니 이젠 뒷북이 되고야 말았으나, 이왕 시작한 일은 끝을 내야하지 않을까? 라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에서 이 게시물을 마루리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 바로 그거다. 퍼포먼스는 공연의 일부분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연이라고 이름 붙이는 그 어떤 것이 절대 훼손해선 안되는 가 자체로 존재하는 선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퍼포먼스는 공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하니 아닥하고 자빠져라는 이야기를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그 것은 "이런 퍼포먼스는 해선 되고 저런 퍼포먼스는 절대 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앞의 두 단락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은 아마추어들의 공연 중 퍼포먼스가 아니고 프로페셔널들의 공연에서 행해진 퍼포먼스였다ㅣ면 그 퍼포먼스가 성공적이었는가 아닌가라는 것은 그 것을 기획했던 사람들 자신들이 가장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마추어들도 그 정도의 감각은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의 공연이 언론의 취재대상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프로페셔널들의 공연과는 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당연히도!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이다. 정작 진중권 본인은 그런 퍼포먼스를 해선 안되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의 찌질이들이 환호했던" 김형석의 반론이라는 것 역시 결국은 "네가 뭔데 공연 중의 퍼포먼스를 하라 하지 말아라 하느냐?"에 불과한 이야기인 것이다. 내가 갈무리하긴 귀찮으니 당신들이 검색해서 찾아보기 바란다. 진중권은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찬반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터넷에 존재하는 찌질이들은 이야기를 더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 버렸다. "임재범의 퍼포먼스엔 보여진 것보다 더 심오한 뜻이 있단다 아해들아! 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너희들이 캐병신이다." 이건 또 뭔 지랄이란 말이냐? 자신들이 "음악의 절대성을 판단할 귀를 가졌"고 그래서 "임재범이란 가수"를 택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이제 와서 대중문화의 한 축을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것인가? 니미 개자식들... 대중의 선택은 절대적이라 이야기했던 새끼들이 이제 와선 불가지론을 설파하고 자빠졌으니 이 이런 상황에 대해 웃어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울면서 이런 상황을 봐야 한다는 것인가?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재범느님이 하시는 그 어떤 일에도 반대해서는 안되며 재범느님은 도덕적으로도 완벽하신 분이다." 이따위 말들을 하고 싶은가?
당신들이 어떤 가수를 좋아하고 아니고의 문제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할 주제는 못되겠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한 공연에서 어떠너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 것이 무지하게 구렸다거나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대단히 뛰어난 보컬리스트일지는 모르나 생각이 좀 짧을 수도 있고 다소 개념이 업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것이 문제가 되는가? 마약을 한 연예인의 팬이 되는 것, 구린 퍼포먼스를 한 가수의 팬이 되는 것, 병역기피를 한으로 의심되는 가수의 팬이 되는 것... 이런 일들이 창피하고 문제가 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깔아두기 때문에 논란을 이상한 쪽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물론 아님 말고... 네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2011년 6월 28일 화요일
보컬리스트 Y모를 위한 변명
1. 그가 처음 밴드의 보컬리스트가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21년 하고도 5개월 전의 일이었다. 내가 좋건 싫건 그런 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팀의 보컬리스트라는 것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공연 일은 이미 잡혀있고 팀의 보컬은 긴 퍼머머리에 가죽바지에 체인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아들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한 그의 아버지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장이 나와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악보를 볼 줄 알고 소리를 내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이유로 땜빵 보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그는 주로 보컬 자리에 문제가 생긴 팀의 땜빵 보컬을 하는 신세였다. 뜬금없는 속담을 인용하면 "첫 단추를 잘 꿰야 한다"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보컬 인생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2. 애초에 그는 헤비메탈 곡들을 카피하는 밴드의 보컬이 되리라는 생각 따위는 낮잠을 자다 꾼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중학 때부터 주로 Progressive Rock과 지금은 주로 Art Rock이라 불리는 유럽 쪽 팀들의 음악을 들었고 자신이 음악을 하게 된다면 막연하게 그런 음악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고 주변의 찌질이들을 모아 그런 음악들을 카피하는 밴드를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헤비메탈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을 뿐 아니라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그는 헤비메탈 보컬들의 창법이 자신이 없기도 했었다 한다. 고음을 내는 것이 두려웠다기 보다는 성대를 활짝 연 상태에서 그런 고음을 내다가 성대가 잘못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가 헤비메탈"만"을 연주하는 팀의 보컬을 했던 것은 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3. 그 뒤로 주로 땜빵 보컬로 몇 번의 무대에 서게 되었으나 그는 애초 그의 생각대로 에릭 마틴과 같은 모노톤 창법으로도 그리고 메탈 보컬리스트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두성만으로도 노래를 부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지 꼴리는대로" 노래를 불렀다 한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시간이 갈수록 그의 노래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노래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다.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하자면 "엄청나게 무미건조한 보컬"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그의 보컬이 그런 식으로 변할수록 무대 아래에서의 광란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는 슷로 "이제야 나는 노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무대 위에서 무대 아래의 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데 자신의 노래에 만족하게 되었다고?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물론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4. 그는 자신의 무미건조한 노래에 대하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 생각엔 음악이란 것은 엄청난 격정에 싸인 그 순간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엄청난 고통의 순간이나 분노의 순간에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을 떠나려는 연인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하는 그 순간의 감정을 물론 음악으로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진짜 폭발하는 감정이 생기는 순간엔 음악이 아닌 더 격한 것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왕 시작한 것 꾸준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내게 있어 음악이란 것은 일종의 후일담 같은 것이다. 격정이라든지 격랑이라 할 수있는 그 어떤 것이 지나간 다음에 비로소 그런 감정이 음악이라는 형식으로 정리되어 자신의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음악이 후일담이란 것은 그런 의미이고 격정의 순간이 지난 후에 이야기하는 후일담엔 격정보다는 덤덤함이 존재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5. 그는 앞으로도 무대에 설 기회가 생긴다면, 그리고 그보다 먼저 자신이 자신의 음악을 만들게 되어 그 음악을 무대에서 다른 인간들에게 들려주게 된다면 그 음악은 철저하게 "덤덤" 그 자체일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것이야 말로 진짜 변명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이 흔히 이야기하는 "극적인 분위기의, 그런 창법의 노래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신의 곡을 무대에 올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격정적이며 극적인 곡을 쓸 일도, 그럴 자신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곡을 연주하더라도 그런 곡들을 택하진 않을 것이라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음악이라는 것의 완성도는 자신의 철학에 일치하는 음악에 가까워질 때에 비로소 높아지는 것"이라 한다.
2. 애초에 그는 헤비메탈 곡들을 카피하는 밴드의 보컬이 되리라는 생각 따위는 낮잠을 자다 꾼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중학 때부터 주로 Progressive Rock과 지금은 주로 Art Rock이라 불리는 유럽 쪽 팀들의 음악을 들었고 자신이 음악을 하게 된다면 막연하게 그런 음악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고 주변의 찌질이들을 모아 그런 음악들을 카피하는 밴드를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헤비메탈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을 뿐 아니라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그는 헤비메탈 보컬들의 창법이 자신이 없기도 했었다 한다. 고음을 내는 것이 두려웠다기 보다는 성대를 활짝 연 상태에서 그런 고음을 내다가 성대가 잘못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가 헤비메탈"만"을 연주하는 팀의 보컬을 했던 것은 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3. 그 뒤로 주로 땜빵 보컬로 몇 번의 무대에 서게 되었으나 그는 애초 그의 생각대로 에릭 마틴과 같은 모노톤 창법으로도 그리고 메탈 보컬리스트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두성만으로도 노래를 부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지 꼴리는대로" 노래를 불렀다 한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시간이 갈수록 그의 노래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노래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다.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하자면 "엄청나게 무미건조한 보컬"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그의 보컬이 그런 식으로 변할수록 무대 아래에서의 광란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는 슷로 "이제야 나는 노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무대 위에서 무대 아래의 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데 자신의 노래에 만족하게 되었다고?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물론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4. 그는 자신의 무미건조한 노래에 대하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 생각엔 음악이란 것은 엄청난 격정에 싸인 그 순간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엄청난 고통의 순간이나 분노의 순간에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을 떠나려는 연인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하는 그 순간의 감정을 물론 음악으로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진짜 폭발하는 감정이 생기는 순간엔 음악이 아닌 더 격한 것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왕 시작한 것 꾸준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내게 있어 음악이란 것은 일종의 후일담 같은 것이다. 격정이라든지 격랑이라 할 수있는 그 어떤 것이 지나간 다음에 비로소 그런 감정이 음악이라는 형식으로 정리되어 자신의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음악이 후일담이란 것은 그런 의미이고 격정의 순간이 지난 후에 이야기하는 후일담엔 격정보다는 덤덤함이 존재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5. 그는 앞으로도 무대에 설 기회가 생긴다면, 그리고 그보다 먼저 자신이 자신의 음악을 만들게 되어 그 음악을 무대에서 다른 인간들에게 들려주게 된다면 그 음악은 철저하게 "덤덤" 그 자체일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것이야 말로 진짜 변명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이 흔히 이야기하는 "극적인 분위기의, 그런 창법의 노래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신의 곡을 무대에 올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격정적이며 극적인 곡을 쓸 일도, 그럴 자신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곡을 연주하더라도 그런 곡들을 택하진 않을 것이라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음악이라는 것의 완성도는 자신의 철학에 일치하는 음악에 가까워질 때에 비로소 높아지는 것"이라 한다.
2011년 5월 30일 월요일
정말 싫다.(개소리들)
1. 보통의 경우 이렇게 오랜 시간을 블로깅을 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없다거나 내 자신이 게을러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번 경우는 정말 종류가 다른 경우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안토냇울 하고 있는, 혹은 온라인을 떠도는 나라는 존재를 환멸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환멸감을 들게 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이른바 SNS이라 불리는 것이었지만 그 역시도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에서의 관계를 유지시키거나 만들어주는 것 아니었던가? 그 것이 원인이 되어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모든 것에 염증을 낼 수밖에 없던 나로서는 블로그 역시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2. 우리는 SNS이라는 빌어먹을 물건을 가지고 재능있고 보기 드문, 어떤 이가 보기엔 쉬운 길이겠지만 어떤 이들이 보기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길을 가려했던 젊고 아름다운 여성 스포츠 캐스터(아직은 캐스터는 아니었지만 그는 캐스터를 꿈꿨다.) 한 명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그가 병원에서 만류했을 때 스스로의 고집으로 퇴원을 선택한 것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이야기는 전혀 소용없다. "죽을 각옹로 열심히 살아라!"라는 이야기는 이명박이 "내가 뻥튀기 장사 해봐서 아는데" 보다 더 가증스런 이야기이다. 그런 극단적인 선택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실제로 행동에 옮기건 그 전 단계에 이르기전까지의 단계에서 그만 두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는 "자신의 삶에 더 이상 희망이 없으며 탈출구조차 이 세상엔 없다"고 느끼게 되었을 때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극한의 고통을 "자살 드립"이라 이야기하는 놈들이 득실거리는 온라인 세상은 정말 환멸을 넘어서 공포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3. 전에 내가 이야기했던 모 텔레비전 방송국의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가수"들이 출연해 노래를 부른다는... 전에 분명히 이야기했다. "지상파 방송이 가지고 있는 패권적 위치를 다른 방식으로 유지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닌 방송"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젠 "자신들처럼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이 방송을 시청한"다고 찌질대는 것들이 왕 노릇을 하는 지상파 방송국의 왕노릇을 하려 한다. 특정 여가수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 가수가 방송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치 "공화국 가요계에 정의라는 깃발을 꽂는 것인양"... 빌어먹을 스마트폰 때문일까? 이동시에 스마트폰을 이용해 보게되는 인터넷 기사에 붙는 덧글들을 보면 가관이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진 않고, 그저 한 마디 할까 한다. "참 대단한 평론가들 나셨다 그죠?"
4. 80년대나 90년대 초까지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인터넷이란 괴물에 대해 굉장히 희망적인 미래를 예측한다. 그러나 인터넷이란 공간은 질적인 변화보다는 근본적으로 양적인 변화나 수치에 집착하는 곳이며 많은 사람이 모여 자신보다 힘없는 존재라 여겨지는 인간들을 타자화하고 그들을 밟아 뭉개는 용도로 이용되기 훨씬 더 쉬운 공간이라는 것을 간과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 테제인 양질전환의 법칙은 양적인 변화가 결국 질적인 변화로 추동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다수가 모이기만 하면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대중추수주의라는 비판을 피하려면 이런 문제들을 정말 심도있게 다시 고민해야할 것이다. 물론 하기 싫으면 말고... 너희 새끼들이 언제 내 말 들었니?
2. 우리는 SNS이라는 빌어먹을 물건을 가지고 재능있고 보기 드문, 어떤 이가 보기엔 쉬운 길이겠지만 어떤 이들이 보기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길을 가려했던 젊고 아름다운 여성 스포츠 캐스터(아직은 캐스터는 아니었지만 그는 캐스터를 꿈꿨다.) 한 명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그가 병원에서 만류했을 때 스스로의 고집으로 퇴원을 선택한 것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이야기는 전혀 소용없다. "죽을 각옹로 열심히 살아라!"라는 이야기는 이명박이 "내가 뻥튀기 장사 해봐서 아는데" 보다 더 가증스런 이야기이다. 그런 극단적인 선택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실제로 행동에 옮기건 그 전 단계에 이르기전까지의 단계에서 그만 두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는 "자신의 삶에 더 이상 희망이 없으며 탈출구조차 이 세상엔 없다"고 느끼게 되었을 때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극한의 고통을 "자살 드립"이라 이야기하는 놈들이 득실거리는 온라인 세상은 정말 환멸을 넘어서 공포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3. 전에 내가 이야기했던 모 텔레비전 방송국의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가수"들이 출연해 노래를 부른다는... 전에 분명히 이야기했다. "지상파 방송이 가지고 있는 패권적 위치를 다른 방식으로 유지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닌 방송"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젠 "자신들처럼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이 방송을 시청한"다고 찌질대는 것들이 왕 노릇을 하는 지상파 방송국의 왕노릇을 하려 한다. 특정 여가수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 가수가 방송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치 "공화국 가요계에 정의라는 깃발을 꽂는 것인양"... 빌어먹을 스마트폰 때문일까? 이동시에 스마트폰을 이용해 보게되는 인터넷 기사에 붙는 덧글들을 보면 가관이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진 않고, 그저 한 마디 할까 한다. "참 대단한 평론가들 나셨다 그죠?"
4. 80년대나 90년대 초까지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인터넷이란 괴물에 대해 굉장히 희망적인 미래를 예측한다. 그러나 인터넷이란 공간은 질적인 변화보다는 근본적으로 양적인 변화나 수치에 집착하는 곳이며 많은 사람이 모여 자신보다 힘없는 존재라 여겨지는 인간들을 타자화하고 그들을 밟아 뭉개는 용도로 이용되기 훨씬 더 쉬운 공간이라는 것을 간과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 테제인 양질전환의 법칙은 양적인 변화가 결국 질적인 변화로 추동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다수가 모이기만 하면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대중추수주의라는 비판을 피하려면 이런 문제들을 정말 심도있게 다시 고민해야할 것이다. 물론 하기 싫으면 말고... 너희 새끼들이 언제 내 말 들었니?
2011년 5월 15일 일요일
돌직구!!!(Soundless Music)
*일단 게시물의 제목이 되어버린 돌직구란 표현은 100% 보노소년님의 아이디어임을 밝혀야만 한다. 오늘 쇼개하려는 이 앨범의 주인(?)인 Foo Fighters에 대해 "돌직구"라는 표현을 써주신 분이 바로 보노소년님이며 공화국 평균 이하의 두뇌용량을 가진 내게선 절대 나올 수 없는 그들에 대한 적확한 표현임을 깨닫는 순간 보노소년님의 재기발랄함에 대한 존경심과 더불어 질투심이 생겼음도 부정하지 않겠다. 어쨌든 무단으로 돌직구라는 단어를 쓴 것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며 대구 삼성 라이온즈의 오승환 투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점 또한 밝힌다.
위키피디아나 VH1 혹은 MTV의 사이트를 통해 Foo Fighters에 대한 검색을 하면 Alternative 혹은 Post-grunge 음악을 구사하는 팀이라는 부연설명이 따르게 된다. 하지만, 게시물의 제목을 "돌직구"라 한 이유는 그들의 음악을 이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이 팀의 Frontman인 Dave Grohl 혹은 다른 멤버들에게는 그런 표현이 다소 억울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오히려 Foo Fighters의 음악은 그런 레토릭보다는 훨씬 더 정직한 Hard Rock sound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물론 포스트-그런지나 얼터너티브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그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해둘 것은 분명히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나 자신의 신념 아니었던가?
Nirvana의 드러머였던 Dave Grohl은 너바나라는 팀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현역 밴드로서의 지위를 내려놓아야만 했을 때 너바나의 팬들이 보기엔 다소 섭섭해할 정도로 대단히 빠른 시기에 새로운 팀을 결성했고
아! 완성된 게시물을 올려놨으나 갑자기 Blogger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란 메시지가 몇 번 나오더니 결국 그 완성된 게시물이 날아가고 말았다. 고로 구글 블로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이 상태로 내버려 두기로 한다. 줴길!
2011년 3월 26일 토요일
정말 내가 해야만 하는 이야기(Soundless Music)
일단 고민 끝에 이야기를 했던 <나는 가수다>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할 필요도 없고 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다행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막장으로 가진 않았기 때문에 그 점이 다행이라 해야할까? 자세한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겠지만 난 그 프로그램이 지금의 사태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으로 전개될 것이라 생각했더랬다.(물론 프로그램이 시작되기도 전에...) 지금 모든 사람들이 그에 대해 떠들고들 있으나 본질은 역시 간과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선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그만 뚝!
이제 본론 들어가게 되시겠다....라 하려니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한 마디만 하려 한다.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경쟁 그 자체나 경쟁심이 아니라 성취감이다.(누구의 말을 인용한 것이 아닌 순도 100%의 내 이야기라는 말씀!)
1981년 8월 1일(미국 시간으로)은 아마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중음악의 300년이 넘는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날로 기억해야만 하는 날일 것이다. Tube Amp이라는 물건이 대중음악에 등장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큰 변화라 볼 수 있겠지만 1981년 1월 1일 MTV의 개국과 같은 정도로 판 자체를 완전히 뒤흔들어버린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공관 앰플리파이어(그게 바로 Tube Amp.입니다. 공연히 영어 써서 죄송!)의 사용보다는 78회전 SP Vynil음반의 발명이 더 큰 일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공관 앰플리파이어의 역할을 무시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제작 방식에나 음악이 소비되는 방식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1981년 개국한 MTV의 영향력은 기존의 다른 모든 변화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음악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에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나 판매하는 사람들이 했던 일들의 상당부분을 MTV이라는 방송곡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Music Video Clip이 대신하게 되었으며 아무리 저예산으로 음반 작업을 하더라도 그 자신의 음반의 저예산에 맞는 저예산으로라도 뮤직 비디오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매체에 대한 인간들의 호기심은 "뮤직 비디오 자체의 예술성"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과정에서 MJ의 Thriller의 비디오 클립이 엄청난 역할을 했음은 두 번 이야기하면 입 안에 무좀이 생기는 일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뮤직 비디오가 어떤 과정을 걸쳐 발달해왓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음악 자체의 예술적 완성도를 일단 최우선에 두지만, 가끔은 뮤직 비디오가 가지고 있는 예술성에 감탄을 할 때도 있다는 사실! 때로는 뮤직 비디오 자체가 음악의 감동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다.(정말 어쩌다가는...) 그리고 그런 비디오 클립들에 대한 기억은 수없이 많은 순간 위로가 되고 감동을 전해주지만, 가끔은 그로 인해 답답하기도 하다는 사실! 하지만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그 답답함이 사라진 것은 스마트폰이 가지는 긍정적 기능 중 최고라 할만한 것이다. 내게도 그런 비디오 클립이 있냐고? 물론 한 두 곡의 비디오 클립이 아니지만 오늘 꼭 당신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클립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이 곡이다. 그냥 듣고 보고 즐기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 비디오 클립이 사실이었기를 바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라 확신한다.
이제 본론 들어가게 되시겠다....라 하려니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한 마디만 하려 한다.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경쟁 그 자체나 경쟁심이 아니라 성취감이다.(누구의 말을 인용한 것이 아닌 순도 100%의 내 이야기라는 말씀!)
1981년 8월 1일(미국 시간으로)은 아마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중음악의 300년이 넘는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날로 기억해야만 하는 날일 것이다. Tube Amp이라는 물건이 대중음악에 등장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큰 변화라 볼 수 있겠지만 1981년 1월 1일 MTV의 개국과 같은 정도로 판 자체를 완전히 뒤흔들어버린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공관 앰플리파이어(그게 바로 Tube Amp.입니다. 공연히 영어 써서 죄송!)의 사용보다는 78회전 SP Vynil음반의 발명이 더 큰 일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공관 앰플리파이어의 역할을 무시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제작 방식에나 음악이 소비되는 방식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1981년 개국한 MTV의 영향력은 기존의 다른 모든 변화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음악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에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나 판매하는 사람들이 했던 일들의 상당부분을 MTV이라는 방송곡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Music Video Clip이 대신하게 되었으며 아무리 저예산으로 음반 작업을 하더라도 그 자신의 음반의 저예산에 맞는 저예산으로라도 뮤직 비디오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매체에 대한 인간들의 호기심은 "뮤직 비디오 자체의 예술성"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과정에서 MJ의 Thriller의 비디오 클립이 엄청난 역할을 했음은 두 번 이야기하면 입 안에 무좀이 생기는 일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뮤직 비디오가 어떤 과정을 걸쳐 발달해왓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음악 자체의 예술적 완성도를 일단 최우선에 두지만, 가끔은 뮤직 비디오가 가지고 있는 예술성에 감탄을 할 때도 있다는 사실! 때로는 뮤직 비디오 자체가 음악의 감동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다.(정말 어쩌다가는...) 그리고 그런 비디오 클립들에 대한 기억은 수없이 많은 순간 위로가 되고 감동을 전해주지만, 가끔은 그로 인해 답답하기도 하다는 사실! 하지만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그 답답함이 사라진 것은 스마트폰이 가지는 긍정적 기능 중 최고라 할만한 것이다. 내게도 그런 비디오 클립이 있냐고? 물론 한 두 곡의 비디오 클립이 아니지만 오늘 꼭 당신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클립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이 곡이다. 그냥 듣고 보고 즐기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 비디오 클립이 사실이었기를 바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라 확신한다.
2011년 3월 15일 화요일
꼭 내가 할 필요는 없는 소리들(Soundless Music)
나는 가수다? 너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첫 회를 방송한 <너룰 거슈더>를 보지 않았다. 물론 앞으로도 절대 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프로그램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한다면 밤의 주둥아리들은 "보지도 않은 새끼가... 넌 노래를 들으면서 전율을 느껴나 봤느냐?" 혹은 "요즘 아이돌들이나 볼 수 있는 TV에서 진정한 뮤지션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라든지 "그런 가수들의 무대를 한꺼번에 본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아냐?"라든가, "7명에 끼지 못하는 가수들은 긴장해야 한다"든지, "이건 순위를 메기자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라 하시거나 그 외 기타등등 몇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처해대시면서 지랄 난리 버거지들을 해대실텐데 나름대로 이야기를 해댈테니 다 읽고 꺼지든지, 읽다가 중간에 꺼지든지, 아니면 읽는 척하다 로그인 하시고 Reply에 욕을 써대시든지 알아서 하시되 제발 좀 그 삼십원 어치도 되지 않는 input을 가지고 무지하게 선언적인데다가 선생질이 하늘을 찌르는 소리를 output으로 내시는 일은 삼가주시기 바란다.
일단 뭐 넌 음악 프로그램을 보며 그런 전율을 느껴본 적 있는가?라는 고마운 지적에 대해 한 번 지껄여주고... 그렇다면 내가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지... "넌 텔레비전에서만 음악을 듣고 전율을 느껴봤니?" 아!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다른 프로그램에선 음악을 듣고 전율을 느낄만한 가수가 출연해본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늬들은 지금은 없어진 <음악여행 라라라>가 없어지도록 물 했니? 아! "그건 주람 황금시간대가 아니었다ㅏ 이 씹새야"라고 하려고? 주말 황금시간대에 그런 프로그램을 편성해야 하는 건 M Net이나 MTV Korea 아닌가? 쉽게 이야기해보볼게 혹시 넌 "주말 황금시간이 아니면 음악프로는 잘 보지 않는 새끼일 수도 있는 건 인정하니?" 그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고? 그럼 이건 어떠니?
늬들은 "<나는 가수다>로 인해 그 프로그램에 나왔던 가수들의 노래가 음원차트에서 상위권을 휩쓸고 있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봐라!"라는 이야기를 존나게 하고 싶을거야. 그렇지? 아! 물론 늬들이 생업에 존나 바쁘셔서 그런 훌륭한 가수들을 몰랐는데 이번 기회로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어... 그런데 이거 한 번 생각해 봐봐... 그런 식으로 음원차트를 휩쓰는 현상이 얼마나 갈 것 같니? 한 주가 지나고 새 프로그램이 방송되면 또 그 차트의 상위권에 올라갈 곡들이 바뀔 거라고? 근데 내 생각엔 말이지... 이런 식으로 늬들이 "노래의 신, 레전드"라고 기암을 하는 가수들의 노래가 그런 식으로 소비되면 늬들이 그렇게 욕질 해대는 지상파에 많이 노출되고 그로 인해 음원으로 떼돈을 버는 아이돌들의 음악이 소비되는 방식과 뭐가 다르지? 그 두 가지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제발 "감동적으로" 내게 좀 설명해줘 볼래?
좀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무대"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 번 해볼까? 늬들이 그렇게 감격해서 떠벌리는 이야기... "어느 가수가 그러는데 두 시간의 공연보다 한 곡을 부르는 데 에너지를 더 많이 소비했다"는... 너희는 이게 감격스럽니? 두 시간 공연보다 더 큰 에너지를 한 곡을 부르는 동안 소비하라고? 이런 일이 정상적인 일이라 본다는거야? 이런 거야말로 내 생각엔 지상파 방송의 횡포가 아닐까 싶은데... 노래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두 시간 소비할 에너지보다 많은 에너지를 한 곡을 부르는 동안 소비하는게 감동이라고? 이봐! 한 곡을 부르는 동안 두 시간짜리 공연보다 더 심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 "지상파 방송이 주는 위압감"이 아니라면 가능할 것 같나? 설사 그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문제는 이거지...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그렇게 심한 에너지 소비를 강제하는 대가로 그 가수들 생계를 책임져 준다던가? 그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가수나 그 말에 감동한 늬들이나 도냐? 빽도냐?의 차이 밖엔 없는 것 같지 않아?
하나하나 그런 개소리들에 다 대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해야할 것 같다. 별 불만 없지? 그럼 시작한다. 일찍이 칼 맑스 선생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 말씀하셨고 Edward Hallet Carr 선생께서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말씀하셨다. 꼭 이 양반들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지금 너희들이 환장하고 있는 <나는 가수다>는 비극으로 벌어졌던 역사의 희극적 재연이라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 자! 과거 어떻게 공화국에서 "Video kill the radio star"이라는 문장이 단지 곡목이 아닌 현실이었는지부터 한 번 보도록 하자는 말이다. 알았어? 모르겠으면 나보다 머리는 좋을테니 한 번 기억을 복기해보도록 해보란 말이다. 이 지점이 시작이다. 알겠니?
단지 MP3이나 불법복제 파일 때문에 가요계의 황금기가 막을 내렸다고 생각한다면 넌 대단히 그 문제에 대해 단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어야 알았니? 디지털 음원 시장을 키우고 불법 복제를 활성화시킨 배후엔 분명히 "지상파 방송국"이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아! 이 시점에서 이 무식한 새끼야 지상파가 뭐냐? 공중파지! 라고 할 새끼가 있다면 아가리 닥쳐 주시길 바란다.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지상파란다. 얘야!) 방송사의 음악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만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압도적인 지위를 이용해 "네 노래는 다 좋은데 기니 4분 30초 짜리를 2분 30초로 편집해줄래?" 라는 식으로 "가요 혹은 대중음악이라는 것은 일단 귀에 꽂힐 수 있는 부분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웠고 애초에 무대 음향의 세팅 자체가 불가능한 장소에서 "실력있는 가수는 라이브를 합니다."라는 이름으로 선정적인 프로그램 운영을 해온 바, MR이라는 것을 틀고 "노래만 부르면 라이브"라는 이상한 개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아! 대단하다. 지상파 방송의 노래방화!
자꾸 자극적인 멜로디를 찍어내고 "자극적인 비주얼"을 만들어내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섹터들 중 하나가 바로 지상파 방송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목하겠다고? Jay Leno Show 혹은 Late Show 같은 곳에서도 차마 하지 못하는 MR 틀고 거기 맞춰 방송을 노래방으로 만들기를 공화국 음악방송들에서 했는데 가요의 질적 저하의 배후에 지상파 방송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방송에 맞춰 음악의 질적 저하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줄에서 바로 백 스페이스 키를 눈르고 꺼지시고! 그런데 이런 방송국에서 "황금시간 대의 예능 프로그램의 한 꼭지를 통해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겠다고? 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발상잉란 말인가? 음악은 언제든지 방송이 원하는 방향으로 임의대로 뚜드려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방송잉라는 것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심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주로 청소년들이 보는 가요 순위프로그램에서도 <나는 가수다>에서도 결여된 것은 "진정 노래를 잘하는 가수를 위한 무대" 따위가 아니라 "음악에 대한 쵝소한의 존경심"이라는 것이다. MPC 300, MOPc 3500 돈이 좀 덤비는 사람은 MPC 5000 등의 드럼 머신을 이용해 "비정상적으로 큰 킥(베이스 드럼)의 사운드"를 만들어내고 그 외 다른 악기의 사운드는 Yamaha Motif XF/7 한 대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준 데에 자신의 책임음 없는가?에 대해 한 번 정도 생각해보라는 이야기이다.
계속해서 선정적인 요구를 음악을 만드는 사람에게 반강제적으로 해 온 결과는 일본이나 미국에 비해 터무니 없이 높은 "디지털 음원이 대중음악 시장의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내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너희들이 입에 게거품 물고 난리치는 <나는 가수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들의 경우도 디지털 음원 차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그들의 앨범이 팔린다는 이야기는 없다는 말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게 되면 앨범을 내던 중견가수들의 상당수가 디지털 음원 쪽에 주력하게 될거란 말이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넌 어차피 좋은 노래 하나만 찍어서 듣는다고? 씨발 네가 그래서 안된다는 거야! 알겠어?
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이미 많이 지껄였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수도 있으니(이미 좀 했지만 이 쯤에서 그만 한다. 제발 좀 "음악에 대한 존경심"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해봐... 음악을 듣고 있는 너 자신이 얼마나 음악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덤으로 한 가지만 생각해 봐봐... 그 유명한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가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도 그는 예능 프로그램의 프로듀서고 <나는 가수다>라는 코너 역시 예능이란 점... 그리고 음악에 대한 존경심... 음악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가만히 생각해보면 왜 그 프로그램과 이런 것들이 공존할 수 없는지 알게 될거다... 모르겠으면 넌 저능아 새끼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첫 회를 방송한 <너룰 거슈더>를 보지 않았다. 물론 앞으로도 절대 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프로그램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한다면 밤의 주둥아리들은 "보지도 않은 새끼가... 넌 노래를 들으면서 전율을 느껴나 봤느냐?" 혹은 "요즘 아이돌들이나 볼 수 있는 TV에서 진정한 뮤지션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라든지 "그런 가수들의 무대를 한꺼번에 본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아냐?"라든가, "7명에 끼지 못하는 가수들은 긴장해야 한다"든지, "이건 순위를 메기자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라 하시거나 그 외 기타등등 몇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처해대시면서 지랄 난리 버거지들을 해대실텐데 나름대로 이야기를 해댈테니 다 읽고 꺼지든지, 읽다가 중간에 꺼지든지, 아니면 읽는 척하다 로그인 하시고 Reply에 욕을 써대시든지 알아서 하시되 제발 좀 그 삼십원 어치도 되지 않는 input을 가지고 무지하게 선언적인데다가 선생질이 하늘을 찌르는 소리를 output으로 내시는 일은 삼가주시기 바란다.
일단 뭐 넌 음악 프로그램을 보며 그런 전율을 느껴본 적 있는가?라는 고마운 지적에 대해 한 번 지껄여주고... 그렇다면 내가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지... "넌 텔레비전에서만 음악을 듣고 전율을 느껴봤니?" 아!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다른 프로그램에선 음악을 듣고 전율을 느낄만한 가수가 출연해본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늬들은 지금은 없어진 <음악여행 라라라>가 없어지도록 물 했니? 아! "그건 주람 황금시간대가 아니었다ㅏ 이 씹새야"라고 하려고? 주말 황금시간대에 그런 프로그램을 편성해야 하는 건 M Net이나 MTV Korea 아닌가? 쉽게 이야기해보볼게 혹시 넌 "주말 황금시간이 아니면 음악프로는 잘 보지 않는 새끼일 수도 있는 건 인정하니?" 그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고? 그럼 이건 어떠니?
늬들은 "<나는 가수다>로 인해 그 프로그램에 나왔던 가수들의 노래가 음원차트에서 상위권을 휩쓸고 있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봐라!"라는 이야기를 존나게 하고 싶을거야. 그렇지? 아! 물론 늬들이 생업에 존나 바쁘셔서 그런 훌륭한 가수들을 몰랐는데 이번 기회로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어... 그런데 이거 한 번 생각해 봐봐... 그런 식으로 음원차트를 휩쓰는 현상이 얼마나 갈 것 같니? 한 주가 지나고 새 프로그램이 방송되면 또 그 차트의 상위권에 올라갈 곡들이 바뀔 거라고? 근데 내 생각엔 말이지... 이런 식으로 늬들이 "노래의 신, 레전드"라고 기암을 하는 가수들의 노래가 그런 식으로 소비되면 늬들이 그렇게 욕질 해대는 지상파에 많이 노출되고 그로 인해 음원으로 떼돈을 버는 아이돌들의 음악이 소비되는 방식과 뭐가 다르지? 그 두 가지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제발 "감동적으로" 내게 좀 설명해줘 볼래?
좀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무대"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 번 해볼까? 늬들이 그렇게 감격해서 떠벌리는 이야기... "어느 가수가 그러는데 두 시간의 공연보다 한 곡을 부르는 데 에너지를 더 많이 소비했다"는... 너희는 이게 감격스럽니? 두 시간 공연보다 더 큰 에너지를 한 곡을 부르는 동안 소비하라고? 이런 일이 정상적인 일이라 본다는거야? 이런 거야말로 내 생각엔 지상파 방송의 횡포가 아닐까 싶은데... 노래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두 시간 소비할 에너지보다 많은 에너지를 한 곡을 부르는 동안 소비하는게 감동이라고? 이봐! 한 곡을 부르는 동안 두 시간짜리 공연보다 더 심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 "지상파 방송이 주는 위압감"이 아니라면 가능할 것 같나? 설사 그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문제는 이거지...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그렇게 심한 에너지 소비를 강제하는 대가로 그 가수들 생계를 책임져 준다던가? 그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가수나 그 말에 감동한 늬들이나 도냐? 빽도냐?의 차이 밖엔 없는 것 같지 않아?
하나하나 그런 개소리들에 다 대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해야할 것 같다. 별 불만 없지? 그럼 시작한다. 일찍이 칼 맑스 선생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 말씀하셨고 Edward Hallet Carr 선생께서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말씀하셨다. 꼭 이 양반들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지금 너희들이 환장하고 있는 <나는 가수다>는 비극으로 벌어졌던 역사의 희극적 재연이라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 자! 과거 어떻게 공화국에서 "Video kill the radio star"이라는 문장이 단지 곡목이 아닌 현실이었는지부터 한 번 보도록 하자는 말이다. 알았어? 모르겠으면 나보다 머리는 좋을테니 한 번 기억을 복기해보도록 해보란 말이다. 이 지점이 시작이다. 알겠니?
단지 MP3이나 불법복제 파일 때문에 가요계의 황금기가 막을 내렸다고 생각한다면 넌 대단히 그 문제에 대해 단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어야 알았니? 디지털 음원 시장을 키우고 불법 복제를 활성화시킨 배후엔 분명히 "지상파 방송국"이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아! 이 시점에서 이 무식한 새끼야 지상파가 뭐냐? 공중파지! 라고 할 새끼가 있다면 아가리 닥쳐 주시길 바란다.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지상파란다. 얘야!) 방송사의 음악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만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압도적인 지위를 이용해 "네 노래는 다 좋은데 기니 4분 30초 짜리를 2분 30초로 편집해줄래?" 라는 식으로 "가요 혹은 대중음악이라는 것은 일단 귀에 꽂힐 수 있는 부분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웠고 애초에 무대 음향의 세팅 자체가 불가능한 장소에서 "실력있는 가수는 라이브를 합니다."라는 이름으로 선정적인 프로그램 운영을 해온 바, MR이라는 것을 틀고 "노래만 부르면 라이브"라는 이상한 개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아! 대단하다. 지상파 방송의 노래방화!
자꾸 자극적인 멜로디를 찍어내고 "자극적인 비주얼"을 만들어내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섹터들 중 하나가 바로 지상파 방송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목하겠다고? Jay Leno Show 혹은 Late Show 같은 곳에서도 차마 하지 못하는 MR 틀고 거기 맞춰 방송을 노래방으로 만들기를 공화국 음악방송들에서 했는데 가요의 질적 저하의 배후에 지상파 방송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방송에 맞춰 음악의 질적 저하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줄에서 바로 백 스페이스 키를 눈르고 꺼지시고! 그런데 이런 방송국에서 "황금시간 대의 예능 프로그램의 한 꼭지를 통해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겠다고? 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발상잉란 말인가? 음악은 언제든지 방송이 원하는 방향으로 임의대로 뚜드려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방송잉라는 것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심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주로 청소년들이 보는 가요 순위프로그램에서도 <나는 가수다>에서도 결여된 것은 "진정 노래를 잘하는 가수를 위한 무대" 따위가 아니라 "음악에 대한 쵝소한의 존경심"이라는 것이다. MPC 300, MOPc 3500 돈이 좀 덤비는 사람은 MPC 5000 등의 드럼 머신을 이용해 "비정상적으로 큰 킥(베이스 드럼)의 사운드"를 만들어내고 그 외 다른 악기의 사운드는 Yamaha Motif XF/7 한 대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준 데에 자신의 책임음 없는가?에 대해 한 번 정도 생각해보라는 이야기이다.
계속해서 선정적인 요구를 음악을 만드는 사람에게 반강제적으로 해 온 결과는 일본이나 미국에 비해 터무니 없이 높은 "디지털 음원이 대중음악 시장의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내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너희들이 입에 게거품 물고 난리치는 <나는 가수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들의 경우도 디지털 음원 차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그들의 앨범이 팔린다는 이야기는 없다는 말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게 되면 앨범을 내던 중견가수들의 상당수가 디지털 음원 쪽에 주력하게 될거란 말이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넌 어차피 좋은 노래 하나만 찍어서 듣는다고? 씨발 네가 그래서 안된다는 거야! 알겠어?
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이미 많이 지껄였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수도 있으니(이미 좀 했지만 이 쯤에서 그만 한다. 제발 좀 "음악에 대한 존경심"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해봐... 음악을 듣고 있는 너 자신이 얼마나 음악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덤으로 한 가지만 생각해 봐봐... 그 유명한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가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도 그는 예능 프로그램의 프로듀서고 <나는 가수다>라는 코너 역시 예능이란 점... 그리고 음악에 대한 존경심... 음악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가만히 생각해보면 왜 그 프로그램과 이런 것들이 공존할 수 없는지 알게 될거다... 모르겠으면 넌 저능아 새끼고...
2011년 2월 21일 월요일
53회 Grammy Awards 그리고 잡담들
1. National Academy of Recording Arts and Science and Grammophones Awards
흔히 줄여서 Grammy라 언급되는 이 상의 권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단서가 되는 것은 위의 두 단어다. National Academy of Recording Arts and Science의 회원이 되는 자격은 Musician, Producer, Engineer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반산업의 발전에 현격한 공헌을 했다고 인정되는 음반산업과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다. 흔히 Oscar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아카데미 영화상에 비해 이 상이 조금 더 권위를 가지게 되는 이유는 투표권을 가지게 되는 회원의 자격요건이 대단히 까다롭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각기 다른 성향의 직업군들이 동시에 투표를 함으로 인해 보수적이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이 상에 정말 가끔 의외의 결과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비교적 이 상이 미국 음반산업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단체인 RIAA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 점 대단히 중요하다.)
2. 보수성, 뒷북, 절충
그래미의 성향을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내라고 한다면 위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적어도 나는그렇게 생각한다는 뜻!) 미국 음악계의 가장 권위있는 상이지만 미국 음반산업과 무관한 사람들이 주관하는 행사가 아닌 관계로 과거 쌍벽을 (이룬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두자) 이루던 American Music Awards에 비하면 대단히 보수적인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AMA는 절대적으로 Cash Box Chart에 의존하던 상이었으나 그래미는 그런 점에서는 자류로웠으므로 음악성 혹은 작품성이란 말에 그만큼 민감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미의 뒷북에 대해선 뭐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요 몇년간 그래미를 휩쓸었던 대가들에게 상 몰아주기 열풍의 뒷면엔 그들이 전성기에 남긴 일생일대의 명작에 상을 수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 선에서 퉁칩시다."라는 제스쳐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는 그래미 역시 미국이 주관하는 상이다 보니 (캐나다의 주노 상과는 달리) 외국의 아티스트들에게 관대한 듯 보이나 다분이 미국화된 외국의 아티스트들에게만 시상이 집중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그래미의 고충일 수도 있지만 이 부분이 "그래미 수상자가 절대적으로 당대 세계 최고라 인정받을 아티스트라 이야기하기엔 뭔가 부족한 점"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공화국 언론의 가벼움
그래미 이야기에서 어찌하여 갑자기 공화국 언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가? 너 바보 아니냐? 라고 이야기한다면 믿거나 말거나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공화국 언론에서 대서특필한 것은 캐나다의 Indie Rock Band인(언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린 것이다.)Arcade Fire의 Album of the year 수상에 집중되고 있는 중이다. 일단 이 팀의 수상에 대한 보도의 문제점을 짚어보자면 우선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을 뽑는 것이 그래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발 그래미의 공식 홈 페이지에 한 번 정도라도 들어가 보길 권한다. 이른바 그래미의 4대 Major는 홈페이지의 순서대로 1. Record of the year 2. Album of the year 3. Song of the year 4. Best new artist of the year인데 그래미 상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NARAS의 구성으로 인한 특성이다.(이 점을 납득 시키려면 게시물을 하나 통째로 써야할텐데 나도 귀찮고 당신들도 지겨운 일이다.) 물론 맨 마지막에 시상하는 부붑도 Record of the year이다. 물론 이해한다. 미국인들의 잔치에 대단히 대중적이지도 않은 캐나다의 밴드가 대어를 낚았다는 것 자체가 특종일 수 있다는 점...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과연 "Canadian Pop"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혹은 "Canadian Rock"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라는 캐나다 음악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물론 이 점은 분명하다. 영어권의 대중음악 애호가들 중 (만일 그들을 집단화한다면) 캐나다의 대중음악 애호가들이 가장 까다로운 감상자이며 막말로 "엄청나게 수준높은 음악을 요구하는" 감상자라는 점! 그러나 그들 역시 미국 대중음악이 자라온 자양분을 기초로한 음악들 중 "작품성을 갖춘"음악을 즐겨찾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가장 미국의 영향력을 빠르게 체험하고 있는 캐나다의 밴드에게 "반미국적인 혹은 비미국적인 음악의 대표자"라는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그래미의 절충적 특성 중 하나가 이런 팀들에게 가끔 엄청난 대어를 낚을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음악이 훌륭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나 그들이 미국 팀이 아니라는 이유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미국 팀이 아니라 하더라도 Arcade Fire은 영어권의 팀이라는 점도...
4. 진짜 파격은?!
그렇다고 이번 그래미가 가장 미국적인 음악인 Country and Western 팀에게 Record of the year을 안겨줬다 해서 100% 그간 그래미가 보였던 무난한 결과를 보여주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국내 언론이 간과하고 있는, 국내의 대중음악 애호가들도 많이 간과하는, 예측불허의 수상자는 따로 있다 할 수 있다. 그 것도 Major 상들 중에서 말이다. 전통적으로 Best new artist of the year이야 말로 "가장 상업적인 성과가 중요시 되는" 분야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공화국으로 치자면 "이승기" 정도 된다고 보면 얼추 통할 듯한 미국판 "국민 남동생"인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에게 돌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올해 27세가 되는, 미국에선 결코 메이저 장르가 보긴 힘든, 보사노바에 기반을 둔 재즈, 소울 아티스트인 Esperanza Spalding(농구공을 떠올리셨다고? 나도 그랬다.)가 신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게다가 무대에서 주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진짜 재즈 아티스트"라는 점에서 53회 그래미의 정점을 찍기에 손색없는 신인이었던 것이다. 좀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저스틴 비버가 아니라 스팔딩에게 이 상을 수여한 그래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흔히 줄여서 Grammy라 언급되는 이 상의 권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단서가 되는 것은 위의 두 단어다. National Academy of Recording Arts and Science의 회원이 되는 자격은 Musician, Producer, Engineer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반산업의 발전에 현격한 공헌을 했다고 인정되는 음반산업과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다. 흔히 Oscar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아카데미 영화상에 비해 이 상이 조금 더 권위를 가지게 되는 이유는 투표권을 가지게 되는 회원의 자격요건이 대단히 까다롭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각기 다른 성향의 직업군들이 동시에 투표를 함으로 인해 보수적이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이 상에 정말 가끔 의외의 결과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비교적 이 상이 미국 음반산업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단체인 RIAA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 점 대단히 중요하다.)
2. 보수성, 뒷북, 절충
그래미의 성향을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내라고 한다면 위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적어도 나는그렇게 생각한다는 뜻!) 미국 음악계의 가장 권위있는 상이지만 미국 음반산업과 무관한 사람들이 주관하는 행사가 아닌 관계로 과거 쌍벽을 (이룬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두자) 이루던 American Music Awards에 비하면 대단히 보수적인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AMA는 절대적으로 Cash Box Chart에 의존하던 상이었으나 그래미는 그런 점에서는 자류로웠으므로 음악성 혹은 작품성이란 말에 그만큼 민감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미의 뒷북에 대해선 뭐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요 몇년간 그래미를 휩쓸었던 대가들에게 상 몰아주기 열풍의 뒷면엔 그들이 전성기에 남긴 일생일대의 명작에 상을 수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 선에서 퉁칩시다."라는 제스쳐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는 그래미 역시 미국이 주관하는 상이다 보니 (캐나다의 주노 상과는 달리) 외국의 아티스트들에게 관대한 듯 보이나 다분이 미국화된 외국의 아티스트들에게만 시상이 집중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그래미의 고충일 수도 있지만 이 부분이 "그래미 수상자가 절대적으로 당대 세계 최고라 인정받을 아티스트라 이야기하기엔 뭔가 부족한 점"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공화국 언론의 가벼움
그래미 이야기에서 어찌하여 갑자기 공화국 언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가? 너 바보 아니냐? 라고 이야기한다면 믿거나 말거나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공화국 언론에서 대서특필한 것은 캐나다의 Indie Rock Band인(언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린 것이다.)Arcade Fire의 Album of the year 수상에 집중되고 있는 중이다. 일단 이 팀의 수상에 대한 보도의 문제점을 짚어보자면 우선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을 뽑는 것이 그래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발 그래미의 공식 홈 페이지에 한 번 정도라도 들어가 보길 권한다. 이른바 그래미의 4대 Major는 홈페이지의 순서대로 1. Record of the year 2. Album of the year 3. Song of the year 4. Best new artist of the year인데 그래미 상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NARAS의 구성으로 인한 특성이다.(이 점을 납득 시키려면 게시물을 하나 통째로 써야할텐데 나도 귀찮고 당신들도 지겨운 일이다.) 물론 맨 마지막에 시상하는 부붑도 Record of the year이다. 물론 이해한다. 미국인들의 잔치에 대단히 대중적이지도 않은 캐나다의 밴드가 대어를 낚았다는 것 자체가 특종일 수 있다는 점...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과연 "Canadian Pop"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혹은 "Canadian Rock"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라는 캐나다 음악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물론 이 점은 분명하다. 영어권의 대중음악 애호가들 중 (만일 그들을 집단화한다면) 캐나다의 대중음악 애호가들이 가장 까다로운 감상자이며 막말로 "엄청나게 수준높은 음악을 요구하는" 감상자라는 점! 그러나 그들 역시 미국 대중음악이 자라온 자양분을 기초로한 음악들 중 "작품성을 갖춘"음악을 즐겨찾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가장 미국의 영향력을 빠르게 체험하고 있는 캐나다의 밴드에게 "반미국적인 혹은 비미국적인 음악의 대표자"라는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그래미의 절충적 특성 중 하나가 이런 팀들에게 가끔 엄청난 대어를 낚을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음악이 훌륭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나 그들이 미국 팀이 아니라는 이유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미국 팀이 아니라 하더라도 Arcade Fire은 영어권의 팀이라는 점도...
4. 진짜 파격은?!
그렇다고 이번 그래미가 가장 미국적인 음악인 Country and Western 팀에게 Record of the year을 안겨줬다 해서 100% 그간 그래미가 보였던 무난한 결과를 보여주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국내 언론이 간과하고 있는, 국내의 대중음악 애호가들도 많이 간과하는, 예측불허의 수상자는 따로 있다 할 수 있다. 그 것도 Major 상들 중에서 말이다. 전통적으로 Best new artist of the year이야 말로 "가장 상업적인 성과가 중요시 되는" 분야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공화국으로 치자면 "이승기" 정도 된다고 보면 얼추 통할 듯한 미국판 "국민 남동생"인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에게 돌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올해 27세가 되는, 미국에선 결코 메이저 장르가 보긴 힘든, 보사노바에 기반을 둔 재즈, 소울 아티스트인 Esperanza Spalding(농구공을 떠올리셨다고? 나도 그랬다.)가 신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게다가 무대에서 주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진짜 재즈 아티스트"라는 점에서 53회 그래미의 정점을 찍기에 손색없는 신인이었던 것이다. 좀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저스틴 비버가 아니라 스팔딩에게 이 상을 수여한 그래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011년 2월 13일 일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27)
아님 말고 1000곡
127. Broken Silence-Dean Magraw(1994)-
가끔 지나치게 원칙을 고집하면 안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나이를 처먹을수록 느끼게 되는데 이번 경우도 그렇다. 애초에 곡의 배정을 연대기적 순서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려 했으나 사실 처죽을 때까지 1000이란 숫자를 채울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자꾸 시간이 지체될수록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1990년대 이후의 음악들이 과도하게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끔 이런 식으로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음반이나 아티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그 때 그 때 해주지 않으면 안된 것 같다. 물론 오늘의 게시물은 순서맡 좀 앞당겨졌다 뿐이지 반드시 1000이라는 엔트리 안에 들어왔을 것이다.(급조한 것은 아니니 그냥 아닥하고 계시란 말씀!)
혹시나 나중에 음반을 구입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물론 나 말고 댁들이... 이미 난 구입했다는 말씀!) Broken Silence이라는 것은 트랙의 타이틀이 아니라 Dean Magraw의 1994년 데뷔 음반의 타이틀이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의 엔트리에 이 사람이 있지도 않고 이 앨범의 Booklet은 달랑 두 페이지에 불과하고 웹페이지를 통해 찾아낼 수 있는 Dean Magraw에 대한 정보가 있는 페이지나 사이트들은 대부분 영어가 아니라 독어라는 점! 오프라인 매장에선 어떤지 모르겠으나 온라인 매장의 경우 이 앨범을 구하는 데에만 3일 이상 소요된다는 사실 등등... 분명히 공화국에서 대중성을 가지고 있는 기타리스트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나마 Dean Magraw에 대한 가장 확실한 정보를찾을 수 있는 곳은 You Tube일 것이다. 유투브에 올라와있는 동영상들은 그의 연주 동영상들이다. "확실한"이란 수식어를 쓸 수 있는 이유도 어떤 기타리스트를 판단하는 데에 있어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은 바로 그의 연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물론 지금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영상을 통해 볼 수 있는 그의 연주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정말 "대단하다"는 탄성이 쉴 사이 없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는 기타리스트라는 이야기가 가장 적합할 것이란 생각이다.
대중음악에 일렉트릭 기타가 도입되면서 크게 보아 이펙터와 앰플리파이어를 통한 다양한 주법과 효과를 얻은 대신 프랫을 운지하는 손이 아닌 반대쪽 손이 구사할 수 있는 여러가지의 주법을 다소 (관점에 따라선 꽤 많이)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피킹을 통해서 나일론 기타나 스틸 스트링 어쿠스틱 기타에선 표현이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해졌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예컨데 흔히들 Funky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연주는 나일론 기타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지만 반때쪽 손의 다섯 손가락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다양한 리듬은 피킹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라 할 것이다.
이 Dean Magraw이라는 이름의 기타리스트는 피킹을 통해 핑거링이 가질 수 있는 장점에 근접한 연주를 할 수 있는 현재 활동하는 몇 안되는 기타리스트들 중 하나라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동영상을 통해 확인해보실 수 있겠지만 그는 기타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패턴의 리듬을 연주하는 것이 가능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되도록이면 직접 들어보길 권한다. 고로 오늘은 동영상 링크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는 말씀! 이 게시물을 쓰고 있는 나로서도 아직 많은 연구나 자료 수집이 필요한 기타 플레이어지만 정말 운좋게도 대단한 기타리스트를 만났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2011년 2월 7일 월요일
Boys will be back in town(Soundless Music)
Gary Moore passed away...
영어를 모르는 관계로 저 문장의 뜻이 어떤 것인지 모르므로 아시는 분들은 가르쳐 주시길...하지만 무식한 것은 죄가 아니니 욕설은 삼가해주시길 바란다. 여지껏 1954년 생으로 알고있던 게리 무어는 1952년에 태어났다. 왜 잘못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과거 중앙일보사에서 나오던 팝음악 잡지에 게리 무어가 1954년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쓴 기사가 실렸던 기억은 확실하다. 걔네들 하는 일이야 원체 그러려니 하는 관계로 그들을 욕하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 것도 휴가차 스페인에 갔다 호텔방에서 사인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말이다.
한 때 그에겐 "철새"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만큼 그는 한 팀에 오래 있지 못하고 이 팀 저 팀을 옮겨다니길 밥먹듯 했다는 것을 비우호적인 태도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그는 유독 공화국의 팬들에겐 Thin Lizzy의 기타리스트로서 기억된다. 일본과 공화국에서 유난히 인기있는 "Parisienne Walkway"와 "Spanish Guitar"이 그 시절에 발표된 곡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곡이 유난히 인기있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일본과 공화국에서 그의 음악적 여정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국내 언론의 기사 제목처럼 "전설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라 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니다.
물론 그가 30대 후반 이후엔 블루스라는 장르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곡 작업을 할 때 블루스를 염두에 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본격적인 블루스 음악의 감상자들에게 과연 그가 "블루스라는 장르의 대가"로 비춰질지는 의문이다. 항상 그의 곡들은 "정통적인 블루스"라는 잣대에서 본다면 "게리 무어는 애초에 블루스를 접한 것 자체가 백인 블루스를 통해서가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기 대문이다. 하지만, 그가 항상 블루스라는 장르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자신을 블루스 뮤지션"으로 포지셔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사실 자체는 대단히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의 노력까지 부정할 정도로 매정한 사람이 있을까?
공화국의 언론은 7080세대에게 인기가 많은 뮤지션이라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는 80년대 중후반에서 90년대 초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밴드를 했던 이들에게 우상이자 목표였던 인물이었다.(물론 공화국 내에서) 수많은 rock and roll kids들은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의 합주실에서 그의 Parisienne Walkway를 카피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가 무대에서 그리고 음반에서 들려줬던 만큼의 Feed-back에 도달하지 못한 수많은 아해들에게 짜증의 시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시절의 이해들이 에디 반 할런과 잉위 맘스틴을 카피하면서 그들의 테크닉을 따라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면 게리의 경우는 그의 연주에서 당시의 아해들이 테크닉이 아닌 다른 것을 익히려 노력했덛랬다.
아마 80년대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게리 무어와 함께 떠오르는 이름 하나가 Virgin Record일 것이다. 그는 Mike Oldfield와 함께 버진 레코드의 구세주로 여겨졌고 한 때는 버진과 게리무어는 서로 동의어였던 시기도 있었다. 아마 작년에 내한공연을 했을 때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무대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쯤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때늦은 후회를 하며자판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게시물의 제목을 저렇게 적은 것은 애써 게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서라 이해해주면 대단히 감사하겠다.(살짝 문장을 바꾼 이유가 거기에 있기도 하다.) 물론 아님 말고...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퀴즈 하나! 아래의 동영상에서 게리 무어와 함께 기타를 치는 사람은 누굴까요?
영어를 모르는 관계로 저 문장의 뜻이 어떤 것인지 모르므로 아시는 분들은 가르쳐 주시길...하지만 무식한 것은 죄가 아니니 욕설은 삼가해주시길 바란다. 여지껏 1954년 생으로 알고있던 게리 무어는 1952년에 태어났다. 왜 잘못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과거 중앙일보사에서 나오던 팝음악 잡지에 게리 무어가 1954년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쓴 기사가 실렸던 기억은 확실하다. 걔네들 하는 일이야 원체 그러려니 하는 관계로 그들을 욕하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 것도 휴가차 스페인에 갔다 호텔방에서 사인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말이다.
한 때 그에겐 "철새"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만큼 그는 한 팀에 오래 있지 못하고 이 팀 저 팀을 옮겨다니길 밥먹듯 했다는 것을 비우호적인 태도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그는 유독 공화국의 팬들에겐 Thin Lizzy의 기타리스트로서 기억된다. 일본과 공화국에서 유난히 인기있는 "Parisienne Walkway"와 "Spanish Guitar"이 그 시절에 발표된 곡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곡이 유난히 인기있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일본과 공화국에서 그의 음악적 여정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국내 언론의 기사 제목처럼 "전설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라 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니다.
물론 그가 30대 후반 이후엔 블루스라는 장르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곡 작업을 할 때 블루스를 염두에 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본격적인 블루스 음악의 감상자들에게 과연 그가 "블루스라는 장르의 대가"로 비춰질지는 의문이다. 항상 그의 곡들은 "정통적인 블루스"라는 잣대에서 본다면 "게리 무어는 애초에 블루스를 접한 것 자체가 백인 블루스를 통해서가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기 대문이다. 하지만, 그가 항상 블루스라는 장르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자신을 블루스 뮤지션"으로 포지셔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사실 자체는 대단히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의 노력까지 부정할 정도로 매정한 사람이 있을까?
공화국의 언론은 7080세대에게 인기가 많은 뮤지션이라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는 80년대 중후반에서 90년대 초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밴드를 했던 이들에게 우상이자 목표였던 인물이었다.(물론 공화국 내에서) 수많은 rock and roll kids들은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의 합주실에서 그의 Parisienne Walkway를 카피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가 무대에서 그리고 음반에서 들려줬던 만큼의 Feed-back에 도달하지 못한 수많은 아해들에게 짜증의 시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시절의 이해들이 에디 반 할런과 잉위 맘스틴을 카피하면서 그들의 테크닉을 따라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면 게리의 경우는 그의 연주에서 당시의 아해들이 테크닉이 아닌 다른 것을 익히려 노력했덛랬다.
아마 80년대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게리 무어와 함께 떠오르는 이름 하나가 Virgin Record일 것이다. 그는 Mike Oldfield와 함께 버진 레코드의 구세주로 여겨졌고 한 때는 버진과 게리무어는 서로 동의어였던 시기도 있었다. 아마 작년에 내한공연을 했을 때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무대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쯤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때늦은 후회를 하며자판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게시물의 제목을 저렇게 적은 것은 애써 게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서라 이해해주면 대단히 감사하겠다.(살짝 문장을 바꾼 이유가 거기에 있기도 하다.) 물론 아님 말고...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퀴즈 하나! 아래의 동영상에서 게리 무어와 함께 기타를 치는 사람은 누굴까요?
2011년 2월 2일 수요일
아님 말고 100곡(126)
듣거나 말거나 1000곡
126. A piece of my heart-Janis Joplin(1967)-
Janis Joplin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식상할 수도 있고 어쩌면 "저 새끼 음악 더럽게 안 들었나 보네... 이 누나 이야기나 하고..."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기껏 음악 듣는 척 가오는 다 잡아놓고 개나 고등어나 다 아는 Janis의 이야기를 하냐?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이야기를 해야한다. 대단히 미안하게도 지난 19일이 Janis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살아있었으면 그 날 She turns 68!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린다는 이야기부터 게시물을 시작해야겠다. 생일날 살아계셨어도 되는데 왜 굳이 돌아가셨수? 생일 축하 치곤 좀 불손한가?
어쨌거나 대중음악계에 있어 가장 불운한 기운이 감돌던 해로 기억될 해는 1970년일 것이다. 그 해 (물론 법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가 결정된 것은 1972년이지만) 비틀스가 해채되었으며 도어스의 짐 모리슨을 저 세상으로 보냈고 지미 헨드릭스 역시 1970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으며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Janis 역시 1970년 운명을 달리했다. 비틀스의 해체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불행한 사건들의 원인이 약물이었음은 다들 잘 알 것이다. 그 해 그나마 슬프지 않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면 Isle of Whight에서의 Rock Festival에서 ELP가 그 유명한 "Pictures at an exibition"을 공식적으로 처음 연주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해에 태어난 누군가는 그런 나쁜 일들이 있더 해에 태어난 것이 원인인지는 몰라도 항상 불만에 가득차있고 냉소적이며 "우울함"이라는 단어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간 자신의 더러운 성격과 운명이 자신이 태어난 해에 그런 나쁜 일들이 줄줄이 일어났던 때문인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오다 이제서야 그 원인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의 개인적인 불행이 100% 1970년의 일련의 사건들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분명한 것은 Janis Joplin을 잃었다는 것 자체고 전세계의 팝음악계는 그 자체로 수십년의 시간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Janis와 같은 여성보컬을 다시 발견해내는 일도 그처럼 짧은 시간에 많은 음악적 성취를 이뤄낼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일도 아직은 요원해보이기 때문이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Janis가 소속되어있던 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에서부터 시작하여 Kozmic Blues Band, Full Tilt Boogie Band까지 그 유명한 Pearl 앨범이 발매되기 전까지 Janis의 활동은 항상 밴드의 보컬리스트였으며 이전에도 이후에도 Janis처럼 Full Band의 음악에 능했던 여성보컬은 극히 드물었다.(사실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Full Band 음악이라는 단어엔 사실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음악의 모든 작업을 밴드를 전제로 하여 만들어지는 음악을 지칭한다고 할 것이다. 이 것보다 조금 더 긴 설명을 하자면 조금이 아니라 심하게 많이 길어지는 관계로 정말 궁금하시다면 전화를 걸어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든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든지 해야하지 않을까 한다.
Janis joplin의 이야기를 단 하나의 게시물로 이야기할 수 도 없고 그건 예의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단히 많은 게시물을 그에게 할애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이 곡 A piece of my heart은 그가 불렀던 곡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인 동시에 가장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곡이기도 하며 곡의 발표년도를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의 음악적 커리어에 있어 비교적 초창기라 할 수 있는...이라기 보다는 전성기의 초창기라 할 수 있는 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 시절에 발표했던 곡이기도 하다. 그냥 연휴를 시작하는 날에 닥치고 즐감들 하기 바란다. 아님 말고...
2011년 1월 24일 월요일
횡재수(Sondless Music))


우선 위에서 두번째의 사진부터 주목해주시길 바란다. EBS의 Space 공감의 애청자라면 Giovanni Mirabassi Trio에 대해 아실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정말 오랜만에 구입한 피아노 트리오의 음반이다. 그리고 가장 위의 사진은 기타리스트이자 보컬인 Petteri Sariola의 음반 재킷이다. 내가 말하려 하는 이 두 장의 음반의 공통점들은 다음과 같다.
1. 두 장 다 알라딘에서 구입했다.(그 회사와 전혀 관계없으니 안심하시길!)
2. 두 장 다 아티스트들에 대한 사전적 짖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구입한 음반이다.
3. 두 장 다 수입음반이다.
4. 수입 음반이긴 한데 미국이나 유럽에서 수입한 음반이 아닌 일본에서 수입한 음반이다.
5. 두 장 다 올 해 구입했다.
6. 앨범에 대한 기대가 100 정도였다면 두 장의 앨범 다 그 두배 이상의 만족도를 준 앨범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Giovanni Mirabassi Trio의 경우는 150 정도? Petteri Sariola의 경우는 250 정도?
지오바니 미라바시 트리오의 음반은 피아노 트리오라는 팀의 구성에 100% 어울리는 메인스트림 재즈 음반이다. 사실 요즘 재즈를 하는 사람들이 거의 재즈 퓨전 계열의 음악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여기저기 뒤지다 보면 의외로 아직도 메인스트림 재즈를 하는 팀들이 많다. 특히나 유럽 출신의 연주자들의 경우에 그렇다 할 수 있다. 세계 재즈계의 양대 강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과 일본의 재즈가 자꾸 새로운 시도를 통해 재즈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쪽으로 그들의 활동 범위를 설정하고 있다면 미국이나 일본과 쌍벽을 이루는 재즈의 강국인 스웨덴의 영향력이 아직도 막강하다 할 수 있는 유럽대륙은 조금 더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재즈를 구사한다고 보는 것도 무방할 듯하다. 좀 도식적인 감이 없진 않지만...
요즘 Finger Style Guitar이라는 것이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에겐 세계적인 추세라 한다. 유투브에 올려 화제가 되었던 공화국의 10대 초반의 아이도 그렇고 그 외 어쿠스틱 기타가 자신의 메인 악기인 연주자들에게 funger style은 거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동영상을 쫙 훑었는데 전통적으로 일렉트릭 기타에서나 가능하다 여겨졌던 햄머링이라든지 에디 반 할런(영어권에선 밴 헤일런이라고 하나 네덜란드 출신인 그들은 반 할런이라 불리길 원한다고 한다.)을 당대 최고의 위치에 오르게한 태핑을 이용하여 마치 두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물론 피아노 연주보다는 다양한 리듬을 만들어낸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Petteri Sariola의 음반을 선택하게 된다면 요즘 어쿠스틱 기타의 추세가 어떤지 확실히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리고 이 사람의 보컬 역시 상당히 매력적이다. 문제는 이런 스타일의 기타가 유행하게 된다면 앞으로 세칭 크리틱이나 리뷰어들이라 불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장르"에 대한 기준을 어디에 둬야할지에 대해 애매한 상황이 올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무서워 새로운 음악을 듣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정말 곤란하지않을까? 2011년 찾아온 이 두 음반의 행운은 아마 2011년을 연 개인적인 최초의 행운이자 2011ㄴ면 마지막 행운일 거라 확신한다. 빌어먹을...
2011년 1월 6일 목요일
필요 이상의 선생질은 거부한다.
1. 쪽수에 대한 강박관념
물론 그들은 엄청난 재미를 봤다. 1987년 6월에 -심지어 고삐리였던 나까지도 거리로 뛰쳐나갔으니- 그들은 엄청난 경험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름 그들은 "조직화되지도 의식화되지도 않은" 대중들의 엄청난 쪽수가 4.13 호헌조치를 무력화시키고 공화국에서 근 20년간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다. 인정한다. 그들이 느꼈을 쪽수의 엄청난 힘을! 그리고 쪽수로 밀어붙일 수 있다는 것이 정치투쟁의 과정에서 얼마나 큰 무기로 작동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면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젠 그런 확신이 도를 지나쳐 그들 스스로를 강박증에 빠져들게 하고 말았다.
그들은 2002년에 광장에 모여 "흔히 이야기하는 진보적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런 가치를 부정하는 구호인 "애~한 민국"을 외치는 사람들을 W 세대니 하는 이름을 붙여가며 지속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하지만 그 것은 그들이 바라던 "자발적 참여"도 심지어는 "국가주의적 광분"도 아니었다. 모양 많이 빠지는 이야기지만 교보문고와 동아일보 건물 사이의 거리에 앉아 축구를 보다가 뒤의 여중생들이 미친 듯이 당시 유행하던 응원구호들을 선창하다 사람들의 반응이 없자 "야! 재미 없다. 딴 데 가자"라며 자리를 떴다. 물론 그런 아이들이 절대다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러,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있는 스스로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에게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수였다. 애초에 그들이 거리로 나선 다양한 이유들을 무시하고 일단 "무언가 생각이 있어서 나왔을 것이고 그런 생각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틀이 있을 것"임을 전제한 후 현상을 분석하려 했던 것은 엄청난 무리수였다. 아마 그들은 "하나의 목적을 이루려 모이기 위해" 거리에 나온 것이 아니라 "거리에 나가기 위해" 거리에 나갔을 것이리라.
그런 후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집단 지성"이니 이런 말을 하면 되나? 어떤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이 "집단의 의식"이나 "집단의 지성"에 의해 발현된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동시에 신선한 발상이다. 그들의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아마 칼 융은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론을 전면 수정하거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전면전을 벌이려 하지 않았을까? 사람이 모이는 것에 그렇게 의미를 두고자 한다면 이미 모인 사람들을 두고 "최대한의 선의"를 이용해 해석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기 전에 미리 그들에게 "선생질"을 했어야 옳다. 물론 쪽수의 힘은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의 세칭 "진보적 지식인"들은 쪽수라는 것에, 사람이 거리로 나온다는 것에 나르시스트적 의미부여를 하는 데에 쓸 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지배계급은 지나치게 과민반응한다. 현상에 대한 과잉해석은 "대~한 민 국"이라는 반동적 구호를 외쳐대는 이들에게서 "신세대의 에너지를 느끼고 변화를 갈망하는 그들의 욕구에 귀를 기울여라"라는 웃어선 절대 안될 자가당착의 담론을 생산해낸다. 이런 선생질은 정중히 사양한다.
2. 진보 집권이라고?
이제부턴 실명 까고 이야기하겠다. 일단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오랜만에 책 가지고 돈 번 것 축하드린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장난하자는 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구질구지랗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 책을 읽은 후 내린 결론은 단 하나다!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진보집권이라는 것은 노무현 정부와 큰 그림에 있어 별 다를 바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런 것을 가지고 진보가 집권했닫고 떠들 요량이면 입 닥치라고! 그냥 오연호 개인이 책으로 돈 좀 번 것에 만족하고 말라고 말이다.
책을 읽어보신다면 말릴 이유는 없지만 되도록이면 도서관에서 대여하시기를... 아무튼 요는 그런다. 그들이 "집권"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가장 강하게 원하는 것은 "현재 민주당에 들어가있는 전대협 세대의 386들의 선의"에 불과하다는 것! 사실! 좌파ㅑ 우파냐라는 구분을 억지로 사용하지 않고 정말 지겹디 지겨운 진보 개혁세력이라는 말을 꺼낼 때부터 이 것은 분명했지만, 현재의 대통령제를 전제한 상황에서 결국 집권이란 말은 대통령 선거의 승리를 뜻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승리했을 경우 그 어떤 방법으로 "정권의 진보적 성격"을 무엇으로 강제한다는 말인가? 과연 지금 가운데에서 조금이라도 왼쪽에 있는 사람들이 민주당에게 그 것을 강제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 없이 그런 식의 비당파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결국 "민주당이나 노빠들의 선거운동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오연호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면 이 정도가 아닐까?
"돈 벌려면 벌어! 근데 딴 거 해서 벌어! 딴 거 해서 안되면 입 다물고 쉬어!"
아무튼 1월의 첫 게시물이 이 정도로 날림인 데다가 우울한 이야기인 것은 나 자신에게만 안좋은 일인 것 같다. 빌어먹을
물론 그들은 엄청난 재미를 봤다. 1987년 6월에 -심지어 고삐리였던 나까지도 거리로 뛰쳐나갔으니- 그들은 엄청난 경험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름 그들은 "조직화되지도 의식화되지도 않은" 대중들의 엄청난 쪽수가 4.13 호헌조치를 무력화시키고 공화국에서 근 20년간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다. 인정한다. 그들이 느꼈을 쪽수의 엄청난 힘을! 그리고 쪽수로 밀어붙일 수 있다는 것이 정치투쟁의 과정에서 얼마나 큰 무기로 작동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면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젠 그런 확신이 도를 지나쳐 그들 스스로를 강박증에 빠져들게 하고 말았다.
그들은 2002년에 광장에 모여 "흔히 이야기하는 진보적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런 가치를 부정하는 구호인 "애~한 민국"을 외치는 사람들을 W 세대니 하는 이름을 붙여가며 지속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하지만 그 것은 그들이 바라던 "자발적 참여"도 심지어는 "국가주의적 광분"도 아니었다. 모양 많이 빠지는 이야기지만 교보문고와 동아일보 건물 사이의 거리에 앉아 축구를 보다가 뒤의 여중생들이 미친 듯이 당시 유행하던 응원구호들을 선창하다 사람들의 반응이 없자 "야! 재미 없다. 딴 데 가자"라며 자리를 떴다. 물론 그런 아이들이 절대다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러,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있는 스스로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에게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수였다. 애초에 그들이 거리로 나선 다양한 이유들을 무시하고 일단 "무언가 생각이 있어서 나왔을 것이고 그런 생각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틀이 있을 것"임을 전제한 후 현상을 분석하려 했던 것은 엄청난 무리수였다. 아마 그들은 "하나의 목적을 이루려 모이기 위해" 거리에 나온 것이 아니라 "거리에 나가기 위해" 거리에 나갔을 것이리라.
그런 후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집단 지성"이니 이런 말을 하면 되나? 어떤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이 "집단의 의식"이나 "집단의 지성"에 의해 발현된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동시에 신선한 발상이다. 그들의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아마 칼 융은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론을 전면 수정하거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전면전을 벌이려 하지 않았을까? 사람이 모이는 것에 그렇게 의미를 두고자 한다면 이미 모인 사람들을 두고 "최대한의 선의"를 이용해 해석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기 전에 미리 그들에게 "선생질"을 했어야 옳다. 물론 쪽수의 힘은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의 세칭 "진보적 지식인"들은 쪽수라는 것에, 사람이 거리로 나온다는 것에 나르시스트적 의미부여를 하는 데에 쓸 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지배계급은 지나치게 과민반응한다. 현상에 대한 과잉해석은 "대~한 민 국"이라는 반동적 구호를 외쳐대는 이들에게서 "신세대의 에너지를 느끼고 변화를 갈망하는 그들의 욕구에 귀를 기울여라"라는 웃어선 절대 안될 자가당착의 담론을 생산해낸다. 이런 선생질은 정중히 사양한다.
2. 진보 집권이라고?
이제부턴 실명 까고 이야기하겠다. 일단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오랜만에 책 가지고 돈 번 것 축하드린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장난하자는 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구질구지랗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 책을 읽은 후 내린 결론은 단 하나다!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진보집권이라는 것은 노무현 정부와 큰 그림에 있어 별 다를 바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런 것을 가지고 진보가 집권했닫고 떠들 요량이면 입 닥치라고! 그냥 오연호 개인이 책으로 돈 좀 번 것에 만족하고 말라고 말이다.
책을 읽어보신다면 말릴 이유는 없지만 되도록이면 도서관에서 대여하시기를... 아무튼 요는 그런다. 그들이 "집권"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가장 강하게 원하는 것은 "현재 민주당에 들어가있는 전대협 세대의 386들의 선의"에 불과하다는 것! 사실! 좌파ㅑ 우파냐라는 구분을 억지로 사용하지 않고 정말 지겹디 지겨운 진보 개혁세력이라는 말을 꺼낼 때부터 이 것은 분명했지만, 현재의 대통령제를 전제한 상황에서 결국 집권이란 말은 대통령 선거의 승리를 뜻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승리했을 경우 그 어떤 방법으로 "정권의 진보적 성격"을 무엇으로 강제한다는 말인가? 과연 지금 가운데에서 조금이라도 왼쪽에 있는 사람들이 민주당에게 그 것을 강제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 없이 그런 식의 비당파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결국 "민주당이나 노빠들의 선거운동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오연호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면 이 정도가 아닐까?
"돈 벌려면 벌어! 근데 딴 거 해서 벌어! 딴 거 해서 안되면 입 다물고 쉬어!"
아무튼 1월의 첫 게시물이 이 정도로 날림인 데다가 우울한 이야기인 것은 나 자신에게만 안좋은 일인 것 같다.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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