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대로 쓰레기 더미에서도 꽃은 핀다. 실제초 지금은 상암동 서울 월드컵 경기장은 과거 난지도 쓰레기 하치장이라 불리던 곳이었는데, 그 쓰레기 더미에서도 피던 꽃이 있다고 한다.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개인적으로 내가 게을러) 없으나 둥글레차로 유명한 둥글레라는 식물은 쓰레기 더미에서도 생존한다고 업자들이 선전을 하며 그로 인해 그 뛰어난 생명력은 인간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를 가지고 선전을 했으며 그 선전은 굉장한 효과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지금 하려고 하는 이야기에 더 걸맞은 제목은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의외의 보물을 발견할 수도 있다"가 적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무튼 또 서론이 존나 긿었으니 이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자.
는 >성과 도시?와는 좀 더 다른 측면에서 공화국의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에 이르는 여성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텔레비전 시리즈다. 한 때는 나 역시도 이 프로그램을 꽤나 열심히 시청했던 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붵 이 시리즈는 순전히 "남여 상열지사"내지는 "오로지 아는 단어라고는 사랑밖엔 없는 머저리들의 찌질한 이야기"가 되면서 Don't touch이라는 요즘 유행하는 국적 불명의 영어가 아닌 "Please turn off your T.V. set for your mental health"라는 충고가 꼭 맞는 프로그램이 된 아쉬움이 있다. 물론 일정 시점을 벗어난 후엔 아쉬울 것도 없을 정도로 그 자체로 "쓰레기통"이 되어버린 시리즈가 되어버렸다. 빌어먹을...
버뜨 그러나!!! 많은 수의 공화국 인민들은 이 시리즈를 통해 "The way I am" "Breakable" "The corner of your heart"이라는 곡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앞서 이야기했던 특정 계층 혹은 그 시리즈의 팬들을 통해 대단히 많은 "어둠의 경로에서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크게 보자면 pop이라는 장르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folk적인 요소들이 가득한 이 곡들은 꽤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국내에서 발매되지도 않았을 뿐더러(만일 발매된 적이 있다면 수정하겠다.) 심지어 공화국의 "Grey's Anatomy"의 팬들은 이 곡을 부른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것도 하물며 이 곡들을 부른 사람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지나간 경우가 허다하다.
Ingrid Michaelson(잉그리드 마이클슨이라고 한단다.)이라는 북구와 독일계의 냄새가 동시에 나는 이름을 가진 뉴욕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는 Indie Popg혹은 INdie Folk계열의 아티스트로 분류되는 1979년 12월 8일-즉 존 레넌이 죽기 바로 1년 전에 태어난-생의 New York주의 Staten Island출생의 여성이 바로 이 곡들의 주인공이다. 이미 만으로 4세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Dorothy Delson Kuhn Music Institute에서 보컬 트레이너인 Elizabeth Mcollough을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걷게 될 계기를 가지게 되었으며 나름대로의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스스로 자신의 곡 작업에서부터 프로듀싱에 이르는 과정에 참여하여 스스로의 음반을 완성하는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절대 대중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뉴요커들이라면 그의 음악을 다 알고 있을 정도의 인지도를 지닌" 주목할만한 재능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적 명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잉그리드가 전세계적... 은 아니더라도 유럽에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2008년도 JAson Mraz의 유럽 투어에 동행하면서 때로는 그의 무대에 오프닝으로 서기도 하고 제이슨의 유일한 여성 보컬과의 듀엣곡인 Lucky을 함께 부르기도 하며 유럽에 이름을 알리며 현재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잉그리드 마이클슨을 모른다고 해서 자괴감 따위를 느끼실 필요는 없다. 그저 "난 잉그리드 마이클슨을 알만한 사람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시면 아무 문제 없다. 그 때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2009년엔 프랑스와 독일 투어를 했고 2010년엔 "Everybody"라는 타이틀의 전미 투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잉그리드에게 발견되는 특이한 점은 "Grey's Anatomy"외에도 다른 수많은 텔레비전 쇼에 자신의 곡이 소개되었고 심지어 농담 삼아 "음반 판매로 그가 얻은 수입보다 텔레비전 방송에서 그의 곡이 등장하면서 그로 인해 받는 인세가 더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을 정도라 한다. 개인적으로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 재능을 지닌 아티스트라 오래전부터 이야기를 꺼낸다고 작심하고 있었으나 이제서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 게시물이 속한 카테고리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잉그리드의 곡들은 손수 유투브를 통해 찾아보시기 바란다. 그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싫음 말고!
첫번째 뻘소리-Drama는 Yes의 discography속의 재앙인가? 국내에 엄청나게 많은 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엄청난 반대자들도 가지고 있는 밴드 중 하나가 바로 Yes일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은 예스라는 팀의 보컬리스트가 존 앤더슨이기 때문이다. 조금 막말을 하자면 "어떻게 들으면 게이임이 확실하다 생각되는 음색을 가진" 존 앤더슨의 보컬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예스를 거론하느 것 자체를 싫어한다. 좀 심한 경우엔 Emerson Lake and Palmer의 C'est la vie 와 같은 평이한 곡에 엄청난 찬사를 보내다가도 예스의 Roundabout이 방송에서 나온다거나 하면 라디오의 채널을 돌려버리는 경우도 있다. 풍부한 성량과 샤우팅 그리고 무시무시한 고음이 보컬리스트라는 사람이 가져야할 필수덕목이라는 점을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공화국의 상당수 감상자들에게 예스의 보컬리스트이자 예스의 프론트맨이었으며 그 자체로 예스라 할 수 있는 존 앤더슨의 창법과 음색은 대단히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곡이 수록된 1980년 발매된 'Drama'라는 타이틀의 예스의 앨범의 보컬은 존 앤더슨이 아니다.(이 부분에 대해선 이 쓰레기 게시물의 도번째 파트에서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 위에서 입에 게거품을 물고 이야기했듯, 존 앤더슨이 곧 예스이고 예스는 존 앤더슨이었다. 적어도 영미의 팝음악 팬들에겐... 그래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나중에 이야기하더라도 존 앤더슨이 빠진 Drama라는 타이틀의 앨범은 예스의 디스코그래피에서 "평단의 최악의 평가"와 "최악의 상업적 실적"을 동시에 얻게 된 앨범이 되었다. 영미시장에서 이 음반에 대한 반감은 "거의 기계적인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존 앤더슨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하지만 예스의 사운드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세계적인 건반악기 연주자이자 신서사이저 연주자인(두 가지의 차이가 뭐냐? 너 바보 아냐?라 하실 수 있겠으나, 사실 두 악기는 굉장히 많이 다르다. 키보드를 이용해 소리를 내는 것이 공통점이라는 이유로 같은 취급을 받을 수는 없다.) Rick Wakeman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릭 웨이크먼은 이미 1974년의 앨범인 Relayer의 작업 당시 이미 팀을 떠났더랬다. 그러나 그 때의 반응은 이 정도로 싸늘하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예스의 팬들은 패트릭 모라즈에 대해선 관대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존 앤더슨의 부재에 대해서 예스의 팬들은 엄청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존 앤더슨이 없는 예스는 예스가 아니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Drama는 예스에게 있어 지우고 싶은 기억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198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이 앨범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는 전문가들이 조금씩 자신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존 앤더슨이 없고 릭 웨이크먼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처참한 실패를 경험했다는 이유로 이 앨범이 예스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존재하는 것이 민폐인 앨범"의 취급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다면 예스의 팬들이 가장 많고 그들의 음악이 가장 폭넓게 이해되고 있다는 일본에서 그런 움직임은 오히려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더 활발했다. 국내에서도 지금은 좀 뜸한 S모 형님을 중심으로 한 전문가들이 Drama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재평가를 내리려는 시도에 착수했다고 볼 수 있다. "넌 어떠냐고?" 굳이 대답을 하자면 티렉스의 생각은 "이 앨범은 예스의 앨범 중 베스트 3안에 들어갈 훌륭한 음반"이다.
두번째 뻘로시-Drama? Chris Squire(Bass Guitar), Steve Howe(Guitar) and Alan White(Drums), Trevor Horn(Vocals) and Geoff Downes(Keyboards) of The Buggles(and이라는 접속사를 어느 경우에 쓰는지 당연히 아시리라 믿으며 설명 들어가겠다.) 위에 열거한 인물들이 Drama를 녹음할 당시의 라인업이다. 다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굳이 덧붙이자면 Buggles이라는 팀은 그 유명한 "Video kills the radio star"로 유명한 영국의 테크노 듀오이며 후에 죠프 다운스는 1982년 그 유명한 Asia의 멤버로 참여하게 된다.(이 것도 다 아시겠지만...) 좀 심한 표현을 쓰자면 예스의 기존 팬들으 입장에서 보면 "차포를 다 뗀 예스"라 해도 과언이 아닌 라인업인 것이다.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존 앤더슨과 릭 웨이크먼이 자신들의 솔로 프로젝트 때문에 팀을 떠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idling away할 시간이 필요했던지 한 명은 자신의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주거지 근처의 바를 전전하며 술독에 빠져 있었고 그로 인해 두 명이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 스콰이어는 "예스라는 팀은 존 앤더슨의 팀이 아니라 존과 나의 팀"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머릿속에 각인한 사람이었고 움직이지 않는 이들을 대신하여 버글스의 멤버를 통째로 영입해 새로운 앨범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항상 예스의 스튜디오 앨범의 작업에 핵심 축으로 참여하던 크리스였으나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면 아무리 크리스 자신이 작업의 핵심에 있었다 하더라도 곡작업엔 존과 릭 역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며-그렇다고 해서 스티브 하우가 곡작업에 있어 한 발 물러선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스티브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쇼ㅡ티브는 이 앨범의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예스의 음악엔 크리스의 영향외에도 존과 릭의 영향이 엄청나게 녹아들어가 있었다는 점이다. 존과 릭이 없는 상태에서 크리스와 스티브가 아무리 열심히 작업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예스의 팬들-혹은 팬이 아닌 사람들도-이 이 앨범을 이전의 예스의 앨범과는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 버글스의 음악은 당시 엄청난 유행의 조짐을 본이며 80년대 초반의 대세가 되리라는 예견을 지배적이게 만들었던 장르인 테크노, 뉴웨이브적인 것이었으며 거기에 펑크(punk)적인 요소 또한 다분한 음악이었다. 그에 비해 예스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프로그레시브 혹은 아트 록 계열의 밴드들 중에서도 가장 탄탄한 연주력을 갖추고 엄청난 업비트와 굉장히 헤비한 사운드를 구사하던 팀이었다. 게다가 존 앤더슨과 릭 웨이크먼은 10년에 한 번 나오기도 힘든 수준의 보컬리스트와 건반 연주자 아니던가? 게다가 릭 웨이크먼이 대단히 많이 훈련된 클래식 음악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조프리 다운스(지오프 다운스라고도 한다.)는 릭 웨이크먼 보다는 우히려 장 미셀 자르나 반겔리스처럼 뛰어난 연주력보다는 "신서사이저 사운드의 독창성"에 강점이 있는 건반 연주자 아니던가? 예스의 팬들이 이 음반이 "예스의 명찰만을 단 비(非)예스의 음악"이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평론가들 역시 수많은 반복 청취를 통해 존 앤더슨과 릭 웨이크에게 단련된 귀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이 자리에서 제기해 보고자 한다.
3. 솔직히 The best은 아니지만... 평론가라는 사람들 역시 dogma라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들 때문일 것이다. 예컨데 밥 제임스가 어느날 깨어보니 자신의 몸 안으로 키스 에머슨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치자. 그리고 다음 앨범은 키스 에머슨의 에머슨, 레이크, & 파머의 음악에 근접한 음반이었다면 평론가들의 반응은? 물론 굉장히 새로운 실험이니 하는 반응들이 주를 이루겠지만 이런 커멘트는 당연히 붙을 것이다ㅣ. "다 좋은데... 밥 제임스는 사신의 음악적 색을 잃어버린 듯하다."라는... 분명히 Drama 앨범 역시 비슷한 경우에 해당할 것이라는 것이 개인적 견해다. 그들이 익숙하지 않은 음악이 그들이 익숙한 "예스"라는 간판으로 게다가 존 앤더슨에 비하면 "듣보잡"에 가까운 트레버 혼의 목소리로...
다들 아시다시피 이후 트레버 혼은 예스의 제작자가 되는데,(중요한 사실 한가지는 2000년 이후에도 트레버 혼과 죠프리 다운스는 '버글스'의 이름으로 한 무대에 굉장히 여러번 섰더랬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더 이상 보컬리스트가 아니길 원했던 이유에 이 앨범이 조금은 기여했다고도 한다. 어쨌거나 절대 예스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드라마라는 앨범이 베스트는 아니다.(솔직히 내가 베스트 3안에 든다고 한 것은 약간의 오기가 내재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런저런 외피들을 다 걷고 알맹이만을 본다면 나름 내실을 가지고 있는 앨범이다. 예스를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이 앨범을 다시 자세히 들어보라 권해주고 싶다. 계급장 떼고 음악만을 보면 그렇게 후지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존 앤더슨이나 릭 웨이크먼을 대체할만한 다른 인물이 없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트레버 혼이나 죠프리 다운스가 마냥 욕만 얻어먹어도 되는 듣보잡은 아닌 탓이다.
1. 체력과 지구력의 한계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솔직하게 책이건 다른 종류건 활자가 있는 인쇄물을 본 시간보다 음악을 들은 시간이 훨씬 더 길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런 날양아치의 습성을 주변 사람들이라 해서 모르리라는 법은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 "어떤 장르의 음악을 듣는가?" "특별히 듣는 장르는 없다.." "그래도 좋아하는 장르가 있을 것이지 않은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좋아하는 장르도 없다." "그럼 음악을 왜 듣는가?" "선호하는 장르가 없느 것이 음악을 들을 때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 이런 종류의 허섭한 대화 아니면 "넌 하루 종일 Rock음악만 듣는가?" "절대 아니다." "넌 하루 종일 블루스 음악만 듣는가?" "웃기지 말아라! 그렇지 않다." "재즈만 듣는가?" "지랄하지 말아라! 어떻게 인간이 한 장르의 음악만을 들을 수 있는가? 난 마라톤 선수가 아니다." 그렇다. 한 장르의 음악을 목숨을 걸고 듣기엔 내 지구력은 형편없고 지구력이 형편없는데 체력이 좋을 리 없다. 아시겠수?
2. Dogma 나도 음악을 무지하게 많이 들었다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가끔 하는 질문이 있다. "모짜ㅣ르트나 베토벤이 지금 활동한다면 어떤 음악을 쓸까?"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은 불경스럽다. 베토벤이나 모짜르트가 지금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그 전에 그들의 음악과 같은 음악을 만든 사람이 없었을테고 21세기인 지금 그 음악들이 나왔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고 확신하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너의 무식함을 이해할 수 없다." 과연 그럴까? 그렇게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는 그렇게 궁금하지 않지만, 고전음악외의 다른 장르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당신들이 미쳐있는 그 장르는 그저 여러 음악들 중 하나의 장르에 불과할 뿐이다." 이 이야기가 불편하다면 아랫 줄부터는 읽지 않아도 좋다.
다시 반복해서 질문을 던져본다. "모짜르트가 지금 태어난다면 과연 어떤 음악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음악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개소리는 빼고 일단 그는 다시 태어나도 음악을 해야만 한다고 가정하자. 이 가정이 왜 중요하냐고? 씨발 모짜르트가 다시 태어나면 음악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도 경우의 수에 포함시킨다면 지금 왜 아까운 전파와 전기를 낭비하면서 이 짓거리를 하겠냐고? 응? 하지만 이런 답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모짜르트가 지금 활동한다면 전혀 다른 개념의 멀티미디어 박스를 발명했을 것"이라는 정도의 답은 충분히 타당하다. 모짜르트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 자신의 환경과 자신의 재능에 의해 18세기 사람들이 간응하닫고 생각했던 것을 뛰어넘는 다른 차원의 어떤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활동한다면?
지금 그가 접할 수 있는 악기, 들을 수 있는 음반, 그가 찾아볼 수 있는 공연 이런 음악적인 요소들을 바탕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이 과연 "시대으로 합의된 상상력을 능가하는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 그가 그의 시대에 그의 배경과 그의 재능으로 그런 업적이 가능했다 해서 그 것이 21세기 초에 가능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100% 환경에 좌우되는 동물이 아닐 수는 있겠으나 그를 규정하는 것은 존재이며 그를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사적 유물론을 연상하지 마시기 바란다. 그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왜 그 것도 설명해 주랴?) 만일 모짜르트가 클래식 음악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수긍할 수 있다면 다음의 이야기도 수긍해야 한다. 물론 하기 싫으면 말고!
지금 어느 누군가들이 그렇게 고귀하고 고상하게 생각하시는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당시 지배계급이 좋아하고 그래서 그들의 경제력으로 지원을 받았던 음악ㄱ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은 그 때와 음악을 소비하는 패턴이 다르고 댖우들의 인식고 다르고 더더군다나 음악이라는 것의 사회적인 존재의 형식이나 내용이 다르기때문에 그 때와는 달리 클래식 음악이 주류 장르가 아닌 것이다. 이 것을 두고 21세기의 우매한 대중들 때문에 클래식 음악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거나? 현대인들은 공부를 하기 싫어해 무식한 관계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가슴 아파한다면 그냥 그 것은 당신들의 정신건강을 갉아먹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음악학이나 음악 이론에 비추어 높은 완성도를 가지는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서양의 고전음악이 정한 음계가 12음계라 해서 "특정 음정으로 특정 음예가 존재하지 않는 임도의 음악"이 미개하다거나 "반음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의 고전음악 혹은 국악은 그 표현에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한 마디로 "어디 가서 너맡 병신 되는 일"인 것이다. 그래야 어느 특정한 모임에 짚단처럼 구석의 자리를 챙기다가 "클래식을 주로 듣지 않는다"는 말에 상대방이 깜짝 놀라며 침묵의 시간이 흐르다가 "혹시 재즈는 들으세요?"라는 질문에 대해 긍정의 답을 날리면 "아! 그래도 음악을 듣지 않으시는 건 아니네요"라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듣는 불쾌감 따위는 없어질 것 아닌가?
3. 불편한 진실? 정확하게 1993년에서 1995년을 지나가는 동안에 내가 결심하게 된 것은 "더 이상 차트를 신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당시 컬럼비아 에픽의 위트니 휴스턴, CBS Sony의 머라이어 캐리, 유니버설의 셀린 디온은 이른바 "세계 최고 레이블들의 대표선수"들이었다. 그 빌어먹을 놈의 최고 레이블들이 대표선수라는 것을 눈에 띄게 밀어준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Hot shot debut"이라는 말들을 심심치 않게 사용하게 되었는데, 말 그대로 빌보드 Hot 100 싱글 차트에 등장하는 첫 주에 1위를 차지하는 일이 빈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1970년 비틀스의 The long and winding road이 첫 주에 6위 둘째 주에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 이후엔 어떤 차트도 밎지 않았다. 물론 일종의 인기투표였던 공화국 지상파 방송국들의 가요차트는 그 이전부터 믿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요즘에 D모 라는 이름의 팀의 K모씨가 이야기한 "우리는 회사가 작아서 1위를 못했다"는 발언을 했고 그로 인해 그에 대해 애초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밤의 주둥아리들이 욕질을 해대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항상 이야기하듯, 이런 상황에서 "넌 그런 말을 하면 안 돼!"라는 욕질은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의 윤리적가티를 따지는 것은 차후의 문제이고 그는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과거에 사회면에 많이 등장해서 안된다고? 쌈질을 좀 하고 다녀서 입 닥치라고? 다 좆까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많은 이들이 불편하겠지만 그의 이야기는 사실이다.
물론 그들도 같은 방식을 썼다. 티저를 올리고 음원 공개일을 미리 밝히고... 하지만, 그들이 1위를 하지 못하게 했던 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항상 Ready to buy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수십만의 팬클럽 회원들과 음원 출시일이면 업무를 중단하고 법인 카드나 법인의 통장을 이용하여 자사 가수의 음원을 사들이는 직원들, 그리고 소매시장에 내기도 전에 미리 회사의 창고에 "도매로 판매된 것으로 정리되어 있는 상태로 다시 일반 소비자들의 주문이 오기를 기다리며 투자용 재고로 활용되고 있는 첫번째 프린트들..."이 미국 뿐 아니라 공화국 가요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불편하지만 사실인 이 문제를 넘어서야 진정 명랑사회가 가까이 올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내가 너무 뻔한 이야기들만 했나? 줴길...
아서 블레이크, 그의 애칭인 Blind Blake으로 더 유명한 이 아티스트는 초창기의 Ragtime Bles의 대가들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죽은 연도도 확실하지 않고 태어난 연도는 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대중음악사가들 혹은 음악학자들의 추정에 의해 1893년에 태어나 1933년에 사망하지 않았을까?라는 기록들만 잇을 뿐이다. 그의 애칭이 Blind이라면 음악계에서 그를 통칭하는 수사는 "The King of Ragtime Blues Guitar"이라고 한다. 워낙 딴따라판이라는 곳엔 King도 많고 Legend도 많긴 하지만, 지금 얼마 남아있지 않은 그의 도넛판(SP 혹은 75회전 읔반 등 어떻게 불러도 좋다.)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그의 연주는 왜 사람들이 그를 래그타임 블루스 기타의 왕이라 하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본디 대가란 짧고 굵게 살다 간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대가라 불리거나 ~의 왕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짧고 굵게 왔다 간 경우가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 비해 비례적으로 많다는 것이 그 특징 중 하나일텐데, 이런 경우는 블라인드 블레이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 지금은 음반사업을 접은 Paramount와 계약을 하고 1926년에서 1932년까지의 기간동안 대략 80개 정도의 트랙을 녹음한 것이 그의 스튜디오 활동의 전부라 하니 얼마나 짧고 굵게 살다 간 사람인지 알 수 잇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출생년도에 대한 추정이 얼추 맞는 것이라 한다면 그는 한국 나이를 기준으로는 30대 중반에야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 본격적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니 20대에 모든 것을 이룬 사람들이 많은 이 바닥에 대해 열폭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제공해준다 아니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비록 태어난 해와 세상을 뜬 해는 분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기록을 보면 그는 Jacksonville Florida 태생이라 되이있다. 세상에 태어난 곳이 어딘지 아는데 연도도 모른다고? 물론 그의 출생 도시 역시 파라마운트에서 발표한 기록일 뿐 그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그의 이름이 본래 Blind이 아니라 Arthur이라는 점까지도 그저 언젠가 그의 지인이 "당신의 진짜 이름이 뭐냐?"라는 질문에 대해 "Arthur"이라 답했다는 말이 전해지는 것외에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한다. 심지어 그가 굉장히 유명한 기타리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 남아있는 그의 사진은 단 한장이라 하니 이 사람에 대해 조사하다보면 "블라인드 블레이크는 외계인이거나 파라마운트에서 가상으로 만들어 여러 사람들을 시켜 녹음작업을 했던 인물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니 어디 가서 쓰잘데 없이 "미지의 인물인 블라인드 블에이크가 존재했다는 것을 아니?"라는 류의 찌질함을 보이지 마셨으면 한다.
1925년 녹음된 그의 첫 음반은 파라마운트의 예상과 달리 굉장히 좋은 판매실적을 올렸다고 한다. 그의 데뷔 곡은 "Early morning blues"이라는 곡인데 오늘 여러분들이 들으실 "West coast blues"은 이 곡과 같은 싱글의 B 사이드에 수록된 곡이다. 과거 몇 번 링크를 걸었던 곡들- 누구의곡이었는지는 여러분들께 숙제로 남기려 한다. 곡명은 말씀드리지요. "Maple leaf rag"-을 상기하시면서 래그타임(전에 소개했던 곡은 정말 재즈가 본격적으로 그 틀을 가지기 전의 곡이었다.)과 래그타임 블루스가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해선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 물론 싫음 말고... 블루스에 대한 관심으로 잠을 이룰 수 없다거나 하신 분들잉라면 반드시 들으시고 아닌 분들도 꼭 들으실 곡이라고 주장한다. 듣기 싫으면 말고...
2010년 8월 11일 수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
116. Ain't no sunshine when she's gone(Freddie King)
Frederick Christian, Freddie King은 모두 같은 사람인데 궁극적으로 이 사람은 자신의 본명이나 음반 작업시 혹은 무대에서 활동할 때의 이름보다는 음악 전문가나 팬들은 이 사람을 "The Texas Cannonball"이라 불렀다. 이 Freddie King은 Albert King, B.B. King과 함께 블루스 일렉트릭 기타의 Three Kings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대단히 애석한 것은 그의 업적이나 연주력에 비해 공화국에선 비교적 덜 알려져있다는 점은 대단히 애석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또 이상하게 생각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이 텍사스 출신의 텍사스를 대표할만한 뮤지션 중 하나인 프레디 킹은 가장 뛰어난 시카고 블루스(Chicago Blues) 뮤지션들 중 한 명으로 꼽힌다는 점이다. 물론 이상하지 않으시다면 말고! 아!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의 음악사적 위치가 공화국에서 과소평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그의 곡들을 공화국 인민들이 잘 모른다는 말로 착각하시지 마시라!
이 곡은 아마 심야에 나오는 광고들의 CM으로 대단히 여러번 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또! 또! 광고에 많이 쓰인 곡을 쓰고 연주한 사람이니 음악이 가볍겠지! 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런 말씀은 말타는 서부에 가서 하시고! 블루스라는 장르가 그렇게 만만하진 않으니 섣부른 판단은 자제해 주시기 바란다. "Have you loved a woman"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계실까? (제발 브라이언 애덤스의 "Have you really loved a woman"과 혼돈하는 바보짓은...)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곡은 정말 한 마디로 "놀라운 블루스 넘버"라 할 수 있는 명곡인데, 그럼 여기서 또 한가지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그 곡이 그렇게 좋다면서 왜 다른 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빠졌냐?" 아! 물론 "Have youloved a woman"에 대한 게시물도 있을 것이다. 다만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곡은 "혹시라도 당신들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블루스에 대한 주눅든 마음"을 좀 풀어주기 위함이다. 아무리 명곡이라 하더라도 너무 어려운 곡들만 듣게 되면 "블루스"라는 단어만 들어도 나가 떨어질 수 있고 그 것은 절대 티렉스가 바라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레디 킹이 대단히 돋보이는 인물이라는 점을 여러분들께 부각시키기 위해 프레디에 대한 첫번째 소개의 게시물에서 이 곡을 선택한 것이다. 왜냐고? 프레디는 당연히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이기도 하지만, 여러분들께서 아시는 것 이상으로-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절대 B.B. King에 뒤지지 않는-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이ㅑ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목적으로 소개하기엔 이 곡만큼 대중적이면서도 보컬리스트로서의 프레디 킹의 장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곡을 찾기도 그다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시거나 하면 알겠지만, 프레디 킹은 일단 외관상으로 "오래 살기 힘든" 외모를 가지고 있다.(나쁜 뜻이 아니라 절대 건강하게 생기지 않은 외모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는 30대 초반에 세상과 등을 졌고 그의 활동 기간이 20년이나 되지만 그의 데뷔가 빨랐다는 것과 그의 능력들을 감안햇을 때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 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짧은 커리어를 가지고 잇는 뮤지션이다.
이야기가 또 딴 길로 간다고? 그렇게 보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B.B. King이나 Albert King과 거의 같은 클래스의 블루스 뮤지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절한 사람이기 땜누에 그의 짧은 인생을 굉장히 밀도있게 살펴볼 필요가 잇고 다프레디 킹에 대한 이야기를 할 다음 번 게시물부터는 얼마나 빡센 상태로 게시물들을 작성해야하는지에 대해 미리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빠른 데뷔가 가능했던 이유는 그의 어머니인 엘라 메이(Ella Mae)와 그의 숙부가 그가 여섯살 되던 해부터 기타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던 탓이라 전해진다. 그기로 그는 가족과 함께 그가 15세 되던 해인 1949년에 시카고 근교로-정확하게는 시카고의 서남부로- 자신이 살던 텍사스의 댈러스를 뒤로 하고 이주하게 된다. 그래서 그가 TThe Texas cannonball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음악사전의 Chicago Blues를 소개하는 챕터에 시카고 블루스의 대단히 중요한 뮤지션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1954년에서 1956년 사이에 프레디 킹은 생애 첫 녹음을 하고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데뷔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이름에 관한 일화가 하나 전해지는데 그가 자신의 성을 "King"으로 바꾸게 된 것 역시 이 시기라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직업적인 연주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B.B> King"처럼 성공한 블루스 뮤지션이 되는 것으로 삼았고 그런 자신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자신의 성(Sur name or family name)을 "King"이라 했다는데 이 역시 내가 직접 들은 말이 아니니 확인할 길은 없으나 미국의 팝저널리스트들이 일부러 뻥을 쳤을 리는 없으니 그냥 믿어보는 것은 어떨지? 일단 프레디 킹에 대한 이야기는 또 하기로 하고 일단은 딱치고 즐감하시기 바란다.
추신> 머디 워터스 할배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멀리 한국까지 가서 너같은 놈의 허섭한 블로그에 자주 나오려니 체력이 달린다. 좀 쉬겠다." 뭐 돌아가신 분의 소원이라 가뿐하게 들어드렸다. 그러니 심하게 불만 가지지 마시기 바란다.
117. Country Blues, I Be's Trouble(Muddy Waters Etc. 1941)
McKinley Morganfield... 이게 뭐냐고? 다 아시면서 내숭을 떠시는건가? 다소 평범하고 영국식의 뉘앙스의 이 이름이 바로 Muddy Waters의 본명이다. 또한 이 것은 거의 확실한 이야기라 전해지는데 그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1915년 생이 아닌 1913년 생이라 한다. 실제 그는 1913년 미시시피주의 Issaquena County 근교의 Jug's Corner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 아! 물론 아님 말고...이런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사후에 발견된 그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들 중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그가 사용하던 결혼신고서와 음악인 협회 회원증의 기록이 발견되면서부터다. 뭐 사실 그가 자신의 생년을 1913년이라 착각했던 것일 수도 있고... 그러니 아님 말고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1913년 생이라는 것조차 확실히 믿을 수 없는 이유로 제시되는 것 중 하나는 1920년대의 미국 인구 총조사(US Popularity Census)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1914년 생이란다. 빌어먹을! 도대체 왜 한 사람의 나이에 대해 이리도 설이 많다는 것인가! 아무튼 그는 출생 후 주로 그의 할머니인 Della Grant에 의해 자랐다고 하는데 당시 그가 가장 좋아하던 놀이가 진흙탕에서 뒹굴며 노는 것이었다 한다. 그가 후에 자신의 이름을 "Muddy"라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것이었다나 뭐라나...(출생 연도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의 애칭에 대한 유례라고 확실할까 싶다.) 즉,흙탕물에서 뒹굴었다고 해서 Muddy Water이고 그의 가족들이 다 그렇다 해서 Waters라는 이야기!!!!(머디 할배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 게시물에선 여기까지만...)
머디 할배가 진지하게 블루스 음악가가 되려는 생각을 가진 후 맨 처음 연주하던 악기는 하모니카였다. 사실, 일렉트릭 기타가 본격적으로 블루스에 들어오기 전엔 하모키가는, 마치 포크 음악에서 그런 것처럼 혹은 일렉트릭 기타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재즈 음악에서 우클렐레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처럼, 블루스 음악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악기다. 아마 이 것은 포크 음악의 경우에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하모니카라는 악기를 자신의 노래 중간중간 애들립으로 연주하는 것을 상상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갈 것이다. 언젠가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하고 없으면 말겠지만 초창기에 블루스 음악과 포크 음악은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여러분들은 머디 워터스가 하모니카를 연주했다ㅓ는 사실을 받아들이기힘드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래서 그는 당황해하실 여러분들을 위해 17세가 되던 해에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 후 그의 기타가 어떠했는지는 머디를 아시는 분들이라면 굳이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머디의 기타가 어땠냐고?" 뭐 답은 그렇다. 들어보면 알 것이고, 들어도 왜 그의 기타가 훌륭한지 모르겠다면 네 귀를 수술하든지, 음악을 더 이상 듣지 말든지 하시고...
또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개지만 그는 1932년 대단히 어린 나이에-아무리 나이를 많이 잡아봤자 열아홉이니 얼마나 까진 인간인가?- MAbel Berry(설마 이 이름을 "마벨 베리"라 읽으시는 분은 없으시리라 확신한다.)와 결혼하는데 그의 결혼식 피로연-영화를 보시면 얼겠지만 그들은 조그마한 밴드나 피아노 4중주 혹은 5중주 팀을 초청해서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파티를 하며, 그 것이 동양과는 다른 피로연 문화라 할 수 있다.-에서 Robrtd Nighthawk(로버트 밤매)라는 사람이 밴드의 기타를 치게 되는데 전해지기로는 그 파티가 워낙 와일드했던 나머지 피로연장의 마루가 꺼지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상황은 악몽으로 기억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우리의 머디 선생께서는 그 광경에 크나큰 감동을 받으신 나머지 자신의 일생을 기타에 바치리라는 결심을 하셨다나 무라나... 아무튼, 이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을지는 모르겟으나 최소한 그 엄처난 광란으 밤에 결혼식 피로연을 열던 장소의 마루가 주저앉았다는 것만은 fact으로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라 한다. 아! 힘들다...
물론 이 게시물을 읽으시는 여러분들이 티렉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본디 Country Blues이라는 것은 특정한 곡의 명칭이 아니라 19세기 말 미국에서 시작된-이런 줴길, 블루스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미국이란 단어를 이렇게 고민 없이 쓰다니!- 블루스 음악의 한 형식이다. 즉, 같은 곡명의 곡을 녹음한 사람이 머디 많이 아니라 흔히 자주 쓰는 표현으로 Various Artists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의 곡들이 블루스의 형식으로서의 Country Blues이라는 차원에선 다 같은 곡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역시 같은 논리로-various artists라는 이유?-다 다른 곡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되시고 돈 되시면 ㅇAmazon U.S에서 Country Blues으로 검색해서 다 구입해서 들어보시고 평가를 하시면 대단히 도움이 되실 것이다. 뭐 음악에 목숨을 걸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으신 분들에겐 절대 권해드리고 싶은 방법은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마디! 하고 싶으면 하고 싫음 말고!
자! 오늘 여러분들께 소개해드리는 두 곡 모두 그가 본격적으로 성공가도를 향해 치닫기도 훨씬 전인-즉 그가 Chicago로 이주하기 전인-1940년 이전에 녹음된 곡들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늘 여러분들께-아! 찔린다. 기껏해야 두 세명 들어오는 이 블로그에 "여러분"이라는 단어를 눈썹하나 찡그리지 않고 뱉어대다니- 소개하고 있는 두 곡은 모두가 다 머디 워터스라는 이름으로 흔히들 떠올리는 음악과는 상당히 다른 음악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겐 전성기 혹은 완숙기의 머디의 음악과는 다소 다른듯한 이 곡들에서 머디 워터스의 음악적 일관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이 되었든지 간에 이 두 곡을 여러분들이 들어보시는 것은 길고 긴, 그리고 끝없는 재미를 선사할 블루스라는 즐거운 탐험의 길로 가는 데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한 걸음이 될 것이라 장담한다.(아! 씨발! 이 비릿한 멘트느 또 뭐냐!!!!)
일단 웃기지도 않은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이런 곡은 "듣는 이들에겐 무지하게 아름다운 곡"이 될 것이라는 점이 우선이다. 인간으 목소리가 신이 내려준 가장 훌륭한 악기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 곡을 들어보면 그런 신념에 조금 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밴드의 음악도 이런 음악이 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밴드가 보컬이 들어간 곡을 한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곡은 밴드의 음악이 감상자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궁극의 보컬라인을 제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 그리고 위에 우선이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가 당연히 힜을텐데 그 이야기는 이 게시물의 말미에 하기로 하자.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Chicago라는 팀이 유명한 이유는 그들이 브라스 록 내지는 빅밴드 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하위 장르의 개척자 내지는 대가라는 이유가 우선일 것이다. 물론 어느 순간에선가부터 팀에서 브라스를 담당하는 멤버들이 정규 멤버가 아니었고-마치 ELO가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브라스가 주가 되던 음악에서 브라스의 위치가 다소 바뀜에 따라 바뀐 팀의 구성처럼 그들이 전체 대중음악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달라졌지만 공화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그들의 82년도 곡인 Hard to say I'm sorry가 수록된 Chicago 16 앨범도 그 곡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곡이 브라스가 곡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그들 음악의 뿌리는 브라스 악기에 있다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음악을 소개함에 있어 이 곡을 가장 먼저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개념을 안드로메다에 보내버린" 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굉장히 큰 이미지들 사안들 중 하나는 거의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시카고라는 팀은 앨범 타이틀을 정하는 데에 있어 고민이 없는 팀이라는 점일 것이다. 아시다시피 시카고는 절대로 특별한 앨범 타이틀을 정하지 않고 그저 그들의 앨범이 발매된 순서에 따라 Chicago-X라는 형식으로 앨범을 발매하며 그 것이 그 팀이 가지는 유명세에 한 몫을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암기력이 나쁜 사람들에게ㄷ 아주 편한 팀 되시겠다. 그들의 첫번째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곡인 If you leave me now은 Chicago 13에 앞서 이야기한 Hard to say I'm sorry는 Chicago 16에 그리고 이 곡은 Chicago 18에 수록되어있다는 것만 알면 어디 가서 나름 가오 세우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팀에 대해 조금 더 형식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다른 게시물에서 이 팀의 결성이나 초창기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본격적으로 하기로 하ㅗ, 잠시 이 앨범이 발매되고 이 곡이 싱글로 커트될 시점인 1987년의 팀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Peter Cetera라는 이름을 다들 기억하실 것이다. 그리고 Chicago는 이 인물이 팀의 보컬리스트로 있을 때 대중적으로나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던 시기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피터 세트라의 외모가 출중하다고는 볼 수 없었으나 유독 시카고라는 팀 내에서 피터 세트라의인기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할 것이다. 사실 그가 팀을 떠나리라는 것은 1982년 Chicago 16의 엄청난 상업적 성공 이후부터 충분히 예견되던 것이었다. 그리고 피터 세트라는 1985년에 솔로 앨범을 발매했으며 그 얼마 후 결국 팀을 떠나게 된다.
사실 Chicago 18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기대와 그 기대를 압도하는 무게의 우려를 내재하고 발매된 앨범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피터 세트라가 없이도 시카고라는 팀이 얼마나 출중한 본컬 라인업을 가진 팀인가를 확인시켜주는 결정적 역할ㅇ을 했다. 맨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마치 최고의 재료로 정성껏 반죽하여 종잇장보다도 더 얇은 두께의 파이를 겹겹이 쌓은 것 같은 명품 페스트리를 감상하는 것과 같은 절대 단순하지 않고 섬세하고 우아한 그와 동시에 화성학의 기본에 절대 어긋나지 않는 유려한 화음을 곡 안에서 들려줌으로써 음악이라는 예술을 하는 데에 있어 인간이 유일하게 신으로부터 받은 가장 소박하지만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선물인 "인간 그 자신"을 어떤 식으로 음악에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과서적 해답을 보여주는 곡이 오늘 소개하고 있는 Will you still love me이라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자! 그럼 마지막 이야기는 맨 앞에서 이야기한 "우선" 다음의 이야기일 것이다. 밴드를 해 본 사람 특히 밴드에서 보컬 라인업에 해당할만한 위치를 담당하공 있던 사람들이라면 이 정도로 중간음과 고음을 자유자재로 왔다갔다 하며 화려한 멜로디 라인을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곡의 시작에서부터 엔딩에 이르기까지 거의 제 마디를 쉬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보컬 파트를 모질게 다루는 이런 곡들은 기피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마 이런 곡을 연주하다가는 곡이 끝날 때 즈음엔 구급차에 실려 산소호흡기를 입에 쓰고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 곡에 대해 제공하고 싶은 tip은 이 곡은 유려한 브라스 악기들 대신 오케스트레이션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자! 확인들은 알아서들 하시고...
듣거나 말거나 1000곡 115. They call me Muddy Waters(Muddy Waters. 1971)
시절이 좆같고 세상이 엿같아 응당 가누가 나갔어야 하는 음악 프로그램에 빙상의 여왕씨가 나와 초등학교 학예회 분위기를 만들며 세 곡이나 부른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면 그 가수가 "국민 여동생을 건드린 죄"로 빙상의 여왕씨를 그리며 두루마리 휴지를 밤새 애용했을 찌질이들에게 욕을 먹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으니 티렉스라 해서 어찌 키보드를 두드릴 힘이 생기리요? 허나 이런 좆같은 상황일수록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다름 아닌 "음악"이요 그 중에서도 티렉스와 제일 친하다 할 수 있는 "블루스"아니겠는가? 빙상의 여왕씨와 서울방송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어도 음악은 절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씀!
먼저 사적인 이야기 하나 쌔우시겠다. 오늘 말씀드리려는 분과 같은 1915년생인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이 빌어먹을 세상에 계시지 않아 가끔 "고아가 된 우리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쌓여가고 있는데 웅리 외할아버지 보다는 24년 외할머니 보다는 무려 26년 씩이나 먼저 저 세상 사람이 디ㅚ셨으나 살아있는 그 어떤 뮤지션들 보다도 후대의 모든 뮤지션들에게 장르 불문하고 수없이 영감을 주셨고 지금도 그러고 계신 분, 어떤 새끼들은 운이 좋은지 실력이 좋은 것인지 20대부터 그래미상을 휩쓸고 개 난리를 치지만 56세 되시던 해인 197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래미 트로피가 어떻게 생겨먹은 물건인지를 육안으로 확인하신 분, 그 이후로는 1970년대에만 다섯 번의 그래미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받으셨던 그 분, 심지어 1993년엔 미국의 우표에까지 얼굴을 내미셨던 그 분이 바로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Muddy Waters 할배 되시겠다.
일단 머디 워터스의 1950년ㄴ에서부터 60년대 말에 이르는 수많은 히트 싱글들을 뒤로 하고 오늘의 이 곡인 "They call me Muddy Waters"을 고른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 Rollin' Stone, Rollin and Tumblin, Country Blues, I am your hoochie coaching man 등등등의 수많은 주옥같은 싱글들이 아닌 어찌 보면 전성기가 지난 50대에 발표했던 곡이냐? 우리가 머디 워터스도 모르는 바보로 아느냐?라고 하시더라도 난 꿋꿋이 할 이야기가 있다. "ㄴThey call me Muddy Waters"을 자신의 앨범의 타이틀이자 곡명으로 할만한 개건방을 떨어도 욕을 먹지 않을 정도의 클래스에 있는 뮤지션이 대중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몇 명이나 될 것 같은가? 누가 뭐래도 머디 워터스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이고 이런 개건방으로 인해 욕먹지 않아도 될 인간이라는 점 밝히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머디 워터스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지겹게 할 기회가 많을테니 오늘은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해 보도록 하자. "머디 워터스가 왜 수많은 블루스 뮤지션들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문장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당연히 rock and roll이 블루스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만큼 그 어느 클래시컬한 블루스의 대가도 백인들의 음악에 영향을 안미친 경우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머디 워터스의 경우는 특별한데 그가 1958년 43세의 나이에 미국을 떠나 잉글랜드에 가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잉글랜드에서 대중 앞에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Sonny Terry & Brownie Mcghee Big Bill Broonzy등 어쿠스틱 기타를 사용하던 블루스 혹은 포크 뮤지션들 외에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잉글랜드의 무대에 섰던 "정통 아프리카계 미국인 블루스 뮤지션"으로서는 머디 워터스가 최초였고 그의 공연은 수많은 잉글랜드의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게 된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백인 믈루스"가 어쩔 수 없는 음악적 환경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장르였다면, 잉글랜등-ㅔ서 "백인 블루스"가 발전하게 된 데에 최우선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 머디 워터스 할배라는 사실이 대중음악사에서 그의 위치를 특별하게 하는 "그만이 할 수 있던 음악적 기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혹은 잉글랜드의 "백인 블루스"도, 머디 워터스의 음악과 그의 음반들도 워낙 할 이야기가 많아 오늘은 머디 워터스의 일생에 있어 가장 드람마틱했던 사건들 중 하나로 불리는 일인 그의 1958년 잉글랜드 행에 대한 운을 띄우면서 여러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에서 이 게시물을 마쳐도괜찮을까요? 뭐 괜찮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이 게시물은 내가 끝내고 싶으면 내가 끝내는 것이니 말이다...
1. 길게 이야기 하지 않겠다. 말 그대로 그들이 돌아왔다. DJ DOC 과거 이 팀의 이름은 DIJ D.O.C.였는데 지금은 그냥 DOC이다. Dream Of Children의 약자임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을까? 아무튼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교실 이데아"가 들어있는 "발해를 꿈꾸며"가 메인 타이틀인 앨범을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고 DEUX는 "약한 남자"와 그리고 국민 가요 중 하나인 "여름 안에서"를 가지고 서태지와 아이들과는 다른 곳에서 자신들의 철옹성을 쌓고 있던 1994년 Disco Theque의 DJ 출신들인 이하늘과 김창렬 박정환을 나미와 붐붐과 철이와 미애를 거친 신철이 제작자로 나서 "슈퍼맨의 비애"를 가지고 그 어지러운 해에 등장했던 그들이 무려 만으로 16년이 지난 지금 그리고 Street Life 앨범을 낸지 5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 그냥 한 마디로 그들이 돌아왔다.
2. 10년 전의 기억 그들이 한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방송을 하지 못하고 앨범이 뜸하게 된 2000년 6웡ㄹ경 서태지와 아이들도 없고 듀스도 없었지만, 그 때보다 더 어지러운 시기를 겪고 있던 공화국 가요계였다. 본격적인 아이돌 스타들의 시대가 열리면서 별 같지 않은 이야기들이 논란이 되고 화제가 되던 그런 시기였다. 그리고 그런 아이돌 시대의 도래에 힘입어 "동네 양아치" 출신들이 가요계라는 정글에서 "가수"라는 이름으로 갖은 주접을 떨며 진상을 부리던 20세기의 마지막 해! 그들은 "Run to you"를 들고 나와 한 마디로 당시 어지럽던 가요계를 확실하게 정리해주었다. 길가의 B자 테입을 팔던 리어커에서건 버스에서건 심지어 야구장과 농구장에서건 그들의 "Run to you"는 울려 퍼졌고 쪼그려 뛰기 자세어서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가 어깨 높이로 내리는 동작을 반복하던 댄스와 수건을 보고 그들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공화국에선 아무도 없었다.
3. 힙합이건 뽕댄스건... 평론가들이란 사람들 혹은 언론들은 그들의 음악에 힙합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에 전혀 인색하지 않는다. 허나, 팀의 리더이자 프론트맨인 이근배 횽아는 자신들의 음악을 "뽕댄스"라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의 음악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그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음악이 가치를 가지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음악이 "10대에서 50대까지 모두다가 자신들이 그들의 음악에서 받는 그 feel 그대로 그들의 음악에 미친듯이 흔들어대더라도 다른 세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아마 공화국에서 2010년ㄴ이라는 시기에 오버그라운드를 종횡무진할 수 있는 팀들 중에 "씨발 좆 꼴리면 따라와 아님 말고"라는 식의 음악을 통해 대중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팀은 이들이 유일하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 놀자~ 씨발! 하도 반가운 나머지 음악이 어쩌고 하는 시시껍적한 분석 따위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저 그들의 음악에 우리들은 "그래 씨발 따라 놀지 뭐!"라는 기분을 가지고 지랄맞게 놀면 그만이다. 놀다가 열받으면 부수고 신나면 춤추고 그저 그 뿐이다.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왜 점점 더 클럽에서의 공연이 공연이라는 이름보다 파티라는 이름에 더 가까운 형태가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든 뮤지션이 밥 딜런일 필요도 핑크 플로이드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 한도에서 최고의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음악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DJ DOC는 항상 옳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가끔은 문제를 노출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공화국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앨범을 낼 기회를 가지는 사람들이 극소수라는 점을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씨발 놀자!는 이야기이다.
5. 힘내라 근배 횽아! 아! 지금도 안습인 근배 횽아의 모발 상태에 더 안좋은 소식이 많이 생기고 있다. 그 이야기를 ㅣㅅ시콜콜 할 필요는 없지만, 근배 횽아의 이야기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에 대한 판단을 떠나 "명랑한 사회를 위해 딴따라들이 그 정도의 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든지 용납되어야 한다"는 것이 티렉스의 지극히 꼬장스러운 견해다. 아니! 그보다 더 한 이야기가 나와도 놀라지 않는 세상이어야 한다. 작금의 이근배 횽아를 둘러싼 논란들은 한마디로 웃기고 자빠지면서 좆도까는 일이란 이야기이다. 이근배 횽아의 말이 맞고 아니고는 나중에 따지고 "이 정도의 이야기를 가지고 지랄을 떠는 공화국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니 절대 자신의 말에 후회하지 말지어다. 그대 이!근!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