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0일 목요일

그 거 알어? (월드컵의 역사)











과거의, 대단히 오랜 과거의 특정한 날짜들이 절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1978년 6월 25이라든지 1981년 1월 7일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내게 있어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1982년 3월 27일이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 날은 공화국에서 프로야구라는 것이 생기고 그 첫 경기를 치른 날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양팀 모두에게 그다지 좋은 경기였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연장 10회말에 MBC 청룡이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프로야구 역사상 첫 승리를 거둔 팀이 된 날이다. 물론 난 그 전부터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청룡의 팬이었다. 나서 한 번도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는 내가 서울에 프로야구 팀이 잇다는데 다른 무슨 명분이 필요했겠는가 말이다.

물론 그 다음날 거짓말처럼 미국에서 AA 리그에서 뛰다 왔다는 박철순에게 농락당하며 9-2로 충청 OB 베어스에게 대패를 당했지만, 그 정도로 실망하거나 할 이유는 없었다. 난 서울 사람이었고 청룡은 서울 팀이었으니까....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가 끝나고 김재박과 이해차창이 그리고 김정수가 들어오면 우리 팀은 단번에 우승할 수 있는 팀이 될 것이었으니까... 설혹 우승을 못한다 하더라도 청룡은 서울 팀이니까 아무런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청룡은 정규시즌의 성적만을 따지면 1위 팀이었다. 그러나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경기를 하던 리그에서 청룡은 후기리그 우승팀의 자격으로 한국 시리즈에 나가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광주 해태 타이거즈에게 개망신을 당했다.

그 뒤로 항상 좋은 전력을 가지고 있지만 늘 위 언저리를 맴돌았고 1989년 4위까지 포스트 시즌 진출권이 주어진다 했을 때 설마 저 걸 못할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 4등도 못하는 팀이 되었고 그리고 나서 팀이 팔렸다. 럭키금성에게 말이다. KBS에서 타방송사의 이름을 말할 수 없어서 다른 팀은 기업의 이름을 표기했으나 유일하게 청룡이라 표기하던 그 팀이 이젠 공화국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대구 삼성 라이온스의 그 머저리같은 푸른색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한 푸른색의 청룡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자존심 상했고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이 팀이 우리팀인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그 후 나름 10년간은 그 팀이 나름 강팀이라 꼽을 수 있는 팀이었다. 정규시즌 우승 두 번 한국 시리즈 우승 역시 두 번 그 외에도 나름 괜찮은 성적을 냈다. 그리고는 2002년 정규시즌 4위를 한 것이 이 팀의 마지막 포스트 시즌 진출의 기억이 되었다. 내 또래의 이상훈이 떠나고 유지현이 떠나고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마무리를 했던 서용빈도 있었고 반강제적으로 팀을 떠난 김재현도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 나중에 팀의 대표가 되는 이병규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말이다. 2002년에 4위를 한 것이 마지막이었던 팀이 그리고 작년인 2012년엔 만장일치로 꼴찌 후보라 했던 팀이 2013 시즌 정규 시즌 2위를 했다. 1위를 한 대구 삼성 라이온스에게 단 1승을 덜 거둔 상태로 말이다.

다들 웃을지 모르지만 그 날 난 펑펑 울었다. 팀의 최전성기에 입단해서 황금기를 2군에서 보내다 마지막 포스트 시즌을 경험하고 다른 팀에도 가있어야 했던 최동수의 은퇴식은 아마 활활 타오르는 불에 휘발유를 부은 것과 같았을 것이다. 이 팀이 잘하건 못하건 상관없다. 지금 좋은 것은 성적을 잘 거둔 것도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야구에 대한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야구로 나름의 성적을 올린 데에 있다. 그 것은 김성근이 감독을 할 때 정규시즌 4위를 했던 때엔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이다. 물론 당장 내년에 성적이 다이빙을 한다 하더라도 이 팀은 어디 가서도 이야기할 내 팀일 것이다.

자랑스러운 내 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걸 아는가? 이 팀은 내게 첫사랑과 같은 팀이다. 비틀스가 리버풀 출신의 밴드라 해서 팬이 되었으나 비틀스의 멤버 중 그 어느 누구도 리버풀의 팬이 아님을 알았을 때에도 리버풀의 팬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할 수 없었다. 지금은 과거처럼 리버풀에 열성적이지 않지만 그 팀으로 인해 내 축구에 대한 열정이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서 원망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첫사랑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 리버풀이고 청룡과 트윈스이다. 누군가 한참동안 흑역사를 경험한 이 팀의 팬을 왜 하냐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대답한다. 너 그 거 알어? 이 팀은 내 첫사랑이야...



2013년 9월 21일 토요일

그래도 연휴는 끝난다. (Soundless Music)

어차피 시간은 흐르는 것이다. 시간은 아무도 가늠할 수는 없지만 시작한 시점이 있었고 그리고 끝나는 시점도 존재할 것이다. 적어도 지구에서의 시간은 그럴 것이다. 적어도 우리 세대엔 오지 않을 것이 확실하지만 지구의 수명은 정해져있는 것이고 지구의 수명이 다하는 그 순간이 지구에서 물리적 의미의 시간이라는 것은 그 종착점에 달할 것이다. 정말 다행인 것은 지금 이 거지같은 포스트를 읽고 있을 사람들 중에선 그 어느 누구도 그 시점까지 생존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그래서 결국 적어도 지금 이 지구에서 사는 우리들은 인류의 종말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선 신경 끄고 살아도 사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우리가 어지간해선 100년 이상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나치게 서러워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 것은 누가 가르쳐줬든 인간의 본능이든 인간이 기록을 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그 것을 꾸준하게 발전시켜온 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인간은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것을 바탕으로 주둥이를 털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고-이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한 행위가 될 것이다.- 잚못 입을 털어서 개망신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이라는 것의 이점은 단순히 문자가 아닌 다른 여러가지의 방법을 동원해 누릴 수 있다.

음악도 결국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악보를 통해 음악을 기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 사회엔 평론가라는 직업이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평론은 예술작품이 기록되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평론이라는 분야가 아무리 발달한다 하더라도 그 것이 그 장르의 예술 그 자체를 뛰어넘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평론이라는 이름의 행위가 행해지는 순간의 상황에 따라 같은 예술작품에 대해서도 수없이 많은 다른 세부적인 내용을 담을 수 있으며 평론가 개인에 따라서도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입을 터는 행위의 한계는 바로 이런 데에 있다.

이런 질문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두 가지가 별로 다를 것 없는 것 같은데..."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평론이라는 것은 대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시대와 개인에 따라 대상 자체가 달라지는 것과 대상에 대해 이을 터는 것이 달라지는 것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넌 그냥 멍청한 새끼일 뿐이다. 아무리 훌륭한 평론가라 하더라도 평론을 할 대상이 없다면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즉, 자기 주제 따위는 모르고 지나치게 입을 터는 것들을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 이와 관련하여 더 할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를 다하게 되면 과도하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오늘은 이만!



2013년 8월 16일 금요일

그래도 음악은 죽지 않는다.(Soundless Music)

The day the music die...
한국에선 그 사고의 주인공은 리치 발랜스로 더 많이 기억되지만, 사실 그 비극적인 사고의 주인공은-그런 사고에 주인공이란 말 자체를 쓰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지만-버디 홀리였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버디 홀리는 아마도 엘비스를 위협할만한 rock ''n' roll의 영웅이 될 것이라 의심한 사람도 없는 인물이었고 실제로 그가 살아있었다면 제리 리 루이스,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미국 팝음악 씬을 삼분할 수 있는 인물이라 여기는 것이 당연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연을 위해 프로펠러 비행기로 이동하던 중 항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돈 맥글린은 그의 일생의 명곡 "American pie"에서 위의 가사로 그의 죽음이 가지는 팝음악 역사에서의 충격을 묘사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재즈 씬에서 천재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인물인 찰리 "버드" 파커는 약물과다복용으로 저 세상으로 떠났다. 물론 재즈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구인가를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듀크 엘링턴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이름을 이야기하지만 진정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만한 사람은 찰리 파커였다. 그가 50도 되기 전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이들은 재즈라는 장르, 더 나아가서는 팝음악의 발전이 상당히 더디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했고 그 예상은 어떤 면에선 상당 부분 맞아 떨어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떠난 사람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떤 위치에 있을 지 짐작조차 되지않는 듀언 올맨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직 올맨 브라더스 밴드는 존재하지만 듀언 올맨이 존재하지 않는 올맨 브라더스 밴드는 한 때 잘나갔던 노장 밴드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1977년 엘비스 프레슬리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rock 'n' roll이 전세계를 뒤흔들 장르가 될 수 없었음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그 장르는 엘비스라는 개인의 인기에 힘입어 미국의 팝 씬의 정면에 나설 수 있었다. 이전의 스탠더드 팝 음악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의 팝음악이라는 것이 거의 감상용 음악이었던 것에 비한다면 엘비스의 등장은 팝음악을 듣고 그 자리에서 청자 역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음악으로 바꿔 놓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다른 사람들이 누렸던 대중적 성공은 엘비스의 그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 어느 누구든 엘비스를 황제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When the music's over
1980년 12월 9일 뉴욕 타임스의 헤드라인의 제목은 위와 같았다. 그 바로 전 날 그가 사는 뉴욕의 다코타의 콘도 앞에서 그는 채프먼이라는 "그의 팬이라 자칭하는" 사람의 총탄으로 저 세상으로 갔다. 비틀스의 프런트 맨이었으며 독실한 크리스천들에겐 weird 하다는 평가까지 받는 그는 Fab four이었던 The beatles의 "엄청나게 중요한" 멤버였다. 그의 죽음을 두고 뉴욕타임스는 "음악은 죽었다"는 표현을 쓰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다. 최소한 팝음악 씬에서 그의 동료나 선후배 아티스트들이 보여줬던 그에 대한 추모의 열기는 2년은 지속되었다. 그와 그렇게 앙숙지간이었던 폴 매카트니 아저씨도 존 아저씨의 죽음에 엄청난 충격으로 한동안 칩거했고 비틀스가 해체될 무렵에 가장 사이가 나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조지 아저씨도 존 아저씨에 대한 추모의 태도를 진지하게 유지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다들 아실 것이다. 심지어 엘비스의 뒤를 이어 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던 마이클 잭슨 역시 세상을 떠났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사람들의 죽음과 마이클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마치 음악이 끝난 것처럼 이야기했다. 물론 여기서 그들의 죽음 따위는 음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거만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들이 가지는 충격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실제로 접었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이유로 계속 음악을 한 이들이 용기있는 자들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예술장르들을 통해 자신을 포현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음악이라는 것이 예술이라면 이 세상 어디선가 그 누군가는 음악을 할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이들이 초음속 여객기로 불과 수시간 만에 대서양을 건넜다면 또 다른 누군가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뗏목을 타고 대서양을 건널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면 또 다른 바다가 있을 것이다. 그 것이 지중해가 되었던 북해가 되었던 인도양이 되었던 간에... 아직 대서양을 건넜는지도 불분명하고 그 바다를 건넌 후 건너야 하는 바다는 어떤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그 불분명한 도착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음악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음악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들대로 음악을 열심히 해야하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 역시 계속해서 음악을 들어야 한다. 듣는 사람이 없으면 음악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2013년 7월 27일 토요일

그깟 공놀이 때문에...

이번 달에도 제 블로그는 황폐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음악을 멀리했던 것도 아닌데...

빌어먹을 놈입니다.

그깟 공놀이 때문에 여길 이렇게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특단의 조치...는 잘 모르겠고...

다시 반성하겠습니다.



2013년 6월 29일 토요일

반성...

이번 달엔 블로그질을 전혀 못했다.

그 빌어먹을 공놀이 야구 때문에...

7월에는 야구에만 미쳐있지 말고 블로그도 좀 하겠습니다.

꾸벅~


2013년 5월 18일 토요일

정말,... 그러나, 아름다운(Books)






이 게시물의 카테고리를 음악에 관한 것으로 할지, 책에 관한 것으로 할지 아니면 그냥 잡다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할지를 대단히 오래 고민했다. 분명히 책을 읽고 그 리뷰를 쓴다는 것은 분명한데 이 책의 본문에 들어가기 전 이 책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짤막한 리뷰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이 책은 장르를 규정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가까스로...

이 책엔 정말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찰스 밍거스, 버드 파커, 듀크 앨링턴, 아트 블래키, 버드 파웰, 쳇 베이커, 델로니오스 뭉크, 아트 페퍼... 말 그대로 전설에 대한 전설이 될만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유명 아티스트라는 표현 정도로는 표현이 불가능하고 영웅일아 부르기엔 비극적인 삶을 살았으며 마이클 잭슨이나 마돈나가 되기엔 모든 사람들이 아는 정도의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특정한 이들의 세계에선 그 누구보다도 큰 영향력을 지녔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다. 그들은 의외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부분이 적었던 것이다.

이 책은 손에 쥐고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무언가를 직감하게 해준다.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절대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겠구나..." 이미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논픽션 작가인 Geoff Dyer(뵤하게도 이 사람의 이름을 제프 다이어가 아닌 지오프 다이어라 읽으면서 쾌감을 느낀다.)은 그들의 실제 생을 바탕으로 "재즈"를 풀어나간다. 결국 이 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재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엔 익숙한 아티스트들의 이름 때문에 이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 그 다음에 이 책에 엄청나게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이 책에 "재즈" 그 자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재즈가 담겨있다는 이야기는 그냥 낭만적 수사가 아니라 재즈의 연주법과 재즈를 연주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 더 나아가 재즈의 spirit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동시에 "재즈에 대한 이론서"이자 재즈에 대한 평론서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인해 당연히 재즈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단순히 "난 재즈를 좋아하는데..."라는 사람이 아닌 재즈에 대해 대단히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우을 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 것 때문에 많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재즈가 아닌 다른 음악에 대해 정통하거나 다른 장르의 음악에 대단한 애정을 가지고 잇는 사람들에게도 많은것을 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반드시 알아두셔야 한다. 비평서로서도 이 정도의 가치를 가진 책은 전에도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즉, 다른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가 대단해야 많은 것을 이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

이 책의 역할이나 내용이 다양하듯 재즈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여러분들은 재즈에 대해 실망을 느낄 수도 잇을 것이다.(아마 재즈를 잘 모르는 당신이라면 더...) 하지만 그에 대한 작가의 모든 답은 이 책의 제목에 있다. But beautiful... 그러나 아름다운... 재즈 신의 영웅들에겐 실망스러운 부분도 그들의 삶이 불행해서 안쓰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도 재즈도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 당신들의 이 책을 보지 않게 될 것을 걱정하여 전혀 본뭉을 인용하지 않은 점 이해해 주기 바란다.



2013년 5월 14일 화요일

특별히 견강에 해로울 일 없으시면 이 팀의 음악을 들어 보심이...(Soundless Music)

탑정 소설에 조금이라도 익숙하신 분이라면 Philip Marlow이라는 캐릭터를 아실 것이라 생각한다. 이 필립 멀로우라는 캐릭터의 대사 중에 "Elbow이라는 단어는 영어에서 가장 Sensuous(육감적인) 단어다." 이런 단어를 팀 이름으로 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1990년 굘송ㄷ하오 어작꺼자 활동하고 있는 Elbow이라는 팀이다. 1990년에 결성되었다 하니 그들의 나이가 대단이 많을 것 같다 생각하겠지만 이제 기껏해야 한국 나이로 40세 전후 밖에 안된 팀이다.

이 팀은 그간 멤버의 들락거림이 없었던 관계로 일단 멤버 구성부터 이야기해보도록 하면,

Gay Garvey-Lead Singer
Mark Potter-Guitar
Richard Jupp-Drum & Perccusion
Pete Turner-Bass Guitar
Craig Potter-Keyboards
애초 팀을 이뤘던 것은 Craig을 제외한 네 명이었으며 리드 보컬인 Guy가 16세이던 1990년에 결성되었으며 맨 처음 팀의 이름은 Mr. Soft이었다가 그 뒤 Soft으로 1997년 드디어 Elbow로 팀 이름을 확정짓게 된다.

1997년 마침내 그들의 팀명을 확정짓고 Island Record와 계약을 하고 Steve Osbourne의 프로듀싱하에 그들의 첫 앨범을 녹음하기에 이르는데 이 과정에서 좀 묘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Island Record 측에서 이들과의 계약을 메이저 음반사인 Universal에 넘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유니버설측은 이들의 음반을 발매하려던 계획을 백지화하게 된 것이다. 아마 당시에 이들의 음반이 상업성이 없다 판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그들의 을뱀이 발매되진 못하고 그 뒤 Ugly Man 레이블로 세 장의 EP을 발매하게 된다.

그들의 첫 앨범이 발매되는 것은 2001년의 일이다. 타이틀은 Asleep in the back이었으며 V2이라는 레이블에서 발매된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2002년 곧바로 두번째 앨범인 Cast of thousands을 발매하게 된다. 이 앨범의 타이틀은 또한 재미있는 유례를 가지고 있는데 2002년 Glastonbury에서 그들의 연주 중에 수천의 관중이 "We believe in love, so fuck you"이라는 부분을 같이 노래하게 되고 그에서 영감을 얻어 앨범 타이틀을 Cast of thousands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데뷔 앨범은 Mercury Music Awards와 BRIT Awards의 후보로 선정되기에 이른다.

그 외 이 팀에 대한 이야기 몇 가지를 하자면 2001년 맨체스터의 코소보 지원 단체에 자신의 미발표 앨범인 "Scattered Black and Whites"을 기부하기도 했으며 2004년 Cuba로 투어를 떠나 이 "Asleep in the back", "Cast of thousands"의 수록곡들을 위주로한 공연을 쿠바의 수도인 Havana 인근을 돌며 했는데 이 때의 기록을 영국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인 Irshad Ashraf이 이 공연의 대부분을 영상에 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 필름은 2004년 몇몇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지만 상업적인 목적으로 상영된 적은 없다고 한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앨범인 Cast of thousands은 이 팀을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앨범인데 제 얼굴책을 보신 분들은 이 앨범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2003년에 발매된 앨범으로서 기본인 16비트에 충실한 곡들을 보이다가도 갑자기 Electronica 팀이 아닐까 할 정도의 사운드를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브릿팝 사운드에 유사한 곡들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래도 이 팀이 절대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은 베이스를 팀의 사운드의 축에 두고 그 위에 여러가지를 입히는 Rock음악의 기본이다. 굉장한 규모를 가진 사운드는 아니지만 절대 느슨하지 않은 사운드의 음악들로 채워진 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점은 이들 스스로 인터뷰에서 밝힌 점인데 이들에게 가장 큰 음악적 영향을 준 이들의 선배 밴드는 제네시스와 라디오헤드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린 시절 내내 (특히나 피터 가브리엘과 스티브 해켓이 활동하던 시기의) 제네시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보냈다는 이야기를 했으며 "라디오헤드가 없었다면 엘보우라는 팀도 없었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그들이 프로페셔녈한 뮤지션이 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팀이 라디오헤드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피터 가브리엘 시기의 제네시스를 연상시키는 듯 하기도 하다. 물론 아님 말고...




2013년 5월 8일 수요일

명랑 음악 감상법(Soundless Music)

1. 일단 질러라!

명랑한 음악 감상을 위한 첫 단계는 바로 "일단 지르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지르는 것을 "오프라인 매장"에서 하라는 것! 온라인 매장에서 음반을 구입하는 것보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구입하는 것이 명랑 음악 감상으로 가는 더 빠른 길이라 부르짖는 이유는 온라인 매장에서 지를 경우 자신이 어떤 음반을 구입하겠다는 곗획을 가지고 음반 쇼핑을 하게 될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직 제대로 된 음악 감상의 암흑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럴 경우 "The very best of ~"이라는 타이틀의 음반을 구입할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지게 된다. 이 것은 절대 명랑 음악 감상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

1-1. 어디서 지를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분들을 위해

인터넷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오프라인 매장은 아직도 존재한다. 여기저기에... 정 아무 것도 모르겠다 싶으면 광화문이나 강남의 교보문고 핫 트랙스에 가시기 바란다. 그 외 신촌이나 홍대 부근에도 아직 오프라인 음반 매장들이 꽤 있다. 지방에 사시는 분에겐 별 도움 되지 못하는 점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


2. Do not rewind!

명랑하게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덕목이다. 딱 세 번만...자신이 구입한 음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 리와인드 없이 1번 트랙에서 마지막 트랙까지 주루룩 들엉라... 헤드폰을 사용하건 컴포넌트를 사용하건 자신의 컴퓨터의 ODD을 이용하건 좋으니 음반을 구입하자 마자 세 번 정도는 중간에 멈추는 일 없이 들어보기 바란다. 물론 다른 일 때문에 pause 버튼을 이용하는 것은 장려된다. 그렇지 않다가는 자칫 고등학교 시절에 "오늘부터 존나 열심히 공부한다"며 수학의 정석의 챕터 1만 새까맣게 되도록 보는 일이 발생가헤 될 수도 있으니... 명심하시기 바란다. 절대 음반을 중단 없이 세 번만 처음부터 끛까지 들어라... 이 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는 없으나 이 짓거리를 몇 번만 하게 되면 "왜 그 새끼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2-2. 헛소리를 할 수도 있는 당신에게...

"디지털 음원을 구입한 경우엔 어떻게 하냐?"는 개소리를 당신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야기한다. 1번을 보시기 바란다. "그래도 난 디지털 음원으로 살거야..."라고 당신이 말한다면? 그냥 나가 뒈지기 바란다.

3. 크레딧은 당신의 음악적 식견을 조금 더 높여줄 것이다.

크레딧을 보라고 하니 Thanks to...만 죽어라 하고 보는 인간들 있다. 이러려면 제발 나가 뒈지기 바란다. 아무튼 북릿의 크레딧에는 그 음반에 대해 당신이 알아야할 모든 정보가 들어있다. 일단 프로듀서가 누구이며 각 곡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각 곡의 세션은 어떻게 되는지 어떤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는지 심지어 어떤 경우엔 녹음 시기가 언제인지도 있으며 각 곡에 어떤 악기가 쓰였는지도 알 수 있으며 심지어 친절한 분들은 자신의 악기가 어떤 모델인지에 대해서도 적어놓는다. 그리고 대단히 중요한 것은 이런 꼼꼼한 점검을 하다 보면 "어느 레이블에서 나온 음반의 퀄러티가 높은지 혹은 그 반대인지"에 대한 판단을 할 수도 있게 된다.

4. 자 이제...

최소한 열 장의 음반을 이런 식으로 들어보시기 바란다. 그 후엔 당신이 알아서 명랑한 음악 감상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음반을 사서 이런 짓거리를 해야하는지 모르시겠다면 그냥 평생 살던 그대로 사실 것을 권한다. 난 안되는 놈이라고 생각하시길...



2013년 5월 6일 월요일

당신이 야구라는 종목에 대해 하고있는 심각한 오해2(월드컵의 역사)

앞서 이야기는 퀄러티 스타트라는 것에서 시작해서 선발투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투수의 빠른 승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 대충 얼버무린 채로 끝냈다. 물론 이 번엔 그 이야기를 이어서 하기로 한다. 어차피 투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이니 계속해서 투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오늘 이야기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과연 "스페셜리스트가 필요한가?"란 문제로 부터 시작해보도록 하자.

보통 오른손 타자 스페셜리스트 투수라는 말은 그 단어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거의 쓰이는 일이 없다. 그 것은 대단히 큰 발견도 놀랄 일도 아니다. 지구상에는 압도적으로 오른손잡이들이 많다. 즉 이 것은 오른손 투수와 오른손 타자가 서로 경기 중에 만날 확률이 가장 높음을 의미한다. 그 확률은 왼손타자가 오른손 투수를 만날 확률이나 오른손 타자가 왼손 투수를 만날 확률을 압도하는 것이다. 확률론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직관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왼손투수와 왼손타자가 만날 확률이 가장 적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왼손타자에 대한 스페셜리스트로 왼손투수를 올리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명심하자. 열번의 타수 중-즉 타수에서 제외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세 번만 안타를 치면 그 타자는 대단한 타자가 된다. 이 것을 타석대 안타의 비율로 따지면 그 확률은 0.300에 당연히 미치지 못하는 수치가 될 것이다. 이 말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안타를 치는 확률이 훨씬 낮은 타자들도 대단한 타자가 되는 종목이 야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것을 다시 뒤집어 보자면, 아무리 왼손타자에 강한 왼손투수라 할지라도 매번 위기의 상황에서 왼손타자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그 타자를 상대로 아웃 카웆트를 잡을 확률은 0이라는 것이다. 즉, 왼손타자를 완벽하게 막는 왼손투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확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야구라는 종목의 팬이라면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완벽하지 않은 기대에 목을 메는 그 순간부터 "야구는 지루한 스포츠"가 되는 단초가 자라나게 된다. 사실 왼순투수라서 왼손타자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왼손타자와 왼손투수가 만나게 될 확률이 가능한 경우의 수 중에서 가장 낮기 때문인데 사실상, 왼손투수의 공을 왼손타자가 치지 못하는 경우는 그 투수가 왼손투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마운드에 올라가 있는 왼손투수의 구위가 좋을 경우인 것이 대부분이다. "네가 감독보다 더 많이 알아?"라 이야기할 사람들이 있을텐데, 사실상 이런 매치업을 이용하는 것은 많은 경우 "감독으로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관중에 대한 시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는가?

왼손과 왼손의 대결을 피하고자 하는 역으로 그 매치업을 이용하고자 하는 심리는 선수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는데 잉런 경우 해당 선수를 "영원한 반쪽짜리"로 만들게 될 확률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것이다. 켄 그리피 주니어를 이런 확률에 기대어 활용했다면 그가 그처럼 대단한 선수가 될 수 있었을까? 루 게릭을 그런 식으로 활용했다면 그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그랜드 슬램을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감독의 일은 시즌이 시작되기 전 이미 다 끝나있다."고 말이다.

내 자신의 야구에 대한 가치관은 "감독은 한 경기에서 선수를 교체하거나 작전을 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야구 감독이 코치가 아닌 매니저라 불리는지에 대해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야구 감독은 한 시즌을 어떻게 운영해나갈 것인가를 경기장 안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려면 선수들의 수준을 끌어 올려야 하고 감독의 주된 임무는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각 구단의 봄 훈련 때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즌 중에는 선수들을 무리하게 기용하여 부상당하거나 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코치가 아닌 매니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4월 29일 월요일

당신이 야구라는 종목에 대해 하고 있는 심각한 오해(월드컵의 역사)

야구라는 종목이 근본적으로 축구와 다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야구는 상대방과 눈을 마주보면서 하지 않는 유일한 종목이다. 물론 경기 중 투수는 타자의 눈을 볼 수도 있고 타자도 투수의 눈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경기 내내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팀의 상대 선수의 눈을 보는 것이 그리고 마주보고 있는 상대방의 동작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 다른 스포츠라면 야구는 절대 그렇지 않다. 두번째로 야구가 축구와 다른 점은 축구와는 달리 야구는 극히 일부분의 참가자들을 제외하곤 게임에 임하고 있는 선수들의 거의 대부분이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놀고"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시간이 노는 시간은 아니고 항상 자신의 플레이를 준비해야 하지만 그 것은 축구가 심지어 골키퍼를 포함해서 모든 선수들이 계속 달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놀고"있다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이유들로 인해 야구는 농구를 능가할 정도로 "특정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선수"가 경기를 지배할 확률이 그만큼 높은 경기다. 특히 선발 투수라는 역할을 가진 선수의 영향력이란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야구 중계나 야구 관련 프로그램이나 기사에서 수도 없이 인용되는 "Quality Start"이란 말에 대한 오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애초 야구의 초기에는 구원투수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투수는 경기에서 내내 투수의 역할을 경기 종료시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지나면서 완투가 힘들어지고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세이브"와 "홀드"라는 것이 야구 경기에서 중요한 기록으로 등장하게 되자 선발 투수가 한 경기를 완투하는 것-complete game-은 더 이상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대단히 드문 일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퀄러티 스타트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공화국에서는 이 개념에 대해 투구 이닝과 자책점을 동시에 고려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 중요한 것은 퀄러티 스타트엔 여러분들이 당연히 알고 있지만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전제가 있다는 점이다. 즉 "선발 투수는 적어도 6 이닝을 던져야 선발 투수로서의 1차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5회를 퍼펙트로 막고 내려간 투수는 "선발 투수"로서 함량 미달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선발 투수는 일단 적어도 6 이닝을 던져야 하고 그 다음에 그 투구가 어느 정도의 투구였는지를 평가하는 데에 있어 2이닝에 1자책점 꼴인 6이닝 3자책점 이하라는 단서를 붙이게 된 것이다. 이 것은 다른 면에서 본다면 "미국 야구가 선발 투수라는 역할에 대해 얼마나 큰 기대와 신뢰를 부여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지금은 덜하지만 90년대 초중반 까지만 하더라도 선발투스를 6회 이상 던지게 하지 않는 다시 말하자면 그 이전에 선발 투수를 교체하는 경기는 메이저리그에 드물었다.

물론 퀄러티 스타트라는 개념이 처음 야구에 도입될 때보다 지금 투수의 역할이 세분화된 것도 사실이고 불펜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선발 투수가 단지 첫번째 투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감독이나 투수코치 그리고 그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야구팬들의 태도이다. 일단 한 가지 점을 살펴보자. 자신이 많은 이닝을 책임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선발투수는 당연히 투구수가 많아지게 되어있다. 자신이 많은 이닝을 책임지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투수는 "빠른 승부"를 선호, 아니 당연히 빠른 승부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의 투구 스타일에 충실한 타자들은 볼 카운트가 0-2인 상황에서 절대 3구를 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실제로 3구로 스트럭 아웃되는 타자가 얼마나 적은가?- 이런 패턴이 가져오는 결과는 경기 시간의 지연이 될 것이라 추측할 수있다.

컨트롤에 관한 한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 일컬어지는 그렉 매덕스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 목표는 단지 27개의 공으로 한 경기를 끝내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위력적인 구질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로저 클레멘스나 놀런 라이언도 자신들이 은퇴할 시점에서의 통산 ERA가 3을 넘었다. 다른 면에서 이 사실을 해석하면 아무리 "잘난" 투수라 하더라도 타자들이 절대 못치는 공을 던지는 투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즉 아무리 피해다녀봤자 타자에게 맞는 것이 투수라는 이야기다. 웅리 팀의 야수들을 믿고 빠른 승부를 하는 것이 투구수를 늘리는 것보다 빠른 투구가 엄청나게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제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포수는 공 하나하나를 벤취의 사인을 보고 투수에게 사인을 내다 보니 경기 시간은 자꾸 길어지게 되고 관중들은 야구를 외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할 이야기가 더 있으나 나중에 하자...



2013년 4월 12일 금요일

올드하지만 진부하지 않다는...

요 근래에 항상 그렇듯, 얼굴책에 링크를 해오던 중 참스승님이나 똘레도님께서 The Lumineers의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이시는 것을 기점으로 하게 된 고민이 하나 있는데 그 것은 과연 old한 음악에 대해 어떤 방식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미리 전제하고 들어가자. 다분히 the lumineers의 음악은 old하다는 평가를 받을만한 구석이 있다.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분명히 그들의 음악은 시계를 상당히 과거로 돌린 듯한 음악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어떤 미국의 음악 관련 매체에서도 그들의 음악에 대해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한 것을 찾진 못했다. 이야기를 이러한 문제에 집중해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공화국의 가요를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가 "아이돌 음악 중심의 천편 일률적인 음악"이라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말을 "곡을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라는 말로만 면죄부를 받기엔 분명히 한 방향으로 전력질주하는 모습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공화국의 가요라 할 수 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표절을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단 어떤 쪽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하면 그 페달에서 적당한 때에 발을 뗄 줄을 모르고 여기저기 다른 사람들도 그 방향으로 미친 듯이 쫓아오고 서로가 가속 페달을 더욱 더 강하게 밟는 그런 상황이 진행된다는 이야기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해서 오버그라운드 씬이건 언더그라운드 씬이건 자신들의 음악이 "올드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공화국의 가요계에선 끝장이라는 말씀이다. 또 여기서 오해하지 마시길 부탁드리는 것은 그렇다고 내가 "미사리 가요"에 대한 찬사를 보내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개인적으로는 미사리나 콘서트 7080과 같은 것들이 공화국의 가요계에 긍정적인 영향보다는 부정적인 영향력이 훨씬 더 강하다 생각한다. 그에 대해선 이전에도 수없이 이야기해 왔기 때문에 오늘은 특별한 언급을 반복하진 않으려 한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오버 그라운드나 언더그라운드 씬 모두 "참신하고 신선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작업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올드한 것"에 대한 사랑이 넘처나기도 하는 곳이 공화국이다. 마치 KBS 1TV에 채널을 고정하고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수의 자부심"인양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특정한 장르-까놓고 이야기하자면 트로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 자신의 나이가 가지는 특권인 양 행동하는 사람들도 가요시장에서 대단히 많은 portion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굳이 일례를 들자면...이라는 진부한 표현을 해보자면 음악을 존나 사랑한다는 50대 후반의 초면의 사람이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라 해서 "제퍼슨 에어플레인 같은 사이키델릭 음악도 많이 들어 보셨는가?"라 불어봤더니만 "난 요즘 음악은 안들어"라며 자랑스럽게 웃던 적이 있었다나 뭐라나...

전에 한 번은 후배 한 명이 "메이저 가요 씬에선 희망이 없고 오로지 인디 가요만이 공화국의 가오계가 나아갈 제대로 된 방향"이라는 말을 술자리에서 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것이 벌써 15년 전 일이었고 당시엔 나도 20대였고 그 후배는 갓 스물이 된 대학 신입생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만 사실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음악" 내지는 인디 음악에 대한 수요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여기서 갑자기 글빨 딸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아무튼 끝까지 가보자.

중요한 것은 분명히 "올드하나 진부하지 않은 음악"은 존재하고 그런 것들에 대한 선행 학습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재즈 퓨전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메인스트림 재즈에 대한 완ㅇ벽한 이해 없이는 자신의 음악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그를 학습한다. 그 올드한 것들을 계속 해오면서 사운드의 완성도를 더해가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 것은 마치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수백년 전의 곡들을 아직도 꾸준히 연주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래! 까놓고 이야기해서 난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나 그 자체를 클래식 애호가라는 사람들이 깔보는 것이 싫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올드한 것들을 파고들어 그런 음악의 질적인 발전을 추구해야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이 대중음악의 자양분이 될 것이란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대중음악도 이제 학생들을 혹은 앞으로 음악을 할 사람들에게 체계적인 교본이 될만한 것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그 분야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을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 물론 힘든 일이다. 지금처럼 판팔이 해서는 밥벌이 하기 힘든 세상에선 말이다. 물론 시장에서의 수요에 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장에서의 수요를 만들어 내는 일 역시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라는 말씀이다. 앞의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다가 스스로 수요를 만들어 내는 일은 포기하는 사태는 한 마디로 "대중음악의 악몽"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수?


2013년 3월 25일 월요일

듣거나 말거나 1000곡(143)

아님 말고 1000곡

143. Whiskey in the jar-The Dubliners-

아일랜드의 음악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리는 면이 존재한다. 아일랜드 음악의 특유의 창법에 대해 특히 그런 호불호가 극명하게 표현되는 측면이 있는데, 사실 그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한국의 포크라 할 수 있는 흔히 이야기하는 "소리"에 대해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판국에 외국인들의 입장에선 어떨까? 잠시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여러분들이 강하게 부정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실 한국에서 가장 이국적인 풍경을 이야기하라 하면 그 것은 "한옥"으로 대표되는 전통의 건축양식일 것이다. 같은 논리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가장 이국적인 음악은 "한국의 전통음악"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긴 이야기를 시작할 때를 되돌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고 지금 세계적 주류라 할 수 있는, 대중음악이라는 것은 사실상 미국으로 "강제적으로 주거를 옮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대중음악이라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없었다면 지금 정도의 발전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팝 음악의 발전 단계에서 분명히 어떤 지점에서들은 분명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음악들이 굉장히 큰 기여를 해왔던 것 역시 사실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Adult Contemporary Music이라 불리는-이 역시도 과거 일본의 영향으로 국내에선 Easy listening이라 부르던 시기가 있었다.-음악들에서는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닐 다이아먼드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혹은 배리 메닐로우나 이런 사람들의 음악들은 2차 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스탠더드 팝에 기반한 음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닐 다이아먼드는 좀 예외로 하자.-그러나 ACM이라 분류할 수 없는 부분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이 아닌 백인 이민들의 음악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경우도 힘들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니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American Modern Folk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이렇게 부르는 부류의 이 음악은 분명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영향을 받은 음악은 아니다. 물론 rock and roll의 시대를 지나 오면서 어메리컨 모던 포크라는 장르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더 이상 이 둘이 서로 독립적인 배경을 가지고 존재하는 음악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 자체에 무리가 있는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전의 엔트리로는 The folk music of Ireland 이라 되어 있으며 흔히들 Irish folk music이라고도 불리는 음악이 있다. 지금은 뭉뜽그려 Irish pop이라 부르는 것이 대세지만 한 때는 이를 엄밀히 나누기도 했다.(물론 개인적으로 그런 엄밀한 구분 자체를 무의미하다 본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김새는 일일 수도 있겠으나 전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대중음악은 모두다 포크 음악이라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지금 아일랜드 출신의 유명 아티스트들은 거의 모두 아잉리쉬 포크의 음악적 세례를 받은 세대라 하더라고 과언이 아니다. 얼터너티브 세대를 대표하는 팀 중 하나였던 크렌베리스도, 셔네이드 오코너도 The Corrs도 그렇고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밴드라 일컬어지는 U2역시 우리가 흔히 아이리쉬 포크라 부르는 그 음악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다.

조금 더 고전적인 형태의 즉, 원형에 가까운 아잉리쉬 음악은 개인적으로 발견하는 즉시 이 블로그를 통해 소개시켜드릴 것을 약속하고... 19621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결성된 The Dubliners의 경우는 아이리쉬 포크라 불리는 장르를 전세계적으로 익숙한 장르를 만드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했던 팀들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 팀에 조금 더 자세히 알려는 목적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들이 25주년 기념 공연과 음반, 40주년 기념 공연과 음반, 50주년 기념 공연과 음반에 관한 이야기일 정도로 이 팀의 역사는 이제 전체 서구의 대중음악의 역사와 일치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 팀의 역사가 서구 대중음악의 역사이며 서구 대중음악의 역사가 이 팀의 역사인...

그냥 입문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어메리컨 모던 포크와 아이리쉬 포크와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는 밴드의 악기 구성에 있다. 가장 미국적인 악기라 할 수 있는 벤조가 어메리컨 모던 포크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차지한다면 아이리쉬 포크 뮤직에 있어선 바이얼린과 대단히 비슷한 모양의 fiddle이라는 악기와 Irish Flute그리고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Whistle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뭐 당연히 악기 구성에 차이가 있으니 사운드에서도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더블리너스의 히트곡은 대단히 많으나 다 들을 수는 없고 거의 무작위에 가깝게 뽑은 곡이니 불만 가지지 마시기 바란다.


2013년 3월 11일 월요일

그래도 다시 주절거리련다.Soundless Music)

방배동 살쾡이 때문이었다. 그 것만은 아니었지만 방배동 살쾡이가 쓰고 정형돈이 부른 노래가 엄청난 인기를 얻는 바람에 음악이라는 것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는 것이 좋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기본적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개인적인 바람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고 아무도 신경 따위 쓰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절필을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래선 안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왜냐구? 불과 한 달 사이에 절필을 철회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냐구? 물론 그렇지 않다.

세상이 바뀌어서 내가 다시 뭐라 주절거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주절거린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이래도 듣보, 저래도 듣보일 팔자라면 주절거리기다로 하는 것이 개인적인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 순전히 개인적인 안위를 위해 다시 지껄이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자. 개인적인 안위를 위하는 동시에 혹시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내 이빨이 먹힐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다시 키보드질을 하기로 하는 정도로 말이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지만 내가 죽으면 나는 끝이 되는 것 아니겠

아무튼 웃기지도 않은 절필이라는 것을 하는 동안 내내 생각했던 것이 있으니 그 것은 "대중음악이라는 녀석에게 있어 과연 비평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 놈인가?"였다. 무지하게 거창한 것 같지만 항상 해오는 생각이고 고민이다. 뭐 내가 대단히 잘나서 그런건 아니고 어떤 계기가 되었든지 대중음악을 가까이 하게 된 연원을 따져 보자면 당시의 비평가들의 글에 닿게 되어있는 개인사의 한계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문제가 항상 머릿속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물론 그 어린 시절을 통과하는 동안 비평가들의 글이라는 것이 항상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고...

항상 이런 식의 고민을 하다 블로그라거나 그 외의 다른 것들을 때려치네 마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주로 "비평담론"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 때문일 것이다. 이런 짓거리를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흔히 이야기되는 "더 이상 비평가의 이야기가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에는 좀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 어떤 것이 무엇이냐면 비평이라는 것이 해야하는 역할에 대한 각자의 시각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생기면 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준다는 측면에서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젠 더 이상 어떤 영향력이라는 것에 대한 집착은 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영와의 경우 "감독의 의도"를 영화의 감상자에게 설명해주고 그리고 영화의 완성도라든지 기술적인 면에서 그러한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었는가?에 대한 의5견을 불특정 다수에게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특성상 비교적 이런 작업을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의 경우엔 이러한 것이 영화에 비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물론 이 것은 영화라는 매첵가 예술적으로 영화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있다거나 하기 때문은 아니다.

일단 시각적으로 음악은 영화에 대해 상당히 열악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비평담론에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논리"즉 음악이론에 비추어 봤을 때의 개별 작품의 이론적인 완성도라는 점을 가지고 예술적인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여야 하며 그리고 그러한 방향으로 비평담론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에 대한 비평담론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그 음악이 가지는 "사회, 정치적 의미"에 침잠하는 현재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렇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꾸준히 음악을 듣고 음악 이론을 학습하고 음악사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는 평론가들은 음악비평 담론을 생산하는 일에서 도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내 생각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억압받는 XX년대의 사회상이 어쩌고... 로 시작하는 글을 쓰는 것이 더 쉽다고 느낄 것이고 그런 식의 비평문들을 생산해내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곧 자신들의 방법으로는 모든 음악에 대한 비평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범주로 설명할 수 없는 음악을 비평가들이 도태시킬 위험성도 있다.

빌어먹을...



2013년 2월 11일 월요일

20130212(개소리들)

1. 그래도 명랑사회는 계속되어야 한다.
빌어먹을... 북한에서 또 핵설험을 한 것 같다는 이야기로 언론이 시끄럽다. 언제나 한 이야기지만, 핵무기가 확산되어선 안된다는 것이 신념이고 당장은 어렵더라도 차차 현재 인정되고 있는 핵보유국들 역시 핵무기를 폐기해야-무력화시켜야-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철칙이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건 핵을 터뜨려 그 불로 라면을 끓이거나 오징어를 굽더라도 우리의 명랑사회를 향한 발걸음을 멈춰선 안된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건 명랑사회는 계속되어야 한다. 쭈욱~

2. 당분간 하지 않는다.
뭘? 그렇다. 박명수라고도 알려진 작곡가 방배동 살쾡이의 "강북 멋쟁이"를 들은 순간, 그리고 그 곡이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시점에서 당분간 "음악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접"겠다 결심했다. 물론 당분간이라는 전제를 깔고는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음악이 좋은 음악이니 음악의 미래는 어떠해야 한다느니 과거의 음악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다느니... 등등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생각되더라는 말이다. 이제 그 어느 누구도... 라는 말은 뻥이지만, 대중음악을 향유하려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음악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 꺼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다.

3. 삼가 고인의 명복을...
울랄라 세션의 임윤택이 결국 세상을 떠났단다.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겠지만, 난 그와 그의 팀이 음악이라는 것에 접근하는 방식을 대단히 싫어했다. 울랄라 세션의 연주는 "자신들이 왜 음악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회피한 채, 자신의 무대를 철저히 쇼 비지니스의 관점에서 연출했다. 그들이 실력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철저히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치중했던 관계로 항상 "다른 사람들의 노래를 해야만 했다." 자신의 무대가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 한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 그 팀은 팀의 프런트맨을 잃었다.

이제 겨우 서른 넷의 젊은 나이에 그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한다면 그와 그의 팀이 보여줬던 무대에 대한 호불호를 차치하고 일단은 그의 가는 길이 편하길 바라야한다는 생각이다. 팀의 프런트 맨이 떠났다 하더라도 앞으로 울랄라 세션이라는 팀의 음악이 어떤 식으로든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간 그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의 팀의 구성원들이 겪었을 고통에 위로의 말을 하고자 한다. 편히 쉬시길...

4. 수험생의 가족이 된다는 것
아! 이제 유승이가 고 3이 된다. 이미 고 3이라 해도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 내가 수험생이었을 때의 내 의식을 되돌아 본다면 엄청나게 기만적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수험생이라는 것을 가족들이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도 짜증나고, "내가 수험생이라는 것을 가족들이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경우에도 짜증나고... 항상 짜증날 일만을 찾아 산긼을 헤메는 하이에나 같았다는 생각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를 생각해 보지만 항상 뒷북에 불과한 것...

그런듯 안 그렇게, 안 그런듯 그렇게 누군가를 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흔히들 이야기하는 "상대방을 우선적으로 배려"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공화국이 철저한 계급사회라는 것을 미리부터 각인시켜주는 대학교 입시라는 것이 아이들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만드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어른들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그다지 크게 할 일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나쁜 것은 확실하게 배우고 인생을 시작"하지 않던가? 나도 그렇고 늬들도 그랬다. 고 3을 지나면서 인생의 첫번째 선택을 하기 이전에 자신이 가게 될 대학잉라는 곳이 철저하게 계급화된 곳이라는 것을 이미 배우고 시작한다. 그래서 좋냐?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그래도 우리는 음악을 포기할 수 없다.(Soundless Music)

3. 똘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앞에서 이야기했던 똘똘한 사람들은 어찌 보면 잉여들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밥도 되지 않는 일에 미친 듯한 재능을 보인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말씀이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 용어로 보자면 일종의 잉여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주 근사하게 이야기한다면 음악가인 동시에 예술가가 될 것이다. 물론 그 중에서는 장인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사람도 있을테지만 말이다. 일본에서 샤미센을 처음 만든 사람도 그런 부류일 것이고 아프리카의 그 수없이 많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진 타악기들을 만든 사람도 그런 부류에 속할 것이고 구전되어 오다 근세에 이르러 악보로 정리된 수많은 중세 이전의 곡들을 만들었던 사람들도 그런 부류에 속할 것이다. 아래를 한 번 보자.

이런 씽크빅 돋는 인물들 중 역사상 가장 먼저 이름이 튀어 나오는 인물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피타고라스 할아버지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가 음악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의 체계를 처음 세운 사람이었을 뿐이지 피타고라스 이전에 씽크빅 돋는 생활을 했던 사람들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건 뭐 한도 끝도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가까운 중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중국 음악의 공식적 기원을 기원전 6600년에서 7000년 사이로 보는 견해가 거의 학계의 공식적인 설로 인정받고 있다.  심지어 메소포타미아 지역 근처에선 기원전 1400년 경 일종의 악보를 표기한 증거가 출토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시면 아니된다. 지금까지 인간이 발견한 최고(最古)의 악기로 추정되는 Divje Babe Flute의 경우엔 그 연대가 무려 기원전 40000년으로 추정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씽크빅 돋는 행위들을 했던 똘똘한 형님들은 세계 도처에 계시다. 세계 도처라는 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인 "가장 발달한 형태의 음악이 발달한 곳은 서부유럽" 이라는 식의 어이없는 사고를 배격하기 위해서임은 두 말하면 숨소리가 되는 말씀 되시겠다. 세계 도처라는 것이 중요한 다른 이유는 "음악이라는 것을 하는 행위"가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게 되는 일종의 문화적인 욕구 혹은 예술적인 욕구이며 각 지역마다 음악이 조금씩 혹은 확연히 다른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은 해당 지역 혹은 그 지역 문화, 예술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해있던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기본적으로 음악이라는 형태를 빌어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모든 음악은 본질적으로 동질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세계 도처에 널려있는 씽크빅 돋는 행위를 한 형님들은 모조리 다 위대한 분들이라는 이야기다.



2013년 1월 17일 목요일

박명수가 아닌 방배동 살쾡이를 보는 두 개의 눈(Soundless Music)

두 개의 눈이 아니라 네 개의 눈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서로 다른 관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음이니 알아서들 이해하시기 바라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혹시 이 사실을 아는가 모르겠다. 소녀시대의 새 앨범이 정식으로 발매된 나라들 중 음원 차트에서 발매 첫 주에 1위를 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는 한국이다. 지금 지상에서건 지하에서건 박명수가 곡을 쓰고 정형돈이 부른 "강북 멋쟁이"에 대한 논란이 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소녀시대가 한국에서 음원 발매 첫 주에 1위를 했으면" 아무런 문젲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이야기에선 공화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포털 사이트들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인 "모 에이전트의 언론 플레이"에 대한 논의는 배제하고자 한다. 이 경우 이야기가 원치 않게 산으로 올라가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 이런 사람들은 줄창 이야기한다. "선택은 대중의 몫이며 대중은 우매하지 않다." 게다가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한 가지의 말을 덧붙인다. "박명수가 저작권과 인접권으로 생기는 수익을 사적인 치부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일에 쓰도록 기부한다는데 무슨 지랄이냐?" 그리고 또 한가지 결정적인 이야기를 한다. "거대 에이전트들로부터 대중이 선택권을 돌려 받아야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한다. "거대 음반 제작업자들 혹은 에이전트들이 아이돌들의 음악을 줄창 밀어대다보니 대중의 선택권이 위축된 상황에서 이런 시도는 충분히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한 커멘트는 뒤에 몰아서 하도록 하자.

문제가 된다.
연제협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이런 것들이다. "좋은 음악을 죽어라 하고 만들고도 발표학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는 창작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허접한 노래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방송국의 횡포다." 또 이런 것, "무도빨을 이용해서, 무도 도전의 시청자들은 충성도가 높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이런 것까지 시장에 내놓는 것은 시장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방송국의 횡포 아닌가?" "따라서 이 것은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에 존나 위배되는 일 아닌가?" "씨발 뭐 음악이 장난이냐?" "앞으로도 방송국이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이용해서 이런 짓을 한다면 저질 음악들이 판을 치게 될 것 아닌가? 이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런 등등의 이야기들...

내 얘기.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서로가 상대방을 "시장에서의 강자"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뭐 이런 종류의 문제에서 일반적으로 나오는 말들이긴 하지만 "당사자들 서로가 자신은 약자고 상대방은 강자"임을 내세워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가 정당함을 호소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근간은 바로 여기 있다. 그래서 과연 박명수의 곡들이 음악적으로 훌륭한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박명수의 곡이 음악적으로 어떠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흐릴 뿐 아니라 지금의 대결 국면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돌들의 음악은 다 쓰레기인데 뭐..."라 하실 분들은 그냥 평생 그 수준에서 생각하면서 그 수준으로 살라고 하면 된다. 어차피 내가 하는 이야기는 그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이니...

이 문제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여지껏 대중음악에 대해 대중의 선호를 조작하는 데에 의기투합하여 같이 잘 해처먹던 것들이 서로의 이해관계가 어긋나게 되어 생긴 분쟁" 미리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이로 인해 "씨발 넌 양비론이냐? 듣기 싫어! 양비론 따위"라 한다 하더라도,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분쟁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한 쪽은 흔히 이야기 해서 "한 쪽으로 편중된 음악을 자꾸 만들어내어 대중의 선호를 조작하던 집단"이고 또 다른 한 쪽은 "그런 음악을 계속해서 대중에게 노출해서 그들의 돈벌이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집단"이다. 그리고 가요시장에서 이 둘의 힘은 어느 쪽이 더 강한지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상태에서 서로 이해의 균형을 맞줘 온 사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반성을 하고 가야 한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평론가 집단은 가요시장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아무튼... 그렇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둘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요시작에서 대중들의 판단이 좋은 음악을 살아남게 하고 그렇지 않은 음악은 퇴출시킨다."라는 말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개뻥인지 말이다. 그리고 그 점을 이용해서 알아서 공존공생한 집단들 아닌가? 그들이 서로의 이해관계가 부합해서 여지껏 문제 없이 지내다 지금 문제가 커진 것은 하필이면 현재의 대중음악 제작 시스템의 상징적 존재인 "소녀시대의 신곡"이 음원차트에서 1위를 하지 못한 것 때문이다. 소녀시대를 박명수가 밀어냈다는 사실이 가지는 상징성은 대단하다.

앞으로도 이런 문제가 생기면 이들은 또 이런 식의 다툼을 벌이게 될 것이다. 서로가 "대중음악의 주인은 대중"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위의 정언 명제를 팔아 처먹으면서 말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지금 심정은 "이런 과정에서 진정한 피해자는 가요시장에서의 소비자인 대중"이라는 말도 별로 하고 싶지 않다. 항상 이야기해 왔듯 현재 가요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집단은 수요자인 대중들이라는 생각을 거두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자신의 이름이 함부로 팔리는 것에 대해 경멸의 눈초리 정도는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이런 일은 또 생길 것이며 그 때마다 분쟁의 당사자들은 "오류가 없는 위대한 대중"을 팔던가 "지상파를 장악한 이들에 의해 자신의 선택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 불쌍한 대중들"을 팔 것이기 때문이다.



2013년 1월 16일 수요일

그래도 우리는 음악은 포기할 수 없다.(Soundless Music)

1. 태초에 음악이 있었다.
이 무슨 웃기는 짬뽕같은 소리? 맞다. 웃기는 짬뽕같은 소리다. 하지만, 인간이 나름 체계적인 언어의 틀을 가지기 전의 의사소통 방법은 언어라기 보다는-당연하다. 앞에서 언어 이전이라 전제했는데- 차라리 음악에 가까웠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음의 장단과 고저가 발음기관이 진화하고 머릿속에서 단어라는 것을 만들어 그 것을 통용하고 문법이라는 체계를 만들기 전엔 음악적인 요소들이 언어적 요소에 우선한다고 확신한다. 이 점을 나한테 증명해 보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해 드리리다. "그 정도의 지식을 내게서 얻길 원한다면 내게 연구지원을 해주고 정식 논문을 출간하길 기다려라. 그렇게 해주겠다." 하지만 늬들이 그렇게 해줄 이유가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정도 선에서 소설을 쓰는 것으로 대신하고 그냥 그렇다고 생각을 좀 해주길 바란다.

2. 언젠가부터 언어가 음악을 대신했다.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특정 단계에서 분명히 서로의 의사소통체계가 현재 언어라 부르는 어떤 것에 가까워젺을 것이라 본다. 그렇다. 그 때부터 "음악적인 어떤 것으로 소통하던 시기"를 졸업하고 지금 우리가 언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그 "음악적인 것"을 대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은 "음악적인 것"들이 결코 진정 자리를 잡게 된 "언어체계"에 대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진정 이 이야기의 반전이다. "음악적인 것에 가까운 요소"를 통해 인간이 의사소통을 했다면 "언어 혹은 언어 체계라 불릴만한 어떤 것"이 독립적으로 생김으로 인해 "음악적인 요소"들도 스스로 독립하여 이제 후대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예술행위로서의 음악"이 발달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게 된 역사적 사건일 것이다.

소리의 높낮이나 리듬의 장단(長短)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기존의 방법이었다면 각자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던 이 방법을 이젠 다른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 같은 것을 가지고 "내가 지금 배가 고파 사냥을 하가고자 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같이 갈래?"라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다면 이젠 같은 것을 가지고 다른 것을 떠올리게끔 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기가막힌 것은 그 것을 듣는 사람들이 반드시 "사냥에 동참하겠냐?"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점이고, 그 것이 크게 문제가 되거나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이런 방식이 이 새로운 체계를 대하는 데에 있어 오히려 권장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드디어 음악은 "진정으로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게 되는 과정"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음악"이라는 것이 독립해나가는 과정이란 것을 알게 된 똑똑한 사람들은 이 음악이라는 놈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하려다 보니 이 쯤에서 끊어가야겠다는 느낌이 팍팍 온다. 3번 부터는 조금 후에...




2013년 1월 6일 일요일

이제 그들의 역사는 끝났다.(개소리들)

박찬호가 처음 던지는 것을 본 건 1989년이었다. 그 유명한 휘문고의 박정혁이 3타석 연속 3점 홈런을 치던 그 날, 상대는 공주 고등학교였고 상대 투수가 바로 박찬호였다. 지금은 상샅도 하지 못할 일이겠지만 당시 박찬호는 키만 삐쭉하게 크고 몸은 유난히 왜소한 아주 앳된 얼굴의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그 날 박찬호는 말 그대로 가루가 되도록 얻어 터졌으며 아마도 어지간한 선수였다면,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도 그가 공화국 최초의 메이저 리그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박찬호라는 이름을 "공화국 최고"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이며 기억하진 않았다. 그가 고등학교 3년이던 1991년에도 그는 최고의 자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있었다. 1996년 그 해 최고의 선수가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게 되는 김병현이 아니라 봉중근이었 듯, 미래의 메이저 리거는 사람들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던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것은 휘문 고등학교의 임선동도 아니고 경기 고등학교의 손경수도 아닌 신일 고등학교의 조성민과 설종진이었다. 설종진과 조성민이 3번과 4번을 치던 신일 고등학교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초고교급이라 일컬어지던 임선동이나 손경수의 휘문고나 경기고는 전력이 약해 전국대회의 4강까지는 어찌어찌 올라갈 수 있는 행운의 팀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경기는 마산역 대합실에서 보던 봉황대기 결승전인 신일고와 광주제일고의 경기였다. 야구를 본 구력이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은 상상이 불가능하겠지만, 당시 광주제일고의 에이스 투수는 박재홍이었다. 그리고 광주제일고의 동문과 팬들에겐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날 박재홍은 신일고 타자들에게 복날의 개 맞듯이 두드려 맞았고 전국대회 결승이라 하기엔 조금 미안한 수준의 일방적인 경기였다.

유독 92학번엔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 임선동, 손경수, 조성민 이 세 명의 투수는 일단 넘사벽의 수준이었고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수준의 투수로 꼽히던 선수들이 경남상고의 차명주와 공주고의 박찬호 대구상고의 전병호 등이었다. 그 외에 설종진, 김종국, 홍원기, 그리고 나중에 대학에 사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송지만, 아까 이야기했던 광주일고의 만능 선수였던 박재홍-대학 때 그의 별명은 리틀 쿠바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아마도 한 해에 이런 뛰어난 투수둘이 왕창 쏟아져 나온 것은 77학번의 최동원 김시진 김용남, 89학번의 김홍집, 구대성, 이상훈 이후로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대단한 92학번 선수들이 세계대회 급의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적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가만 내버려두진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박찬호는 잘하건 못하건 그 후에도 미국에 가기 전까지 몇 번의 경기를 직접 관람한 적이 있다. 그 때마다 저 엄청난 패스트볼에 저렇게 아쉬운 컨트롤이라니!라는 생각을 무진장하긴 했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안정감이 있던 선수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임선동과 조성민이었다. 그들은 각각 문동환과 이상훈이라는 걸출한 선배와 마운드를 함께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학야구의 쓰디쓴 맛 같은 것은 크게 볼 일이 없었다. 물론 박재홍은 임선동이라는 걸출한 선수를 같은 학번 친구로 둔 덕에 연세대 시절 타격에 전념해서 지금까지 이를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임선동과 조성민이 대학에 간 후로 그들이 같은 경기에서 서로 상대 투수로 뛰는 걸 보진 못했다. 그런 경기가 없진 않았지만, 내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는 말씀이다.

아무튼 내가 다니던 그 빌어먹을 학교에서 조선민이란 이름은 꽤나 오랜 시간동안 "구세주"와 동의어였다. 1학년 때는 주로 경기 후반에 이상훈의 승리를 지켰으나 2학년 때부터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팀의 에이스였으며, 심지어는 한 학년 후배인 손민한이 입학한 후에도 그 빌어먹을 학교의 재학생 혹은 졸업생들은 조성민의 이름을 더 큰 소리로 불러제꼈다. 그리고 언제나 조성민은 자신에게 집중된 기대치를 큰 무리없이 감당해냈다.(그렇다고 그가 천하무적이었단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지금도 조성민 보다는 임선동이 훨씬 더 뛰어난 투수였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임선동은 재수가 없게도 일본에 갈 수 없었던 반면, 서울의 두 구단이 서로 눈치를 보다 고 3때 지명하지 못했던 조성민은 아무런 문제 없이 일본에 진출할 수 있었다.

조성민이 일본에서 어떤 선수였나에 대해선 인터넷을 이용하시기 바란다. 아쉬웠던 점은 그 엄청난 투수들이 즐비했던 92학번들 중에서 해외에 나갔던 선수는 박찬호와 조성민 둘 뿐이었다는 점이다. 그게 어째서 아쉬운 일인가?라 질문한다면 두 가지 측면에서 대답할 수 있다. 하나는 박찬호 때문에 해외진출 선수의 국내 복귀에 대한 조항이 생겼을 만큼 당시엔 해외 진출잉라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선수들이 밀어붙일 수 있는 여지가 그 후보다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가지 이유는 당시의 국내 프로야구의 수준은 지금에 비하면 한참 허섭했기 때문에 "일단 국내에서 인정 받은 후에"라는 따위의 이야기를 발라버릴 수 있는 분위기였다는 점이다.

조성민 개인의 인성이나 그의 행동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은 아니라 생각해서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한다. 정작 조성민의 죽음을 보며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은 "이제는 좋건 싫건 그들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92학번들 중 아직까지 송지만이 확실하게 현역 선수로 남아있고 박재홍은 이번 시즌 선수생활을 이어가게 될지 아닐지에 대한 확신도 없는 상태긴 하지만 아직은 현역 신분이긴 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박찬호 만큼의 박수를 받으며 야구판을 떠날 수 있는 시기"는 놓친 것이 분명하다. 분명 2012 시즌에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박찬호도 마찬가지였지만, 박재홍이나 송지만은 그의 은퇴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할 정도의 처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야구판을 관심있게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손경수 못지 않게 가장 불우한 선수생활을 보낸 조성민은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야구 선수로서의 생활이 아닌 진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이젠 92학번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이 정도의 언론의 주목은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 한 가지 까먹은 것이 있다. 임종석과 정민철도 그들과 동기지만, 그들은 92학번이라는 수사를 택하는 대신 92년도 한국 프로야구 신인선수가 되는 길을 택했기 때문에 오늘의 이야기에서 빼버렸다. 박찬호와 조성민이 다르다면, 박찬호는 자신의 주도 하에 언론에 노축된 반면 조성민이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노출된 것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어찌 보면 92학번의 시대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주위를 둘러보니 극히 몇몇을 제외하곤 70년대 생으로서 정상의 위치에 있는 선수들도 보이지 않는다. 조성민의 비극으로 최소한 야구판에서는 한 시대가 확실하게 마감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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