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26일 토요일

Simon Corwell, RATM, Super-Star K, 2009년의 씁쓸함

폴 포츠나 수전 보일 그리고 서인국이라는 가수의 공통점은 방송사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1등을 먹었거나 1등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1등을 먹은 사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슈를 만든 사람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보통의 가수들의 데뷔앨범을 내는 기간에 비해 훨씬 더 짧은 기간에 자신의 이름을 단 첫 앨범을 냈다는 점일 것이다. 폴 포츠는 <브리튼스 갓 탤런트>의 1위가 확정된 후 3개월만에 자신의 앨범이 나왔으며 서인국은 그보다도 훨씬 더 짧은 시간에 자신의 앨범이 나왔다. 죄송하다. 수전 보일이 얼마만에 자신의 앨범을 냈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다. 아무튼 그들에게 있어 또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그들이 만들어낸 이슈의 폭발력에 비한다면 그들의 음반의 완성도는 대단히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점도 포함될 것이다. 물론 심사위원들이나 주최측은 "당장 시장에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된 사람을 뽑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목적"이라는 점을 재삼 강조하며 그들이 이렇게 짧은 시간의 작업을 통해 음반을 내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란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지에 대해선 좀 생각이 필요할 것이다.

<브리튼스 갓 탤런트>외에도 영국엔 또 하나의 유명한-사실은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을 듣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으니 그 포로그램의 제목은 X-Factor이라 한다. 그 프로그램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2005년 이후에 이 프로그램 출신으로 정규 앨범을 냈던 가수들 중 영국의 앨범 차트에서 1위를 하지 못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X-Factor의 괴수라 불리는 대단한 독설을 자랑하는 평론가인 사이먼 코웰(Simon Coewell)이 있다. 그의 영향력은 "패션도 노래의 일부"라는 어이없는 말을 주저없이 뱉어내신 공화국 최고의 섹시 아이콘이라 불리는 이모 여가수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것이어서 그에게 호평을 받는다는 것은 최소한 영국 시장에서의 대성공을 예약하는 것과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일이라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이 영국의 분위기라 한다. 빌어먹을 새끼! 나도 잘 모르는 새끼가 그렇게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평론가였단 말인가? 아무튼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이 게시물을 끝까지 읽는 것이 의미있다는 것까지만 여기서 이야기하자.

또 한가지 이야기할 것이 있다. 2009년 영국의 크리스마스의 싱글 차트에서 이미 해체한 팀인 Rage Against The Machine의 "Killing in the name"(이 곡은 티렉스가 나중에 반드시 여러분들께 소개해야할 곡이기도 하다.)이 1위를 차지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RATM이라 하면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와 머플러 그리고 머그잔 등을 전세계적인 상품으로 만드는 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고 앨범의 북릿에 자신들의 앨범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러이러한 책들을 선행학습해야한다는 이야기를 써놓는 등의 대단한 시건방을 떨던 팀이었다. 사실 그들이 시건방을 떨었던 그렇지 않건 문제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두도록 하자.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과거 어떤 팀이었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번 크리스마스 차트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1위를 하게 되었는가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영국의 크리스마스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되었는가는 요기를 눌러서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그 이야기까지 다 쓰려면 좀 과하게 길어진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젠 대세가 되어버린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RATM이 1위에 올락가게 된 방식에 대한 개인적 소회이다. 오디션이라는 것 자체는 이 동네에선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런데 이 일상에 가까운 오디션이란 일이 방송사가 개입하게 되면 으 때부터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아직 정식으로 데뷔하지도 않은 오디션 참가자들의 팬클럽이 생기질 않나, 애꿎은 10대들은 누가 1등을 하네 마네 하며 서로 싸워대지들 않나, 경쟁이 끝나기도 전에 특정 참가자와 계약을 하는 에이전시가 생기질 않나...방송이란 매체 하나가 끼어듦으로해서 대중음악판에 관심을 가진 팬들에게 있어 오디션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권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권력이라는 것이 별다른 저항없이 대중들을 무장해제시키기도 한다는 데에 분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RATM 사태는 일종의 그 권력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소수들과 그 권력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와의 맞짱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으로 이번 사태가 주는 쾌감도 인정하고 통쾌하다는 것도 인정하긴 하지만 이런 일들은 1회성의 이벤트와 비슷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이유는 우선, 무엇보다도 이런 일 자체가 지극히 인위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 역시 팝음악의 역사에 기록될만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런 대단한 결과를 이뤄낸 후 그에 대한 다른 조치(?)내지는 그를 통한 다른 변화(그 것이 꼭 바람직할 필요는 절대 없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일 것이다.)를 추동할만한 뒷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팝음악의 전체적 큰 흐름에서 삐져나온 하나의 과속방지턱 정도의 역할 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런 사건들이 주는 쾌감은 춫분히 인정한다. 다만, 이런 일은 이벤트에 그쳐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만일 RATM이 현재진행형의 밴드라 하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현재 그 팀은 해체한 팀이며 다시 결성될 가능성도 (아직은) 없어 보일 뿐더러 팬들이 차트의 정상에 올린 곡 역시 새로 발매된 미발표곡도 아니며 심지어는 재발매된 싱글도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티렉스의 결론이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으면 한다는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기인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문제의 본질이 "요즘 전세계적으로 휠을 잡고 있는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자발적 반발"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그런 차원에서 따져봐야 한다 할 것이다. 애초에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RATM의 싱글을 걸고 했던 팬들의 모험(?)에 대해 비아냥거린 사람이 문제의 그 인물이라는 점이며 그가 요즘 전세계적으로 휠을 잡고 있는 이른바 음반시장의 대세라 할만한 그 지랄맞은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독설이나 날리고 있는 같잖은 인물이라는 점이 그들의 눈에 대단히 거슬렸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것이 그들의 전의를 불타게 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이 휠을 잡고 있는 한 대중음악의 근본적인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상업적으로만 봐도 폴 포츠의 첫 음반이 전 세계적으로 300만장 나갔다는 것은 전세계 수십억의 인구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상업적 성공"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거의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모창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미 스타인 사람들을 따라하는 것"을 최대의 미덕으로 알고(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 것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왜냐고? 이른바 휠을 잡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휠을 잡고 있는 심사자들 역시 "현재 휠을 잡고 있는 대중적 음악"이라는 데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왜 거 공화국의 대표 프로그램인 <슈퍼스타 K>에서 공화국에서 가장 hot하다는 아이돌 그룹 출신의 여가수께서 한 건 올리지 않았던가... "패션도 음악의 일부분"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도 안되는 호흡으로 음반을 내는 것을 보면 분명히 오디션을 통해 배출된 인물과 상당한 교감을 나눈 후 그를 위해 쓴 곡들이 아니라 이미 쓴 곡을 그에게 주입시키는 작업을 했다는 의혹을 뿌리칠 수 없다. 그리고 그 것은 오디션을 통과한 사람들에겐 대단히 쉬운 일일 것이다. 왜? 여태까지 해온 것은 "자신들의 가이드들"을 충실히 따라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공화국 여가수들 중 최고의 가창력을 가진 가수라 평가받던 솔로 여가수들 중 한 명에 대해 티렉스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바로 그랬다. 하드웨어도 좋고 테크닉도 있지만 작곡자가 어떤 요구를 하든 그를 그대로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겐 마이너스 요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지금 그는 그런 상태다. 다행히도 그 여가수는 공개 오디션 출신은 아니지만 말이다. 공개 오디션에 대해선 이 정도만 까주기로 하고 진짜 결론을 내려야할 때이다.

이번 사건이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으면 한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지만 최소한 어떤 맥락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고 자신이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괴물이 쳐대는 장난에 놀아나지 않을 필요는 있다는 점이 줒ㅇ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할 환경 자체가 조성되지 않는다면 더없이 행복하겠지만 공화국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까?에 대한 답이 회의적이기 때문에 사실 상당히 부러운 일이긴 하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사람은 아는만큼만 보이고 들리고 생각하게 된다. 가장 무시무시한 일은 자신의 해석과 구성능력을 벗어나는 양의 정보가 대가리에 들어오게 되는 일이다. 그런 인간들은 애초에 정보를 제공하는 쪽이 의도하는 방향을 기막히게 따라가게끔 하는 촉수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정도의 해프닝도 기대할 수 없는 시장 풍토에서 살고있는 일은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다만... 항상 회의하고 의심할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하는 수 밖에...

2009년 12월 16일 수요일

아님 말고 1000곡(107)







107. Coleman Hawkins - I love you

지난 번에 이어 콜먼 호킨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런저런 뉘앙스가 곧바로 콜먼 호킨스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다들 알 수 있게끔 되었고 그리고 콜먼 호킨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만큼 그의 연주자와 작곡가로서의 극적인 반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콜먼 호킨스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하지 않느니만 못하기 때문에 콜먼 호킨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의 극적인 인생의 반전의 계기들은 사실상 비밥 재즈의 시대와 점프 블루스의 시대에와 100%의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워낙 천재들이 날뛰던(?) 비밥의 시대를 콜먼 호킨스라는 아티스트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게, 더 나아거서는 그 시대를 자신의 전성기로 만들었는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비밥에 대한 이야기를 상당부분 깊이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델로니우스 몽크(Thelonious Monk)와의 만남이 콜먼 호킨스에게 얼마나 크나큰 인생의 반전을 가져왔는지부터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앞서의 게시물에서 마지막부분에 이야기했던 것은 콜먼 호킨스의 처음 레코딩 작업은 빅밴드 스타일의 작업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그가 참여했던-사실은 그가 주도했던- 빅밴드 음반들은 대단히 큰 실패를 거두게 되었더랬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 것은 콜런 호킨스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이거나 시기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초창기의 빅밴드 스타일의 음반들이 기대에 못미치는 성과를 낸 후 그는 Kelly's Stables와 함께 뉴욕의 맨해턴의 52번가에서 함께 연주를 하게 되는데 그는 이 곳에서 위에서 이야기한 Thelonious Monk, Oscar Pettford, Miles Davis, Max Roach등 당시 Kelly's Stables의 멤버로 활동하던 재즈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만한 인물들을 만나고 인간적인 신뢰를 쌓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것이 그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인지는 그 자신조차 당시엔 짐작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1944년에 Dizzy Gillespie, Max Roach와 함께 역사상 최초의 비밥 음반이라 불릴만한 스튜디오 작업에 리더로서 참여하게 된다. 문제가 되는 바로 그 작업 후 그는 Howard McGhee와 함께 투어를 떠났고 그 후 JJ Johnson, Fats Navarro와 함께 녹음 작업을 했으며 Jazz at the philharmonic과도 함께 투어를 하기도 했다. 1948년 콜먼 호킨스가 녹음했던 Picasso라는 타이틀의 앨범이 있는데 재즈에 정통한 대중음악사가들은 이 음반을 초창기 무반주 색소폰 음반의 걸작중의 걸작으로 꼽는다. 1948년 이후 콜먼 호킨스는 뉴욕과 유럽을 오가며 프리랜서 뮤지션으로서 녹음작업을 활발하게 하게 되는데 1950년대에는 뉴욕시 맨해튼의 Village Vanguard이라는 유명 클럽에서(이 클럽에 대해 나중에 찾아보시면 이 무대에 서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가를 아시게 될 것이다.) 고정적으로 연주를 하게 된다. 바로 이 시대를 거치는 동안 콜먼 호킨스는 수많은 비밥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고 나중에 대단히 혁신적인 스타일과 탁월한 연주력을 가진 후배 뮤지션들과 함께 무대에 설 기회를 자주 가지게 되는데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존 콜트레인(John Coltrain)등이 그런 뮤지션들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콜트레인과는 콜트레인이 델로니오스 몽크와 함께 녹음작업을 할 때 (게스타가 아닌 동등한 비중으로) 같이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MAx Roach의 We insist-Freedom Now!조곡의 녹음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 후에도 그는 수많은 작업들을 통해 그의 건재함을 과시했고 사망하기 불과 몇해전까지 활동했으나 그 후의 이야기들은 굳이 꺼내지 않는 이유는 흔히들 "천재들의 주도했던 시대"라 불리는 비밥 재즈의 시대가 도래하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 "비밥시대의 천재들"에 비하면 천재라는 이야기를 하기엔 무언가 부족한듯한 이 콜먼 호킨스라는 인물이 많은 공헌을 했고 비밥의 전성기에 콜먼 호킨스의 영향이란 것은 어찌보면 그 유명한 찰리 "버드" 파커나 디지 길레스피를 능가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부각시켜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트럼피스트로서는 다소 자질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의 전 하위 장르에 있어 그 끝을 알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 했듯, 천재의 시대였다는 평가를 받는 비밥의 시대에 천재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인 콜먼 호킨스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오래 살고 덜 튀는 것"이 꼭 불쌍한 점(?)은 아니라는 평소의 내 지론과도 일치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알아가게 되는 과정이 바로 한 인간이 음악에 대한 애정을 조금 더 깊게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Coleman Hawkins - I love you

2009년 12월 14일 월요일

All about ELO?(Soundless Music)

도저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네이버 블로그의 똘레도님께서 저렴한 비용으로 음원을 구입하실 수 있는 방법이 있어 Elctric Light Ochestra의 곡들로 한장의 CD를 구우신다며 그들의 곡들을 추천해주실 것을 부탁하셨다. 일종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무슨 갱스터 영화의 대사같긴 하지만...) 대략 10곡은 훨씬 넘는 곡들을 이유 불문하고 그들의 대표곡들이라 할만한 곡들의 리스트를 올리려 한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 앨범별로 리스트를 올리려 한다. 다만 이유 등등은 필요없이 긴 게시물이 될 것 같아 생략하도록 한다. 살아있으면 언젠가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물론 아님 말고...

*The Electric Light Orchestra (album)
10538 Overture" (Lynne) – 5:32
"First Movement (Jumping Biz)" (Wood) – 3:00
"Mr. Radio" (Lynne) – 5:04
"Queen of the Hours" (Lynne) – 3:22

*ELO 2
"In Old England Town (Boogie No. 2)" – 6:56
"Kuiama" – 11:19

*On the Third Day
"Ocean Breakup / King of the Universe" – 4:07
"Oh No Not Susan" – 3:07
"Showdown"* – 4:09
"Daybreaker" – 3:51
"Ma-Ma-Ma Belle" – 3:56
"In the Hall of the Mountain King" (Edvard Grieg) – 6:37

*Eldorado (Electric Light Orchestra album)
"Eldorado Overture"
"Can't Get It Out of My Head"
"Boy Blue"
"Laredo Tornado"
"Poor Boy (The Greenwood)"
"Mister Kingdom"
"Illusions in G Major"
"Eldorado"
"Eldorado Finale"

*Face the Music (Electric Light Orchestra album)
"Fire on High"
"Evil Woman"
"Nightrider"
"Poker"
"Strange Magic"
"Down Home Town"
"One Summer Dream"

*A New World Record
"Tightrope"
"Telephone Line"
"Rockaria!"
"Livin' Thing"

*Out of the Blue (Electric Light Orchestra album)
"Sweet Talkin' Woman"
"Jungle"
"Standin' in the Rain"
"Mr. Blue Sky"
"Sweet Is the Night"
"Birmingham Blues"

*Xanadu
"Magic"
"Don't Walk Away"

*Discovery (Electric Light Orchestra album)
"Shine a Little Love" – 4:43
"Confusion" – 3:42
"Last Train to London" – 4:32
"Midnight Blue" – 4:19
"Don't Bring Me Down" – 4:02

*Time
"Twilight" – 3:35
"Ticket to the Moon" – 4:06
"The Way Life's Meant to Be" – 4:36
"Here Is the News" – 3:49
"Hold on Tight" – 3:05

*Secret Messages
"Secret Messages" - 4:44
"Four Little Diamonds" - 4:05
"Rock 'n' Roll Is King" - 3:49

*Balance of Power
"So Serious" – 2:38
"Getting to the Point" – 4:28
"Calling America" – 3:26

*Zoom
"Alright" – 3:13
"Moment in Paradise" – 3:36


날로 게시물 하나 먹었다는...

2009년 12월 10일 목요일

도대체 왜 공화국의 대중음악 비평 담론은 명랑사회와 작별을 고하게 되었는가? (2)

2.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 하나...
사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지만 일단 편의상 하나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런 점은 분명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거대 기획사가 신인 가수가 데뷔한다는 사실에 대해 언론에 홍보하고 각종 수단을 동원해 미리 선전을 해두게 되면 10대 그루피들이 항상 "ready to go"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들의 음원이 공개되는 동시에 스타를 만들어버리고 그리고 어찌보면 한난라당이 경상도에서 민주당이 전라도에서 공천을 준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당선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땅짚고 헤엄치기의 상황이 연출된다는 것! 어느 누구도 이런 과정을 긍정적으로 볼 사람도 없고 나 자신 역시 이런 점에 대해선 "니미 존나 심하다"라고 생각하며 이 부분은 고쳐져야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대해선 과도하게 동의한다. 분명히 지금 이른바 거대기획사라 불리는 에이전트들은 그들이 트레이닝시킨 가수들을 이용해 대단히 쉽게 매체를 장악하고 있으며 대중의 욕구가 그런 방식을 믄들어내느 것인지 그들의 시장조작에 의해 대중들이 움직이는 것인지 애매모호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 점은 반드시 극복해야할 점일 것이다.

굳이 X-File의 팬이 아니더라도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이 무엇인인가에 대해 궁금해햘 것이고 이런 대중가요라는 대중문화 컨텐츠에 관련된 갖가지의 음모론들이 난무하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이다. 아마 <메트릭스>를 떠올리거나 빅 브라더라는 단어를 떠올리거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공화국의 10대와 혹은 가끔은 그 이상의 연령대의 그루피들은 이른바 메이저 기획사들의 음모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기계인간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요 몇년간의 fact들을 살피게 되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 게시물을 보시는 분들은 기분이 나쁘실 수도 있겠지만 대중들으 ㅣ기호나 여론을 조작하는 것은 중고등학교 학생이 엄마에게 참고서를 산다고 거짓말을 하며 삥땅을 치는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들의 선호나 혹은 기호라는 것을 조작하는 것이 쉽다 하더라도 아무리 선견지명이 뛰어난 천재적 감각의 음반 기획자라 하더라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대중을 조작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 17대 1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마당에 1대 수천만이라는 싸움을 그리 쉽게 이긴다는 것은 일종의 "뻥"아닐까?

그런데 그간 공화국의 대중음악 비평 담론을 주도하던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 지나치게 안이하고 진부한 결론을 내리고 이렇게 쉽게 내린 결론을 바탕으로 처방전 역시 안이안 것을 제시해왔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에 언급했다시피 막말로 가요계가 몇몇의 대형기획사에 의해 완전히 놀아나고 있고 그들이 별로 달가와하지 않는 이런 현상의 모든 책임이 대형기획사라 불리는 곳에 있다는 정말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발상에서 그들이 자유로웠던 적이 있던가? 이른바 아이돌을 만들어내는 대형기뢱사들은 항상 악한들이고 대중들은 항상 무지하고 어리숙한 선의의 피해자인가? 대형기획사들이 악당의 역할을 맡고 있음이 분명해보이긴 하지만 과연 그들만 악한가?에 대해선 수없이 많은 질문과 대답을 필요로 한다. 가요계의 획일화라는 문제가 이 지경에 이르게까지 되는 동안 과연 천하에 처죽일놈들은 대형기획사와 지상파 방송만 있는 것일까? 감상자 내지 소비자와 평론가의 책임은 없는가? 과연 평론가라는 작자들이 이런 현상에 대해 대형기획사의 뒷다마나 까고 있는 것이 100% 용인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깨끗한가?

문제를 조금 더 본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자면 이른바 비평담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대중의 아이콘" 혹은 "아이들 스타"(사전에서 발음기호를 찾아보시면 아이돌이 아닌 아이들이 올바른 발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계속 이렇게 쓸 생각은 없지만 분위기 환기 차원에허 한 번 잉렇게 써본다.)라 불리는 자들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탄생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10대 뿐 아니라 전 세대에 걸쳐 해당하는 이야기 되시겠지만 대중들의 스타가 되려면 두가지 중 하나가 만족되어야 한다. (1) 절대적으로 대중이 모방하고 싶은 존재일 것 (2) 대중이 더 이상 모방의 욕구를 느끼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저 존재는 나와 동일하다고 느낄 것... 과연 10대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보기에 이상한 복장과 이상한 머리를 하고 "루저의 정서"를 이야기하는 딴따라들에게 위의 두가지 중 하나를 느낄 수 있을까? 아직 세상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사회의 부조리와 그에 대해 저항할 것을 노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나 알까? 좀 더 간지가 팍팍 살아주고 더 예쁘장한 아해들을 닮고 싶어하는 것이 10대들의 자연스런 욕구라는 것을 인정하면 펜대가 뿌러지나? 키보드의 키가 하나씩 뽑히나?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는 사실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10대들이 닮고 싶어하는 아해들이 어떤 아해들인가?라는 데에 대한 답이 나와있다는 점이며 이미 가요계는 10대들이 좌지우지하는 시장이라는 것!

이른바 대형기획사들이라는 것이 생기고 그들이 아이돌 스타들을 만들어내고 그들에 대한 그루피가 생기는 과정을 그저 "그런 과정이 존재했다"라는 싟으로만 판단하고 아이돌 스타들이 휠을 가요계의 휠을 잡기 시작한 것이 15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이돌 스타들의 특징에도 질적인 차이가 존재해왔다는 것을 판단하지 못한 상태에서 "너희들이 듣는 음악은 좆도 구린 음악이고 그 것은 너희들의 귀를 썩게 만들 것이다. 이에 우리가 너희에게 광명의 길을 밝혀주리니 우리들이 좋다고 하는 음악을 들어야만 한다. 나를 그냥 죽어라 하고 믿고 따르라!"라고 턱뼈가 빠지도록 외쳐대는 동안 그들은 가요시장에 이미 주어진 컨텐츠들의 질적인 부분들을 분석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음악의 기술적인 면이나 형식적인 측면에 대한 분석은 싹뚝 잘라먹고 앵무새처럼 쉴 새 없이 주류비평가들이 해온 이야기를 요역해보자면 "이 노래는 존나 좋아 왜? Rock이라는 장르이거나 Falk이라는 장르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조낸 돈 바쳐대는 그 노래는 조낸 나빠 왜? 위에서 이야기한 장르가 아니거나 댄스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신념으로 "10대 아해들이 이런 나락에 빠져있고 그 것이 결국 가요계의 암담함을 가져오게 된 것은 오로지 대중들이 방송사와 대형기획사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조종되는 기계인간이기 때문"이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부분은 다들 인정한다. 어느 정도 그런 대자본들이 대중의 머릿속까지 식민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하지만 주류 비평가라는 사람들이 내리는 처방이나 그들의 담론 역시 대중들을 세뇌시키고 뒤에서 마음껏 조종하고 있는 대형기획사나 방송사들의 기본 발상과 한개도 다르지 않다. "대중 특히 10대 들에게 나쁜 것이 아닌 좋은 것을 계속적으로 주입하면 그들은 따라올 것"이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 실제로 대중들을 조작하고 조종해온 그들이 혐오하는 자들의 방식과 도대체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역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만일 당신들이 이야기하는대로 대중들이 구리지 않고 좋은 음악들만 듣는다 치자...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음악적인 다양성을 충족시키는 것인가?"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푸르른 것은 오직 저 초원의 소나무 한그루이다. 현실에 기반하지 못하는 당위론은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보는 빈도수가 작다못해 불필요하다고까지 여겼던 도덕과 국민윤리 책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날 것이란 생각은 안했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 아직 멀었다. 줴길... 네이버가 아니라 구글로 오니까 이런 이야기는 마음대로 지껄일 수 있어 좋구나!)

2009년 12월 7일 월요일

아님 말고 1000곡(106)








106. (Just like) Starting over-John Lennon(1980)

어째 며칠 전 꿈에 존 아저씨가 나타났다 했더니만 오늘이 벌써 존 아저씨의 29주기라는 것을 잊어버릴까봐 나타났던 것 같다. 조지의 8주기를 까맣게 잊고 지나간 것에 대한 질타도 그에 포함되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나름대로 다짐한 것이 작년부터 해마다 존 아저씨의 기일엔 그의 곡과 그에 대한 게시질을 하리라는 것이었는데 어거지로나마 올해에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지 아저씨에겐 미안하고 존 아저씨에겐 고마운 동시에 미안하기도 하다. 내년부턴 미리미리 준비할테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조지 아저씨도 마찬가지고요...

정말 티렉스가 꼬꼬마였을 무렵 1980년 12우러 8일(한국시간) 뉴욕발 기사 하나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 것은 존 레넌이 뉴욕시의 타코마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권총 사격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티렉스가 그보다도 더 꼬꼬마였을 때 엘비스가 저세상으로 떠났을 때에도 전 세계가 이렇게 들썩거리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존 레넌의 새 앨범인 "Double Fantasy"를 발매하고 정확히 3주가 지났던 때였으며(이 앨범은 1980년 11월 17일 발매되었다.) 그리고 비틀스의 실질적 해산 10주년 되던 해였고 법적으로 더 이상 비틀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난 뒤로부터 만 8년이 되던 해에 정말 오랜 기간의 칩거를 깨고 발매한 앨범이었고 차트에서 한 마디로 휠을 잡기 시작했으며 평단의 반응도 비교적 호의적어서 "이젠 정말 비틀스의 존 레넌이 아닌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존 레넌"에 대한 평가가 연착륙을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가져왔던 충격이 더했던 것일지 모르겠다.

"Double Fantasy"는 그의 솔로 앨범들 중 최고라 할 수는 없으나, 그의 마지막 앨범이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대단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테지만, 사적으로 보았을 때 음악적으로 이 앨범은 과거의 존의 앨범들과는 달리 굉장히 많이 "힘을 뺀" 음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이 앨범이 존의 팬들루부터는 존의 베스트라 여겨지지 않는지도 모르겠으나 사운드도 가사도 날카로움을 잃은 대신 조금 더 여유를 찾은 앨범이라 보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이 개인적 견해이다. 앨범의 수록곡들 중 "Life begins at 40"이라는 곡은 곡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오랜만에 새 앨범을 내게되기까지 나름의 방황과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고 이 앨범을 자신의 인생에서나 음악에 있어 일종의 터닝 포인트로 삼고 있다는 점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사실 40이라는 그의 나이는 그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리도 불화를 거듭했던 세상이라는 곳에 대해 조금은 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대해 "이제 난 너를 편하게 대할 수 있어"라는메시지를 보낸 것과 동시에 그는 아직도 의문점들이 숱하게 남아있는 암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John Lennon and the Plastic Ono band시절의 날카로움과 이미 비틀스 시절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냉소적인 자세를 버리려는 제스쳐를 취하자 마자 그는 그가 가까이 다가가려했던 세상에 의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정말이지 이 앨범은 이제 다음의 존 레넌의 작업들은 얼마나 더 편해질까?라는 의문점을 가지게 될 정도의 의아함을 자아냈고 오히려 그 것으로 인해 존 레넌에 대해 "weird"하다는 단 하나의 단엉로 그를 경원하던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조차 그에게 관심을 보이게 시작하게 만들었던 이 앨범은 애석하게도 그의 마지막 앨범이 되고 말았고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해리 닐슨이 허무하게 짧은 인생을 마감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물론 해리 닐슨은 술을 과하게 퍼먹었고 그로 인해 세상을 등진 것이 존 아저씨와의 결정적 차이긴 하지만 말이다.

꼬꼬꼬마 티렉스는 비틀스라는 이름을 알게 되자마자 리버풀FC가 그들의 고향 팀이라는 이유 하나로 아직껏 그 팀의 팬이고-빌어먹을 네 명의 딱정벌레들 중에 그 팀의 팬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안 것은 불과 10년이 되지 않는다.- 존 아저씨의 죽음을 접하며 한 사람의 죽음이 이리도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으며 그 다음 날 뉴욕 타임스의 헤드라인이었던 "When the music's over"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그리고 그런 과정들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팝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평생 목숨을 걸고 해볼만한 행위"라 생각했던 꼬꼬마는 이젠 존 아저씨가 세상을 뜨던 바로 그 나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또 한가지, 개인적으로 이 앨범의 편곡자이자 공동 프로듀서였던 JAck Douglas의 편곡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으나 이젠 존과 잭의 공동 작업이라는 것은 더 이상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며칠전처럼 가끔 꿈에라도 나타나 주시길 바란다. 존 아저씨! 내년 오늘 또 봐요!

마치면서 한마디 더 드립니다. 오늘 게시물은 급조된 것이고 내용도 허접하지만 존 아저씨를 추모하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Just like)Starting over

요건 과거 나왔던 뮤직 비디오.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나도 이런 짓 한다.(월드컵의 역사)







항상 시사성과는 거리가 먼 뒷북치는 이야기이거나 아무도 관심없는 이슈의 중심을 애써 벗어난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도 매체를 접하고 살기는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오늘 날밤을 까게 만들었던 월드컵 조추첨식의 결과로 인해 나온 2010 월드컵의 1라운드 조배정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고자 한다. 나도 이런 짓 한다.

1. 각 조별로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신물나게 해댈테니 이번 결과에 대한 몇가지 원인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포르투갈도 프랑스도 아닌 잉글랜드가 탑시드를 받았기 때문인데, 포르투갈과 프랑스 중 최소한 한 팀은 탑시드를 받았어야 했다. 그리고 조금 더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아르헨티나가 퀄러파잉 라운드에서의 최악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탑시드를 받음으로 인해 "날로먹을 수 있는 조"에 편성된 것 역시 조별 리그를 치루는 것만으로도 진을 다 뺄만한 팀을 최소한 여섯 팀을 만든 결과를 빚어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근래 몇차례의 뤙드컵 중 이번처럼 "당연히 올라갈만한 팀들이 거의 올라온 대회"는 드물다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개인적으로 쭉 주장해왔던 "AFC 퀄러파잉 라운드"에 지나치게 관대함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도 만만치는 않다할 것이다. 호주를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특히 북한-을 같은 조에 배정받은 팀들은 모두들 최소한 1승은 주웠닫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아시아에 배정되는 티켓은 2.5장 정도로 제안할 필요가 있다.

2. 위에 이어서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개인적으론 "월드컵 대회가 세계 최강의 팀을 꼽는 명실상부한 대회"가 되기 위해선 지금의 퀄러파잉 라운드를 지역별로 하는 것이 아니라 FIFA 랭킹을 기준으로 상튀팀들과 하위팀들을 홈&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치르게 하여 32팀이 남게 한 뒤 본선대회를 하면 된다. 아시아 팀이 한 팀도 없어도 북중미에서 한 팀도 없어도 괜찮다. 이 것은 그저 축구팬으로 "아무리 날밤을 까도 아깝지 않을 월드컵 대회"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안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륙별 안배니 약체에 대한 배려니 하는 따위의 태클"은 사양한다. 당연히 내 이야기는 현실성도 없을 뿐더러 올라는 방식이지도 않지만 전세계에서 "정말 가장 강한 32개 팀"이 벌이는 4년마다 벌어지는 월드컵은 유로대회를 보기 위해서는 매일 밤 날밤을 까지만 월드컵 대회에선 생략하는 일도 꽤 있는 나같은 사람들에겐 희소식이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저 혼자 하는 푸념 정도로 들어주셨으면 한다. 이 방식이 죽어도 최고니 꼭 이렇게 하자고 주장할 생각도 없으니 말이다.

3. 누가 뭐래도 이번 조추첨에서 가장 큰 행운을 얻은 팀은 아일랜드와의 플레이오프에서의 문제로 지금 세계 축구계의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프랑스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탑시드를 받을 근거가 미약한 잉글랜드일 것이다. 탑시드에서 탈락하며 험난한 앞길이 예상되던 프랑스는 항상 개최국의 조인 A조에 배치됨으로 인해 날로먹을 수 있게 되었고 잉글랜드 역시 프랑스나 포르투갈이 아닌 잉글랜드가 탑시드를 받게 됨으로 인해 가장 쉬운 조라 예상되는 C조에 배정되어 미국 알제리 슬로베니아와 비교적 쉬운 조별리그를 치룰 수 있게 되었다. 잉글랜드로서는 전승을 해봤자 본전인 조에 속했다는 것만이 그들의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할 뿐 그 어느 것도 거칠 것 없게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팀에겐 미치지 못하지만 아르헨티나 역시 탑시드를 받으며 "거의 날로 먹을 수 있는 조"에 배정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재수 좋은 팀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4. 코트 디 부와르는 지금 현재 아프리카 팀들 중 가나, 카메론과 더불어 최강 팀 중 하나라 평가받고 있고 프리미어 리그외엔 축구도 아니라 생각하는 공화국 팬들에겐 디디에 드록바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프리카 최강의 팀으로 인식되는 팀이지만 지난 대회에 이어 말도 안되는 조편성으로 인해 내년 대회에서도 안타까운 탈락이 예상되는 팀이다. 브라질, 포르투갈과 한조라니... 그나마 북한이 있어 최소 승점 3점은 얻은 후에 탈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바 그들의 억울함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그리고 가장 무시무시한 조는 누가 뭐래도 D조라 할 것이다. 독일, 호주, 가나, 세르비아의 네 팀으로 구성된 이 조는 최악의 경우에 네 팀 모두 승점 3점을 얻게되어 무슨 방법으로 2라운드 진출팀 두 팀을 결정할지를 고민해야할 상황에 이를지도 모른다. 항상 네덜란드는 조편성의 운이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번 경우에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일본이 있어 나머지 세 팀들이 최소 승점 3점은 확보한 뒤 게임을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으나 나머지 세팀은 서로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골치아픈 조가 될 확률이 놓게 될 것이다. 카메룬은 무엇보다 아프리카 팀들 중 월드컵 대회의 경험이 가장 많은 팀이다. 덴마크 역시 피지컬이라는 측면에선 참가국들 중 최고 수준이라는 점에서 네덜란드가 쉬운 경기를 펼치리라는 예상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할 것이다.

5. 어쩔 수 없이 공화국의 2라운드 진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텐데, 이미 언론에서 수도 없이 나왔듯, 축구 도박 사이트들의 공화국 대표팀의 2라운드 진출에 대한 배당금은 대략 8.5에서 13 수준인 것으로 나와있다. 이 것은 북한의 26에서 101에 비한다면 엄청난 수치라 할 수 있지만 그리스의 4~6보다 현저히 높은 수치로 공화국이 2라운드에 진출할 경우 공화국에 돈을 건 사람들이 그만큼 많은 돈을 배당받는다는 이야기로 그들의 예상에 의하면 사실상 공화국의 2라운드 진출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고 보면 될 것이다. 물론 티렉스의 개인적 예상 역시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90년 월드컵 이후 20년만에 무승점 대회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가 감독을 맡은 이후 팀이 말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그들 개개인의 클래스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보니 공화국이 그들을 꺾을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일단 아르헨티나에 패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공화국 대표팀의 가장 큰 문제는 선수들의 개인기량의 문제에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감독이 허정무라는 점에 있다 할 것이다. 이미 히딩크, 퍼거슨, 무링요, 벵거 말고 다른 사람들이 공화국 감독으로 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도대체 현대 축구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가 의심스럽다.

6. 하긴 그럴만도 할 것이다. 그는 마라도나를 발로 차는 장면에 타임지의 커버에 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했다가는 7명이 안되어 실격패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가장 위험해 보이는 것은 그리스를 1승 상대로 생각해 그리스전에 올인하게 되는 상황이다. 그리스는 상대방을 압도할만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는 팀은 아니지만 전 국민의 80퍼센트가 올림피아코스의 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국의 리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 대단하며 올림피아코스가 절대 강팀이고 오토 레하겔이 벌써 팀을 맡은지 9년이 된 만큼 수비 조직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으며 그들보다 높은 클래스에 있는 팀들도 그리스에게 역습을 당해 선제골을 내준다면 그리스에게 1-0으로 잡힐 수 있을 정도의 강한 수비를 가진 팀이다. 게다가 공화국은 과거부터 피지컬이 압도적인 유럽팀에겐 굉장히 약한 면을 보여오지 않았던가... 만일 그리스를 만만하게 보고 그들에게 처음부터 강하게 나간다면 개인적인 우려대로 20년만의 무승점 월드컵이 현실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물론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국가들 중 거의 유례가 힘든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그런만큼 그들은 몸빵 축구에 능하다. 카메룬이나 이집트같은 스타일의 아프리카 팀을 생각한다면 전혀 예상외의 결과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에게 보다 더 큰 점수 차이로 깨지는...

7. 공화국 축구의 문제점을 지적하라 한다면 뭐 날밤을 깔 수도 있겠지만 실전에서 가장 유용하게 쓰일 두가지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가장 많은 골 찬스를 만들 수 있는 플레이는 공격수의 스크린 플레이-수비를 등지고 어깨싸움을 통해 자신이 돌며 슈팅을 하거나 다른 선수에게 패스하는 플레이-이다. 과거 김도훈이 현역 시절엔 공화국에서 가장 뛰어난 스크린 플레이를 했지만 지금은 김도훈 정도의 몸빵 축구를 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많은 이들이 세트피스 상황을 이야기하는데 그 것은 공화국 축구엔 해당사항이 아니라는 것이 "항상 문제되는 공화국의 킥력과 공격수의 위치 선정"이 워낙 월드 클래스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세트피스는 패스로의 활용보다는 거리가 조금 멀더라도 오히려 직접 슈팅을 시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아주 고질적인 수비의 문제인데, 상대방의 패스나 프리킥이 애매한 지점에 떨어지게 되는 경우 수비수가 자리를 지키지 않고 공을 쫓아가는 행위를 피해야만 할 것이란 생각이다. 그 정도의 경합에서 개인기로 상대 공격수보다 먼저 공을 따낼 확률도 적을 뿐더러 수비수가 나감으로써 생기는 공간은 치명적이 될 것이다. 제발! 제발! 그럴 경우엔 공을 따라가지 말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4백의 수비전형을 쓸 아무런 이유가 없다.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스위퍼 시스템을 쓰는 것이 나을 수 있다.

8. 아무튼 이제 6개월... 체코를 제외하고는 거의 올라갈만한 팀들이 올라간만큼 이번 대회는 말 그대로 강호들의 각축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남반구의 늦가을 내지 초겨울에 해당하는 날씨인 관계로 막 더워지기 시작하는 북반구의 클럽 대항전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팀들의 선수들의 활약이 다소 미진할 것이란 예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부상만 없다면 그 정도 클래스의 선수들을 한번에 볼 수 있는 기회란 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공화국 축구는 200%의 전력을 발휘하고 상대방은 50%의 전력을 보일 것을 절대적 전제로 16강이 어쩌고 해대는 공화국 언론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지만 이젠 케이블의 스포츠 채널 들도 많지 않은가... 제발 오버하지들 말고 그냥 축구를 즐기게 되길 바란다. 아무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으나 나도 이런 시의성 있는 이야기도 한다. 흥! 우리 집에도 텔레비전은 나온다구!!! 알았어?

2009년 11월 24일 화요일

도대체 왜 공화국의 대중음악 비평 담론은 명랑사회와 작별을 고하게 되었는가?

본디 지상파 언론 혹은 제도권 언론이란 이른바 타블로이트 신문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위치를 이용해 타블로이드판 신문들보바도 훨씬 더 저급하고 짜증나는 이슈들을 "손가락질을 덜 받으며" 만들어낼 특권을 지니고 있다. 그 것이 바로 지상파 미디어의 힘이다. 물론 지상파라는 이름은 지상파 방송 3사는 물론 이른바 중앙 일간지들-그 것이 6대 일간지이건 8대 일간지이건 간에- 역시 이르는 말이다. 애초에 선정성 자체가 가장 큰 무기인 3대 일간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끔은 특정한 결론을 미리 정해놓은 뒤 그 것을 계몽적 지도자의 위치에서 대중에게 강요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 마디로 해선 절대 안되는 "쓸 데없는 선생질"을 하고 자빠진 경우가 허다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어이없는 일들이 가능했던 것 중 하나가 소위 "문화 특히나 대중문화 분야"인데 내 다른 분야는 거론할 여력이 안되고-물론 영화에 대해선 굉장히 생산적인 담론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음악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첫 단락에서 신문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나, 사실 신문 그 자체에 대해 뭐라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듯해 보이는 언론 역시 선정적이긴 마찬가지고 그 것이 언론의 속성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른바 주류 대중음악 비평계의 스타들을 만들어낸 것이 모 신문사이고 그리고 그들로 인해 그들이-어느 그가 어느 그인지 알아맞혀 보세요!- 그 바닥에서 권위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책임은 인정해야할 것이란 생각이다. 내가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그-누군지 대놓고 이름을 말할 수도 있으나 뭐 어차피 다 아는 K씨 L(I?)씨인걸 뭐 새삼스레...-들이 줄기차게 제기해왔고, 그래서 이런 요소들이 빠지면 제대로 된 한국 대중음악 평론이 아닌 것처럼 되어버린-소문에 의하면 누구는 가요평론가라는 직함을 무지하게 혐오하신다 하여...-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경향신문의 모씨와 모 기획사의 대표 모씨와의 대담을 찾아 읽어보시려면 보시고 마시려면 마시고 링크는 생략하도록 한다.

1. Rock and roll에 대한 편집증
Rock음악에 대한 대단히 큰 오해가 있는데, 그런 오해가 가장 심한 곳은 공화국일 것이다. 필히 지적해야 하는 오해라는 것은 서구, 특히 영미의 음악, 더 좁게는 미국의 대중음악 필드에서 휠을 잡고 있는 장르가 Rock 음악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미국에서 Rock이라는 이름의 음악장르가 미국 대중음악 전체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는 점이다. 공화국과는 달리 장거리 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공화국의 차들이 기본 옵션으로 제공했던 카 스테레오의 카세트 데크마저 옵션인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FM방송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놓고 그들의 방송은 공화국의 FM방송이 유명 엔터테이너 DJ의 잡담이 주가 되는 것과 달리 Station 자체가 하나의 장르의 음악만을 방송하며 음악이 방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진행자의 뻐꾸기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월등히 높다. 왜 갑자기 라디오 방송국 이야기를 하는가? 궁금하실 수 있을텐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차피 전국방송이라는 것의 영향이 공화국보다는 덜 압도적인 동시에 케이블 텔레비전의 가입률이 낮은 미국에서 FM Station의 전문 음악 방송 채널들 중 어떤 장르가 가장 많은가?는 미국 사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장르-인기라는 것이 한 가수나 한 곡의 월등한 시장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일상적으로 듣는 음악들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음악을 말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인가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것은 곧바로 시장의 규모와도 무관하지 않다. 한 곡을 틀 때마다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수입이 배분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공화국의 몇몇 주류 대중음악 평론가들의 바람과는 달리 미국에서 가장 많은 스테이션에서 방송되는 장르는 rock음악이 아니라 Country and Western이다. 그리고 시장의 상황이 대단히 많이 바뀐 지금까지도 흑인음악이 대약진하며 컨트리 웨스턴의 위치를 위협하는 평세지 rock 음악 전문방송의 숫자는 컨트리 & 웨스턴 전문방송의 숫자보다는 감소폭이 덜하지만 가장 많다는 이야기를 하기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이다. 이 것은 쪽팔리긴 해도 공화국의 수많은 라디오 방송들 중에서 나오는 음악의 장르들 중 트로트 곡들이 결국엔(심심하시면 일요일 정도에 하루 종일 이 채널 저 채널 라디오를 돌려보시면 금방 아실 수 있으실 것이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장르가 트로트라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첫번째 이야기의 결론이 Rock음악이 미국의 대중음악을 주도하는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고 미국 사회 전체로 보면 컨트리 & 웨스턴, 음반 시장을 보면 흑인음악이 휠을 잡고 있는 장르라는 점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두 번째 이야기는 "그들이 그렇게도 오매불망하는 rock이라는 장르"가 그들의 바람대로 과연 "저항적이며 사회적인 메세지로 충만한 음악인가?"라는 점이다. 가장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Rock and Roll의 태생이 과연 사회적인 메시지를 음악에 담기위한 수단으로서 음악을 사고하던 사람들의 시도였던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초한 티렉스의 게시물들에서 이미 수차례 언급했지만 Rock and Roll은 흑인 음악에서부터 파생되어 나온 장르이며 그 뿌리가 블루스에 있긴 하나 블루스에 비하면 문학적 성격이 대단히 약한 장르라 할 것이다. 블루스와는 달리 대부분 초창기 록앤롤 곡들의 가사를 보면 대단히 직설적이고 좀 심하게 보면 "개념없는 노는 아이들의 푸념"에 가까운 내용의 가사들임을 아실 수 있을 것이다. 더우기 1950년대 일렉트릭 기타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백인 아해들이 이 장르에 뛰어들면서 그런 상황은 더 심해졌다.

머리에 글리스를 잔뜩 바르고 가죽 자켓을 걸친 아해들이 무리들 중 한 놈의 집의 차고(Garage 거라쥐라고 발음한다나 뭐라나)에 모여 연주를 하던 아해들은 대부분 "학교 가기 싫어하는 양아"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척 베리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그들보다 한참 후배인 엘비스나 비틀스의 초창기 음악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록&롤 음악이 베트남전 반대 운동, 히피 무브먼트,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유행이라는 세가지 요소와 결합되며 "저항적인 색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은 인정한다. 그 것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식자층들이 rock이라는 장르에 뛰어 들어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곡들을 양산해내기도 했지만, 그런 팀들의 음악에서 보여지는 저항의식이나 사회적 메시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 효과의 하나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것은 모든 헤비메탈 음악이 사타니즘과 관련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앞으로 이어서 이야기하게 될 내용이지만, 음악에 대한 비평 담론이 자꾸 이런 식으로 "가사의 사회적 의미"에 치우치면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할 것이다.

(심하게 길어졌고 본디 계획이 그랫던 관계로 다음 번에 이야기 이어지겠다.)

get the fuck out of here(개소리들)

2000년대 초반 자타칭 "미국에서 온 랩 천재"가 있었다. 그는 E모라는 이름의 힙합(?)그룹으로 데뷔했고 미국 서부의 최고 명문대인 S대학의 영문학 석사라는 후광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분이시다. 그 사람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한 다리 건너면 다 "어떤 좆같은 새끼가 뒤에서 너 까더라"라는 이야기가 돌고도는 것이 이 바닥이니 그런 일은 참도록 하고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위대하신 스탠포드 영문학 석사 출신의 형님이신 스탠포드보다 좀 많이 떨어지는 컬럼비아 유니벌씨티를 나오신 캐네이디언이자 교육방송에서 영엉를 가르쳐 돈을 처벌고 계신 그 분의 형님의 지극히 크로이펠츠 제이콥스 증후군적인 뇌구조에 대한 이야기 되시겠다. 아! 심지어 그 위대하신 미국의 명문대 출신의 두 형제에다가 중간에 그들보다 더 좋은 학교를 나온 따님을 두신 어머님은 "빌어먹을 좆같은 공화국의 여성지"에 존나 이상적인 어머니로 몇차례 인터뷰까지 하신 분이시다. 씨발새끼 왜 부모까지 들먹거리냐고? 그러려면 네가 네 부모가 잡지와 인터뷰했다는 이야기를 어이없는 공화국 좆병신들의 사대주의의 씁쓸한 결과로 만들지 말았어야지 병신 새끼야...

씨발 내 너보다 나이도 많으니 처음부터 반말까고 들어간다. 이 새끼야. 물론 내가 너보다 어렸어도 새끼로 시작해서 새끼로 끝났겠지만, 당신이 도토리 존나 사대면서 화려하게 꾸민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당신의 게시물을 보니 이런저런 대단한 것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영어 못하는 새끼들이 미국의 중심인 뉴욕에 나가서 영어 못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국의 시청자들을 웃기는 무한도전을 보며 그들을 바라보는 미국애들의 시선 때문에 미국애들이 아닌 무한도전에 화가 났다"는 것 아니겠어? 이미 당신은 전력이 있더구만... 작년 빌어먹을 멸치대가리 새끼가 개좆같은 FTA를 위해 미국에 가져다 바친 쇠고기 협상에 대해 반대하는 공화국의 인민들을 "한심해 보인다."라고 한 일이 있더구만... 뭐 그래 그거야 미국보다도 광우병 소의 출현이 더 빈번한 캐나다 국적의 소를 처먹은 자네라면 캐나다소를 처먹은 나도 있는데 그보다 안전한 미국 소를 가지고 왜 지랄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근데 씨발 문제는 그게 아니거든... 클로이펠츠 제이콥스 증후군에 걸린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 당신의 뇌가 그 병의 환자들보다도 더 심각하게 스펀지같은 상태라는 데에 네 문제점이 있는거야...이제부터 잘들어! 응? 난 같은 말 여러번 하는 것 싫어하고 "좋은 주먹 놔두고 왜 말로 해!"가 내 인생 신조니까 한 번에 못알아들으면 밤길 조심하면서 다녀야 한다. 알았지?

다른 것 다 제쳐놓고 바이링구얼 내지는 멀타이 링구얼일 네가 공화국에서 한국말 좆도 이상하게 하는 외국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씨발 빌어먹을 공화국 인민들은 영어가 모국어인 애들이 아주 인사동에서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영어로 길 물어보면 "서로 영어로 답해주지 못해 안달난 새끼들처럼 경쟁적으로 영어 하려고 하는 불쌍한 영어 편집증 환자들"인 것 인정한다. 그리고 씨발 또 미국에 가서는 영어로 길 물어보고... 넌 이 새끼야! 미국애들이 거의 당연하게 영어로 서울에서 한국인들에게 길 물어보는데 그런 놈들에게 영어로 "존나 친절하게 고매한 양키들이 땡스 외쳐주시면 몸둘 바를 몰라하며 잇츠 오케이 외쳐주시는 공화국 인민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왜 유재석의 박명수의 병신같은 영어에 네 얼굴이 화끈거려야 하는데? 어차피 웃기려고 간 애들이 존나 유창한 영어를 해대거나 통역을 대동해서 매끈한 대화를 하면 그게 한식세계화에 이바지하려는 공영방송 문화방송의 야심찬 다큐멘터리지 주말 버라이어티 <무한도전>이니? 알지 모르겠는데 무한도전이란 프로그램은 과거 소싸움 대회에서 1등한 소하고 줄다리기 하고 지하철하고 100미터 잘리기하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면서 "무모한 도전" "무리한 도전"하던 프로그램이라는 거 아냐? 갑자기 네 모국어가 듣고 싶어졌나보지? 유재석이가 뉴욕에 간다니까 네 모국어 듣고 싶어졌어? 씨발! 네가 뭔데 지상파 방송의 프로그램 포맷까지 이래라저래라 해? 네가 진성호야? 최시중이야? 씨발 어차피 웃기는 프로그램 불편했으면 채널 놀려 응? 손가락은 딸딸이 칠때만 쓰니? 나도 어지간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 좋아하지만 "손발이 오글거릴 때"는 그냥 다른 채널로 돌려 심지어 <1박 2일>이라 해도 말이야... 이게 내가 네 대가리를 날려보리고 싶은 첫번째 이유야 알겠어?

네가 그렇게 고매하게 생각하고 자부심을 갖는 네 모국어인 영어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보자 "네 밥벌이 하게 해주는 것이 영어인데 너 영어 2급 정교사 자격증"은 있냐? 야 이 씨발놈아! 넌 새끼야 곡화국 법에 따르면 중학교에서 영어 가르치는 것도 불법이란 말이야... 네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그 영어가 그렇게 대단해? 22000 뗀 새끼들은 3등급 시민이고 33000 뗀 새끼들은 2등급 시민이고 네이티브들하고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한 새끼들은 1등 시민이니? 씨발...너 나보다 한국어로 욕 잘해? 영어 잘하는 것이 그렇게 자랑이야? 근데 넌 네 동생처럼 영문학 전공자도 아니잖아? 근데 왜 영어로 밥빌어먹고 살고 지랄이야? 뭐 그거야 그렇다 치자. 네가 차별을 받았다고? 어려서 영어 때문에? 그래서 미국애들의 그런 시선이 싫다고? 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그런 이유로 외국인들을 버러지 보듯하는 미국애들은 그 외국인 새끼들이 영어 존나 잘해도 어차피 버러지보듯하는 새끼들이야. 제노포비아 새끼들 눈엔 외국인들, 트히 유색인종인데다가 황인종인 우리들,은 다 버러지야? 알아? 너만 미국에서 학교 다녀본 것 아니란다. LA의 한국인 갱스터들은 영어 못해서 총질해대니? 바꿔 생각해봐! 촬영장비 다 보이고 우스꽝스럽게 행동하는 애들을 보면서 "혐오에 찬 시선을 보내는 애들"은 너희 잉글리시 스피킹 피플들이 그렇게 외쳐대는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를 실천하고 있는 새끼들인지... 넌 그 새끼들이 문제있다는 생각은 1g도 안해봤지? 이게 네가 네 대가리를 날리고 싶은 두번째 이유야... 더 있는데 그냥 이쯤에서 관두자 너같은 새끼는 전기톱으로 뇌를 따서 네 골을 "보양식 좋아하시는 어르신들"이 드시게 광화문 광장-빌어먹을 지구상에서 가장 추한 중앙 분리대-에 놔두고 싶으니까... 그리고 정말 심한 욕으로 끝내고 싶구나. "씹새끼야 평생 그렇게 살어!"

2009년 11월 14일 토요일

아님 말고 1000곡(105)






105 Body and Soul Etc.-Coleman Hawkins-
어떤 이들은 이 인물이 1901년에 출생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그에 대해 입증할만한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고 있진 못한 관계로 공식절으로 이 사람은 1904년 11월 21일 생인 것으로 되어있다. 이 사람은 미국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Jazz Saxophonist들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테너 색스를 재즈라는 음악에서 독주 악기로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것만으로도 그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애햐할 충분한 명분이 된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지만 뭐 그러기 싫으면 그냥 싹 다 잊어버리고 살아도 당신이 밥벌이하는 데에는 1g의 지장도 없으니 뭐 알아서들 하시길 바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재즈에 테너 색스를 사용한 사람들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콜먼 호킨스 이전의 테너 색스라는 것이 재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테너 색스라는 악기는 최소한 재즈라는 장르에 있어서만은 콜먼 호킨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콜먼 호킨스라는 이 위대한 재즈 뮤지션은 스윙 재즈의 시대를 거쳐 비밥 재즈의 시대에 자신의 만개한 기량을 선보였던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만 할 것이 있다. 이 게시물을 보시는 여러분들 중 대부분은-심지어 얼마 전까지의 티렉스도- 보통 비밥 재즈라는 장르의 이름을 제시하면 반사적으로 나오는 인물이 있다. 그 이름도 거축한 Charlie "Bird" Parker... 그렇다. 그는 재즈의 역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천재 색소포니스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리고 비밥 재즈를 이야기할 때 만일 이 인물의 이름을 빼놓게 된다면 그는 아마도 비밥 재즈가 뭔지 모르는 인물이거나 비밥 재즈라는 것이 비가 오는 날 밥을 먹을 때는 재즈를 들으면서 먹으면 분위기 죽인다... 라는 불결한 연상을 할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할 것이다. 하지만, 콜먼 호킨스라는 인물은 비록 찰리 버드 파커만큼의 대단한 천재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비밥 재즈의 시대를 서술하는 데에 있어 찰리와 함께 반드시 거론되어야할 인물임에 틀림없다는 점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당연히 찰리 버드 파커와 콜먼 호킨스가 협연을 한 곡도 있다.(그 둘만 같이 작업을 한 것이 아니었고 그 유명한 Lester Young도 그들과 함께 작업을 했더랬다.) 그의 고향은 미주리주의 Saint Joseph이라는 곳이었는데, 우연치 않게-그 이류가 정확히 서술된 문헌을 발견하지 못한 관계로 이렇게 말씀드린다.- 고등학교를 시카고로 진학하게 되었고 당시 스윙 재즈의 본거지나 다름없었던 시카고에서 그는 (그 학교의 이름이 Topeka Highschool이었다 한다.) 학교에서는 물론 학교를 벗어난 지역에서도 자연스럽게 당시 미국 대중음악의 본거지라 할만한 시카고가 그에게 음악적으로 베풀 수 있는 많은 혜택의 수혜자로서 살아갈 수 잇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와중에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921년에 Mamie Snith's JAzzHound이라는 이름의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고 공식적인 그의 음악적 커리어의 시작은 이 밴드와 함께였다 한다. 그 후 호킨스는 이 팀에서 1923년까지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 호킨스는 뉴욕시에 정착하게 되며 이는 그가 본격적으로 직업 연주가의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는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뉴욕에서 Fletcher Henderson's Orchestra이라는 이름의 밴드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는데 그 팀에서 그는 자신의 주 연주악기인 테너 색소폰 외에도 클라리넷과 베이스 색소폰(이 악기는 평생 실물을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까지 연주하며 다중악기주자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특히 1924년부터 그 다음 해까지는 그 유명한 루이 암스트롱의 눈에 쏙 드는 연주로 그의 무대에 항상 서기도 했다.

1934년 Jack Jylton의 밴드에 가입하며 그는 런던으로 무대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1939년까지 거의 쉴사이 없는 유럽 투어를 다니게 되었는데 좀 늦은 편이긴 했지만 이 투어를 통해 드디어 그는 soloist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이 때 그와 함께한 이 때 그와 함께했던 연주자로는( 놀라지 마시길 바란다.) Django Reinhadr와 Benny Carter등이 있는데, 이 세명이 모두 함께 투어에 참가한 해는 1937년이 유일하지만 그 impact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들의 투어를 중요하게 여겨야할 충분한 이유는 이들의 투어가 지속되고 꾸준한 반향을 얻었던 것을 바탕으로 하여 대륙(당연히 유럽 대륙을 말하는 것이겠지요.)과 신대륙과의 Jazz라는 장르의 시차가 상당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유럽 대륙의 스웨덴같은 재즈 강국이 탄생하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콜먼 루이스가 본격적으로 재즈 신에서 자신의 이름을 각인하긴 했어도 그는 스윙 재즈에서부터 (1928년에는) 루이 암스트롱의 "West and Blues"의 녹음에 참여하는 등, 녹음 작업에 있어선 "자신만의 색채가 다소 약한 연주자"였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랬던 그가 본격적인 "A Class"에 속하게 되는 계기는 미국의 재즈 신에서 Bebop이라는 하위 장르가 말 그대로 휠을 잡던 시기가 열리던 바로 그 사건이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다음 게시물에 이어가도록 한다. 줴길... 한번에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길어졌잖아...오늘 링크를 건 Body and soul이라는 곡은 호킨스가 본격적으로 비밥신에서 휠을 잡기 이전 빅밴드 스타일의 동명의 타이틀의 앨범의 타이틀 곡으로서 발매 연도는 1939년이다.

Coleman Hawkins - Body & Soul

2009년 11월 5일 목요일

오랜만에 축구 이야기나 실컷...(월드컵의 역사)






1. 진실게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펴기 옹은 박지성의 부상 때문에 A매치 데이에 대표팀에 합류하는 것을 반대하고 허정무는 데려가겠단ㄷ. 가능성은 두 가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퍼기가 몽니를 부리고 있거나 아니면 허정무가 개새끼거나... 이런 이야기를 주말에 모처럼 모인 녀석들과 하는 도중에 내가 한가지 가능성을 더 제시했다. "워낙 한국 언론의 관심이 높은 박지성을 쓰지 않는 데에 대해 한국 언론에 핑계거리를 만들려는 퍼기 영감의 고도의 전술"일 수 있다고... 그런데 더 큰 문제가 터졌다. 아예 팀에선 경기에 출전도 시키지 못한다고 아쉬워할 정도의 부상을 입은 박주영까지 대표팀에 합류시켰다. 허정무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몇시간 분량은 되나 걸러내고 걸러내고 또 걸러내어 정제된 용어만 사용해서 한 마디만 하겠다. "이봐 허정무씨 평가전은 평가전이야. 평가전 성적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쌓으려 하지 말라구..." 그런데 왜 제목이 진실게임이냐고?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게임이라는 것이 아니라 허정무가 평가전이라는 이름의 게임이 가지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2. Steel Yard을 홈으로 가지고 있는 포항 시민들이 부럽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미친즛이 측면공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공화국 축구 전문가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왜 항상 공화국 측면은 상대적으로 높은 측면 공격의 비중에도 불구하고 측면 공격에서 좋은 장면을 만들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다. 축구는 볼을 제대로 잘 차는 것이 가장 우선되는 종목이르는 점을 공화국의 축구지도자라는 인간들이나 선수들이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측면돌파로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까지 간 다음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하는 것이라고는 아무도 속아주지 않는 몸을 좌우로 움직이는 페인트 동작을 쓰는 윙어들"이 문제다. 축구가 되었건 농구가 되었건 사람이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공격과 수비를 하는 운동(배구는 예외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에서 맨마킹의 기본 중의 기본은 "눈도 다리도 팔도 거짓말을 핯 수 있지만 골반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수비의 제 1원칙이라는 점이다. 제 아무리 유연한 몸과 신의 경지에 이른 개인기를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도 절대 자신이 움직이는 방향과 반대방햐으로 골반을 틀 수는 없다. 노련한 수비수일수록 맨마킹을 하게 되는 경우 절대 상대방의 시선을 응시하지 않는다.

결국 몸을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페잊ㄴ트 동작이라 생각하는 윙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옆으로 계속 움직여 중앙에서 고립되거나 사이드라인 쪽으로 고립되는 것 말고는 없다. 지금은 좀 맛이 갔으나 한 때 세계 최고의 오른쪽 윙어였던 호아킨 산체스나 왼쪽 윙어의 표본이라 불리던 아르옌 로벤이나 현역 최고의 윙어라 불리는 프랑크 리베리 중 그 어느 누구도 페널티 에어리어 북근까지 드리블을 한 뒤 수비를 앞에 세워두고 몸을 좌우로 움직이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내지른다. 당연히 중앙 공격수가 따라오고 만일 그럴 여유가 없다면 스스로 자신이 해결한다. 그런데,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포항 스틸러스의 팬은 절대 아니지만 포항 스틸러스의 플레이를 보면 그냥 군더더기도 아니고 "절대 해서는 안될 동작임에도 불구하고 공화국 축구에선 항상 보는" 앞에서 이야기한 그런 허섭한 짓거리들이 거의 없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팀에 비해 쓸 데 없는 백패스를 거의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횡패스의 비중도 낮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압도적인 ball possesion을 바탕으로 축구를 하는 팀들을 좋아하고 포항은 그런 스타일은 아니지만 군더더기가 없다는 면에서는 오히려 점유율이 높은 축구보다 효울적일 수도 있는 포항의 축구에 대해선 높게 평가한다.

더군다나, 마케도니아 국가대표인 스테보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가 있긴 하지만, 기껏해봤자 공화국 대표팀 멤버가 될 선수로는 황재원이나 김형일 정도가 전부인 팀이 아시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유럽 챔피언스리그가 아니면 축구도 아니라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으나 국가가 나서 수많은 돈을 뿌려가며 선수들을 사재기해대는 중동국가나 구소련에서 독립한 국가의"거의 국영인" 클럽들이 돈지라를 하면서도 안아보지 못한 ACL 우승 트로피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단히 싼 가격에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팀장악력을 가진 유능한 감독"을 붙잡아둘 수도 있는 기회를 이번 ACL 우승으로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다. 파리아스를 단기간에 실적이 나올 수 있는 팀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장기적으로 그를 붙잡아두고-꼭 국가대표팀 감독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파리아스 자신이 국가대표팀을 원한다 했으니 그 것도 나쁘지 않다.- 많은 부분의 재량권을 그에게 준다면 공화국에서 아르헨티나의 페케르만과 같은 감독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페케르만은 비록 2006년 월드컵의 실패로 모양이 좀 빠지는 수모를 겪었으나 그만큼 어린 선수들을 데리고 전술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구사하는 축구를 할 수 있는 감독은 거의 없다고 본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길어졌으나 오랜만에 축구도시 포항과 그들의 스틸러스가 내게 준 감격은 빌어먹을 리버풀FC의 부진을 잠재울 수 있게 해주어 참으로 고마웠다는 말밖에 다른 할 말이 없었다.

3. 리버풀은 끝까지 나를 우울하게 만들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선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최소한 올 시즌엔 답이 안보인다. 사비 알론소의 공백이 이 정도일 줄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누구의 말처럼 아넬카를 왜 데리고 오지 못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나마 이제 아퀼라니가 리그에서의 데뷔를 앞두고 있다하니 그에 대해 기대를 걸어볼 따름이다. 사실 3번은 첼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간의 경기를 보고 왜 안첼로티나 퍼기 옹이 세계적 감독인가라는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그들의 승승장구에 대해 이야기하기엔 리버풀의 팬이라는 것이 너무 약이 올라 이야기하기 싫어졌다.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보르도의 선전 정도일 것이다. 매번 올해는... 혹시 올해는... 하며 리버풀의 우승을 기원하던 것도 이젠 지친다는 말 밖에는... 빌어먹을 리버풀! 왜 베니테스 아저씨는 스페인 출신이 잉글랜드 감독들보다 더 뻥축구를 해대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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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을 쓰고 있는 동안에 독일의 국가대표 골리였던 얀케의 자살소식이 들여왔다. 그리고 며칠 전, 이 광기 형아의 아들이 저세상으로 갔단다. 얀케 역시 자신의 딸을 잃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얀케가 없어도 지구상에서 축구공은 계속 굴러가겠지만 그는 정말 훌륭한 골리였다. 그의 명복을 빈다.

아저씨가 살아있었다면...(Soundless Music)








1984년 4월 2일(한국시간) 그때만 하더라도 압도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FM음악방송의 팝음악 전문 프로그램들은 말 그대로 난리도 아니었다.(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 도대체 이런 비논리적이고 비언어적인 표현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많은 사람들-심지어 나조차도-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난리가 아니라면 별 일 아닌 일이란 이야기인데...) 물론 존이나 조지의 사망소식처럼 전 세계를 들끓게했던 임팩트를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인류는 자신의 필드에선 압도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있던 한 위대한 작곡가이며 타악기와 건반악기와 심지어는 클라리넷까지 연주할 수 있던 다중 악기 연주자이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최고의 보컬리스트를 한 명 잃었다. 그 것도 병사가 아닌 대단히 불행한 사건으로 말이다.(그 것이 뭔지는 각자 알아서들 찾아보시기 바란다.) 사람들은 그가 살아있을 때 그를 Marvin Gaye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더랬다. 미국 시간으로 1939년 4월 2일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태어나 45세 생일을 하루 앞둔 1984년 4월 1일 로스 앤젤리스에서 세상을 떠난 그 사람이 바로 마빈 게이라는 말이다.

누구나 Motown Sound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하면 슈프림스나 잭슨 파이브를 떠올리지만 개인적인 견해로는 Motown Sound의 완성은, 그리고 가장 높은 음악적 완성도 역시, Marvin Gaye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본다. 물론 그의 별칭 역시 "Prince of Motown"이거나 "Prince of soul"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마빈의 개인적인 천재성 못지않게 모타운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에 "화룡정점"(용은 불에 구워 먹어야 맛있다는 이야기)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잭슨 파이브나 잭슨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스타성에 비해 아직 풋내기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했고 다이애나 로스 & 더 슈프림스는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다이애나 로스가 오리지널 멤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팀의 이름 앞에 내세울 정도로 지나치게 다이애나 아줌마의 스타성에 의존하는 팀이었고 전혀 이견이 없는 천재 스티비 원더는 "대단히 재기발랄하고 천재성이 넘치나 원숙한 음악을 했다"고 보기엔 무언가 조금 모자란 점-음악적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경륜의 문제라 하는 것이 좋겠군요-이 있었다는 생각이다.

마빈 아저씨는 곡을 쓰는 능력에서 다중악기 연주자로의 능력은 물론 보컬리스트로서도 당대 최고의 인물 중 하나라는 데에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그가 돋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우월한 DNA를 이용해서 듣는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듯한 힘" 보다는 폭발할 듯, 폭발할 듯하다 결국엔 특정 지점에선 선을 넘지않는 "대단히 지적이고 영악한 보컬리스트"라는 점 때문이라 할 것이다. 아마 소울 보컬의 전범(proto type)이 어떤 것이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열 명중 여섯 명 이상의 전문가들은 그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소울 보컬의 선생님"으로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만큼 그의 보컬은 천부적인 보컬리스트로서의 재능을 갖추었다기 보단 천재적인 곡해석력을 가지고 있는 보컬리스트라는 평을 받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아지막 문단에서 그 빌어먹을 1000곡도 아닌 다른 카테고리에 이 사람의 "Sexual Healing"을 소개하려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니 딴 곳으로 채널 돌리지 마시라!(채널은 무슨 얼어죽을 채널이란 말인가? 그래서 애들 방에선 텔레비전을 없애야 한다.)

사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흑인음악을 진지하게 들어야겠다는 동기의식을 부여했던 곡이 바로 이 곡이다. 중학생도 안된 놈이 그 해 밞매되었던 마빈 아저씨의 이 곡을 듣고 "우리와는 도저히 정서도 안맞고 따라부를 능력도 낭되는 흑인음악"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감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으나 그렇기 때문에 평생 들을 수 있는 음악이 흑인 음악"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 것이 바로 이 곡이다. 물론 이 곡이 마빈의 곡 중에서 최고라든지 흑인음악을 대표할만한 유일한 곡이라든지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실시간으로 들었던-발매되던 그 해에 접했던- 소울 곡이며 그리고 그 감동의 동시성을 근 30년이 다 되어 돌이켜보아도 "그 때 마빈 아저씨의 이 곡을 듣지 못했다면 T-Rex이라는 인간의 반은 충분히 날아가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마빈 아저씨가 살아있었다면-올해 만으로 70이 되셨겠지만- 와견 흑인음악의 판도가 지금과 유사했을까?-지금의 이 바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이런 대가가 죽지 않고 있었다면...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마빈 아저씨의 이야기는 그 빌어먹을 1000곡 어쩌고 하는 게시물에서 더 자세히 하게 될 것이다.


Sexual Healing-Marvin Gay


위의 곡은 Extended Version입니다.

2009년 11월 4일 수요일

20091105(개소리들)








1. 레비 스트로스 할배를 위한 추도
11월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은 탓에 101세가 아니신 100세를 일기로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단 힌반더 선생을 만나뵌 적은 없으나 일찍이 20대 초반의 시절에 처음 접한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선생에게 내가 진 빚을 이야기하자면 족히 20초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 대가리의 용량을 생각했을 때 20초 동안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당근 체력이 소진하고도 남을만한 시간이다. 그만큼 그에게서 받은 영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의 저서는 내가 칼 맑스 선생의 저서를 접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대퇴부를 강타하는 심하게 강타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T-Rex 좆같은 새끼"라 말씀하실 분들이 계시겠지만 분명히 밝혀야만 할 것은 맑스의 주장은 사실 지나치게 유럽중심주의적인 것이고 항상 문제가 되는 이른바 "오리엔털리즘"이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

맑스 선생은 유럽 중심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게 강했던 나머지 아시아에 대한 "전통적 유럽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신 부분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단적으로 "아시아적 소유 형태"라 그가 이야기했던 것을 "아시아적"이라 일반화시키기엔 무리가 있었고 맑스 이후의 수많은 맑시스트들 역시 유럽중심주의 혹은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혹은 이성의 절대적 우의에 대한 암묵적 동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맑스 이후의 최고의 "맑스주의 역사학자"라는 평가를 받는 에릭 홉스봄 선생의 글들을 "행간을 아주 자세하게 디리 파지 않으면" 자칫 잘못하다가는 서구의 아시아에 대한 지배를 정면으로 반박할 논리가 빈약해진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사실 이런 맑스주의의 출발점과 무관하다고 하긴 힘들 것이다. 그렇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심지어 유럽의 좌파들도 서구인들의 아시아 침탈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할 수 없는 어정쩡한 포지셔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아쉽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해도 그리 과한 이야기는 아니라 할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차치하고 레비스트로스가 내게 갖는 의미는 이른비 식민지 팽창의 시기에 왜 인류학이 발달할 수 있었으며 서구의 국가들이 왜 그리도 많은 의사들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보냈으며 결국 그런 "선행(?)"의 종착역이 식민지 지배였는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오지 탐험가나 인류학자라는 인간들이 아프리카나 아시아 국가들에 들어가 "아! 씨발 여긴 존자 미개하고 야만적이에여 교육과 의사가 필요해요! 참! 얘네들은 존나 미신을 숭배하니 선교사도 필요해요! 그리고 이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군대도 있어야 해여!" 니미! 역사시대 이전의 역사를 연구한다는 미명아래 이따위 작당을 하고 있었으니 레비 스트로스 할아버지의 "야 이 좆같은 새끼들아! 늬들은 밥처먹을 때 포크와 나이프를 쓰지? 브라질의 아마존에 사는 사람들은 손을 써서 밥을 먹거든? 너희들의 포크와 나이프가 밥처먹는데 쓰는 도구라면 이 사람들에게 손이 바로 그거야! 그러니 미개니 야만이니 저급이니 고급이니 하는 따위의 이야기를 하려거든 네 주둥이를 꿰메버리겠어"라는 말씀이 대퇴부를 강하게 때리지 않는가?

레비 스트로스 할배를 위시하여 구조주의의 수퍼스타들이라 불릴만한 롤랑 바르트, 미쉘 푸코, 루이 알뛰세 등이 모두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드디어 레비 스트로스 할아버지도 가셨다. 아마도 이제 더 이상 구조주의가 서구의 지성계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몰고오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이들을 "구조주의의 수퍼스타"라 칭한다 하더라도 레비 스트로스 할아버지만큼의 폭발력을 지닌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레비 스트로스 할아버지만큼 구조주의라는 것을 통해 바보들의 뒤통수를 쳤던 일도 없었다 할 것이다. 맹목적으로 개신교에 광분하며 "미국이 없었으면 우리는 좆됐을겨"라고 떠드는 주둥아리나 "일본이 없었으면 근대화는 불가능했고 박정희 장군이 없었으면 우리는 아직도 쫄쫄 꿂고 있을겨.."라고 처나불대는 주둥아리에 아마존의 식인 물고기인 피라니를 몇마리씩 처넣어주고 싶다. 지들이 그걸 우적우적 씹어먹든지 피라니가 그 색히들을 처먹든지 둘 중 하나의 결과는 있으리라. 니미...

2. 공화국은 이미 토건국가였다 수십년 전부터...
올해도 어김없이 연말이 오고 이미 9우러부터 서울 곳곳의 아스팔트를 까대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느 한 구(區)도 아스팔트나 블럭을 까지 않은 곳이 없다. 니미 이 병신같은 공화국은 일년에 반은 눈이 오는 공화국보다 훨씬 더 높은 위도의 국가들도 하지 않는 "매년 아스팔트 교체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것도 지방자치가 부활되기 훨씬 전부터 말이다.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아저씨들이 토건국가 운운하며 4대강 어쩌고 하는 사업을 비판하기 훨씬 이전부터 공화국은 빌어먹을 놈의 토건국가였다는 말이다. 아스팔트랄 까고 수도관이나 하수도관을 교체하는 작업을 하다가 사람들이 다치고 심지어 죽는 일이 생겨도 매년 "내구연한 1년"의 보도블럭은 계속 생산되고 "유통기한 1년"의 아스팔트 공장들은 신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다 경제통계에서 GDP라는 이름으로 잡히는 항목이란 말이다. 니미럴... 긴소리 하기 귀찮다. 대운하나 4대강을 봉쇄하려면 이런 저질스런 짓부터 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삽질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새끼들의 대가리를 몽둥이로 까버릴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오랜만에 올리니 길게 쓰기도 귀찮다.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지오반니 가브리엘리 아저씨께도 죄송하다.

2009년 10월 26일 월요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Soundless Music)

토요일 경향신문에 외국인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연예활동을 하고있는 줄리앤 강과 에바 포피엘의 대담이 기사로 실렸더랬다. 내가 그들의 팬이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다지 자세히 볼 생각도 없었던 기사인데 기사를 읽다가 뒤통수를 한 대 강하게 맞은 충격을 받은 바-아마 지난 토요일이었지?- 잠깐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박정희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의 면상이 떠올라 구역질이 나와 다섯 문단이나 썼던 게시물을 삭제해버렸다. 종종 그런다. 이해하지 않으셔도 된다.) 줄리앤 강에게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냐는 질문을 했던가? 아무튼 그런 질문에 "노래방에 가게 되면 MC몽의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살짝 눈을 의심하고 그러려나보다 하려던 차에 그가 그에 대한 이유를 이야기했던 것 역시 실려있었는데 "미국 스타일 카피 안하고 '완전'한국적인 힙합"이기 때문에 그의 노래를 즐겨 부른단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 2분 정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해머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으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은 느낌이었다.(해머로 머리를 맞아본 적이 없으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집집마다 인터넷 전용선이 깔리기 훨씬 이전인 90년대 말 하이텔이나 천리안 혹은 나우누리의 대중음악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던 이야기들 중 하나가 당시 휠을 잡던 드렁큰 타이거나 지누션 등등이 과연 "정통힙합"을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지금은 더 대중화 되었겠지만 당시에도 힙합을 듣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관계로 이런저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이 많았으나 결론은 "그들의 음악은 정통힙합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고로 좀 구리다."라는 쪽으로 모아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장르에 관심이 있긴 하지만 당시에도 어줍지 않게 힙합이라는 것을 조금은 듣던 시기였고 그런 논쟁이 있기 수년 전에 노터리어스 비아이쥐가 투 팍 사커의 살해를 사주했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그리고 그 뒤에 노터리어스 비아이쥐 역시 총에 맞아 죽은 일이 있던 관계로 서구의 대중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힙합 신을 주목하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지만 아무튼 이런 이야기를 하려 한 이유는 3대 통신사의 대중음악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던 이야기가 이른바 이스트 코스트 힙합이나 웨스트 코스트 힙합 등의 "정통힙합"이란 무엇이며 한국의 인기 힙합 팀들이 정통인가 아닌가?를 따지며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며 한국의 힙합이 미국의 그 것을 되도록이면 가깝게 따라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격전장이 PC 통신이었다는 말씀...

다른 장르도 그렇지만 유독 힙합이란 장르에 있어서는 "정통"이라는 수사에 대한 집착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정말X300 나를 당황하게 했던 것은 (물론 줄리앤 강이 음악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의 잎에서 "미국 스타일을 카피했"이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돌리지 말고 이야기하자면 "그간 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그런 류의 논쟁들이 미국인들이 봤을 때 오~ 우리처럼 하는군!"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내가 절대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여~" 내지는 "우리 것이 최고여~"라는 류의 주둥아리 놀림을 해댈 사람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시리라 생각한다. 문제는, "음악의 완성도나 작품성이라는 단어"가 장르의 전범게 일치해야만 하는가?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던져봐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비단 힙합이라는 장르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닐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힙합이란 장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 자신도 대단히 찔리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 "머리를 해머로 맞으면 이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처죽기 전에 안들으면 넌 병신~ 이라는 컨셉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과연 "내가 죽은 자식의 몸을 만지며 그를 살리려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병신 색히"는 아닌가?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게 된 것이다. "왜그래? 넌 본디 쓰레기이고 양아치이고 병신색히잖아?"라는 이야기를 한다면 맞는 말이기는 하나 지금은 말장난 하자는 것이므로 가만있지 않겠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할 문제다. 음악이 먼저인가? 장르가 먼저인가? 이런 문제는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이런 문제는 유치하기 짝이없는 문제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인가?-이런 염병할 내가 무슨 유인촌인가? 이따위 생각을 하게...-외국인의 기준으로 한국의 대중음악을 판단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가지는가? 설마 이런 문제일까? 이런 문제들은 "한국문화의 세계화" 따위의 개소리를 짖어대는 바보들의 질문이다. 물론 나도 바보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자부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솔직히 무엇엔가 얻어맞은 느낌이 잇었으나 그 근본이 나에게 있는 것도 알았으나 정확한 실체를 몰랐다. 그러다가 머리를 또 한 번 때리는 것이 있었다.

아! 잘못하다간 내가 그렇게도 욕해대던 꼰대들의 허섭한 짓거리들을 답습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바로 그 점이었다. 물론 Classic이라 불릴 클래스의 작품들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류는 지금은 형태만 남아있거나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악기들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 것이 발전인지 아닌지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그런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소용없을 것이다. 음악은 계속 변하는 것이고 항상 스스로 주장하듯 "잘만든 음악은 좋은 음악이고 그렇지 않은 음악은 쓰레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 개인적 신념이지만, 그러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항상 새로운 음악을 듣고 현재의 조류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 학습을 꾸준히 실행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도 꼰대나 쓰레기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음악들도 좋고 장르의 기본정신에 충실한 음악도 좋다. 하지만 대중음악이라는 장르의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 하나가 "대중"이며 그 단어 자체에 대단히 가변적인 의미가 내표되어 있으며 그런 가변적이고 다의적인 추상들을 쫓아간다는 것은 피상적으로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결론? 뭐 항상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지만 난 아직 멀었고 어떤 음악이 되었건 평생 듣지 않으면 nurd이 되고 말 것이다. 빌어먹을...

2009년 10월 22일 목요일

아! 씨발 손발이 \오글거려 못해먹겠네 빌어먹을(개소리들)

1. 지난 토요일 벼르고 별러서 <스타 골든벨>을 시청했다. 당연히 김제동의 막방이었기 때문이고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할까라는 것이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내가 여기서 시청 소감을 주루룩 써제낀다면 웃기는 일이 될 것이므로 그에 대한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물론 한 때 지금의 유재석이나 강호동의 위치에 근접했던 김제동이 지금은 주춤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제동의 후임이라는 사람을 보면 김제동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경쟁력 때문에 KBS에서 김제동을 자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제동의 후임인 J씨는 도대체 웃기지도 않고 감동도 주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오래 버틸 수 있는가?라는 존경심을 가지기에 충분한 인물 아니던가? 게다가 과거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다소간의 문제가 있어 프로그램에서 빠졌던 사람 아니던가? 후임자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역할은 주로 잘 나가던 프로그램이 힘이 빠지게 되고 마침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특급 MC의 계약이 끝나게 되었을 경우 설거지를 하던 것 아니덨던가? S본부의 모 프로그램이 그랬다. 아무튼... 그 프로그램의 경쟁력은 전혀 향상되지 않을 것이다. 아! 불쌍한 이채영 눈화... 이젠 그 눈화를 보기 위해 <스타 골든벨>을 가끔 보던 재미도 업어졌구나...

2. 김제동의 막방을 시청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 심지어는 노태우나 김영삼이 대통령을 할 때도 죽어라 코미디의 소재가 되던 "현직 대통령의 성대모사"를 소재로 하는 코미디들을 거의 볼 수 없다는 점에 생각이 이르게 되었다. 즉, 우리의 무오류를 자랑하시는 대통령 각하가 집권을 하시면서 "아!이제 각하의 성대모사를 바탕으로 내가 좀 치고 올라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불철주야 각하의 성대모사를 연습했던 개그맨들은 졸지에 손가락을 빨고 있엤구나... 흑흑흑... 여기에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확실한 상황! "아! 이 정권은 김제동뿐 아니라 수많은 개그맨들의 밥벌이를 막아서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지금은 없어진 <폭소클럽>에서 무오류, 무결점 각하의 성대모사를 하시던 노정렬 형님은 작년 촛불 집회 때 현장에서 사회를 보시더만... 물론 그 일은 돈이 되진 않을 것이다. 물론 무결점 무오류 각하의 성대모사를 하는 개그를 보는 자체가 짜증일 수 있겠으나 이미 김제동이 잘리기 이전, 개그의 소재 자체가 굉장히 제한된 채로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3. 이러던 와중에 절대 오류가 없으시며 실수도 없으신 각하가 속해계신 당의 진 뭐시기라는 의원님께서 김구라를 지칭하여 "저런 분이 방송에 생존해있다는 것은 문제"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언제나 그랬듯 욕 좀 하겠다. 니미! 언제부터 빌어먹을 집권당 국회의원이라는 새끼가 딴따라들 입까지 단속하고 지랄이었단 말인가? 김제동이 잘린 것은 김제동이 경쟁력이 없어 프로그램의 경쟁력을 제고시키기 위한 차원이었고 시장에서 끊임없이 수요가 있어 각 방송사에서 필요로하는 김구라에겐 막말이니 어쩌니 하는 개소리를 해가면서 방송에서 나가야 한다니... 아마 김구라가 인터넷 방송을 하던 당시 무오류 무결점의 각하를 "함바집에서 밥이나 처먹던 노가다 십장"이라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방송에 대해 특정 인물이 나가야 하니 들어와야 하니 하는 것은 근대 이후의 국가에서 그 것도 자유선거에 의해 국가의 권력이 정당성을 갖는 이 빌어먹을 공화국의 국회의원의 주둥아리에서 처나올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새끼가 "이미 평정했다"고 했던 네이버를 떠나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4. 굳이 파리의 1968년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 것"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수없이 한 이야기라 지치는 이야기긴 하지만 애초에 법이란 것이 만들어진 이유, 혹은 법의 정신이란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제한하기 위함이었으며 법이 인민들의 일상의 모든 부분까지 제약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일상의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그 것은 이미 근대적 법 제정의 원리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개인과 국가의 문제가 그렇다면 개인과 개인의 문제 역시 심각한 폭력이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굴욕적인 일들을 저항도 없이 감내할 것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라면 되도록이면 법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법이라는 것이 매개된다면 둘의 인간적인 관계가 다시 회복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와질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이건 개인이건간에 "지가 알아서 할 일만 알아서 하는 것"이 명랑사회를 앞당길 수 있는 첩경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는 점이다. 내가 김제동의 팬이거나 김구라의 팬이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도 용납할 수 없는 이 빌어먹을 공화국에서 "사상의 자유"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빌어먹을 새끼들에게 욕이라도 한 마디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참으로 빌어먹을 새끼들이다.

2009년 10월 12일 월요일

아님 말고 1000곡(104)







104. Jazzy Sensation Etc.-DJ Afrika Bambaataa-

New York City, Bronx, Rapping, Scratching, Graffiti 이 단어들을 모두 합쳐놓으면 하나의 새로운 개념의 단어가 만들어진다. Hip Hop Culture! 이젠 주로 음악의 장르로 이해되는 단어지만 본디 힙합은 앞서 열거한 단어들을 바탕으로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힙합 문화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나, 굳이 그 연원을 따지자면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1930년대 뉴욕 할렘가의 6번 구역에 자리잡고 살기 시작한 서인도 제도 출신의 사람들이 형성했던 문화로까지 Rewind시켜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서인도 제도의 여러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많은 영향을 행사한 것은 (당신들의 짐작대로) 자메이카 출신의 이민자들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열거한 단어들 못지않게 힙합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 있거 중요한-당신들이 절대 잊어서는 안될-이름이 하나 있다. Afrika BAmbaaTaa라는 이름을 쓰는 DJ이다. 사우스 브롱스의 유명 DJ였던 이 사람은 지금은 힙합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라 여겨지는 MCing, DJing을 처음으로 체계화시킨 인물이며 Hip-Hop Music이라 부를 수 있는 대중음악의 장르의 내적 요인들의 "아버지"라 할만한 인물이다.

많은 히피-하파들이 그랬지만 아프리카 밤바타의 전직은 Street Gang이었다고 한다.(이런 사실이 그에게 자랑이 되진 않겠지만 확실히 특별한 경력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이야기지?) 무책임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난 그의 본명을 모른다. 다만, 그가 Afrika Bambaataa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일찌기 청년기에 아프리카 여행을 하고 난 후였다고 한다.(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총쏴서 번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이라... 이 것은 여담인데 그가 조직원으로 일하던 사우스 브롱스의 갱단은 그의 공로는 아니었겠지만 그가 갱응로 활동하던 시기에 사우스 브롱스 지역의 가장 큰 조직이 되었고 지금도 존재하는 조직이라 한다. 그러나, 혹시라도 당신이 디제이로서의 그를 존경하여 그의 인생의 여정을 따르겠다는 생각을 하여 그 조직에 들어간다면 난 절대적으로 반대다. 디제잉을 배우기도 전에 당신의 몸에 수백개의 바람구멍이 생기고 오동나무 코트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 그 여향을 통해 (그와의 인터뷰애 의하면) 자신의 세계관(Worldview)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아프리카 여행을 하던 중 Zulu족의 지역을 지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부터 자신이 아프리카계 이민이라는 것에 대해 가지고 있더너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칠 수 잇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를 통해 한가지 유추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가설은 "그렇다면 아프리카 밤바타(사실 원어민들의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려면 뱀배~터 정도일 것이다.)의 음악에 줄루족의 음악적 요소들이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닌가?"일텐데, 사실 두말하면 입이 아픈 이야기겠지만 아프리카 밤바타가 음악을 하게 된 것이나 그의 음악에 줄루족의 음악이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하나마나한 이야기일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 이야기 자체를 꺼냈겠는가?) 일단 밤바타는 줄루족의 지역을 여행한 후 스스로 자신의 경험에 대한 에세이를 작성하여 에세이 컨테스트에 공모하였고 그리고 자신의 에세이가 그 공모에서 수상을 함으로 "문화사업(?)" 분야에서의 첫번째 커리어를 만들게 된다. 이런 일이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밤배타를(어느새 내 표기도 바뀌었군) 제도권에 발을 들이게 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더랬다. 할렘의 흑인들이 제도권에 안착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농구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사실 래퍼가 되거나 히피 하파가 되는 것은 "반드시 제도권에 안착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어쨌거나 뱀배타는 자신에게 힘쓰고 총 쏘는 것 외에 다른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아프리카 밤배터를 이야기할 때 있어(어느새 자연스럽게 표기를 바꾼 것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Universial Zulu Nation이라는 이름의 International Hip hop awareness group이다. 아프리카 뱀배터가 아프리카 여향을 마치고 돌아온 후 그의 타고난 리더십을 이용하여 과거 그의 동료였던 갱들을 모아 문화운동을 지역사회에서 실천할 그룹을 조직하게 되었는데 이 것이 바로 아프리카 뱀배스터를 2007년 RHOF에 헌액되는 클래스의 뮤지션으로 만들게한 Universial Zulu Nation의 시작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줄루 네이션의 브랜치들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나라로는 일본, 영국, 호주, 프랑스 그리고 공화국이 꼽힌다. 줄루 네이션이 추구하는 이상은 국적과 피부색, 그 외의 인간들을 인위적으로 구별하는 모든 법과 제도 혹은 관습들에 상관없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고 아프리카 뱀배스터가 믿었던 것은 그 것이 자신이 경험했던 줄루족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힙합 문화 운동에 의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의 가설이었다. 그래서 그게 성공했냐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겨우 30년된 movement으로 세상이 변화할 수 있다면 어느 누군들 세계 정복이 불가능하겠는가? 왜 대답이 부족한가?

근 30년간 다른 장르가 발전한 것에 비해 힙합이라는 장르가 워낙 눈코 뜰 사이도 없이 발전해왔기 때문에 지금 아프리카 뱀배터의 곡들을 들으면 막말로 좀 구리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점들과 관계없이 이 인물은 전 세계의 모든 히피 하파들에 의해 힙합의 아버지 혹은 힙합의 매스터로 불리는 인물이다. 본디 이 연속 게시물의 목표가 "최고의 곡"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에 관계없이 음악을 들으려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키보드질을 하는 이었고 대부분은 초보자들보다는 중 고급의 감상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이해해 주신다면 이 사람의 곡들을 왜 오늘 소개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인물들을 소개할 때는 이 사람의 음악적 완성도 보다는 이 이런 인물들이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천착하게 된다 할 것이다. 음악을 듣느라 귀지 좀 후볐다는 누나, 형들, 클럽에 좀 드나들었다는 누나 형들은 이 사람이 힙합이라는 장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금방 이해하시리라 본다.

Jazzy Sensation

Planet Rock

Feel the vibe(설마 이 곡을 모르실 분들이?)

2009년 10월 5일 월요일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또 양비론?(Soundless Music)

1. 대한민국 음악상의 위기
오늘 경향신문의 "경향마당"에 "위기에 처한 한국대중음악상"이라는 기고문이 실린 것을 보고 어줍잖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오늘도 키보드를 두드리게 되었다. 결국 다 읽어보시면 알게되시겠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일종의 양비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절대 양시론은 될 수 없음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신문의 기고문을 읽어보면 요는 "가장 의미가 있는 대중음악 상"에 대해 관계 당국의 지원이 끊긴 것이 정부의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당연하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이 끊긴 것은 당연히 이해하지 못할 일이며 이해해서도 안될 일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자!"라고 이야기하면 그 말을 당연히 "뒤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공화국 정부를 비판하는 것 자체로 그리고 그런 공화국의 정책에 대한 비판만으로 "한국대중음악상"의 난맥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이야기이다.

2. 두 가지 문제점
기고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화국의 "그래미"나 "주노"를 기대하면서 당국에선 지원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주최측 역시 그래미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게 될 것을 목표로 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주최측에 진보적인 인사들" 때문에 지원이 끊겼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물론 그런 가능성이 다분하다. 지금 이 빌어먹을 공화국에선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양측 모두가 "한국 대중음악상"이 가지는 태생적 한계에 대해선 근본적인 고민이 부족한 듯 보인다. 양측 모두 "대한민국 대중음악상"이 가지는 한계가 "이 상을 주는 측" 그러니까 "향사를 누가 주관하는가?"가 이 상이 가지고 있는 난맥상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자발적으로 형성된 공신력을 담보할 수 있는 업계 자체의 기구"가 부재하다는 지점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양쪽 모두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다.

일단 이 이야기부터 하자. "그래미가 공정하다고?" "No!" 그래미는 절대 공정하지 않다. 과거에도 여러번 지적한 점이지만 그래미는 이른바 세계 3대 영화제가 자신들의 취향을 가지고 있듯, 그래미의 취향이 있다. 주요 부분의 시상에 있어 그래미의 편파성에 대한 논란은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수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래미가 여지껏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래미를 주관하는 RIAA"가 단어의 의미 그대로 "전미 음반 산업 협회"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음반산왑과 관계있는 많은 사람들 중 일정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회원으로 하며 그들에게 투표권을 주어 그들의 투표로 수상자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행사가 진행되며 다소의 편파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미국 내에서 가장 큰 행사의 위치를 지키고 있고 대부분이 어쩔 수 없이 결과에 승복하는 이유는 "업계 관계자의 선택"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공화국엔 이런 조직 자체가 없고 만일 있다 하더라도 이익단체로 존재한다는 것이 큰 문제거리인 것이다.

상을 주최하는 측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 "공화국의 음반 구입자들의 10%는 듣도 보도 못하거나 팀이나 솔로 가수의 이름 정도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의 거의 대부분을 몰아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상의 수상자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생기리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일 것이다. 이 문제 역시 이 상의 수상자를 결정하는 가장 큰 주체가 평론가 집단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대중음악에 대한 상은 "우매한 대중들을 계몽하는 도구"가 되어선 안된다. "거의 반은 노골적으로" 대중들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며 그들을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상에 대해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길 바라는 것 자체가 바보들의 가장 큰 특기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보일수록 자신들의 "계몽적 훈계"에 훈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바보들만큼 바보는 아니다. 이 문제 역시 음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비영리적 조직"이 제대로 조직되어 있지 않은 데세 미롯한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다.

3. 사실 바람직한 것은...
지금 공화국의 문제점 중 하나는 메이저 제작사들의 음악이 단조로운 것 못지 않게 비메이저 제작사들의 음악 역시 다양하지 않다는 점이다. 메이저 제작사들이 내놓는 아이돌들의 음악이 다양하지 않은 만큼 인디 레이블들의 음악 역시 그다지 다양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식 용어를 쓰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인디 레이블에 소속된 팀들에겐-특히 여성 멤버가 리드보컬을 맡고 있는 팀들의 경우엔 더- 어쩔 수 없는 그들만의 "조"가 있다. punk나 neo punk로 대표되는 modern rock이나 hip hop은 이른바 인디 신들의 주류이며 인디 레이블에서 출반되는 음반들 역시 특정한 장르음악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다양하다는 수사를 사용하기엔 무언가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 것만으로도 밤을 새울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현실이 그렇다는 것만을 일단 이야기해두고자 한다.

사실 "대한민국 대중음악상"에 대한 기고문에서 기고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그래미"에서도 거의 대부분 CBS SONY, UNIVERSAL, WARNER BROS.등의 메이저 음반사들이 직접 배급한 음반들이거나 메이저 음반사들의 자회사들이 배급을 한 음반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다양성"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음악산업에 대한 지배"에도 불구하고 "음악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자본"이 다양한 음악에 투팁될 여건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 공화국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가장 크게 고민을 해야할 부분은 다양한 음악이 대량유통방식으로도 대중들에게 접근가능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전제가 되어야 궁극적으로 음악의 다양성이라는 것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었고 지금도 그러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문제가 간단하게 몇 줄의 문장으로 답을 제시할 것이라면 고삐리 때 다른 놈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사피우는 데에 돈을 쓰는 대신 라이선스 음반들을 사모으고 FM 방송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 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내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메이저 신에서 다양한 음악의 경합이 가능한 조건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이다.

2009년 10월 2일 금요일

몇 가지 신보들에 대한 잡소리들(Soundless Music)







1. 청력이 다해가고 있긴 한 것같다.
무려 4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는 비틀스 전 음반의 디지털 리매스터 버전... 디지팩으로 된 14개의 앨범이 한 데 묶여있는 세트를 사는 것은 경제적 문제로 당연히 실패했고 어느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Abby Road"의 디지털 리매스터링 버전을 손에 넣게 되었고 잠에 취한 상태에서 Paster Maters1, 2 을 인터넷으로 구매(아직 도착하진 않았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아직 큰 시스템을 통해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디지털 리매스터 판에 대해 다른 사람들처럼 "놀라운 사운드"라든지 "요즘 들어도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사운드"(물론 이 이야기는 내가 20년도 더 전부터 주장하던 이야기기 때문에 이런 호들갑을 떠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내지는 심지어 단세포식의 반응인 "이거 쥑이네~" 정도의 반응도 나올 수 없었다는 것! 익명의 독지가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아직까지 새 음반으로 뿅가는 경험"을 하진 못했다. 아마 꺼져가는 내 오른쪽 귀의 청력 문제일 수도 있겠지?

비틀스의 앨범들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tip을 한가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존의 똥고집인지 폴의 똥고집인지 아니면 조지 마틴의 근거없는 확신인지는 몰라도 비틀스의 레코딩들은 동시대의 다른 아티스트들의 레코딩과 비교해 보더라도 "좌우 스테레오 분리가 과하다." 다른 이야기로 하자면 왼쪽 스피커에서 기타 소리가 들린다면 왼쪽 스피커로는 기타소리가 거의 안들리고 베이스의 소리는 그 반대고... 이런 식이다. 요즘같이 이어폰으로 음악을 많이 듣는 세대들에겐 답답할 수 있을 일일 것이다. 이런 현상이 특히 심한 것은 "Elenor Rigby"인데, 당시 보통 비틀스가 작업하던 4채널 방싱의 녹음에서 폴의 보컬이 하나의 채널, 현악단-오케스트레이션이라고 해두자-이 한 채널, 그리고 또 다른 채널을 하나 사용하고 나머지 한 채널은 비워두었다. 당신이 혹시 과거 아날로그 버전의 "리볼버" 앨범을 듣다가 이어폰의 판 쪽이 빠지게 되면 오케스트레이션을 놓치거나 폴의 보컬을 놓칠 것이다. 이번 디지털 리매스터 판에선 이런 문제들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지를 비교해보는 것이 "좋다, 나쁘다"라는 인상주의적 평가를 벗어나 조금 더 건강한 감상을 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 할 것이다.

2. Back to the Blueprint
흔히들 이야기한다. 영화계 최고의 영향력있는 커플은 "브랜젤리나 커플"이라고... 그들이 누군지 또 이야기하는 것은 입아픈 일이므로 생략! 그렇다면 Pop계의 최고 파워 커플은? 두 말하면 입 아프다. Jaay-Z와 비욘세 놀스! 내가 Jay-Z 이 친구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하더라도 신인급이었는데 이젠 힙합계에서 "휠을 잡으시는 분"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엠미넴은 정말 "엄처나게 오래갈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제이-지는 엠미넴만큼 오래갈 것으로 보는 사람은 드물었더랬다.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아무튼 제이-지가 이번에 새 앨범을 가지고 돌아와 그의 팬들의 괄약근을 쉴 사이 없이 자극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 것도 히피 하퍼들이 꼽는 힙합계 최고의 명반들 중 하나라 꼽히는 그 자신의 Blueprint, Blueprint2에 이은 Blueprint3이라는 타이틀로 말이다.

벌써 이 앨범의 타이틀 트랙 격인 D.O.A.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고 한다. 요게 무슨 약자냐고? Death Of Auto-tine의 약자인데, 요즘 내가 놀라는 것은 이 오토튠이라는 장비의 기능이 바뀐건지 아니면 무슨 오토튠을 능가하는 더 새로운 장비가 나왔는지 과거 쓰이던 용도와는 다른 용도로 오토 튠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토 튠은 본디 스튜디오에서 보컬 트랙을 녹음할 때 한음 정도까지 음정이 틀리는 것을 잡아주는 기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기계가 음성변조용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보곤 의아했다. 이건 과거의 이야기인데 아직 신인시절의 공화국의 동갑내기 남여가수였던 K모씨와B모씨의 곡들을 들어보면 동일인이라 착각할 정도로 음색이 비슷하다. 물론 이런 음악적 쾌거에 기여한 것이 오토 튠이라는 장비였다. 아무튼 D.O.A라는 곡은 바로 이 무분별한 오토 튠의 사용에 대한 제이-지의 꼬장이다. "경향신문"의 타이틀에선 비판이라 했는데 비판보다는 꼬장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한 아이돌 팀이 오토 튠을 사용해서 재미를 보면 뒤에 곡을 발표하는 이들은 죄다 오토 튠을 사용하고... 이런 상황은 미국도 예외는 아닌가보다. 하긴 오토 튠을 음성 변조용으로 가장 먼저 사용한 장르가 힙합이라고 하니 제이-지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만도 했을 것이다. 과거의 아이돌이었다 지금 솔로로 돌아온 K모 가수도 오토 튠에 대한 비판을 하던데, 자신의 소속사의 다른 아이돌들은 다 오토 튠을 "요즘 쓰이는용도"로 사용하고 있고 그가 작곡 능력은 없으니 아마도 국내에선 메이저 신에서 오토 튠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곡을 듣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제이-지의 앨범 전체를 다 들어본 것이 아니고 D.O.A.만을 들은 관계로 그의 앨범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은 생략한다. 아무튼 다들 즐거운 추석!

2009년 10월 1일 목요일

아님 말고 1000곡(103)





103.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라인업을 갖췄던 팀들(2)

오늘 이야기할 팀이야말로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라인업을 갖췄던 팀이지만 가장 과소평가되었던 팀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팀일 것이다. "가장 실력있는 팀은 세명으로 구성된 밴드"라는 이야기에 농담조로 "그럼 솔로가수가 가장 실력있겠네?"라는 반문을 했던 기억이 있다.(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늘 이야기할 팀이 과소평가 되었다는 것은 "절대적 기준"에서라기 보단, 훨씬 더 화려한 팀으로 기억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에 "휠을 잡았던" 다른 듀오들로 인해 상대적으로 그들의 대중적 관심도가 다소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가장 완벽한 듀오의 구성은 Hall and Oates이라 생각하는데-물론 그 팀에 대한 이야기는 당연히 하게 될 것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곡작업에 있어선 철저한 형업체계를 갖춘 동시에 곡의 표현,다시 말해 보컬,에 있어선 한 사람이 전담함으로서 팀의 음악적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외부적으로느느 이야기하나, 사실 그 둘의 곡작업의 완성도가 워낙 높기 때문에 그들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듀오로 꼽는다. 허나 오늘 이야기할 팀은 "듀오 형태의 팀의 역할 분담이 이렇게 완벽해도 문제가 없는가?(궤변인 것 잘 안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팀이다. 그들의 이름은 다음 문단부터 나온다.

-Eurythmics(명. 율동체조)-
뉴웨이브를 대표할만한 팀의 이름이 무슨 빌어먹을 율동체조냐?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명칭의 유례는 워낙 어린 시절부터 각종의 예술적 교육을 받아온 Annie Lenox가 어렸을 적 받았던 댄스 레슨의 선생님이 가르쳐주었던 댄스 테크닉 중 하나의 이름이 "Eurythmy"였다고 한다. 클래식 댄스와 관련된 용어는 거의 대부분 불어에서 곧바로 온 것이라 이 역시 불어를 영어로 번역한 단어일 것이라 추측할 따름이다. 과거 이 팀이 휠을 잡기 시작할 무렵 다소 섭섭하신 한 팝 저널리스트 선생께서 애니 레넉스가 파트 타이머로 "에어로빅"을 가르친 적이 있어 이런 명칭을 사용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으나, 제발 그런 말들에 대해선 한 번 정도 의심해 보시기 바란다. 아무튼 이 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Punk rock band였던 The Catch와 The tourist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러나 안그래도 보기에 답답하고 지나치게 긴 게시물들에 대한 지적을 받는 마당에 이 팀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을 수는 없고 아무튼 데뷔 당시부터 논란이 많았던 팀의 명칭에 대해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하자면 위와 같다는 이야기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David Allen Stewart와 Annie Lennox 이 두 사람이 언급한 두 팀에서 죽 같이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팀의 작곡을 주로 담당하던 Pete Coombes와 관련된 계약상의 법적 문제로 인해 이 두 사람이 80년에 팀을 뛰쳐나오고 "Eurythmics"이라는 이름의 듀오를 결성하여 RCA와 계약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그들은 재결성 뒤엔 Arista로 이적하게 된다.)

오늘 이 팀을 소개하는 목적은 "가장 완벽한 라인업을 가진 팀"중 하나로서 알리는 것이니 그 점에 초점을 맞추자면 스코틀랜드의 에버딘 출신인 1954년생인 애니 레넉스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진 못했지만 "말을 제대로 구사하기도 전에 악기를 다루기 시작했다."는 믿지못할 소문이 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음악적으로 출중한 재능을 보였고 집안의 분위기 역시 애니의 그런 재능을 키우기 위해 "경제적인 것만 빼고" 절대적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설마 그랬을라구...) 10대 후반에 이미 런던으로 거처를 옮겨 Royal Academy of Music(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무지하게 좋은 학교다.)에서 정식 음악교육을 받았고 프로페셔널로 녹음을 시작한 것은 The tourist의 멤버로서였다고 한다. 80년대엔 어느 정도 국내에도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요즘 그 것을 기억할 사람들은 없을 것 같아 이야기하지만 애니 레넉스는 로열 아카데미에서 3년간 flute을 공부했는데 성악이 아닌 기악전공인 것이 그에겐 보컬리스트로서 더욱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뛰어난 보컬리스트들을 봐왔고 그들의 연주를 들어왔으나 애니 레넉스는 "흔들리지 않는 정확한 음정"을 가진 보컬리스트를 꼽자면 당연히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리라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기악을 전공한 데에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성악 전공자들은 곡의 조에 상관없이 그 조의 "도레미파솔라시도"롤 음정을 받아들여도 괜찮은 데에 비해 기악전공자들은 악보의 위치 그대로 하나하나의 음을 인식할 수 있어야 연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애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면 데이브에 대한 이야기도 당연히 해야할 터, David Allen Stewart 흔히 Dave Stewart으로 통하는 그는 팀의 작곡과 프로듀싱을 담당했는데 Eurythmics의 멤버로 활동하던 시기에 워낙 유능한 작곡자로 인식되는 바람에 그웬 스테파니, 존 본 조비, 빅 재거, 보노, 타투(t.a.T.u), 케이티 페리(Katy Perry)등에게 곡을 줄 정도로 동료 선후배들의 신망을 얻었던 인물이다.(저 위에 열거된 인물들 중 선배라 할만한 나이의 사람은 오로지 믹 재거외엔 존재하지 않지만...) 그리고 그는 물론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주는 일 외에도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의 작업에 참여한다거나 뮤지컬을 작곡하는 등의 작곡가와 프로듀서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1968년 상영되었던 그 유명한 제인 폰다가 주연했던 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을 2004년에 발표했다.(이 이야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뮤지컬 작업에 몇 곡을 주는 식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뮤지컬 한 편의 음악 전체를 그가 담당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워낙 뛰어난 애니 레넉스라는 보컬리스트와 함께 해서 그의 두 사람이 같은 팀으로 활동하는 기간엔 그의 노래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그는 보컬리스트로서도 활동(위어났다고 하긴 좀 그렇다.)햇으며 기타를 주로 연주했으나 녹음작업에 필요하다면 무슨 악기라도 필요에 의해 연주할 수 잇는 다중악기주자였다. 관심이 있으실지도 모를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이 사람의 고향은 과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이었던 로이 킨이 감독을 맡았던 축구팀이 있는 선더랜드라고 한다.

그들이 첫 앨범을 낸 것은 1981년의 일이다. "In the garden"이라는 타이틀로 발표된 그들의 데뷔 앨범은 공식적으로 앨범 판매를 집계하는 영어권의 세 국가(호주, 영국, 미국) 중 그 어느 곳에서도 차트의 100위(미국은 200위) 안에 들지 못하는 쾌거를 이룬다. 그리고 그들은 세간을 놀라게 했던 Self Titled Album인 "Eurythmics"을 발표하기에 이르는데 그 때가 바로 1983년의 일이다. 잠시 여기서 미국인들과 RIAA의 오만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에서 타자로 대성공을 거둔 스즈키 이치로는 2001년 American League의 신인상과 최우수 선수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일본 프로야구 리그에서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미국외의 지역의 경력에 대해선 이런 식으로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 Eurythmics역시 1981년의 실제 데뷔앨범이 미국에선 발매되었는지조차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이유로 1984년 초의 그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그들을 Best New Artist of the Year의 후보로 올린다. 아무튼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단하긴 애매하나 그들은 신인상을 수상하지 못했지만 앨범의 타이틀 트랙이었던 "Sweet Dreams(are made of this)"은 전영 싱글차트에서 2위 빌보드 hot 100 싱글 차트에서는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결론에 가까운 이야기를 해야만 할 필요를 느끼는데 그들을 최고의 라인업을 갖춴던 팀들 중 하나로 꼽는 이유는 (한 단일 작곡가를 세계 최고니 하는 수식어를 사용하여 언급하는 것은 항상 적절한 일이 아니므로) 뛰어난 작곡능력과 연주능력에 프로듀서로서로서의 능력도 갖춘 멤버와 뛰어난 곡 해석력과 표현력 그리고 타고난 가창력과 "굉장히 탄탄한 음악적 기초"를 갖춘 멤버로 구성된 이 팀과 같은 듀오가 나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리 밝힌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더 써먹기 위해 아껴둔다. 이 게시물의 초반에 Eurythmics이 과소평가되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당대에 그들의 라이벌이라 불릴만한 팀들 중 유난히 Duo들이 많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말 그대로 휠을 잡았던 "Wham"와 "Tears for fears"를 포함해 심지어 미국의 팝음악 전문가들이 "Simon and Garfunkel"을 제치고 미국 최고의 듀오라 꼽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Hall and Oates"마저 그들과 상당부분 활동기간이 겹쳤던 관계로 최소한 대중적 인지도에 있어서만큼은 큰 손해를 보았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도 이 팀에 대해 이야기하겠지만 곡을 자세히 들어보시면 그들의 라인업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아실 수 있을 것이다.(그들의 최고의 곡은 한 번 더 우리기 위해 오늘은 뺀다.)


Sweet Dreams(are made of this)

There must be an angel(playing with my heart)(이 곡의 하모니카 연주를 잘 들어보시고 누구의 연주인지 아신다면 당신은 센스쟁이!)

2009년 9월 27일 일요일

Soundless Music. 표절의 몇가지 얼굴들





1. Say hot hot hot hot hot hot hot
인터넷 세상에선 요 근래에 정운찬의 총리지명과 그의 양파와 같은 까면 깔수록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의혹 투성이가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가요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YG Entertainment 소속의 가수들의 곡들에 대한 표절시비였을 것이다.(참 대단한 일이다. 가수의 곡에 대한 표절시비도 아니고 가수"들"의 곡"들"에 대한 표절시비라니...) 말하나마나 이렇게까지 뜨거운 이유는 그들이 2009년 봄부터 가을에 접어든 이 시점까지 그 누구보다 독보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면 이런 일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래저래 양군이 애지중지 트레이닝시킨 대표선수들은 Hot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YG Hot뜨거~" 하지만 솔직히 난 별로 씁쓸한 기분이 아니다. 이만큼 가요-누구는 대중음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하여 다른 사람을 팬 경우도 있다 하더만-라는 것이 사회적인 이슈를 선점한 것 자체가 워낙 오래된 일이기 때문이다. 나같은 사람은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일로라도 말 그대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 음악"이 되는 것 자체를 즐길 수밖에 없다.

2. 표절의 딜레마
역사적으로 "심각한 표절의 문제가 경제적인 이유로 제기된 것"의 대표적 사례를 꼽으라면 비틀스의 조지가 자신의 솔로곡으로 발표하여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뒀던 "My sweet lord"였을 것이다. 그 사건이 몇년이었는지 고소인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이 확실하지 않으나 귀찮은 관계로 그냥 넘어간다. 한 시대가 아닌 몇 시대를 앞서갔던 혹은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던 비틀스의 멤버였던 조지로서는 모양 빠지는 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애석하게도 조지는 이 소송에서 패했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피해보상을 해야만 했다. 이 사건이 대중음악의 역사 혹은 대중문화의 역사에 있어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표절이라는 것이 더 이상 "예술가의 양심"의 문제며 도덕적 비난을 받는 일이 되는 대신 "민법상의 범죄행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표절이라는 것은 아주 우스운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예술이나 문화의 문제를 그와는 대단히 거리가 먼, 심지어는 대척점에 있는, 법과 제도에 의해 해결할 수밖에 없는"것이 자연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것이 바로 표절의 딜레마인 거싱다.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적 양심"이나 "예술 이론적 판단"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판사의 판단"이 표절이라는 문제의 최후의 심판이 되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아티스트 스스로의 양심이나 최소한의 동업자 의식은 법의 뒷전으로 밀리게 된 것이다.

3. Free of Plagiarism or Free from Plagiarism
누군가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폴 매카트니 이후로 대중음악에 있어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고... 좀 더 관대하게 본다 하더라도 엘튼 존 이후의 소위 싱어 송라이터들은 "멜로디를 가지고 승부를 거는 것"에 대해 자신감을 잃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팔리는 곡"을 쓰다보면 "가능하다면 익숙하게 들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여덟마디 심지어는 네마디의 훅 하나만 만들어놓으면 나머지는 DJing이나 믹싱 등을 이용하여 래퍼의 역량으로 곡을 만드는 방식의 직업인 힙합 음악을 쓰는 데에 있어 음악의 기본은 멜로디이며 그 점에서 음악의 순수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사실상 "그 순수성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비웃을 수 있는 방법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간혹-사실은 매번-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네 생각은 어떠한가?"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 때마다 내 답은 일정하다. 1. 표절시비가 붙었는데 법정에 가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고소를 하고자 하는 측에서 표절 혐의를 입증하기 힘들거나, 피고와 권고가 타협을 하는 경우인데 이 경우는 어쨌건간에 결론적으로 표절이 아니다. 2. 법정에 가게 될 경우 법원에서 표절 판정이 난다면 당연히 표절이고 법원에서 표절이 아니라 한다면 정서상 10000명 중 9999명이 표절이라 주장한다 하더라도 표절이 아니다.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음악을 많이 들을수록 그리고 많이 알게 될수록 표절여부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하기 힘들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라는 이야기!

4. Some guys are damn idiot
심정적으로 이 곡이 표절곡이라는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심지어 그 확신이 100%이라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 확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른바 "전문가"들에게도 일종의 금도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여태까지 했던 것 같은데, 이 와중에도 "진짜 바보"들은 있을 수밖에 없다. 우선, 모 가수들의 팬이 "씁쓸한 요즈음의 표절에 대한 시비를 보며 그를 생각했다"라고 하며 그는 마치 표절과는 절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세히 이야기하긴 그렇고, 그 이전에 표절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완전히 그 가수가 맛이 가던 시기를 "어떤 방식으로든 넘어가게 된" 계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 누구며 그 이후로도 항상 표절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의 팬들이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이미 감상자들의 문제를 떠나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표절이라는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거성"이라는 이름으로 모 버라이어티 쇼에서 맹활약하시며 공화국에서 가장 오래된 FM 음악프로그램의 판돌이(DJ)일을 하시는 P모씨와 같은 바보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요즘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가 가장 바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것은 그가 개그맨이기 때문에 자신의 분야가 아닌 문제에 대해 떠들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자신의 의견을 조금 격하게 표현해서도 아니다. 그 이야기를 어찌하여 그 날의 게스트였던 C모 그룹의 B모 가수에게 하며 그에게 동의를 구훘기 때문이다. 이 천하의 바보 거성선생은 B가수와 C그룹의 전력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던 것에 분명하다. 이 친구들은 그냥 그대로 일본 곡을 가져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히트곡은 대부분 일본 곡들인 것이다. 어떻게 하여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여러분들의 상식 선에서 생각하시게 되더라도 충분히 이해되시리라 믿는다. 한 마디로 우리 집 옆골목의 아저씨에게 "군사구테타 하는 놈들은 다 죽일 놈들이지요? 그렇죠?"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그 프로그램의 질이 과거에 비해 턱없이 구려졌다 하더라도 그런 전통있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라면 최소한 그 정도 생각은 미리 했어야 한다. 대책이 절대 서지않는 천하의 바보 거성선생님! 플리즈... 게스트들에 대한 최소한의 사전지식을 갖춰야하지 않겠습니까?

5. 굳이 결론을 원하신다면...
(1) 우선 표절의 문제가 이미 "경제적 접근에 기초를 둔 법률의 문제"가 되었다는 점
(2) 이미 법적인 단계로 넘어가려는 조짐이 보이는 문제에 "아무리 전문가라 하더라도 사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데에는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점
(3)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원곡이라 주장하는 곡들에 대한 권리 침해"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만일 그 곡들이 그냥 그대로 원작자들의 이름으로 팔렸다면 그만큼 팔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는 점
(4) "베이스라인이나 BPM등이 상이한 것은 인정되나 동일조건으로 놓고 본다면 원곡을 차용했다고 판단된다."는 이야기는 "기계적 판단에 의한 표절은 아니나 의혹이 짙다"는 것과 동의어인데 왜 하필이면 이런 모호한 표현을 가지고 "경고장"까지 보냈을까? 표절을 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 것은 두가지 점을 시사한다 할 것이다. 우선, 표절문제는 원고측이-즉 고소인측이- 자신들의 손해를 입증해야 하는데 갈수록 여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 이미 과거처럼 "무대포식의 베끼기"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
(5) 네 의견은 어떤 것이냐?라는 질문을 하신다면 이렇게 이야기해드릴 것이다. "단순한 Yes, No에 대한 답을 내리지 않기 위해 이렇게 돌아왔는데 지금 와서 표절인지 아닌지를 이야기하라고? 내가 바보야?"

2009년 9월 25일 금요일

아님 말고 1000곡(102) "이사기념"

102. Grace Kelly-Mika(2007)-

혹시 이런 일이 공화국에선 가능할까 생각해본다. 음악에 10대부터 천부적 재능을 보인 아들이 있다. 이 아들이 드디어 음반을 내고 전세계적 주목을 받아 얼마전 경북 예천에 나왔던 60년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용궁마을에 살다 서울 강남에 지문인식을 해야만 출입이 가능한 무지막지하게 좋은 아파트를 구입했는데 "예술가는 지나치게 안락한 환경에서 생활아면 안되니 그 집을 처분하고 다시 시골로 돌아오길 바란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엄마가 존재할까? 그리고 그 말에 공감하여 다시 자신이 살던 60년대 풍의 용궁마을로 돌아오는 아들은 더우기 존재 가능할까? Never... 그런데 그런 일이 영궁에선 가능했다. 즉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위의 일은 지명만 바꾸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예천의 용궁마을을 아니라 런던의 싸구려 호텔로 강남의 아파트를 로스 엔젤리스의 아파트로 바꾸면 이 이야기는 fact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1983년 8월 18일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Michael Holbrook Penniman이라는 다소 재미없는 이름으로 태어났고 지금은 런던에 거주하며 그 재미없는 이름보다는 Mica Penniman, Mika Penniman, Mika, MIKA등으로 알려진 현재 전세계 대중음악 Scene에서 가장 주목받는 천재 뮤지션이며 드디어 1980년대 생들 중에서도 대가의 가능성을 보이는 뮤지션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음을 보여주기 시작한 인물이기도 한 미카의 실제 이야기이다. "Life in cartoon motion"이라는 데뷔앨범을 통해 앨범의 모든 수록곡 전체가 전세계에서 1분도 쉬지 않고 음악방송이나 광고음악으로 울려퍼지고 있는 바로 그이다. 공화국에선 그의 보컬이 나오기 직전에 음악이 페이드 아웃되는 "Happy ending"과 "Big girls(you are beautiful)"으로 "과도하게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일단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자면 그가 천재라 불리는 이유는 "장르에 관계없이 자신이 음악 자체를 가지고 놀 줄 아는 오랜만에 나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음악을 진지하고 엄숙하게 하는 것은 어찌보면 대단히 쉬운 일이다. 한 장르에 빠져 그에 대해 대단한 지식과 재능을 쌓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 뒤에 나온 음악들이 장르의 정신과 장르의 문법에 충실하고 좀 더 심하게 이야기해서 장르의 클리쉐이까지 답습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좋은 음악이 반드시 어려운 음악은 아니며 되도록이면 음악적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대중성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대단히 쉽게 만들 수 있어야 뮤지션의 재능이 진정 돋보인다는 점을 입에 게거품을 물고 주장하는 부류에 속한다. 글고 그런 개인적인 신념에 미루어 미카와 같은 뮤지션이 많이 나올수록 세상은 명랑해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미카라는 친구의 음악을 들어보면 도대체 이 사람의 머리엔 중간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기나 할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말 그대로 "자신이 하고싶은 바로 그대로 음악을 하는 친구"라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 미국에서 미카와 비견할만한 음악-개인적으로 하이브리드 음악이라 부른다.-을 한다 할 수 있는 제이슨 므라즈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르의 음악을 자신의 마음대로 섞고 또 섞어 제이슨 므라즈표의 음악을 만든다 한다면 미카라는 이름의 이 친구는 애초에 장르의 문법 자체 따위는 안중에ㅔ도 없다는 식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다. 다른 말로 설명을 하자면 "이런저런 장르에 능통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음악 자체를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뮤지션"이라는 정도의 기술 밖에는 다른 설명이 힘들다는 식으로의 설명이 가능하다고나 할까?

이런 그의 음악을 위키피디아에선 Power Pop이라는 수식어로 설명하고 있다. 전형적인 Rock 음악의 비트에서 벗어나 있으나 팝음악의 비트라 하기엔 킥-보통 베이스 드럼이라고도 한다.-의 현란한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21세기의 음악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멜로디"를 구사하나 베이스라인의 화려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그런 음악이다. 그의 개인적 성장과정에 대해선 나중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생략하나 분명, 21세기적 풍토에서 음악을 접하고 그를 바탕으로 하여 음악을 시작한 2010년대의 트랜드를 미리 짐작해볼 수있는 음악이라 하는 것이 가장 속편한 이야기 되시겠다. 올해 발매된 새 앨범인 "The boy who knew too much"를 아직 제대로 들어보지 않은 것이 대단히 아쉽지만 각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미카의 10대의 꿈들을 음악으로 만들었다 하니 반드시 들어본 후 그 앨범에 대한 리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직 그의 절정기가 아니라 생각되므로 그의 음악에 대한 종합적 평가는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이 드나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반드시 들어봐야할 음악을 구사하는 뮤지션"이라는 점엔 이의가 없을 듯하다.

"Grace Kelly"

"Big girls(You are beautiful)"

Soundless Music-나는 빠순이 언니들이 존경스럽다.-

갑자기 빠심으로 똘똘 뭉친 빠순이 언니들이 존경스러워졌다.



어제 조카들을 데리고 I Concert에 다녀왔는데, 정말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공화국에 얼마나 될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 말이 컨서트이지 거의 실상은 공개방송이며 그렇게 힘들게 기다리고 난리를 쳐봤자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는 기껏 두곡을 부르고 많아야 세곡을 부르는 것에 불과한데 그 시간을 그다지 편하지 않은 자리에서-도대체 이 정도의 형편없는 좌석을 가지고 어떻게 올림픽을 개최한 경기장이라 할 수 있는지 생각만 해도 한심스럽다.- 근 다섯시간을 앉아있을 수 있는 것이 가능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든 생각은 과연 이런 일들에 대해 어떤 payoff이 생긴다 하더라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다.



도뎍 교과서의 톤으로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적 환경이 조성되어있지 않으면 수만의 청소년들이 그런 일을 할까?"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는 것이 옳은 일이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런 현장에 가보게 되면 아직도 공화국의 대중음악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음반시장의 불황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이란 말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티렉스의 조카들의 특성상 특정 가수-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신화-를 응원하러 간 조카들의 보호자로서 간 것이고 당연히 그들의 팬들이 모여앉아있는 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그들의 앨범을 하나씩 소지하고 있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입장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 그 정도만 되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임을 감안한다면 도대체 이 끝도 없는 음반 시장의 불황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안 팔리는 사람들은 무지하게 안 팔린다. 빠순이들이 "빠심"으로 판을 사주지 않는 사람들은 안 팔리는 것 아닌가?라고 말씀하실 줄 안다. 하지만, 단순히 그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그 정도의 인워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동원할 힘이 있다면 아직 가요계의 상황이 그다지 절망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음에도 불과하고 가요계가 가진 잠재력과는 별개로 음반시장은 완전히 죽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대단히 죄송스럽게도 이 시점에서 "밤의 주둥아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들이 해대는 수많은 자기 합리화는 100번을 다시 생각해 본다 하더라도 결코 합리화 될 수 없는 그저 변명에 불과한 이야기들이다. 아무리 그들이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위는 도둑질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는 녀석의 블로그에 그 녀석이 음악은 CD로 듣는 것이 더 좋다는 내용의 포스팅을 한 적이 있는데 어떤 분이 덧글로 "더 넓은 음악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나와라"라는 류의 이야기를 하신 것을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 보더라도 더 넓은 음악세계를 접하는 것과 인터넷에서 음악을 다운받아 듣는 것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음악을 듣는 목적에 부합하게 인터넷을 사용하고 싶으시다면, 전세계에 고루 퍼져있는 음반 쇼핑 사이트를 이용해서 정품 CD를 구입하시는 데에 이용하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만일 음악이 없이는 블로그도 없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 분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음원의 불법 공유가 당신의 블로깅의 목적인데 그 것이 불법이라면 과감하게 블로깅을 때려치시라고...



뜬금없는 이야기가 된 것 같지만 다시 빠심을 가진 빠순이 언니들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차라리 그들처럼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은 언제든지 정품으로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공화국의 인구수 만큼만 있다면 지금의 최악의 불황을 뚫고 나올 수 있는 계기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 불황을 타파하는 것이 "음악의 다양성의 확보"라는 문제까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최소한 이 최악의 상황은 벗어나야 지금보다 한 해에 발매되는 음반의 절대 숫자가 늘어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 출시되는 음반의 음악적 다양성이라는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주목하셔야 할 것은 음원의 불법공유라는 범죄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흔히 이야기하는 "매니아층"이라 불릴만한 사람들의 비중이 압도적이라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2005년 7월 10일 네이버 블로그

Soundless Music-Rolling Stone-

Rolling Stone을 모르시는 분들은 흔치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워낙 수많은 종류의 잡지가 쏟아지고 있는 미국이지만, 미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있는 잡지를 꼽으라면 최소한 20위 안에는 언제든지 존재할만한 잡지인데, 사실 공화국의 정서에 근거해 판단하자면 종합연예지가 이 정도의 권위를 가지는 일이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이 롤링스톤이라는 잡지는 항상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저널리즘의 하나임을 그들 스스로 자부하고 있으며 그들의 자부심과는 무관하게 나름대로 최대한의 객관적인 시각을 통해 보더라도 롤링 스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 근거없는 자만심이라고 할만한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위 사진은 몇월호였는가는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으나 지금은 불귀의 객이 된 카렌 카펜터가 자신의 오빠와 함께 활동하던 듀오밴드인 "카펜터즈"가 표지를 장식한 1974년의 어느 달의 롤링 스톤이다. 롤링 스톤의 역사는 이미 수십년에 이르고 있으니, 1974년 발간된 잡지를 인터넷에서 발견했다해서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겠으나,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는 카렌 카펜터의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인터넷"이라는 것이 가끔은 고마울 때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것은 롤링스톤이 가지는 나름의 권위와 공화국의 저널리즘에 대한 이야기 정도가 될 것이다.



과거 "플레이 보이"(지인들 사이에선 이를 '노는 소년'이라고 부른다.)의 인터뷰 기사가 나름대로 "영양가 만땅"인 알찬 내용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서는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왜 플레이 보이에 대한 이야기인가?"라고 반문을 하실지 모르지만, 롤링스톤이 나름대로 쌓아온 권위라는 것과 플레이 보이의 영양가 만점의 인터뷰 기사가 나름의 가치를 가지는, 혹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모두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플레이 보이에 대해서 언급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것은 아마도 정말 집요하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그들의 "취재원에 대한 철저한 준비"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플레이 보이의 과거 "밀튼 프리드먼"이나 "존 레넌"-이 두 명에 대한 인터뷰는 아마도 인류가 인터뷰라는 것을 하나의 저널리즘 고유의 기사작성법으로 인식한 이래로 가장 훌륭한 인터뷰의 목록에 항상 끼일 수 있는 인터뷰라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훌륭했던 인터뷰라 생각하는 "피트 로즈"에 대한 인터뷰를 보면 간파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취재원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대단히 장시간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어를 읽는 속도가 영어를 말하는 속도보다 느리다는 것을 감안하면서 보더라도 최소한 5시간 이상의 인터뷰가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의 분량의 인터뷰 기사의 양을 보면 그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정도의 장시간을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정도의 긴 인터뷰를 통해 많은 것을 얻어낸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나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 쪽의 기사가 어떻게 작성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으니 언급하기 곤란하지만 최소한 "대중음악"에 관련된 기사를 작성할 때의 "롤링스톤"의 철저함은 플레이 보이의 인터뷰 기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의 밴드가 "전미 순회공연"을 한다거나 "동부 몇개 주 순회공연"을 할 경우 롤링 스톤은 자신들의 리포터를 투어가 시작되기 전의 준비과정에서부터 투어가 끝나는 바로 그 시점까지 파견하여 그들의 투어 전체를 취재하도록 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아시는 분들은 아실 내용이지만, 워낙 세칭 딴따라라 불리는 사람들의 성격이 괴팍하고 그들의 사교성 없음이 극에 달해있는지라 "<롤링 스톤>의 리포터이니 취재에 협조해달라"는 말 따위가 통할 리가 없다. 즉 투어를 떠나는 밴드의 멤버들과 친해지기 시작하는 것부터가 잡지의 리포터가 해야할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멤버들과 때로는 같은 버르나 비행기로 이동하기도 하며 나름의 친분을 쌓기 때문에 그 자체가 "기사의 객관성"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으나, 최소한 그 팀에 대한 나름의 심도있는 이야기들-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음악적인 배경들에 대해-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엄청난 장점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공화국의 방송이건 잡지건 신문이건 넘쳐나는 것이 인터뷰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가끔씩 지나간 롤링 스톤을 보며 드는 생각은 "국내 언론들의 인터뷰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사 작성에 있어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취재원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널이라는 것이 모든 기사를 다 100퍼센트의 힘을 들여 쓸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 일이지만 가끔 화제가 되는 인물의 인터뷰가 매체의 수만큼 다른 내용르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체의 수만큼의 같은 인터뷰를 반복확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나 "기사의 제목까지 같은 일간지들의 헤드라인"을 볼 때면 "저널리즘의 태도라는 것이 왜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인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2005년 5월 21일 네이버 블로그

Soundless Music-Rolling Stone-

Rolling Stone을 모르시는 분들은 흔치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워낙 수많은 종류의 잡지가 쏟아지고 있는 미국이지만, 미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있는 잡지를 꼽으라면 최소한 20위 안에는 언제든지 존재할만한 잡지인데, 사실 공화국의 정서에 근거해 판단하자면 종합연예지가 이 정도의 권위를 가지는 일이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이 롤링스톤이라는 잡지는 항상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저널리즘의 하나임을 그들 스스로 자부하고 있으며 그들의 자부심과는 무관하게 나름대로 최대한의 객관적인 시각을 통해 보더라도 롤링 스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 근거없는 자만심이라고 할만한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위 사진은 몇월호였는가는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으나 지금은 불귀의 객이 된 카렌 카펜터가 자신의 오빠와 함께 활동하던 듀오밴드인 "카펜터즈"가 표지를 장식한 1974년의 어느 달의 롤링 스톤이다. 롤링 스톤의 역사는 이미 수십년에 이르고 있으니, 1974년 발간된 잡지를 인터넷에서 발견했다해서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겠으나,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는 카렌 카펜터의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인터넷"이라는 것이 가끔은 고마울 때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것은 롤링스톤이 가지는 나름의 권위와 공화국의 저널리즘에 대한 이야기 정도가 될 것이다.



과거 "플레이 보이"(지인들 사이에선 이를 '노는 소년'이라고 부른다.)의 인터뷰 기사가 나름대로 "영양가 만땅"인 알찬 내용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서는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왜 플레이 보이에 대한 이야기인가?"라고 반문을 하실지 모르지만, 롤링스톤이 나름대로 쌓아온 권위라는 것과 플레이 보이의 영양가 만점의 인터뷰 기사가 나름의 가치를 가지는, 혹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모두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플레이 보이에 대해서 언급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것은 아마도 정말 집요하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그들의 "취재원에 대한 철저한 준비"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플레이 보이의 과거 "밀튼 프리드먼"이나 "존 레넌"-이 두 명에 대한 인터뷰는 아마도 인류가 인터뷰라는 것을 하나의 저널리즘 고유의 기사작성법으로 인식한 이래로 가장 훌륭한 인터뷰의 목록에 항상 끼일 수 있는 인터뷰라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훌륭했던 인터뷰라 생각하는 "피트 로즈"에 대한 인터뷰를 보면 간파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취재원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대단히 장시간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어를 읽는 속도가 영어를 말하는 속도보다 느리다는 것을 감안하면서 보더라도 최소한 5시간 이상의 인터뷰가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의 분량의 인터뷰 기사의 양을 보면 그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정도의 장시간을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정도의 긴 인터뷰를 통해 많은 것을 얻어낸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나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 쪽의 기사가 어떻게 작성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으니 언급하기 곤란하지만 최소한 "대중음악"에 관련된 기사를 작성할 때의 "롤링스톤"의 철저함은 플레이 보이의 인터뷰 기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의 밴드가 "전미 순회공연"을 한다거나 "동부 몇개 주 순회공연"을 할 경우 롤링 스톤은 자신들의 리포터를 투어가 시작되기 전의 준비과정에서부터 투어가 끝나는 바로 그 시점까지 파견하여 그들의 투어 전체를 취재하도록 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아시는 분들은 아실 내용이지만, 워낙 세칭 딴따라라 불리는 사람들의 성격이 괴팍하고 그들의 사교성 없음이 극에 달해있는지라 "<롤링 스톤>의 리포터이니 취재에 협조해달라"는 말 따위가 통할 리가 없다. 즉 투어를 떠나는 밴드의 멤버들과 친해지기 시작하는 것부터가 잡지의 리포터가 해야할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멤버들과 때로는 같은 버르나 비행기로 이동하기도 하며 나름의 친분을 쌓기 때문에 그 자체가 "기사의 객관성"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으나, 최소한 그 팀에 대한 나름의 심도있는 이야기들-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음악적인 배경들에 대해-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엄청난 장점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공화국의 방송이건 잡지건 신문이건 넘쳐나는 것이 인터뷰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가끔씩 지나간 롤링 스톤을 보며 드는 생각은 "국내 언론들의 인터뷰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사 작성에 있어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취재원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널이라는 것이 모든 기사를 다 100퍼센트의 힘을 들여 쓸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 일이지만 가끔 화제가 되는 인물의 인터뷰가 매체의 수만큼 다른 내용르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체의 수만큼의 같은 인터뷰를 반복확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나 "기사의 제목까지 같은 일간지들의 헤드라인"을 볼 때면 "저널리즘의 태도라는 것이 왜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인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2005년 5월 21일 네이버 블로그

Soundless Music-Long live rock 'n' Roll-

도대체 이와 같은 제목으로 천리안 나우누리를 사용하던 시절부터 몇 번이나 게시질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 곳 네이버에도 어김없이 이 제목의 포스팅을 하는 것을 보면 저 제목을 누구들 말마따나 "우라지게" 좋아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갑자기 저 문장이 떠오른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어제 무려 1년 4개월만에 보는 누군가와의 약속 때문에 그다지 잘하는 짓은 아니지만, 집에서부터 홍대입구까지 택시를 타게 되었다.-보통은 걸어다니는 거리이다.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홍대입구 지하철역까지는 기껏해야 도보로 25분이 소요되는 동네에 살고 워낙 걷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그 거리는 언제나 항상 걸어다니는 거리로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가끔은 연희동에서 서대문이나 시청까지 걷기도 하니 그 정도는 우스운 거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사실 그다지 택시를 타야겠다는 마음은 없었으나 아시는 분들은 다들 아실 티렉스의 가장 무서운 적인 "살인적인 추위"로 인해 20분에 한대씩 다니는 버스를 기다리는 일 조차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금요일에서 토요일에 이르는 시간에 밤샘을 한지라 그 날씨에 도보는 정말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상태가 좋지 않은 카스테레오는 처음인 것 같았다. 휴대전화의 상태가 가장 나쁠 때 통화 내용이 뚝뚝 끊기는 것과 같은 그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전문용어로 "줴길"이라 한다. 어쨌든 차가 그다지 막히는 편은 아니었으나 상태가 좋지않은 카스테레오로 짜증이 날 즈음 이상하리만치 귀가 간질간질한 생각이 들어 귀를 "쫑끗" 세우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에 집중을 하기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것이 웬 떡이란 말인가! 방송에서 나오고있는 노래는 바로 "Rainbow Rising"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뚝뚝 끊기는 소리에 짜증이 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택시를 타고 있을 때 그 곡을 듣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닌 관계로 노래를 따라부르며 나름대로 "역시 배철수 형님!"을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물론 속으로만 외쳤다. 아마 그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큰 소리로 밖에 내었다가는 택시기사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라 하더라도 그다지 저항할 명분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목적지에 내리기 전에 이 곡을 다 듣고 내릴 수 있겠군... 음하하하' 그런데 문제는 이 곡이 다 끝나고 난 후에 발생했다.

이 곡을 바로 뒤이은 곡이 바로 "Long Live Rock and Roll"이었던 것이다. 메가쇼킹 만화가식의 표현을 빌자면 "상쾌함 1000000g"짜리의 사고가 아닐 수 없었다. 아직 목적지까지는 조금의 여유가 있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아저씨! 볼륨 무지하게 올려주세요!" 이럴 때 난 공화국의 서비스업계가 발전했음을 느낀다. 기사 아저씨가 그다지 큰 저항 없이 볼륨을 크게 올려준 것이었다. 진정한 서비스 정신이란 이런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때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홍대입구 전철역 5번 출구 근처를 지나는 순간 뚝뚝 끊기던 방송의 수신상태가 갑자기 엄청나게 좋아지는 것이 아닌가!-물론 엄청나게 좋은 음질이었다거나 하는 뻥을 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최소한 듣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원래는 홍대입구 지하철역 6번출구 근처에서 U턴을 하여 지하철 입구에 내릴 계획이었지만 -아시는 분들은 아실 것이다. 그 장소에서 U턴이 된다는 것을...- 갑자기 "아저씨 여기서 U턴하지 마시고 홍대 정문쪽으로 좌회전 해주세요!" 라 외친 것이었다. 물론 목적은 당근 곡을 끝까지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좌회전을 한 후로도 약간의 시간이 모자랐다. "다 왔는데요!"라고 외치는 아저씨와 내가 내린다는 것을 인지한 다른 승객... 세명이 동시에 같은 차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약간의 주저함과 아울러 나는 또 이렇게 외쳤다. "뒷 손님 죄송하지만 많이 바쁘시지 않으시다면 이 곡이 다 끝난 다음에 내리면 안될까요?" "기사 아저씨! 그냥 택시요금미터 켜두세요 그 시간 대기하는 만큼은 요금 더 드릴깨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끝내고 행동에 들어간 사람은 그 상황을 굉장히 이례적인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는 그런 상황이 가능하다는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제지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한 2분간의 어정쩡한 세 남자의 택시 안에서의 기묘한 동거(?)는 끝을 볼 수밖에 없었고, 이 어정쩡한 상황의 유일한 승자인 티렉스는 유유히 휘파람을 불며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물론 그 두 사람들은 어이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참아줌으로써 다소 상태 안 좋은 단 한사람의 기분이 엄청나게 좋아질 수 있다면 그 것이 사회적으로 그다지 나쁜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야 뭐 그렇다. 택시 요금이 몇백원 더 나왔어도, 원래 가야할 길보다 조금 더 돌아갔어도, 약속시간에 조금 늦었어도...

"Long Live Rock and Roll"


2005년 5월 31일 네이버 블로그

2009년 9월 22일 화요일

47회 그래미 어워즈 유감

1990년대 중반 이후로 계속 되어온 그래미상의 문제이긴 하지만, RIAA의 회원들은 지나치게 보수적인 투표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보수적인 것 까지야 그런대로 참아준다 하더라도 1990년대에 Change the world에 상을 몰아준-사실 이 음반으로 그래미의 가장 중요한 상인(영화제라 한다면 작품상에 해당하는) Record of the year는 베이비 페이스가 받았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이 상은 작곡자가 아닌 제작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그래서 1984년의 그 대단했던 마이클 잭슨의 열풍으로 인한 그래미의 몰아주기는 결국 그 Thriller의 공동제작자였던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에게 돌아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로 그래미는 줄곧 이미 전성기에 있다고 보기는 힘든 역전의 노장의 음반에 중요 부분의 상을 몰아주는 행태를 계속 보여주곤 했다. 카를로스 산타나-이 사람 역시 레코드 오브 더 이어는 Match box 20의 로브 토머스와 공동수상했다.-의 경우도 그랬다. 물론 카를로스 산타나의 앨범은 당해년도에 발매되었던 음반들 중 최고라는 견해에 그다지 부정적인 의견을 내기도 어려웠으나, 그래미의 결정적인 뒷북은 바로 2001년 Steely Dan에게 상을 몰아준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밴드를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팀이 바로 스틸리 댄이지만 그들의 2000년 작인 Two against nature은 그들이 발매했던 모든 음반들 중 완성도 면에서 가장 쳐지는 음반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 이후로는 그래미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게 된 것도 사실이다.



공화국의 시간으로 어제 오전에 거행되었던 47회 그래미 어워즈는 이런 몇년간의 그래미의 모든 문제점들을 그대로 폭발시킨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 부분을 휩쓴-사실상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특히나 공화국의 언론들이 난리를 치는 부분인 신인상이나 그 외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것은 레이 찰스의 Genius loves company였다. 물론 레코드 오브 더 이어는 노라 존스와의 공동수상이었다. (레코드 오브 더 이어는 Here we go again이 수상했으며 이 음반의 공동 제작자는 레이 찰스와 요즘 그래미가 가장 선호하는 노라 존스이다.) 사실 Genius loves company를 들어본 개인적인 소감은 "그다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으나 현대 대중음악의 거장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레이의 유작으로는 상당히 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레코드 오브 더 이어를 제외한 다른 부분의 상들을 레이에게 몰아준 것은 고인에 대한 예우라 할 수 있고, 레코드 오브 더 이어를 준 것은 결국은 요 몇년간 그래미가 가장 아껴왔던 노라 존스에게 준 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냐? 아직 노라 존스는 '한물 간 대가'라 하기엔 너무 젊은 현재진행형의 아티스트가 아닌가? 왜 흥분하고 난리인가?"라 질문을 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른다.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물론 이런 문제는 수십년간 쌓여온 문제이지만, 그래미에 대해 가지는 가장 큰 불만은 도대체 RIAA의 회원으로서 그래미상에 대한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변화에 대해 몸을 사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 이러한 그들의 경향은 에릭 클랩튼이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었던 크림이나 데릭 & 더 도미노스 시절에 에릭 클랩튼을 외면했고, 스틸리 댄에 대해서도 월터 배커나 도널드 페이건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또 만들어낼지 불문명할 정도의 역작인 Gaucho에 대해 겨우 "베스트 레코딩 엔지니어링 오브 더 이어" 를 안겼을 뿐이다. 물론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에 대해 거의 철저한 외면으로 일관했던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90녀대 초반에 가능성이 충분한 Rock 밴드들을 발굴하여 새로운 대중음악의 경향을 주도했던 그래미의 영향력이 이젠 역사라는 이름으로나 기록될법한 옛이야기로 묻혀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상이라는 것이 가지는 기능은 그간의 업적에 대한 평가라는 측면이 가장 중효하겠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독려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도 없다고 본다면, 그래미는 10년 간을 스스로의 덫에 자신을 옭아메고 음악의 발전이라는 측면을 도외시한다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2005년 2월 15일 네이버 블로그

월드컵의 역사 1. 차범근과 김재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겠지만, 사내아이들은 자신의 환상이 깨어진 그 날에 대한 기억을 정말 오랫동안 가지고 살게 된다. 물론 그 것조차 필요 이상의 시간이 흐르게 되면 잊게 되지만 그 당시엔 그런 일들이 아이들에겐 대단한 경험이며 때로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따라다니게 되기도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우스개 소리로 곧잘 이야기되곤 하는 것들 중 하나인, 채변봉투를 학교에 내야하는 날 자신의 여자 짝은 화장실도 가지 않는 아이일텐데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까?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다 문제의 바로 그 날 자신의 것보다도 훨씬 더 두툼해 보이는 봉투를 내는 자신의 여자 짝을 보며 묘한 기분에 빠졌다는 류의 이야기는 실상 막 학교라는 곳에 들어간 어린아이에겐 대단한 충격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화장실 따위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여자 짝이나 여선생님이 "나처럼 화장실도 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 뿐 아니라 "환상이 깨지는 경험"이라는 것은 남자아이에게도 여자아이에게도 공히 존재할 것이며 그 양상 또한 여러가지 것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지금도 치를 떨며 분해하는 일이 있는데, 그 것은 바로 아주 아주 어렸던 시절에 경험했던 "한국 축구에 대한 환상이 깨졌던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치를 떨며 분해한다"는 표현을 쓴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가졌던 "한국 축구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 단순한 차원의 거짓말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엄청난 음모가 있는 "정치적 프로파겐다"였기 때문이다. 엄청난 음모라는 단어가 눈에 거슬린다면 그저 "무언가 있는" 정도로 이야기해도 좋을 듯하지만, 사실 그 시절에 있어 축구라는 것은 인민에 대해 대단히 효율적인 "대중 통제 수단"으로도 작용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 있는" 그 어떤 것에 의해 형성된 축구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예컨데 이런 것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 전 세계에서 가장 명망있는 축구 대회는 "박대통령배 축구 대회"라 생각했다거나, 말레이시아에서 열렸던(이 대회가 지금도 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메르데카배 대회에서 우승을 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카퍼레이드를 보며 "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축구를 가장 잘하는 나라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카퍼레이드라 하면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열렸던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의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한 선수들이 하거나. 1976년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열렸던 하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이나 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메르데카 컴이나 킹스 컵 등등의 동남아시아에서 열리던 축구대회 역시 당연히 그 정도 레벨의 대회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또래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럴테지만, 우리 또래의 아이들은 대부분 축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과 "차범근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항상 같은 의미였다. 나 역시도 축구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히 차범근 때문이었다. 그 어느 해인가(정확하게 연도가 기억나지 않음을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박대통령배 대회에서 경기 종료를 4분인가 5분 정도 앞 둔 시점에서 한국팀은 말레이시아 팀에게 4대 1이라는 회복 불가능한 점수 차이로 지고 있었는데, 그 나머지 시간에 차범근이라는 당시엔 20대 초반이었던 선수가 무려 세 골을 넣으며 경기를 무승부로 만들었던 것이다. 연도는 기억에 없지만 그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봤던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며, 아마도 그 후로 축구라는 운동에 대해 관심이 생겼던 것만은 틀림없다. 물론 국민학교 고학년이 된 후 지금까지 항상 "그래도 야구보다는 축구를 더 좋아하는 부류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당시 그 정도의 어린 나이의 아이에게 야구의 규칙은 너무 어려웠으며 야구라는 종목의 경기 시간 역시 너무 길었으며, 결정적으로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움직이지 않고 날로 먹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야구"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에 반해 축구는 (지금도 항상 논란의 여지가 있는 규칙이지만) 오프사이드 외에는 그다지 규칙이라는 것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으며, 많은 선수들이 동시에 경기장을 뛰어다니는 축구라는 종목은 굉장히 쉬우면서도 동적이었으므로 미숙한 어린아이들이 보기엔 야구보다는 역동적으로 보였으리라.



선수가 아닌 차범근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간에 차범근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대단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이 위인 사람부터 내 또래들까지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 축구=차범근"이라는 공식을 거의 암기하다시피 했으며, 차범근이라는 축구선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라는 생각도 서슴지 않고 해대곤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우리 세대는 차범근 보다도 더 유명했다던(당시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랬다.) 이회택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차범근의 선배격 선수였으며 그와 동시대에 뛰었던 몇 명의 선수들에 대한 기억은 생생한데, 그 중 한 명은 그 때까지 한국 축구 선수들 중 최장신이라 했던 김재한에 대한 기억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우성용 정도에 해당하는 선수였을텐데, 당시엔 "우리 비행기"의 가사를 개사한 이런 노래가 있었을 정도였다. "떴다. 떴다. 축구공 차범근 올린 볼 김재한이 헤딩 슛 헤딩 슛 골인~"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으나, 당시 그 둘의 인기는 그 정도로 대단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에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한국 축구를, 아니 어쩌면 한국 사회를 대표할만한 축구선수는 그 둘이 아니었다. 당시의 한국 축구의 명암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는 지금은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장으로 있는 이영무라는 선수였다. 아마도 스스로 오래된 축구 팬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이영무라는 축구선수의 이미지는 "정말 부지런한 선수"라는 표현 그 자체일 것이다.


2006년 3월 14일 네이버 블로그

2009년 9월 18일 금요일

월드컵의 역사-프롤로그-

혹시나 "월드컵의 역사"라는 제목 때문에 이 이야기가 말 그대로 "월드컵 대회의 역사"에 대한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이 혹시 계실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가장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은 "그런 기대를 하신 분들이 혹시라도 계시다면 그 것은 정말 철저한 오판"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덥지 않은 제목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사실 음악 파일에 대한 불법적 사용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개인적인 다짐으로 인해 처음 이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이유이자 개인적으로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블로그 자체가 지지부진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그 놈의 알량한 "여기까지 해 온 것이 어딘데..."라는 생각과 함께 "블로그를 없애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쏙 드는 일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해오던 차에 그냥 가볍게 할 이야기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게 되었고,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이따위 짓거리를 하게 된 것이라 생각해 주신다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이우스나 한계인간은 알고 다른 분들은 모르는 것이 있다. 물론 티렉스라는 인물의 사생활에 대한 것들은 상당 부분 그들은 알고 다른 분들은 모르는 것이다. 그 점 부인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오로지 가이우스나 한계인간 그리고 노토리(이 녀석은 앞의 둘 만큼 잘 알지는 못한다. 이유는 그들과 노토리의 군생활에 약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만이 알고 있을 것은 티렉스의 지극히 사적인 부분들보다도 훨씬 더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티렉스의 일종의 치부인데, 과거 나우누리에서 한참 놀던 그 시절 티렉스가 모 대학 모 학과의 소모임 게시판에서 하던 짓이다. 이 자리에서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XXX XX의 XXX"이라는 시덥지 않은 제목으로 99퍼센트의 논픽션에 1퍼센트의 픽션이 섞인 1986년에서 1990년 사이에 벌어진 개인적인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썼던 적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이해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 정말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101번에 걸쳐 주절거렸던 이야기인데, 지금도 한계인간은 이야기하기를 "형이 온라인에서 했던 모든 일들 중 그 때 그 일이 가장 진정성이 느껴지는 일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짓거리를 할 때엔 최소한 "굉장히 즐거웠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심리적인 불안정함을 그대로 반영하여 인간이라는 존재가 상상 가능한-때로는 상상이 불가능한- 온갖 심한 욕설이 가득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고, 때로는 "장소팔, 고춘자식 만담"으로 가득 채웠던 적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굉장히 즐거웠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는 것이었으며, 한계인간의 이야기처럼 "진정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없으나,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보면서 "어떤 식의 논란을 생산해낼지" 따위에 대한 걱정을 한 적은 없었던 것 만큼은 100퍼센트 사실이었다 할 것이다. 허나, 한가지 애석한 것은 한계인간이라는 녀석은 그 때 끄적이던 그 이야기가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박민규의 책을 읽어보기는 했으나, 그다지 유사점을 발견하진 못했고, 한계인간의 그런 생각에 대해 못내 섭섭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월드컵의 역사"라는 카테고리 명에서 올 수도 있는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미리 밝히지만, 개인적으로 축구와 야구를 모두 좋아하긴 하지만, "국가대항전이라는 성격이 훨씬 약한" 야구를 더 선호하는 편이며, 사실상 축구에 대해서 보다는 야구에 대해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야구에 대한 애정이 더 깊다는 것을 숨길 생각도 없다. 그런데 왜 "월드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냐? 라는 질문을 하신다면, 이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야구를 조금 더 선호하나 피아를 구분하는 법을 가장 처음 배우게 된 것은 축구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며 그 시점이 아마도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월드컵 대회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피아를 구분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깨닫게 된 것이 바로 1978년 무렵이었으며 그 때에 공교롭게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개최되었다는 것이다. 그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아직도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말이다.


2006년 9월 7일 네이버 블로그

2009년 9월 16일 수요일

아직 완벽하진 않으나

중요한 게시물들은 일단 극소수 옮긴 상태 구글 블로그에 대한 파악도 아직 덜 된 상태이므로 정식으로 옮겨오기넹 미약하나 일단은 옮길 생각을 여러차례 하다가 실제로 옮긴 것에 대해서 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음. 여러가지 이유로 옮기긴 했으나 사실 네이버 블로그에 워낙 오랜 시간을 소비한 탓에 그 쪽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의도 있었지만 타의에 의해서 옮길 수 밖에 없었던만큼 새로운 곳에 온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려 한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구글로 온 것은 당연히 "막 놀아보기 위함"이니만큼 정말 막 놀아보려 한다.

네이버에서 같이 놀던 블로거들이 얼마나 이 곳을 찾아줄지는 알 수 없겠으나 정말 여기선 막 놀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2009년 9월 15일 화요일

아님 말고1000곡(101)

101. 최상의 라인업을 갖췄던 밴드들(1)

Blind Faith, Asia, UK, Damn Yankees, Four Play등등 이른바 수퍼밴드라 할 수 있는 팀들은 많이 있다. 그런 팀들이 가지고 있는 화려함을 넘어서는 완벽함이란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음악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팀들에겐 몇가지 한계가 따르게 된다. 우선, 이들의 활동이 길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당대의 휠을 잡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모이다보니 가끔은 "서로 죽이지 않고 팀이 해체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긴, 도켄의 보컬리스트인 돈 도켄은 팀의 기타리스트인 조지 린치를 향해 총을 쏘지 않았던가? 다행히 조지 린치가 총알을 몸으로 막진 않았지만... 또 레인보우 시절의 그레함 보닛은 성질 더럽기로는 "네가 두번째야!"라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치아를 모조리 틀니로 만들어버릴 리치 블랙모어와 무대에서 주먹질을 한 후 레인보우를 탈퇴했고 그 후 자신이 속했던 모든 팀에서 기타리스트들과 폭력사고를 일으키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지나치게 강한 그들의 개성과 출중한 실력은 그들에게 단점이 될 경우가 허다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들이 가지는 한계는 "그들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크다보니 잘해야 본전 못하면 매장"인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일례로 Asia같은 팀은 화려했던 라인업을 상실한 이후에도 팀의 이름을 유지하며 여러장의 앨범을 발매했으나 "안내느니만한 못한 앨범"을 냈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더랬다. 어쟀든지간에 이미 일가를 이룬 아티스트들이 한 팀을 이룬다는 것은 음악애호가들에게도 그들에게도 "마냥 반갑기만한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애호가들은 수퍼밴드의 탄생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모순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소위 이야기하는 수퍼밴드"를 제외한 팀들 중 가장 완벽한 라인업을 가진 몇 팀들과 그 팀들의 곡들에 대해 살펴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에 대해 몇가지 원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블라인드 페이스나 UK Four Play Asia등의 "프로젝트성격을 띈 수퍼 밴드"는 제외하기로 했다. 이유는 구차하게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또 한가지 원칙은 "각자의 기량"보다는 팀으로서의 완성도에 기준을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에 중점을 두려 한다. 사실 이 기준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 이야기를 추가로 한 이유는 어트 팀이라고 밝히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 생가하여 팀의 이름을 거명하진 않으려 하나 실제로 각각의 멤버들은 자신의 포지션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멤버들만 모인 팀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팀으로서의 음악"이 과연 그런 수준에 미칠 수 있었던가?에 대해 자문해본다면 부정적인 답을 내릴 수밖에 없는 팀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략 이런 기준에서 몇 팀을 꼽아보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여러분들께서 명심하셔야할 것은 앞으로 몇 차례의 게시물에서 소개할 팀들은 "절대적으로 무순(無順)"이라는 점이다. 먼저 소개하는 팀이 더 뛰어난 것도 가장 덜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저 자료를 먼저 정리한 순서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과연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에릭 클랩튼을 일컬어 "기타의 신"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세계 3대 기타리스트"니 혹은 "80년대 3대 기타리스트"니 하는 식으로 숫자를 좋아하는 일본의 팝저널들이 사용한 표현이 아니라 미국에서 사용한 표현이었다. 잘 아셔야할 것은 8월 24일자 경향신문의 스포츠면을 보면 우세인 볼트에 대해 "전설"이라는 수사를 하고 있는데 이 것을 보고 "아! 우세인 볼트는 전설과 동의어구나"라는 생각을 하실 분이 계시겠는가? 물론 에릭 클랩튼이 기타를 대단히 잘 친 기타리스트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모든 기타리스트들보다 월등한 기량과 기타라는 악기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음악적 능력이 "인간의 그 것"을 "실제로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수사를 썼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멀리도 갈 필요 없다.) 낙원상가에서나 홍대 앞에서 "에릭 클랩튼을 따라올 자 아묻고 없다."든지 "에릭 클랩튼외의 기타리스트들은 쓰레기다"라고 외친다면 아마 30분 이내에 경찰이 출동해야만 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물론 에릭 클랩튼을 일컬어 "기타의 신"이라는 표현을 미국의 언론에서 사용한 적은 있으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이 단 한 번 나오듯 에릭 클랩튼을 일컬어 독창적으로 기타의 신이란 표현을 쓴 적은 단 한번이었으며 그 이후의 같은 표현들은 그 것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마치 아담 스미스 이후의 그 어느 사람이 시장에서 가격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그저 아담 스미스의 인용이듯 말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Rock Scene에서 supergroup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었던 최초의 팀을 꼽으라 한다면 당연하다는 듯 크림을 이야기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그 역시 대단히 주관적인 일이긴 하지만 한 때 통설처럼 전해져내려오던 "멤버 각자의 음악적 역량이 가장 뛰어난 팀들은 트리오 밴드를 조직해서 활동한다"는 Rock Scene의 오래된 격언에도 합치하는 팀이기도 하다. 이 대단한 트리오 팀의 최연장자인 동시에 Bluce rock drumming의 교과서라 불릴만한 인물의 이름은 Ginger Baker이라 하는데 1939년 8월 19일-생일 지난지 얼마 안되었다는 이야기임!- 런던 남부의 루이스햄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설마 부모들이 Ginger이라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름을 지었을 이유는 절대 없고 본명은 Peter Edward Baker이다. 예명은 손발이 오그라들고 본명은 rocker으로서는 가오가 심하게 떨어지는 이름이니 국내 최고의 작명가라 불리는 "김X수"씨에게 작명을 부탁했다면 더 멋진 이름을 그에게 선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Graham Bond Organisation(이 철자가 영국식이라는 것을 유의하셨으면 한다. 절대 오타가 아니다.)에서 활동을 시작한 뒤로 1966년 문제의 에릭 클랩튼을 만나 1968년 팀이 해체되기 전까지 크림의 멤버였던 인물이다. 이후로 Blind Faith, John Mauall's Blues Breakers, Ginger Baker's Air Force(아! 이 분의 작명 능력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은 단지 1회성 이벤트가 이니었던 것이다.) 등의 밴드를 거친 역사상 가장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드러머 중 한 명이라 할 것이다. 그 외에 진저 베이커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조금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겠으나 오늘 게시물의 목적은 그 것이 아니므로 일단 이 정도선에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John Symon Asher Bruce이라는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식 이름을 가지고 1943년 5월 14일(비틀스의 조지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스코틀랜드의 이스트 더버턴셔의 비숍릭스라는 곳에서 태어난 후에 잭 브루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인물은 다들 아시겠지만 Cream의 리드보컬리스트이자 베이시스트였다가 아니었다가 다시 크림의 멤버였다가 또 아니었다가 다시 크림의 멤버였다 지금은 또 크림의 멤버가 아니다.(크림이 세 번 해체되고 두 번 재결성되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유치하게 하는 중이다.) 부모가 둘 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고 이사를 워낙 자주 다녔던 바람에 "도대체 이 사람이 유년기를 보낸 곳을 어디라 이야기핼까?"자체가 하나의 연구대상이 되는 잭 브루스는 무려 열네군데의 학교를 다닌 경력을 가지고 있다. 10대에 이미 재즈 베이스(당연히 더블베이스를 의미한다.)를 접했고 그 덕에 왕립 스코틀랜드 음악, 연극학교에서 첼로를 공부하며 정식 음악교육을 받은 인물이다.(에릭 클랩튼이 철저하게 독학으로 그 것도 상식적으로는 대단히 늦은 나이인 만 15세에 기타를 처음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대단한 행운아였다 할 것이다.) 1962년 아직 20세도 되기 전 런던의 블루스 밴드이자 Alexis Korner이 이끌던 Bluse Incorporated의 베이스 주자로서 프로 음악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바로 그 밴드에서 브루스는 오거니스트인 Graham Bond을 만나게 되고 색소폰을 연주하던 Dick Heckstell-Smith, 드러머 Ginger Baker을 만나게 되고 나중에 본드, 베이커와 John McLaughlin이라는 기타리스트와 Graham Bond Quartet을 결성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 밴드는 비밥 재즈, 블루스와 리듬 & 블루스등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을 연주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일단 잭 브루스에 대한 이야기도 이 정도까지만...



에릭 클랩튼에 대해 더 이상의 소개는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지금 "쪽쪽 뽑아내 버리면" 앞으로 에릭 클랩튼에 대한 이야기를 활용할 기회가 떨어질 것 같은 생각에 크림이라는 팀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간략한 멤버들의 배경에 대한 셜명에서 알 수 있듯, 에릭을 제외한다면 진저나 잭의 경우엔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대단히 정석적인 과정"을 경험한 사람이며, 굳이 크림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무언가 한 건 했을 사람들이라는 점에 대해 동감하지 않으실 분은 없으시리라 본다. 그들이 활동했던 짧은 기간에 비해 발매한 앨범의 수도 상당히 많고-물론 그 중에선 실황 앨범도 포함되어있지만- 그 이상으로 그들이 이룬 음악적 성과도 대단하다. 일반적인 경우 크림에 대해 "Hard Rock의 선구자" 정도로 이야기하는데 특정 장르가 한 팀에 의해 생겼다기 보다는 크림의 음악에 하드 록의 전형적 요소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야기하자면 크림이라는 팀은 멤버들의 전력이 이야기하듯, 블루스와 약간의 재즈적 배경을 바탕으로 당시로서는 굉장히 앞서가는 음악을 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할 것이다. 심지어 서구의 많은 평자들은 Blin Faith이나 Ginger Baker' Air Force, 심지어는 Derek and the Dominos등을 일컬어 Post Cream 음악이라는 범주에 넣어 크림 음악의 연장선상에 넣으려 하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뭐 어찌 되었건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라인업을 가지고 있던 팀들 중 하나인 동시에 가장 화려한 팀중 하나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1. 크림은 앞으로도 뽑아낼 것이 있는 팀이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2. 다른 좋은 곡도 많으나 오늘은 단 한 곡만 링크하기로 한다.

3. 게시질이 늦어진 것은 정치적 이유라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 앓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티렉스의 특수한 병 때문인데,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이야기해서 티렉스는 8월 말이 되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대단히 괴로움을 겪는데, 8월이 지나면 여름이 끝난다는 데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8월말엔 농담처럼 정신도 육체도 피폐해지고 컨디션이 땅에 떨어진다. 그리고 엄청나게 depress된다는 사실...

4. 크림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쪽쪽 다 빨아먹을 때까지 계속할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5. 진지하게 묻습니다. 지금 외국의 블로그 서비스로 사이버 망명을 고려하는 중인데 이 곳의 몇몇 절대 그냥 사라지기 죄송한 이웃분들의 의견을-몇분 안 남기시겠지만- 따르도록 할까 합니다. 제가 네이버에서 옮겨가더라도 기꺼이 찾아주신다면 저도 뭐... 아무튼...

6. 지미나 엘라의 버전을 링크한 이유는 비교해서 들으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곡이 얼마나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지에 대한 반증으로서 한 링크이기 때문에 어느 버전이 더 좋다거나 무슨 차이가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접어두시고 그냥 들어주셨으면 한다.



Cream- Sunshine of Your Love





Jimi Hendrix - Sunshine of Your Love - Live Stockholm '69





Ella Fitzgerald, Sunshine of your love

아님 말고 1000곡(100)

* 요 게시물은 100번째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만, 그와 전혀 관계없지 않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과거 이 게시물들을 시작할 때 비흑인음악적인 서구 대중음악의 뿌리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거창한 이야기를 했음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100번째 이야기를 하며 맨 처음 아일랜드를 비롯한 북유럽의 음악에서(특히나 아일랜드의 음악) 그 기원을 찾으려 했던 나름대로의 의도를 다시 명백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로 인해 100번째의 이야기는 다시 아일랜드의 음악으로 돌아가 봅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본문을 보시면 당근 아시게 되겠지요.



100. I don't know Etc. -Lisa Hannigan(2008)-

2008년 우리 모두는-솔직히 티렉스만- 아일랜드발의 엄청난 재능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역사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Damiena Rice의 밴드에서 리드 보컬리스트로 활동을 하던 다중악기 연주자이며 뛰어난 보컬리스트이자 작곡자인 리사 해니건(Lisa Hanigan)의 솔로 앨범인 "Sea Sew"을 들고 서구의 대중음악계에 정말 이지 "대단한 포스를 뿜어대며" 등장한 것이다. 전에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음을 한탄하고 있었지만 가히 그의 앨범은 2008년 서구지역에서 출반된 데뷔 앨범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음악적 성취를 이룬" 음반이라 할 수 있었다. 어둠의 경로는 아니고 빛의 인도하심으로 접하게 된 그의 앨범의 첫 트랙에서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한숨에 들어내려가는-이런 표현이 있기하 한가?- 동안 정수리에서 땀 한방울이 흘러내려 그 것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했덜댔다. 2008년 출반된 데뷔 앨범들 중에서 베스트라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을 정도지만 역사상 등장했던 가장 충격적인 데뷔 앨범들 중 스무 장을 꼽으라면 그 안에 당연히 들어갈 정도의 음악적 신선함과 신선함을 뒷받칠 수 잇는 음악적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 서구 대중음악의 "지난한 물음들에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대중음악계 전체에 던지는" 스스로의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음악적인 이슈거리를 품고있는 음반이었던 것이다.



2008년 발매된 "Sea Sew"의 상업적인 결과는 앨범차트를 기준으로 아일랜드 차트에서 3위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35위 전영 차트에서 58위를 기록했다. 까놓고 아일랜드의 음반시장이 작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리사 해니건의 상업적 성취를 두고 성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죄송하지만 아닙니다."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앨범은 Plinky Plonk Rock이라는 장르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장르의 범주에 속하게 하는 데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상업적 성공과 단순한 1대1 비교를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Damien Rice의 밴드와 함께할 때부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가 데미언의 팀을 탈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솔로 프로젝트를 준비중이라는 이야기가 사실로 밝혀졌을 때 아일랜드 음악을 주목하던 서구의 수많은 대중음악 전문가들은 "과연 리사 해니건의 솔로 음반은 어떤 수준의 음악을 들려줄까?"에 대한 기대감을 "순전히 자기들 맘대로" 마음껏 부풀리고 있었다. 그래! 말씀드리는 김에 까발리자면-끝까지 밝히지 않으려 했으나 리사의 음악성에 비해 공화국에서의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밝혀야만 할 것 같다. 줴길- Gary Lightbody는 다들 아실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여러분들이 무지하게 좋아하시는 의 출연자이다. 아무튼 리사는 게리와 함께 "Some Surprise"이라는 곡을 듀엣으로 불렀는데 이 곡은 공정무역을 위한 캠페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표된 곡으로서 서구사회에서 리사 해니건은 이런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인물로도 유명하다. 아! 리사 해니건의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데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설명이 장황해진다.(빌어먹을 놈의 롤링스톤... 리사 해니건의 Sea Sew에 대한 리뷰가 없다니...) 줴길



"a moan of delicate strength, and stirring warmth and humanity" 영어 울렁증 때문에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해외의 팝저널들은 리사 해니건의 음악적 스타일에 대해 이런 간략한 수사를 사용하며 대단히 문학적이고 모호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리사 해니건에 대한 이런 레토릭은 일반적으로 아무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굳이 해석을 원하신다면 "섬세한 힘을 가진 읖조림과 감동적인 따뜻함과 인간미"라 하겠다. 이런 수사는 아일랜드 음악의 보편적 특성에 대한 수사일 수도 있을테지만, 아무튼 리사 해니건의 곡들을 들어보면 이 이상의 수사는 필요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리사 해니건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Plinky Plonk Rock이라 불리는 장르에 대한 평가와도 맥을 같이 한다 할 것이다. 리사 해니건에 대한 독특한 사실 중 하나는 그가 무대나 스튜디오에서 주로 다루는 악기가-미리 말씀드렸다. 리사 해니건은 다중악기연주자라고- 대단히 오래된 아일랜드의 악기로서 마치 인간이 심장에 대단한 무리를 느껴 숨이 넘어갈 때 나는 듯한 소리를 내는 고음역의 악기인 "broke-down"이라는 점이다. 이 악기는 대단히 크기가 큰 악기인데 그의 밴드 맴버들의 도움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라 한다는데 리사 해니건의 블로그에 보면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설마 티렉스가 링크를 걸리라고 상상하시진 않았지?) 리사 해니건은 이미 Damien Rice의 리드 보컬리스트로 있을 때부터 노래와 연주를 병행하여 왔고 작곡이나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 못지않게 연주자로서의 능력도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걔들이 그렇다니...)



Damien Rice의 밴드의 보컬리스트로서의 활동으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여온 리사 해니건은 그가 불과 스무살 때인 2001년 더블린의 Temple Bar Music Centre에서의 무대에 서면서 정식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했고(물론 Rice의 밴드와 함께이다.) 그 뒤로 6년간이나 Damien Rice의 밴드에서 활동한다. 보컬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2년에 발매된 Rice의 솔로 음반 작업에 참여하면서였고 2003년 Glastonbury Festival의 무대에 서면서 영국과 아일랜드 쪽에선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하게 된다. 아무튼 각설하고 이 Damien Rice이라는 이름의 팀의 리더는 보통의 팀의 리더들이 그렇듯, 만만치 않은 성격을 가지신 분이라 팀의 다른 멤버들과의 사이가 결코 매끄럽지 않았고 어인 이유인지는 모르지만-사실은 알고 있으나 귀찮아서 생략하도록 한다.- 리사 해니건과 유난히 껄끄러웠다고 한다. 그렇게 Rice와의 불화가 공공연한 사실이 될 무렵 리사 해니건은 2006년 펜타포트 페스티벌 때 내한한 경력도 있는-전에 이들의 사진이 휴대전화에 있었으나 그 휴대전화가 먹통이 되고 새 전화로 바꾸고 하는 과정에서 사라져벼린 안타까운 사실도 있다.-Snow Patrol의 프런트 맨-공화국의 아이돌 그룹처럼 기획자들이 "네가 이 팀의 리더야!라고 정해주는 일이 없는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 언론에서는 리더라는 말보다 Front man이라는 표현을 더 보편적으로 사용하니 외워두시면 유용하게 쓰실 수 있을 것이다.- Gary Lightbody(그 놈 성 참 희한하기도 하다.와 듀엣으로 음반을 발표하고 그 수록곡들이 공화국의 미혼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한 미국의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물인 에 등장하면서 미국에서의 인지도도 넓혀가게 된다.(그러니 솔로로 독립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2008년 자신의 솔로 앨범이 정식으로 발매되기 이전, 리사 해니건은 이러저러한 비공식 혹은 공식 무대에서 클래시컬한 포크나 Rock and roll 넘버들을 자신의 독특한 해석으로 불러 대중들의 환호를 받았는데 이 때 주로 불렀던 곡들은 조니 미첼, 니나 사이먼(Nina Simone), 제니스 조플린(링크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리사 해니건이 제니스의 곡을 어떤 식으로 불렀는지는 나도 궁금해 미치겠다.)등의 곡이며 심지어는 로이 오스본의 곡까지 불렀다고 하니 리사 해니건은 짐작컨데 대단히 유연한 성대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물론 아니면 말고, 이런 식으로 무대에 자주 서다보니 리사 해니건은 결국 자신의 밴드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밴드의 이름은 The Daisey Okell Quartet이라고 한다. 아직 음반이 나온 상태는 아니었지만 리사는 그의 밴드와 함께 Electric Picnic Music Festival의 무대에 섰으며 이 때 대중들은 "아! 리사는 이제 솔로로 독립할 것이 분명하구나"라고 생각했다 한다. 이 것이 2006년의 일이다. 그리고 그 해 리사 해니건은 게스트 보컬리스트로서 Mic Christoper, The Frames and Herbie Hancock(상상해보시기 바란다. 겨우 스물다섯살의 아일랜드 출신의 여가수가 이 대가의 음반에 게스트 보컬리스트로 참여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Damien Rice와의 마지막 작업이 된 그의 밴드의 앨범인 Possibilities의 녹음작업에도 참여하게 된다. 드디어 대망의 2007년, Damien Rice군은 공식적으로 자신과 리사 해니건과의 음악적 관계가 종말을 맞이했음을 선언하게 되고 기다렸다는 듯이...는 아니지만 2008년 리사 해니건은 자신의 솔로 앨범인 Sea Sew을 들고 대중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추신>

1. 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일부러 여기서 끝을 내는 이유는 그의 솔로 커리어는 아직 진행중인데다 음악적으로 리사 해니건이 어떤 공과가 있다고 이야기하기엔 과도하게 이른 시점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 과감하게 여기서 이야기를 끝맺기로 합니다.

2. 링크시킬 곡 중에 Jason Mraz의 히트곡인 Lucky를 제이슨과 (어느 무대에서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같이 불렀던 동영상이 있습니다. 원래 이 트랙은 JM이 콜비 카일라(Colbie Caillat)와 듀엣으로 부른 곡인데 제 생각엔 (리사 해니건과 같이 부른 것을 과도하게 열심히 들어본 결과) 왜 그렇게 리사 해니건이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게스트 보컬로 참여했는지를 짐작할만합니다.

3. 가치판단은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과거 크렌베리로 아일랜드의 음악을 기억하실 분들이라면 생소하겠지만 리사 해니건의 음악이 아일랜드 음악의 원형에 더 가깝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입니다.

4. 아마 혹시 티렉스로 인해 리사를 알게된 분들은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저 새끼 때문에 쓸데 없이 뇌용랑만 더 쓰게 되었다고 생각하시거나, 남들보다 리사 해니건을 조금 더 빨리 알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게 되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가 발생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전 후자가 될 것이라 자신있게 말씀드립니다.

5. 이 게시물은 100번째 게시물이긴 하나 "특집"은 아닙니다. 그 것은 다음 게시물부터 몇 개가 될 것입니다. 물론 관심은 없으히겠지만...



Lisa Hannigan - I Don't Know



Lisa Hannigan - Lille (official video) - please click view in higher quality below this youtube box



Lisa Hannigan - Sea Song



Lisa Hannigan AN OCEAN AND A ROCK with LYRICS



"Lucky" - Jason Mraz feat. Lisa Hannigan





아 씨발! 이 게시물 올리고 이건희가 집유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분 좆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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