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7일 일요일

Soundless Music. 표절의 몇가지 얼굴들





1. Say hot hot hot hot hot hot hot
인터넷 세상에선 요 근래에 정운찬의 총리지명과 그의 양파와 같은 까면 깔수록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의혹 투성이가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가요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YG Entertainment 소속의 가수들의 곡들에 대한 표절시비였을 것이다.(참 대단한 일이다. 가수의 곡에 대한 표절시비도 아니고 가수"들"의 곡"들"에 대한 표절시비라니...) 말하나마나 이렇게까지 뜨거운 이유는 그들이 2009년 봄부터 가을에 접어든 이 시점까지 그 누구보다 독보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면 이런 일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래저래 양군이 애지중지 트레이닝시킨 대표선수들은 Hot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YG Hot뜨거~" 하지만 솔직히 난 별로 씁쓸한 기분이 아니다. 이만큼 가요-누구는 대중음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하여 다른 사람을 팬 경우도 있다 하더만-라는 것이 사회적인 이슈를 선점한 것 자체가 워낙 오래된 일이기 때문이다. 나같은 사람은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일로라도 말 그대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 음악"이 되는 것 자체를 즐길 수밖에 없다.

2. 표절의 딜레마
역사적으로 "심각한 표절의 문제가 경제적인 이유로 제기된 것"의 대표적 사례를 꼽으라면 비틀스의 조지가 자신의 솔로곡으로 발표하여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뒀던 "My sweet lord"였을 것이다. 그 사건이 몇년이었는지 고소인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이 확실하지 않으나 귀찮은 관계로 그냥 넘어간다. 한 시대가 아닌 몇 시대를 앞서갔던 혹은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던 비틀스의 멤버였던 조지로서는 모양 빠지는 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애석하게도 조지는 이 소송에서 패했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피해보상을 해야만 했다. 이 사건이 대중음악의 역사 혹은 대중문화의 역사에 있어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표절이라는 것이 더 이상 "예술가의 양심"의 문제며 도덕적 비난을 받는 일이 되는 대신 "민법상의 범죄행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표절이라는 것은 아주 우스운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예술이나 문화의 문제를 그와는 대단히 거리가 먼, 심지어는 대척점에 있는, 법과 제도에 의해 해결할 수밖에 없는"것이 자연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것이 바로 표절의 딜레마인 거싱다.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적 양심"이나 "예술 이론적 판단"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판사의 판단"이 표절이라는 문제의 최후의 심판이 되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아티스트 스스로의 양심이나 최소한의 동업자 의식은 법의 뒷전으로 밀리게 된 것이다.

3. Free of Plagiarism or Free from Plagiarism
누군가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폴 매카트니 이후로 대중음악에 있어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고... 좀 더 관대하게 본다 하더라도 엘튼 존 이후의 소위 싱어 송라이터들은 "멜로디를 가지고 승부를 거는 것"에 대해 자신감을 잃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팔리는 곡"을 쓰다보면 "가능하다면 익숙하게 들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여덟마디 심지어는 네마디의 훅 하나만 만들어놓으면 나머지는 DJing이나 믹싱 등을 이용하여 래퍼의 역량으로 곡을 만드는 방식의 직업인 힙합 음악을 쓰는 데에 있어 음악의 기본은 멜로디이며 그 점에서 음악의 순수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사실상 "그 순수성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비웃을 수 있는 방법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간혹-사실은 매번-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네 생각은 어떠한가?"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 때마다 내 답은 일정하다. 1. 표절시비가 붙었는데 법정에 가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고소를 하고자 하는 측에서 표절 혐의를 입증하기 힘들거나, 피고와 권고가 타협을 하는 경우인데 이 경우는 어쨌건간에 결론적으로 표절이 아니다. 2. 법정에 가게 될 경우 법원에서 표절 판정이 난다면 당연히 표절이고 법원에서 표절이 아니라 한다면 정서상 10000명 중 9999명이 표절이라 주장한다 하더라도 표절이 아니다.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음악을 많이 들을수록 그리고 많이 알게 될수록 표절여부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하기 힘들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라는 이야기!

4. Some guys are damn idiot
심정적으로 이 곡이 표절곡이라는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심지어 그 확신이 100%이라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 확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른바 "전문가"들에게도 일종의 금도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여태까지 했던 것 같은데, 이 와중에도 "진짜 바보"들은 있을 수밖에 없다. 우선, 모 가수들의 팬이 "씁쓸한 요즈음의 표절에 대한 시비를 보며 그를 생각했다"라고 하며 그는 마치 표절과는 절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세히 이야기하긴 그렇고, 그 이전에 표절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완전히 그 가수가 맛이 가던 시기를 "어떤 방식으로든 넘어가게 된" 계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 누구며 그 이후로도 항상 표절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의 팬들이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이미 감상자들의 문제를 떠나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표절이라는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거성"이라는 이름으로 모 버라이어티 쇼에서 맹활약하시며 공화국에서 가장 오래된 FM 음악프로그램의 판돌이(DJ)일을 하시는 P모씨와 같은 바보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요즘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가 가장 바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것은 그가 개그맨이기 때문에 자신의 분야가 아닌 문제에 대해 떠들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자신의 의견을 조금 격하게 표현해서도 아니다. 그 이야기를 어찌하여 그 날의 게스트였던 C모 그룹의 B모 가수에게 하며 그에게 동의를 구훘기 때문이다. 이 천하의 바보 거성선생은 B가수와 C그룹의 전력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던 것에 분명하다. 이 친구들은 그냥 그대로 일본 곡을 가져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히트곡은 대부분 일본 곡들인 것이다. 어떻게 하여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여러분들의 상식 선에서 생각하시게 되더라도 충분히 이해되시리라 믿는다. 한 마디로 우리 집 옆골목의 아저씨에게 "군사구테타 하는 놈들은 다 죽일 놈들이지요? 그렇죠?"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그 프로그램의 질이 과거에 비해 턱없이 구려졌다 하더라도 그런 전통있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라면 최소한 그 정도 생각은 미리 했어야 한다. 대책이 절대 서지않는 천하의 바보 거성선생님! 플리즈... 게스트들에 대한 최소한의 사전지식을 갖춰야하지 않겠습니까?

5. 굳이 결론을 원하신다면...
(1) 우선 표절의 문제가 이미 "경제적 접근에 기초를 둔 법률의 문제"가 되었다는 점
(2) 이미 법적인 단계로 넘어가려는 조짐이 보이는 문제에 "아무리 전문가라 하더라도 사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데에는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점
(3)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원곡이라 주장하는 곡들에 대한 권리 침해"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만일 그 곡들이 그냥 그대로 원작자들의 이름으로 팔렸다면 그만큼 팔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는 점
(4) "베이스라인이나 BPM등이 상이한 것은 인정되나 동일조건으로 놓고 본다면 원곡을 차용했다고 판단된다."는 이야기는 "기계적 판단에 의한 표절은 아니나 의혹이 짙다"는 것과 동의어인데 왜 하필이면 이런 모호한 표현을 가지고 "경고장"까지 보냈을까? 표절을 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 것은 두가지 점을 시사한다 할 것이다. 우선, 표절문제는 원고측이-즉 고소인측이- 자신들의 손해를 입증해야 하는데 갈수록 여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 이미 과거처럼 "무대포식의 베끼기"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
(5) 네 의견은 어떤 것이냐?라는 질문을 하신다면 이렇게 이야기해드릴 것이다. "단순한 Yes, No에 대한 답을 내리지 않기 위해 이렇게 돌아왔는데 지금 와서 표절인지 아닌지를 이야기하라고? 내가 바보야?"

2009년 9월 25일 금요일

아님 말고 1000곡(102) "이사기념"

102. Grace Kelly-Mika(2007)-

혹시 이런 일이 공화국에선 가능할까 생각해본다. 음악에 10대부터 천부적 재능을 보인 아들이 있다. 이 아들이 드디어 음반을 내고 전세계적 주목을 받아 얼마전 경북 예천에 나왔던 60년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용궁마을에 살다 서울 강남에 지문인식을 해야만 출입이 가능한 무지막지하게 좋은 아파트를 구입했는데 "예술가는 지나치게 안락한 환경에서 생활아면 안되니 그 집을 처분하고 다시 시골로 돌아오길 바란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엄마가 존재할까? 그리고 그 말에 공감하여 다시 자신이 살던 60년대 풍의 용궁마을로 돌아오는 아들은 더우기 존재 가능할까? Never... 그런데 그런 일이 영궁에선 가능했다. 즉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위의 일은 지명만 바꾸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예천의 용궁마을을 아니라 런던의 싸구려 호텔로 강남의 아파트를 로스 엔젤리스의 아파트로 바꾸면 이 이야기는 fact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1983년 8월 18일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Michael Holbrook Penniman이라는 다소 재미없는 이름으로 태어났고 지금은 런던에 거주하며 그 재미없는 이름보다는 Mica Penniman, Mika Penniman, Mika, MIKA등으로 알려진 현재 전세계 대중음악 Scene에서 가장 주목받는 천재 뮤지션이며 드디어 1980년대 생들 중에서도 대가의 가능성을 보이는 뮤지션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음을 보여주기 시작한 인물이기도 한 미카의 실제 이야기이다. "Life in cartoon motion"이라는 데뷔앨범을 통해 앨범의 모든 수록곡 전체가 전세계에서 1분도 쉬지 않고 음악방송이나 광고음악으로 울려퍼지고 있는 바로 그이다. 공화국에선 그의 보컬이 나오기 직전에 음악이 페이드 아웃되는 "Happy ending"과 "Big girls(you are beautiful)"으로 "과도하게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일단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자면 그가 천재라 불리는 이유는 "장르에 관계없이 자신이 음악 자체를 가지고 놀 줄 아는 오랜만에 나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음악을 진지하고 엄숙하게 하는 것은 어찌보면 대단히 쉬운 일이다. 한 장르에 빠져 그에 대해 대단한 지식과 재능을 쌓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 뒤에 나온 음악들이 장르의 정신과 장르의 문법에 충실하고 좀 더 심하게 이야기해서 장르의 클리쉐이까지 답습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좋은 음악이 반드시 어려운 음악은 아니며 되도록이면 음악적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대중성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대단히 쉽게 만들 수 있어야 뮤지션의 재능이 진정 돋보인다는 점을 입에 게거품을 물고 주장하는 부류에 속한다. 글고 그런 개인적인 신념에 미루어 미카와 같은 뮤지션이 많이 나올수록 세상은 명랑해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미카라는 친구의 음악을 들어보면 도대체 이 사람의 머리엔 중간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기나 할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말 그대로 "자신이 하고싶은 바로 그대로 음악을 하는 친구"라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 미국에서 미카와 비견할만한 음악-개인적으로 하이브리드 음악이라 부른다.-을 한다 할 수 있는 제이슨 므라즈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르의 음악을 자신의 마음대로 섞고 또 섞어 제이슨 므라즈표의 음악을 만든다 한다면 미카라는 이름의 이 친구는 애초에 장르의 문법 자체 따위는 안중에ㅔ도 없다는 식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다. 다른 말로 설명을 하자면 "이런저런 장르에 능통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음악 자체를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뮤지션"이라는 정도의 기술 밖에는 다른 설명이 힘들다는 식으로의 설명이 가능하다고나 할까?

이런 그의 음악을 위키피디아에선 Power Pop이라는 수식어로 설명하고 있다. 전형적인 Rock 음악의 비트에서 벗어나 있으나 팝음악의 비트라 하기엔 킥-보통 베이스 드럼이라고도 한다.-의 현란한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21세기의 음악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멜로디"를 구사하나 베이스라인의 화려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그런 음악이다. 그의 개인적 성장과정에 대해선 나중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생략하나 분명, 21세기적 풍토에서 음악을 접하고 그를 바탕으로 하여 음악을 시작한 2010년대의 트랜드를 미리 짐작해볼 수있는 음악이라 하는 것이 가장 속편한 이야기 되시겠다. 올해 발매된 새 앨범인 "The boy who knew too much"를 아직 제대로 들어보지 않은 것이 대단히 아쉽지만 각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미카의 10대의 꿈들을 음악으로 만들었다 하니 반드시 들어본 후 그 앨범에 대한 리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직 그의 절정기가 아니라 생각되므로 그의 음악에 대한 종합적 평가는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이 드나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반드시 들어봐야할 음악을 구사하는 뮤지션"이라는 점엔 이의가 없을 듯하다.

"Grace Kelly"

"Big girls(You are beautiful)"

Soundless Music-나는 빠순이 언니들이 존경스럽다.-

갑자기 빠심으로 똘똘 뭉친 빠순이 언니들이 존경스러워졌다.



어제 조카들을 데리고 I Concert에 다녀왔는데, 정말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공화국에 얼마나 될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 말이 컨서트이지 거의 실상은 공개방송이며 그렇게 힘들게 기다리고 난리를 쳐봤자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는 기껏 두곡을 부르고 많아야 세곡을 부르는 것에 불과한데 그 시간을 그다지 편하지 않은 자리에서-도대체 이 정도의 형편없는 좌석을 가지고 어떻게 올림픽을 개최한 경기장이라 할 수 있는지 생각만 해도 한심스럽다.- 근 다섯시간을 앉아있을 수 있는 것이 가능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든 생각은 과연 이런 일들에 대해 어떤 payoff이 생긴다 하더라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다.



도뎍 교과서의 톤으로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적 환경이 조성되어있지 않으면 수만의 청소년들이 그런 일을 할까?"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는 것이 옳은 일이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런 현장에 가보게 되면 아직도 공화국의 대중음악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음반시장의 불황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이란 말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티렉스의 조카들의 특성상 특정 가수-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신화-를 응원하러 간 조카들의 보호자로서 간 것이고 당연히 그들의 팬들이 모여앉아있는 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그들의 앨범을 하나씩 소지하고 있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입장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 그 정도만 되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임을 감안한다면 도대체 이 끝도 없는 음반 시장의 불황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안 팔리는 사람들은 무지하게 안 팔린다. 빠순이들이 "빠심"으로 판을 사주지 않는 사람들은 안 팔리는 것 아닌가?라고 말씀하실 줄 안다. 하지만, 단순히 그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그 정도의 인워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동원할 힘이 있다면 아직 가요계의 상황이 그다지 절망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음에도 불과하고 가요계가 가진 잠재력과는 별개로 음반시장은 완전히 죽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대단히 죄송스럽게도 이 시점에서 "밤의 주둥아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들이 해대는 수많은 자기 합리화는 100번을 다시 생각해 본다 하더라도 결코 합리화 될 수 없는 그저 변명에 불과한 이야기들이다. 아무리 그들이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위는 도둑질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는 녀석의 블로그에 그 녀석이 음악은 CD로 듣는 것이 더 좋다는 내용의 포스팅을 한 적이 있는데 어떤 분이 덧글로 "더 넓은 음악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나와라"라는 류의 이야기를 하신 것을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 보더라도 더 넓은 음악세계를 접하는 것과 인터넷에서 음악을 다운받아 듣는 것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음악을 듣는 목적에 부합하게 인터넷을 사용하고 싶으시다면, 전세계에 고루 퍼져있는 음반 쇼핑 사이트를 이용해서 정품 CD를 구입하시는 데에 이용하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만일 음악이 없이는 블로그도 없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 분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음원의 불법 공유가 당신의 블로깅의 목적인데 그 것이 불법이라면 과감하게 블로깅을 때려치시라고...



뜬금없는 이야기가 된 것 같지만 다시 빠심을 가진 빠순이 언니들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차라리 그들처럼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은 언제든지 정품으로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공화국의 인구수 만큼만 있다면 지금의 최악의 불황을 뚫고 나올 수 있는 계기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 불황을 타파하는 것이 "음악의 다양성의 확보"라는 문제까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최소한 이 최악의 상황은 벗어나야 지금보다 한 해에 발매되는 음반의 절대 숫자가 늘어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 출시되는 음반의 음악적 다양성이라는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주목하셔야 할 것은 음원의 불법공유라는 범죄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흔히 이야기하는 "매니아층"이라 불릴만한 사람들의 비중이 압도적이라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2005년 7월 10일 네이버 블로그

Soundless Music-Rolling Stone-

Rolling Stone을 모르시는 분들은 흔치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워낙 수많은 종류의 잡지가 쏟아지고 있는 미국이지만, 미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있는 잡지를 꼽으라면 최소한 20위 안에는 언제든지 존재할만한 잡지인데, 사실 공화국의 정서에 근거해 판단하자면 종합연예지가 이 정도의 권위를 가지는 일이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이 롤링스톤이라는 잡지는 항상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저널리즘의 하나임을 그들 스스로 자부하고 있으며 그들의 자부심과는 무관하게 나름대로 최대한의 객관적인 시각을 통해 보더라도 롤링 스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 근거없는 자만심이라고 할만한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위 사진은 몇월호였는가는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으나 지금은 불귀의 객이 된 카렌 카펜터가 자신의 오빠와 함께 활동하던 듀오밴드인 "카펜터즈"가 표지를 장식한 1974년의 어느 달의 롤링 스톤이다. 롤링 스톤의 역사는 이미 수십년에 이르고 있으니, 1974년 발간된 잡지를 인터넷에서 발견했다해서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겠으나,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는 카렌 카펜터의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인터넷"이라는 것이 가끔은 고마울 때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것은 롤링스톤이 가지는 나름의 권위와 공화국의 저널리즘에 대한 이야기 정도가 될 것이다.



과거 "플레이 보이"(지인들 사이에선 이를 '노는 소년'이라고 부른다.)의 인터뷰 기사가 나름대로 "영양가 만땅"인 알찬 내용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서는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왜 플레이 보이에 대한 이야기인가?"라고 반문을 하실지 모르지만, 롤링스톤이 나름대로 쌓아온 권위라는 것과 플레이 보이의 영양가 만점의 인터뷰 기사가 나름의 가치를 가지는, 혹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모두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플레이 보이에 대해서 언급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것은 아마도 정말 집요하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그들의 "취재원에 대한 철저한 준비"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플레이 보이의 과거 "밀튼 프리드먼"이나 "존 레넌"-이 두 명에 대한 인터뷰는 아마도 인류가 인터뷰라는 것을 하나의 저널리즘 고유의 기사작성법으로 인식한 이래로 가장 훌륭한 인터뷰의 목록에 항상 끼일 수 있는 인터뷰라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훌륭했던 인터뷰라 생각하는 "피트 로즈"에 대한 인터뷰를 보면 간파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취재원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대단히 장시간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어를 읽는 속도가 영어를 말하는 속도보다 느리다는 것을 감안하면서 보더라도 최소한 5시간 이상의 인터뷰가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의 분량의 인터뷰 기사의 양을 보면 그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정도의 장시간을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정도의 긴 인터뷰를 통해 많은 것을 얻어낸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나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 쪽의 기사가 어떻게 작성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으니 언급하기 곤란하지만 최소한 "대중음악"에 관련된 기사를 작성할 때의 "롤링스톤"의 철저함은 플레이 보이의 인터뷰 기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의 밴드가 "전미 순회공연"을 한다거나 "동부 몇개 주 순회공연"을 할 경우 롤링 스톤은 자신들의 리포터를 투어가 시작되기 전의 준비과정에서부터 투어가 끝나는 바로 그 시점까지 파견하여 그들의 투어 전체를 취재하도록 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아시는 분들은 아실 내용이지만, 워낙 세칭 딴따라라 불리는 사람들의 성격이 괴팍하고 그들의 사교성 없음이 극에 달해있는지라 "<롤링 스톤>의 리포터이니 취재에 협조해달라"는 말 따위가 통할 리가 없다. 즉 투어를 떠나는 밴드의 멤버들과 친해지기 시작하는 것부터가 잡지의 리포터가 해야할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멤버들과 때로는 같은 버르나 비행기로 이동하기도 하며 나름의 친분을 쌓기 때문에 그 자체가 "기사의 객관성"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으나, 최소한 그 팀에 대한 나름의 심도있는 이야기들-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음악적인 배경들에 대해-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엄청난 장점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공화국의 방송이건 잡지건 신문이건 넘쳐나는 것이 인터뷰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가끔씩 지나간 롤링 스톤을 보며 드는 생각은 "국내 언론들의 인터뷰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사 작성에 있어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취재원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널이라는 것이 모든 기사를 다 100퍼센트의 힘을 들여 쓸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 일이지만 가끔 화제가 되는 인물의 인터뷰가 매체의 수만큼 다른 내용르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체의 수만큼의 같은 인터뷰를 반복확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나 "기사의 제목까지 같은 일간지들의 헤드라인"을 볼 때면 "저널리즘의 태도라는 것이 왜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인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2005년 5월 21일 네이버 블로그

Soundless Music-Rolling Stone-

Rolling Stone을 모르시는 분들은 흔치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워낙 수많은 종류의 잡지가 쏟아지고 있는 미국이지만, 미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있는 잡지를 꼽으라면 최소한 20위 안에는 언제든지 존재할만한 잡지인데, 사실 공화국의 정서에 근거해 판단하자면 종합연예지가 이 정도의 권위를 가지는 일이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이 롤링스톤이라는 잡지는 항상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저널리즘의 하나임을 그들 스스로 자부하고 있으며 그들의 자부심과는 무관하게 나름대로 최대한의 객관적인 시각을 통해 보더라도 롤링 스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 근거없는 자만심이라고 할만한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위 사진은 몇월호였는가는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으나 지금은 불귀의 객이 된 카렌 카펜터가 자신의 오빠와 함께 활동하던 듀오밴드인 "카펜터즈"가 표지를 장식한 1974년의 어느 달의 롤링 스톤이다. 롤링 스톤의 역사는 이미 수십년에 이르고 있으니, 1974년 발간된 잡지를 인터넷에서 발견했다해서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겠으나,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는 카렌 카펜터의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인터넷"이라는 것이 가끔은 고마울 때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것은 롤링스톤이 가지는 나름의 권위와 공화국의 저널리즘에 대한 이야기 정도가 될 것이다.



과거 "플레이 보이"(지인들 사이에선 이를 '노는 소년'이라고 부른다.)의 인터뷰 기사가 나름대로 "영양가 만땅"인 알찬 내용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서는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왜 플레이 보이에 대한 이야기인가?"라고 반문을 하실지 모르지만, 롤링스톤이 나름대로 쌓아온 권위라는 것과 플레이 보이의 영양가 만점의 인터뷰 기사가 나름의 가치를 가지는, 혹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모두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플레이 보이에 대해서 언급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것은 아마도 정말 집요하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그들의 "취재원에 대한 철저한 준비"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플레이 보이의 과거 "밀튼 프리드먼"이나 "존 레넌"-이 두 명에 대한 인터뷰는 아마도 인류가 인터뷰라는 것을 하나의 저널리즘 고유의 기사작성법으로 인식한 이래로 가장 훌륭한 인터뷰의 목록에 항상 끼일 수 있는 인터뷰라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훌륭했던 인터뷰라 생각하는 "피트 로즈"에 대한 인터뷰를 보면 간파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취재원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대단히 장시간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어를 읽는 속도가 영어를 말하는 속도보다 느리다는 것을 감안하면서 보더라도 최소한 5시간 이상의 인터뷰가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의 분량의 인터뷰 기사의 양을 보면 그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정도의 장시간을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정도의 긴 인터뷰를 통해 많은 것을 얻어낸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나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 쪽의 기사가 어떻게 작성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으니 언급하기 곤란하지만 최소한 "대중음악"에 관련된 기사를 작성할 때의 "롤링스톤"의 철저함은 플레이 보이의 인터뷰 기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의 밴드가 "전미 순회공연"을 한다거나 "동부 몇개 주 순회공연"을 할 경우 롤링 스톤은 자신들의 리포터를 투어가 시작되기 전의 준비과정에서부터 투어가 끝나는 바로 그 시점까지 파견하여 그들의 투어 전체를 취재하도록 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아시는 분들은 아실 내용이지만, 워낙 세칭 딴따라라 불리는 사람들의 성격이 괴팍하고 그들의 사교성 없음이 극에 달해있는지라 "<롤링 스톤>의 리포터이니 취재에 협조해달라"는 말 따위가 통할 리가 없다. 즉 투어를 떠나는 밴드의 멤버들과 친해지기 시작하는 것부터가 잡지의 리포터가 해야할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멤버들과 때로는 같은 버르나 비행기로 이동하기도 하며 나름의 친분을 쌓기 때문에 그 자체가 "기사의 객관성"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으나, 최소한 그 팀에 대한 나름의 심도있는 이야기들-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음악적인 배경들에 대해-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엄청난 장점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공화국의 방송이건 잡지건 신문이건 넘쳐나는 것이 인터뷰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가끔씩 지나간 롤링 스톤을 보며 드는 생각은 "국내 언론들의 인터뷰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사 작성에 있어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취재원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널이라는 것이 모든 기사를 다 100퍼센트의 힘을 들여 쓸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 일이지만 가끔 화제가 되는 인물의 인터뷰가 매체의 수만큼 다른 내용르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체의 수만큼의 같은 인터뷰를 반복확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나 "기사의 제목까지 같은 일간지들의 헤드라인"을 볼 때면 "저널리즘의 태도라는 것이 왜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인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2005년 5월 21일 네이버 블로그

Soundless Music-Long live rock 'n' Roll-

도대체 이와 같은 제목으로 천리안 나우누리를 사용하던 시절부터 몇 번이나 게시질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 곳 네이버에도 어김없이 이 제목의 포스팅을 하는 것을 보면 저 제목을 누구들 말마따나 "우라지게" 좋아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갑자기 저 문장이 떠오른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어제 무려 1년 4개월만에 보는 누군가와의 약속 때문에 그다지 잘하는 짓은 아니지만, 집에서부터 홍대입구까지 택시를 타게 되었다.-보통은 걸어다니는 거리이다.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홍대입구 지하철역까지는 기껏해야 도보로 25분이 소요되는 동네에 살고 워낙 걷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그 거리는 언제나 항상 걸어다니는 거리로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가끔은 연희동에서 서대문이나 시청까지 걷기도 하니 그 정도는 우스운 거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사실 그다지 택시를 타야겠다는 마음은 없었으나 아시는 분들은 다들 아실 티렉스의 가장 무서운 적인 "살인적인 추위"로 인해 20분에 한대씩 다니는 버스를 기다리는 일 조차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금요일에서 토요일에 이르는 시간에 밤샘을 한지라 그 날씨에 도보는 정말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상태가 좋지 않은 카스테레오는 처음인 것 같았다. 휴대전화의 상태가 가장 나쁠 때 통화 내용이 뚝뚝 끊기는 것과 같은 그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전문용어로 "줴길"이라 한다. 어쨌든 차가 그다지 막히는 편은 아니었으나 상태가 좋지않은 카스테레오로 짜증이 날 즈음 이상하리만치 귀가 간질간질한 생각이 들어 귀를 "쫑끗" 세우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에 집중을 하기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것이 웬 떡이란 말인가! 방송에서 나오고있는 노래는 바로 "Rainbow Rising"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뚝뚝 끊기는 소리에 짜증이 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택시를 타고 있을 때 그 곡을 듣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닌 관계로 노래를 따라부르며 나름대로 "역시 배철수 형님!"을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물론 속으로만 외쳤다. 아마 그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큰 소리로 밖에 내었다가는 택시기사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라 하더라도 그다지 저항할 명분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목적지에 내리기 전에 이 곡을 다 듣고 내릴 수 있겠군... 음하하하' 그런데 문제는 이 곡이 다 끝나고 난 후에 발생했다.

이 곡을 바로 뒤이은 곡이 바로 "Long Live Rock and Roll"이었던 것이다. 메가쇼킹 만화가식의 표현을 빌자면 "상쾌함 1000000g"짜리의 사고가 아닐 수 없었다. 아직 목적지까지는 조금의 여유가 있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아저씨! 볼륨 무지하게 올려주세요!" 이럴 때 난 공화국의 서비스업계가 발전했음을 느낀다. 기사 아저씨가 그다지 큰 저항 없이 볼륨을 크게 올려준 것이었다. 진정한 서비스 정신이란 이런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때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홍대입구 전철역 5번 출구 근처를 지나는 순간 뚝뚝 끊기던 방송의 수신상태가 갑자기 엄청나게 좋아지는 것이 아닌가!-물론 엄청나게 좋은 음질이었다거나 하는 뻥을 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최소한 듣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원래는 홍대입구 지하철역 6번출구 근처에서 U턴을 하여 지하철 입구에 내릴 계획이었지만 -아시는 분들은 아실 것이다. 그 장소에서 U턴이 된다는 것을...- 갑자기 "아저씨 여기서 U턴하지 마시고 홍대 정문쪽으로 좌회전 해주세요!" 라 외친 것이었다. 물론 목적은 당근 곡을 끝까지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좌회전을 한 후로도 약간의 시간이 모자랐다. "다 왔는데요!"라고 외치는 아저씨와 내가 내린다는 것을 인지한 다른 승객... 세명이 동시에 같은 차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약간의 주저함과 아울러 나는 또 이렇게 외쳤다. "뒷 손님 죄송하지만 많이 바쁘시지 않으시다면 이 곡이 다 끝난 다음에 내리면 안될까요?" "기사 아저씨! 그냥 택시요금미터 켜두세요 그 시간 대기하는 만큼은 요금 더 드릴깨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끝내고 행동에 들어간 사람은 그 상황을 굉장히 이례적인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는 그런 상황이 가능하다는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제지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한 2분간의 어정쩡한 세 남자의 택시 안에서의 기묘한 동거(?)는 끝을 볼 수밖에 없었고, 이 어정쩡한 상황의 유일한 승자인 티렉스는 유유히 휘파람을 불며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물론 그 두 사람들은 어이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참아줌으로써 다소 상태 안 좋은 단 한사람의 기분이 엄청나게 좋아질 수 있다면 그 것이 사회적으로 그다지 나쁜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야 뭐 그렇다. 택시 요금이 몇백원 더 나왔어도, 원래 가야할 길보다 조금 더 돌아갔어도, 약속시간에 조금 늦었어도...

"Long Live Rock and Roll"


2005년 5월 31일 네이버 블로그

2009년 9월 22일 화요일

47회 그래미 어워즈 유감

1990년대 중반 이후로 계속 되어온 그래미상의 문제이긴 하지만, RIAA의 회원들은 지나치게 보수적인 투표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보수적인 것 까지야 그런대로 참아준다 하더라도 1990년대에 Change the world에 상을 몰아준-사실 이 음반으로 그래미의 가장 중요한 상인(영화제라 한다면 작품상에 해당하는) Record of the year는 베이비 페이스가 받았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이 상은 작곡자가 아닌 제작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그래서 1984년의 그 대단했던 마이클 잭슨의 열풍으로 인한 그래미의 몰아주기는 결국 그 Thriller의 공동제작자였던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에게 돌아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로 그래미는 줄곧 이미 전성기에 있다고 보기는 힘든 역전의 노장의 음반에 중요 부분의 상을 몰아주는 행태를 계속 보여주곤 했다. 카를로스 산타나-이 사람 역시 레코드 오브 더 이어는 Match box 20의 로브 토머스와 공동수상했다.-의 경우도 그랬다. 물론 카를로스 산타나의 앨범은 당해년도에 발매되었던 음반들 중 최고라는 견해에 그다지 부정적인 의견을 내기도 어려웠으나, 그래미의 결정적인 뒷북은 바로 2001년 Steely Dan에게 상을 몰아준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밴드를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팀이 바로 스틸리 댄이지만 그들의 2000년 작인 Two against nature은 그들이 발매했던 모든 음반들 중 완성도 면에서 가장 쳐지는 음반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 이후로는 그래미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게 된 것도 사실이다.



공화국의 시간으로 어제 오전에 거행되었던 47회 그래미 어워즈는 이런 몇년간의 그래미의 모든 문제점들을 그대로 폭발시킨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 부분을 휩쓴-사실상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특히나 공화국의 언론들이 난리를 치는 부분인 신인상이나 그 외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것은 레이 찰스의 Genius loves company였다. 물론 레코드 오브 더 이어는 노라 존스와의 공동수상이었다. (레코드 오브 더 이어는 Here we go again이 수상했으며 이 음반의 공동 제작자는 레이 찰스와 요즘 그래미가 가장 선호하는 노라 존스이다.) 사실 Genius loves company를 들어본 개인적인 소감은 "그다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으나 현대 대중음악의 거장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레이의 유작으로는 상당히 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레코드 오브 더 이어를 제외한 다른 부분의 상들을 레이에게 몰아준 것은 고인에 대한 예우라 할 수 있고, 레코드 오브 더 이어를 준 것은 결국은 요 몇년간 그래미가 가장 아껴왔던 노라 존스에게 준 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냐? 아직 노라 존스는 '한물 간 대가'라 하기엔 너무 젊은 현재진행형의 아티스트가 아닌가? 왜 흥분하고 난리인가?"라 질문을 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른다.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물론 이런 문제는 수십년간 쌓여온 문제이지만, 그래미에 대해 가지는 가장 큰 불만은 도대체 RIAA의 회원으로서 그래미상에 대한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변화에 대해 몸을 사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 이러한 그들의 경향은 에릭 클랩튼이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었던 크림이나 데릭 & 더 도미노스 시절에 에릭 클랩튼을 외면했고, 스틸리 댄에 대해서도 월터 배커나 도널드 페이건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또 만들어낼지 불문명할 정도의 역작인 Gaucho에 대해 겨우 "베스트 레코딩 엔지니어링 오브 더 이어" 를 안겼을 뿐이다. 물론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에 대해 거의 철저한 외면으로 일관했던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90녀대 초반에 가능성이 충분한 Rock 밴드들을 발굴하여 새로운 대중음악의 경향을 주도했던 그래미의 영향력이 이젠 역사라는 이름으로나 기록될법한 옛이야기로 묻혀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상이라는 것이 가지는 기능은 그간의 업적에 대한 평가라는 측면이 가장 중효하겠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독려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도 없다고 본다면, 그래미는 10년 간을 스스로의 덫에 자신을 옭아메고 음악의 발전이라는 측면을 도외시한다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2005년 2월 15일 네이버 블로그

월드컵의 역사 1. 차범근과 김재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겠지만, 사내아이들은 자신의 환상이 깨어진 그 날에 대한 기억을 정말 오랫동안 가지고 살게 된다. 물론 그 것조차 필요 이상의 시간이 흐르게 되면 잊게 되지만 그 당시엔 그런 일들이 아이들에겐 대단한 경험이며 때로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따라다니게 되기도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우스개 소리로 곧잘 이야기되곤 하는 것들 중 하나인, 채변봉투를 학교에 내야하는 날 자신의 여자 짝은 화장실도 가지 않는 아이일텐데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까?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다 문제의 바로 그 날 자신의 것보다도 훨씬 더 두툼해 보이는 봉투를 내는 자신의 여자 짝을 보며 묘한 기분에 빠졌다는 류의 이야기는 실상 막 학교라는 곳에 들어간 어린아이에겐 대단한 충격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화장실 따위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여자 짝이나 여선생님이 "나처럼 화장실도 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 뿐 아니라 "환상이 깨지는 경험"이라는 것은 남자아이에게도 여자아이에게도 공히 존재할 것이며 그 양상 또한 여러가지 것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지금도 치를 떨며 분해하는 일이 있는데, 그 것은 바로 아주 아주 어렸던 시절에 경험했던 "한국 축구에 대한 환상이 깨졌던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치를 떨며 분해한다"는 표현을 쓴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가졌던 "한국 축구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 단순한 차원의 거짓말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엄청난 음모가 있는 "정치적 프로파겐다"였기 때문이다. 엄청난 음모라는 단어가 눈에 거슬린다면 그저 "무언가 있는" 정도로 이야기해도 좋을 듯하지만, 사실 그 시절에 있어 축구라는 것은 인민에 대해 대단히 효율적인 "대중 통제 수단"으로도 작용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 있는" 그 어떤 것에 의해 형성된 축구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예컨데 이런 것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 전 세계에서 가장 명망있는 축구 대회는 "박대통령배 축구 대회"라 생각했다거나, 말레이시아에서 열렸던(이 대회가 지금도 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메르데카배 대회에서 우승을 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카퍼레이드를 보며 "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축구를 가장 잘하는 나라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카퍼레이드라 하면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열렸던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의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한 선수들이 하거나. 1976년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열렸던 하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이나 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메르데카 컴이나 킹스 컵 등등의 동남아시아에서 열리던 축구대회 역시 당연히 그 정도 레벨의 대회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또래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럴테지만, 우리 또래의 아이들은 대부분 축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과 "차범근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항상 같은 의미였다. 나 역시도 축구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히 차범근 때문이었다. 그 어느 해인가(정확하게 연도가 기억나지 않음을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박대통령배 대회에서 경기 종료를 4분인가 5분 정도 앞 둔 시점에서 한국팀은 말레이시아 팀에게 4대 1이라는 회복 불가능한 점수 차이로 지고 있었는데, 그 나머지 시간에 차범근이라는 당시엔 20대 초반이었던 선수가 무려 세 골을 넣으며 경기를 무승부로 만들었던 것이다. 연도는 기억에 없지만 그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봤던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며, 아마도 그 후로 축구라는 운동에 대해 관심이 생겼던 것만은 틀림없다. 물론 국민학교 고학년이 된 후 지금까지 항상 "그래도 야구보다는 축구를 더 좋아하는 부류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당시 그 정도의 어린 나이의 아이에게 야구의 규칙은 너무 어려웠으며 야구라는 종목의 경기 시간 역시 너무 길었으며, 결정적으로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움직이지 않고 날로 먹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야구"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에 반해 축구는 (지금도 항상 논란의 여지가 있는 규칙이지만) 오프사이드 외에는 그다지 규칙이라는 것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으며, 많은 선수들이 동시에 경기장을 뛰어다니는 축구라는 종목은 굉장히 쉬우면서도 동적이었으므로 미숙한 어린아이들이 보기엔 야구보다는 역동적으로 보였으리라.



선수가 아닌 차범근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간에 차범근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대단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이 위인 사람부터 내 또래들까지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 축구=차범근"이라는 공식을 거의 암기하다시피 했으며, 차범근이라는 축구선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라는 생각도 서슴지 않고 해대곤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우리 세대는 차범근 보다도 더 유명했다던(당시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랬다.) 이회택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차범근의 선배격 선수였으며 그와 동시대에 뛰었던 몇 명의 선수들에 대한 기억은 생생한데, 그 중 한 명은 그 때까지 한국 축구 선수들 중 최장신이라 했던 김재한에 대한 기억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우성용 정도에 해당하는 선수였을텐데, 당시엔 "우리 비행기"의 가사를 개사한 이런 노래가 있었을 정도였다. "떴다. 떴다. 축구공 차범근 올린 볼 김재한이 헤딩 슛 헤딩 슛 골인~"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으나, 당시 그 둘의 인기는 그 정도로 대단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에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한국 축구를, 아니 어쩌면 한국 사회를 대표할만한 축구선수는 그 둘이 아니었다. 당시의 한국 축구의 명암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는 지금은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장으로 있는 이영무라는 선수였다. 아마도 스스로 오래된 축구 팬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이영무라는 축구선수의 이미지는 "정말 부지런한 선수"라는 표현 그 자체일 것이다.


2006년 3월 14일 네이버 블로그

2009년 9월 18일 금요일

월드컵의 역사-프롤로그-

혹시나 "월드컵의 역사"라는 제목 때문에 이 이야기가 말 그대로 "월드컵 대회의 역사"에 대한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이 혹시 계실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가장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은 "그런 기대를 하신 분들이 혹시라도 계시다면 그 것은 정말 철저한 오판"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덥지 않은 제목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사실 음악 파일에 대한 불법적 사용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개인적인 다짐으로 인해 처음 이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이유이자 개인적으로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블로그 자체가 지지부진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그 놈의 알량한 "여기까지 해 온 것이 어딘데..."라는 생각과 함께 "블로그를 없애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쏙 드는 일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해오던 차에 그냥 가볍게 할 이야기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게 되었고,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이따위 짓거리를 하게 된 것이라 생각해 주신다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이우스나 한계인간은 알고 다른 분들은 모르는 것이 있다. 물론 티렉스라는 인물의 사생활에 대한 것들은 상당 부분 그들은 알고 다른 분들은 모르는 것이다. 그 점 부인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오로지 가이우스나 한계인간 그리고 노토리(이 녀석은 앞의 둘 만큼 잘 알지는 못한다. 이유는 그들과 노토리의 군생활에 약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만이 알고 있을 것은 티렉스의 지극히 사적인 부분들보다도 훨씬 더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티렉스의 일종의 치부인데, 과거 나우누리에서 한참 놀던 그 시절 티렉스가 모 대학 모 학과의 소모임 게시판에서 하던 짓이다. 이 자리에서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XXX XX의 XXX"이라는 시덥지 않은 제목으로 99퍼센트의 논픽션에 1퍼센트의 픽션이 섞인 1986년에서 1990년 사이에 벌어진 개인적인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썼던 적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이해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 정말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101번에 걸쳐 주절거렸던 이야기인데, 지금도 한계인간은 이야기하기를 "형이 온라인에서 했던 모든 일들 중 그 때 그 일이 가장 진정성이 느껴지는 일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짓거리를 할 때엔 최소한 "굉장히 즐거웠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심리적인 불안정함을 그대로 반영하여 인간이라는 존재가 상상 가능한-때로는 상상이 불가능한- 온갖 심한 욕설이 가득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고, 때로는 "장소팔, 고춘자식 만담"으로 가득 채웠던 적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굉장히 즐거웠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는 것이었으며, 한계인간의 이야기처럼 "진정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없으나,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보면서 "어떤 식의 논란을 생산해낼지" 따위에 대한 걱정을 한 적은 없었던 것 만큼은 100퍼센트 사실이었다 할 것이다. 허나, 한가지 애석한 것은 한계인간이라는 녀석은 그 때 끄적이던 그 이야기가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박민규의 책을 읽어보기는 했으나, 그다지 유사점을 발견하진 못했고, 한계인간의 그런 생각에 대해 못내 섭섭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월드컵의 역사"라는 카테고리 명에서 올 수도 있는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미리 밝히지만, 개인적으로 축구와 야구를 모두 좋아하긴 하지만, "국가대항전이라는 성격이 훨씬 약한" 야구를 더 선호하는 편이며, 사실상 축구에 대해서 보다는 야구에 대해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야구에 대한 애정이 더 깊다는 것을 숨길 생각도 없다. 그런데 왜 "월드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냐? 라는 질문을 하신다면, 이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야구를 조금 더 선호하나 피아를 구분하는 법을 가장 처음 배우게 된 것은 축구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며 그 시점이 아마도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월드컵 대회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피아를 구분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깨닫게 된 것이 바로 1978년 무렵이었으며 그 때에 공교롭게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개최되었다는 것이다. 그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아직도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말이다.


2006년 9월 7일 네이버 블로그

2009년 9월 16일 수요일

아직 완벽하진 않으나

중요한 게시물들은 일단 극소수 옮긴 상태 구글 블로그에 대한 파악도 아직 덜 된 상태이므로 정식으로 옮겨오기넹 미약하나 일단은 옮길 생각을 여러차례 하다가 실제로 옮긴 것에 대해서 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음. 여러가지 이유로 옮기긴 했으나 사실 네이버 블로그에 워낙 오랜 시간을 소비한 탓에 그 쪽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의도 있었지만 타의에 의해서 옮길 수 밖에 없었던만큼 새로운 곳에 온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려 한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구글로 온 것은 당연히 "막 놀아보기 위함"이니만큼 정말 막 놀아보려 한다.

네이버에서 같이 놀던 블로거들이 얼마나 이 곳을 찾아줄지는 알 수 없겠으나 정말 여기선 막 놀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2009년 9월 15일 화요일

아님 말고1000곡(101)

101. 최상의 라인업을 갖췄던 밴드들(1)

Blind Faith, Asia, UK, Damn Yankees, Four Play등등 이른바 수퍼밴드라 할 수 있는 팀들은 많이 있다. 그런 팀들이 가지고 있는 화려함을 넘어서는 완벽함이란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음악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팀들에겐 몇가지 한계가 따르게 된다. 우선, 이들의 활동이 길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당대의 휠을 잡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모이다보니 가끔은 "서로 죽이지 않고 팀이 해체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긴, 도켄의 보컬리스트인 돈 도켄은 팀의 기타리스트인 조지 린치를 향해 총을 쏘지 않았던가? 다행히 조지 린치가 총알을 몸으로 막진 않았지만... 또 레인보우 시절의 그레함 보닛은 성질 더럽기로는 "네가 두번째야!"라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치아를 모조리 틀니로 만들어버릴 리치 블랙모어와 무대에서 주먹질을 한 후 레인보우를 탈퇴했고 그 후 자신이 속했던 모든 팀에서 기타리스트들과 폭력사고를 일으키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지나치게 강한 그들의 개성과 출중한 실력은 그들에게 단점이 될 경우가 허다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들이 가지는 한계는 "그들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크다보니 잘해야 본전 못하면 매장"인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일례로 Asia같은 팀은 화려했던 라인업을 상실한 이후에도 팀의 이름을 유지하며 여러장의 앨범을 발매했으나 "안내느니만한 못한 앨범"을 냈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더랬다. 어쟀든지간에 이미 일가를 이룬 아티스트들이 한 팀을 이룬다는 것은 음악애호가들에게도 그들에게도 "마냥 반갑기만한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애호가들은 수퍼밴드의 탄생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모순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소위 이야기하는 수퍼밴드"를 제외한 팀들 중 가장 완벽한 라인업을 가진 몇 팀들과 그 팀들의 곡들에 대해 살펴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에 대해 몇가지 원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블라인드 페이스나 UK Four Play Asia등의 "프로젝트성격을 띈 수퍼 밴드"는 제외하기로 했다. 이유는 구차하게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또 한가지 원칙은 "각자의 기량"보다는 팀으로서의 완성도에 기준을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에 중점을 두려 한다. 사실 이 기준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 이야기를 추가로 한 이유는 어트 팀이라고 밝히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 생가하여 팀의 이름을 거명하진 않으려 하나 실제로 각각의 멤버들은 자신의 포지션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멤버들만 모인 팀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팀으로서의 음악"이 과연 그런 수준에 미칠 수 있었던가?에 대해 자문해본다면 부정적인 답을 내릴 수밖에 없는 팀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략 이런 기준에서 몇 팀을 꼽아보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여러분들께서 명심하셔야할 것은 앞으로 몇 차례의 게시물에서 소개할 팀들은 "절대적으로 무순(無順)"이라는 점이다. 먼저 소개하는 팀이 더 뛰어난 것도 가장 덜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저 자료를 먼저 정리한 순서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과연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에릭 클랩튼을 일컬어 "기타의 신"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세계 3대 기타리스트"니 혹은 "80년대 3대 기타리스트"니 하는 식으로 숫자를 좋아하는 일본의 팝저널들이 사용한 표현이 아니라 미국에서 사용한 표현이었다. 잘 아셔야할 것은 8월 24일자 경향신문의 스포츠면을 보면 우세인 볼트에 대해 "전설"이라는 수사를 하고 있는데 이 것을 보고 "아! 우세인 볼트는 전설과 동의어구나"라는 생각을 하실 분이 계시겠는가? 물론 에릭 클랩튼이 기타를 대단히 잘 친 기타리스트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모든 기타리스트들보다 월등한 기량과 기타라는 악기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음악적 능력이 "인간의 그 것"을 "실제로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수사를 썼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멀리도 갈 필요 없다.) 낙원상가에서나 홍대 앞에서 "에릭 클랩튼을 따라올 자 아묻고 없다."든지 "에릭 클랩튼외의 기타리스트들은 쓰레기다"라고 외친다면 아마 30분 이내에 경찰이 출동해야만 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물론 에릭 클랩튼을 일컬어 "기타의 신"이라는 표현을 미국의 언론에서 사용한 적은 있으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이 단 한 번 나오듯 에릭 클랩튼을 일컬어 독창적으로 기타의 신이란 표현을 쓴 적은 단 한번이었으며 그 이후의 같은 표현들은 그 것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마치 아담 스미스 이후의 그 어느 사람이 시장에서 가격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그저 아담 스미스의 인용이듯 말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Rock Scene에서 supergroup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었던 최초의 팀을 꼽으라 한다면 당연하다는 듯 크림을 이야기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그 역시 대단히 주관적인 일이긴 하지만 한 때 통설처럼 전해져내려오던 "멤버 각자의 음악적 역량이 가장 뛰어난 팀들은 트리오 밴드를 조직해서 활동한다"는 Rock Scene의 오래된 격언에도 합치하는 팀이기도 하다. 이 대단한 트리오 팀의 최연장자인 동시에 Bluce rock drumming의 교과서라 불릴만한 인물의 이름은 Ginger Baker이라 하는데 1939년 8월 19일-생일 지난지 얼마 안되었다는 이야기임!- 런던 남부의 루이스햄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설마 부모들이 Ginger이라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름을 지었을 이유는 절대 없고 본명은 Peter Edward Baker이다. 예명은 손발이 오그라들고 본명은 rocker으로서는 가오가 심하게 떨어지는 이름이니 국내 최고의 작명가라 불리는 "김X수"씨에게 작명을 부탁했다면 더 멋진 이름을 그에게 선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Graham Bond Organisation(이 철자가 영국식이라는 것을 유의하셨으면 한다. 절대 오타가 아니다.)에서 활동을 시작한 뒤로 1966년 문제의 에릭 클랩튼을 만나 1968년 팀이 해체되기 전까지 크림의 멤버였던 인물이다. 이후로 Blind Faith, John Mauall's Blues Breakers, Ginger Baker's Air Force(아! 이 분의 작명 능력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은 단지 1회성 이벤트가 이니었던 것이다.) 등의 밴드를 거친 역사상 가장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드러머 중 한 명이라 할 것이다. 그 외에 진저 베이커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조금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겠으나 오늘 게시물의 목적은 그 것이 아니므로 일단 이 정도선에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John Symon Asher Bruce이라는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식 이름을 가지고 1943년 5월 14일(비틀스의 조지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스코틀랜드의 이스트 더버턴셔의 비숍릭스라는 곳에서 태어난 후에 잭 브루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인물은 다들 아시겠지만 Cream의 리드보컬리스트이자 베이시스트였다가 아니었다가 다시 크림의 멤버였다가 또 아니었다가 다시 크림의 멤버였다 지금은 또 크림의 멤버가 아니다.(크림이 세 번 해체되고 두 번 재결성되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유치하게 하는 중이다.) 부모가 둘 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고 이사를 워낙 자주 다녔던 바람에 "도대체 이 사람이 유년기를 보낸 곳을 어디라 이야기핼까?"자체가 하나의 연구대상이 되는 잭 브루스는 무려 열네군데의 학교를 다닌 경력을 가지고 있다. 10대에 이미 재즈 베이스(당연히 더블베이스를 의미한다.)를 접했고 그 덕에 왕립 스코틀랜드 음악, 연극학교에서 첼로를 공부하며 정식 음악교육을 받은 인물이다.(에릭 클랩튼이 철저하게 독학으로 그 것도 상식적으로는 대단히 늦은 나이인 만 15세에 기타를 처음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대단한 행운아였다 할 것이다.) 1962년 아직 20세도 되기 전 런던의 블루스 밴드이자 Alexis Korner이 이끌던 Bluse Incorporated의 베이스 주자로서 프로 음악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바로 그 밴드에서 브루스는 오거니스트인 Graham Bond을 만나게 되고 색소폰을 연주하던 Dick Heckstell-Smith, 드러머 Ginger Baker을 만나게 되고 나중에 본드, 베이커와 John McLaughlin이라는 기타리스트와 Graham Bond Quartet을 결성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 밴드는 비밥 재즈, 블루스와 리듬 & 블루스등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을 연주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일단 잭 브루스에 대한 이야기도 이 정도까지만...



에릭 클랩튼에 대해 더 이상의 소개는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지금 "쪽쪽 뽑아내 버리면" 앞으로 에릭 클랩튼에 대한 이야기를 활용할 기회가 떨어질 것 같은 생각에 크림이라는 팀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간략한 멤버들의 배경에 대한 셜명에서 알 수 있듯, 에릭을 제외한다면 진저나 잭의 경우엔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대단히 정석적인 과정"을 경험한 사람이며, 굳이 크림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무언가 한 건 했을 사람들이라는 점에 대해 동감하지 않으실 분은 없으시리라 본다. 그들이 활동했던 짧은 기간에 비해 발매한 앨범의 수도 상당히 많고-물론 그 중에선 실황 앨범도 포함되어있지만- 그 이상으로 그들이 이룬 음악적 성과도 대단하다. 일반적인 경우 크림에 대해 "Hard Rock의 선구자" 정도로 이야기하는데 특정 장르가 한 팀에 의해 생겼다기 보다는 크림의 음악에 하드 록의 전형적 요소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야기하자면 크림이라는 팀은 멤버들의 전력이 이야기하듯, 블루스와 약간의 재즈적 배경을 바탕으로 당시로서는 굉장히 앞서가는 음악을 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할 것이다. 심지어 서구의 많은 평자들은 Blin Faith이나 Ginger Baker' Air Force, 심지어는 Derek and the Dominos등을 일컬어 Post Cream 음악이라는 범주에 넣어 크림 음악의 연장선상에 넣으려 하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뭐 어찌 되었건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라인업을 가지고 있던 팀들 중 하나인 동시에 가장 화려한 팀중 하나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1. 크림은 앞으로도 뽑아낼 것이 있는 팀이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2. 다른 좋은 곡도 많으나 오늘은 단 한 곡만 링크하기로 한다.

3. 게시질이 늦어진 것은 정치적 이유라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 앓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티렉스의 특수한 병 때문인데,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이야기해서 티렉스는 8월 말이 되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대단히 괴로움을 겪는데, 8월이 지나면 여름이 끝난다는 데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8월말엔 농담처럼 정신도 육체도 피폐해지고 컨디션이 땅에 떨어진다. 그리고 엄청나게 depress된다는 사실...

4. 크림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쪽쪽 다 빨아먹을 때까지 계속할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5. 진지하게 묻습니다. 지금 외국의 블로그 서비스로 사이버 망명을 고려하는 중인데 이 곳의 몇몇 절대 그냥 사라지기 죄송한 이웃분들의 의견을-몇분 안 남기시겠지만- 따르도록 할까 합니다. 제가 네이버에서 옮겨가더라도 기꺼이 찾아주신다면 저도 뭐... 아무튼...

6. 지미나 엘라의 버전을 링크한 이유는 비교해서 들으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곡이 얼마나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지에 대한 반증으로서 한 링크이기 때문에 어느 버전이 더 좋다거나 무슨 차이가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접어두시고 그냥 들어주셨으면 한다.



Cream- Sunshine of Your Love





Jimi Hendrix - Sunshine of Your Love - Live Stockholm '69





Ella Fitzgerald, Sunshine of your love

아님 말고 1000곡(100)

* 요 게시물은 100번째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만, 그와 전혀 관계없지 않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과거 이 게시물들을 시작할 때 비흑인음악적인 서구 대중음악의 뿌리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거창한 이야기를 했음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100번째 이야기를 하며 맨 처음 아일랜드를 비롯한 북유럽의 음악에서(특히나 아일랜드의 음악) 그 기원을 찾으려 했던 나름대로의 의도를 다시 명백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로 인해 100번째의 이야기는 다시 아일랜드의 음악으로 돌아가 봅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본문을 보시면 당근 아시게 되겠지요.



100. I don't know Etc. -Lisa Hannigan(2008)-

2008년 우리 모두는-솔직히 티렉스만- 아일랜드발의 엄청난 재능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역사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Damiena Rice의 밴드에서 리드 보컬리스트로 활동을 하던 다중악기 연주자이며 뛰어난 보컬리스트이자 작곡자인 리사 해니건(Lisa Hanigan)의 솔로 앨범인 "Sea Sew"을 들고 서구의 대중음악계에 정말 이지 "대단한 포스를 뿜어대며" 등장한 것이다. 전에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음을 한탄하고 있었지만 가히 그의 앨범은 2008년 서구지역에서 출반된 데뷔 앨범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음악적 성취를 이룬" 음반이라 할 수 있었다. 어둠의 경로는 아니고 빛의 인도하심으로 접하게 된 그의 앨범의 첫 트랙에서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한숨에 들어내려가는-이런 표현이 있기하 한가?- 동안 정수리에서 땀 한방울이 흘러내려 그 것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했덜댔다. 2008년 출반된 데뷔 앨범들 중에서 베스트라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을 정도지만 역사상 등장했던 가장 충격적인 데뷔 앨범들 중 스무 장을 꼽으라면 그 안에 당연히 들어갈 정도의 음악적 신선함과 신선함을 뒷받칠 수 잇는 음악적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 서구 대중음악의 "지난한 물음들에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대중음악계 전체에 던지는" 스스로의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음악적인 이슈거리를 품고있는 음반이었던 것이다.



2008년 발매된 "Sea Sew"의 상업적인 결과는 앨범차트를 기준으로 아일랜드 차트에서 3위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35위 전영 차트에서 58위를 기록했다. 까놓고 아일랜드의 음반시장이 작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리사 해니건의 상업적 성취를 두고 성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죄송하지만 아닙니다."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앨범은 Plinky Plonk Rock이라는 장르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장르의 범주에 속하게 하는 데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상업적 성공과 단순한 1대1 비교를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Damien Rice의 밴드와 함께할 때부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가 데미언의 팀을 탈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솔로 프로젝트를 준비중이라는 이야기가 사실로 밝혀졌을 때 아일랜드 음악을 주목하던 서구의 수많은 대중음악 전문가들은 "과연 리사 해니건의 솔로 음반은 어떤 수준의 음악을 들려줄까?"에 대한 기대감을 "순전히 자기들 맘대로" 마음껏 부풀리고 있었다. 그래! 말씀드리는 김에 까발리자면-끝까지 밝히지 않으려 했으나 리사의 음악성에 비해 공화국에서의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밝혀야만 할 것 같다. 줴길- Gary Lightbody는 다들 아실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여러분들이 무지하게 좋아하시는 의 출연자이다. 아무튼 리사는 게리와 함께 "Some Surprise"이라는 곡을 듀엣으로 불렀는데 이 곡은 공정무역을 위한 캠페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표된 곡으로서 서구사회에서 리사 해니건은 이런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인물로도 유명하다. 아! 리사 해니건의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데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설명이 장황해진다.(빌어먹을 놈의 롤링스톤... 리사 해니건의 Sea Sew에 대한 리뷰가 없다니...) 줴길



"a moan of delicate strength, and stirring warmth and humanity" 영어 울렁증 때문에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해외의 팝저널들은 리사 해니건의 음악적 스타일에 대해 이런 간략한 수사를 사용하며 대단히 문학적이고 모호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리사 해니건에 대한 이런 레토릭은 일반적으로 아무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굳이 해석을 원하신다면 "섬세한 힘을 가진 읖조림과 감동적인 따뜻함과 인간미"라 하겠다. 이런 수사는 아일랜드 음악의 보편적 특성에 대한 수사일 수도 있을테지만, 아무튼 리사 해니건의 곡들을 들어보면 이 이상의 수사는 필요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리사 해니건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Plinky Plonk Rock이라 불리는 장르에 대한 평가와도 맥을 같이 한다 할 것이다. 리사 해니건에 대한 독특한 사실 중 하나는 그가 무대나 스튜디오에서 주로 다루는 악기가-미리 말씀드렸다. 리사 해니건은 다중악기연주자라고- 대단히 오래된 아일랜드의 악기로서 마치 인간이 심장에 대단한 무리를 느껴 숨이 넘어갈 때 나는 듯한 소리를 내는 고음역의 악기인 "broke-down"이라는 점이다. 이 악기는 대단히 크기가 큰 악기인데 그의 밴드 맴버들의 도움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라 한다는데 리사 해니건의 블로그에 보면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설마 티렉스가 링크를 걸리라고 상상하시진 않았지?) 리사 해니건은 이미 Damien Rice의 리드 보컬리스트로 있을 때부터 노래와 연주를 병행하여 왔고 작곡이나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 못지않게 연주자로서의 능력도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걔들이 그렇다니...)



Damien Rice의 밴드의 보컬리스트로서의 활동으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여온 리사 해니건은 그가 불과 스무살 때인 2001년 더블린의 Temple Bar Music Centre에서의 무대에 서면서 정식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했고(물론 Rice의 밴드와 함께이다.) 그 뒤로 6년간이나 Damien Rice의 밴드에서 활동한다. 보컬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2년에 발매된 Rice의 솔로 음반 작업에 참여하면서였고 2003년 Glastonbury Festival의 무대에 서면서 영국과 아일랜드 쪽에선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하게 된다. 아무튼 각설하고 이 Damien Rice이라는 이름의 팀의 리더는 보통의 팀의 리더들이 그렇듯, 만만치 않은 성격을 가지신 분이라 팀의 다른 멤버들과의 사이가 결코 매끄럽지 않았고 어인 이유인지는 모르지만-사실은 알고 있으나 귀찮아서 생략하도록 한다.- 리사 해니건과 유난히 껄끄러웠다고 한다. 그렇게 Rice와의 불화가 공공연한 사실이 될 무렵 리사 해니건은 2006년 펜타포트 페스티벌 때 내한한 경력도 있는-전에 이들의 사진이 휴대전화에 있었으나 그 휴대전화가 먹통이 되고 새 전화로 바꾸고 하는 과정에서 사라져벼린 안타까운 사실도 있다.-Snow Patrol의 프런트 맨-공화국의 아이돌 그룹처럼 기획자들이 "네가 이 팀의 리더야!라고 정해주는 일이 없는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 언론에서는 리더라는 말보다 Front man이라는 표현을 더 보편적으로 사용하니 외워두시면 유용하게 쓰실 수 있을 것이다.- Gary Lightbody(그 놈 성 참 희한하기도 하다.와 듀엣으로 음반을 발표하고 그 수록곡들이 공화국의 미혼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한 미국의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물인 에 등장하면서 미국에서의 인지도도 넓혀가게 된다.(그러니 솔로로 독립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2008년 자신의 솔로 앨범이 정식으로 발매되기 이전, 리사 해니건은 이러저러한 비공식 혹은 공식 무대에서 클래시컬한 포크나 Rock and roll 넘버들을 자신의 독특한 해석으로 불러 대중들의 환호를 받았는데 이 때 주로 불렀던 곡들은 조니 미첼, 니나 사이먼(Nina Simone), 제니스 조플린(링크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리사 해니건이 제니스의 곡을 어떤 식으로 불렀는지는 나도 궁금해 미치겠다.)등의 곡이며 심지어는 로이 오스본의 곡까지 불렀다고 하니 리사 해니건은 짐작컨데 대단히 유연한 성대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물론 아니면 말고, 이런 식으로 무대에 자주 서다보니 리사 해니건은 결국 자신의 밴드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밴드의 이름은 The Daisey Okell Quartet이라고 한다. 아직 음반이 나온 상태는 아니었지만 리사는 그의 밴드와 함께 Electric Picnic Music Festival의 무대에 섰으며 이 때 대중들은 "아! 리사는 이제 솔로로 독립할 것이 분명하구나"라고 생각했다 한다. 이 것이 2006년의 일이다. 그리고 그 해 리사 해니건은 게스트 보컬리스트로서 Mic Christoper, The Frames and Herbie Hancock(상상해보시기 바란다. 겨우 스물다섯살의 아일랜드 출신의 여가수가 이 대가의 음반에 게스트 보컬리스트로 참여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Damien Rice와의 마지막 작업이 된 그의 밴드의 앨범인 Possibilities의 녹음작업에도 참여하게 된다. 드디어 대망의 2007년, Damien Rice군은 공식적으로 자신과 리사 해니건과의 음악적 관계가 종말을 맞이했음을 선언하게 되고 기다렸다는 듯이...는 아니지만 2008년 리사 해니건은 자신의 솔로 앨범인 Sea Sew을 들고 대중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추신>

1. 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일부러 여기서 끝을 내는 이유는 그의 솔로 커리어는 아직 진행중인데다 음악적으로 리사 해니건이 어떤 공과가 있다고 이야기하기엔 과도하게 이른 시점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 과감하게 여기서 이야기를 끝맺기로 합니다.

2. 링크시킬 곡 중에 Jason Mraz의 히트곡인 Lucky를 제이슨과 (어느 무대에서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같이 불렀던 동영상이 있습니다. 원래 이 트랙은 JM이 콜비 카일라(Colbie Caillat)와 듀엣으로 부른 곡인데 제 생각엔 (리사 해니건과 같이 부른 것을 과도하게 열심히 들어본 결과) 왜 그렇게 리사 해니건이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게스트 보컬로 참여했는지를 짐작할만합니다.

3. 가치판단은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과거 크렌베리로 아일랜드의 음악을 기억하실 분들이라면 생소하겠지만 리사 해니건의 음악이 아일랜드 음악의 원형에 더 가깝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입니다.

4. 아마 혹시 티렉스로 인해 리사를 알게된 분들은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저 새끼 때문에 쓸데 없이 뇌용랑만 더 쓰게 되었다고 생각하시거나, 남들보다 리사 해니건을 조금 더 빨리 알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게 되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가 발생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전 후자가 될 것이라 자신있게 말씀드립니다.

5. 이 게시물은 100번째 게시물이긴 하나 "특집"은 아닙니다. 그 것은 다음 게시물부터 몇 개가 될 것입니다. 물론 관심은 없으히겠지만...



Lisa Hannigan - I Don't Know



Lisa Hannigan - Lille (official video) - please click view in higher quality below this youtube box



Lisa Hannigan - Sea Song



Lisa Hannigan AN OCEAN AND A ROCK with LYRICS



"Lucky" - Jason Mraz feat. Lisa Hannigan





아 씨발! 이 게시물 올리고 이건희가 집유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분 좆같습니다.






아님 말고 1000곡(99)

99. Deacon Jones Etc.-Louis Jordan-

조던과 같은 역사적이며 대단한 임팩트를 가진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게시물에 대한 반응이 엄청나게... 썰렁했던 관계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 둘까 하다 언젠 사람들이 이 게시물에 관심이나 있었나?라는 자문을 해보았더니 평소의 반응이나 조던에 대한 게시물에 대한 썰렁한 반응이나 별 차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그런 "소통"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애초 이 게시물들에 대해 어떤 폭발적인 임팩트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게시물들을 올려대며 가장 "서러울 때"는 사람들이 "흘러간 팝송"이나 "추억의 팝송"과 같은 제목으로 검색을 하다 이 블로그의 게시물들을 찾아 보게 되는 경우다. 어떻게 그걸 알았냐느냐고 묻지는 마시기 바란다. 블로그 통계를 보면 굉장히 쉽게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또 이야기가 딴 곳으로 빠졌다. 루이스 조던이라 읽든, 로이 조던이라 읽든(루암스트롱의 경우 같은 철자를 쓰며 루이라고 읽는 것을 보면 이 할아버지도 루이라고 읽어야 할 것 같지만) 이 양반의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하자면 얼마전, MJ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보다도 더 길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를 이야기하면 떠오르는 몇가지의 키워드를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그의 연대기적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위키백과(당연히 영어판이겠지요?)에서 그를 검색하시기 바란다. 내가 쓸 수 있는 것의 몇 배는 나와있을 것이다.





듀엣 혹은 듀오라는 것은 물론 상업적으로 더 쉬운 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 이른바 "안전판"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누군가와 듀엣을 했다는 것이 반대로 자신의 위치를 증명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1945년 조던은 "My baby said yes"이라는 곡을 발표하게 되고 전미 chart에서 14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 곡은 Bing Crosby와의 듀엣곡으로 발표된 곡이다.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빙 크로스비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빙 크로스비는 대단히 유명한 영화배우기도 하지만 ,미국의 스탠더드 팝 음악이 황금기를 맞이하던 즈음 그 장르를 대표하던 인물이다.(공교롭게도 스탠더드 팝 신의 수많은 스타들은 영화배우도 겸업을 하던 경우가 많았다. 도리스 데이도 그랬고, 여러가지로 말이 많은 인물인 프랭크 시내트라도 그랫다.) 스탠더드 팝이라고 한다면 누가 뭐라 하더라도 "대중음악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판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의식적으로 미국인들이 밀어주던 장르"였던 것이다.(생각해보니 팻 분이나 에디 피셔 등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빙 크로스비와 듀엣을 했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조던의 음악이 가지고 있던 크로스오버적 요소에 미국의 주류층에서 주목했다는 점이다. 조던이 냇 킹 콜처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욕을 먹어가면서 백인 취향의 음악을 한 적은 절대 없었으나 백인들이 그의 음악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의 듀엣 해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누가 무라 하더라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들 중 한 명으로 꼽히는 Ella Fitzgerald와는 1946년의 "Stone cold dead in the market(He had it coming)"을 시작으로 무려 네 번이나 같이 듀엣 작업을 했고 Martha CDavis와도 듀엣 작업을 했다. 대단히 많은 저명 아티스트들이 그와의 듀엣작업을 원했다는 점은 그가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얼마나 비중있는 인물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앞서의 게시물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조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스윙을 연주하던 빅밴드의 연주자로서 시작했으며, 그 뒤로 점프 블루스 신에서 무시할 수 없을만큼의 위치를 차지한 이후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를 "탐하는" 왕성한 활동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조던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경우 "Ration Blues"이라는 곡을 그냥 지나쳐선 안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히트곡들을 남긴 조던이지만 이 곡이 그에게 그리고 음악사적으로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이 곡이 조던의 곡들 중에 "최초의 크로스오버 곡"이라 기록될만한 곡이고 단지 조던의 곡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의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이른바 크로스오버라의 본격적 시도의 기원을 이 곡이 발표된 1943년으로 추정하는 음악사가들이 대다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이러한 논쟁들은 항상 명확한 답이 없는 것이 상례이지만 다수의 의견이라는 데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것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어도...) 여러분깨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개인적으로 부단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Ration Blues의 원곡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곡을 들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그 한계를 인정하고 여러분께는 '음악사적'의미만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조던의 이런 크로스오버적 재능이(크로스오버적 재능이라는 단어 자체가 얼마나 유의미한가에 대해선 자신이 없다.) 진정 빛을 발하는 분야는 여러분들도 듣기에 생소하실 "Comedy Music"이라 불리는 음악이다. 코미디 뮤직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말 그대로 "웃기는 내용의 음악"과 "영화나 TV 쇼 같은 곳에서 코미디적인 상황이나 코미디적 효과를 유도하기 위해 쓰인 곡"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대단히 진지한 장르음악"은 "코미디 음악"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힘들다는 것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짧게 이야기한다더니 또 길어지려 한다. 조던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게시물에서도 또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팍팍!



<1940년대와 Decca Record>

이 두가지 단어는 조던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에 있어 항상 같이 움직여야 하는 단어인데 조던은 말 그대로 1940년대 음악의 아이콘 중 하나였으며 그의 성공과 함께 데카 레코드도 대단한 성공가도를 달렸다 할 것이다. 공화국의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은 데카 레이블을 이야기하면 "아! 정경화가 속했던 레이블!"(지금은 소속 음반사를 옮긴 것으로 기억한다. 혹시 아직 데카 소속이라면 지적해주시기 바란다.)하고 이야기하실 것이다. 그 데카 레코드가 세계적 레이블로-클래시컬 음악이 아니라 대중음악에 있어서도- 인식되는 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들 중 한 명이 조던이다.(비틀스가 가장 먼저 퇴짜를 맞은 레이블이 데카이기도 하다.) 아무튼 조던의 40년대의 빛나는 시기의 도화선이 된 음반은 1940년대가 시작되기 2년 전인1939년 출반된 "Saturday night Fish Fry"였다. 이 곡은 대중음악사가들에 의해 "최초의, 그리고 가장 이른(이 차이가 뭔지 모르겠으나 꼭 이런 표현을 쓴다.) rock and roll음반"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Blue light boogie"도 같은 해에 출반된 음반이며 Comic Song의 전형이라 일컬어지는 "Ain't here nobody but us chickens"나 "Buzz me"등도 같은 해에 발매된 음반이다. 조던은 본디 클라리넷 주자로 음악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뛰어난 알토색소포니스트로 기억하고 있고 그리고 훌륭한 보컬리스트로 기억하는데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음악적인 영역을 넓혀갔고 이런 그의 음악적인 영역의 확장이 꽃을 피운 것은 1940년대의 일이었다. 혹시 여러분들은 Bob Dylan이 시도했던 "Story Song"이라는 형태의 음악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 밥 딜런 자신도 그랬고 많은 전문가들 역시도 밥 딜런의 이런 경향이 조던의 영향이라 기술하고 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밥 딜런의 곡인 "Bob Dylan's 115th dream"이나 "Tombstone Blues"등을 찾아 들어보시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리라 생각한다.) 줴길 이야기가 또 길어졌다. 조던의 이야기는 반드시 돌아온다.



Louis Jordan & His Tympany Five--Deacon Jones



Louis Jordan - Saturday Night Fish Fry



Texas and Pacific: Louis Jordan and his Tympany Five



추신>

1. 링크한 곡들을 들어보시면 왜 그에 대한 수사에서 크로스오버란 단어가 절대 빠질 수 없는지 이해하실 걸이라 생각합니다.



2. 아 씨... 다음이 100번이네

아님 말고 1000곡(98)

98. Is you is or is you ain't Etc.-Louis Jordan-

Jukebox이라 불리는 기계를 모르시는 분들은 계시지 않으리라. 모르신다 하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가르쳐드릴 생각은 없으니 Google 검색을 이용하시기 바란다.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거의 30년에 가까운 기간에 걸쳐 주크박스라는 기계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은 Louis Jordan이었다. 그래서 당대와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King of the Jukebox"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 것은 단지 그의 애칭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루이스 조던이라는 인물이 미국의 대중음악계에서 얼마나 광범위한 지지와 호응을 얻었던 인물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수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에는 대중음악 저널들 중 "기획기사나 심층기사"에 있어선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매체라 할 수 있는 "Rolling Stone"(s가 없음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란다. 가끔 공화국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조차 "롤링스톤즈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얼마나 답답함을 느끼는지 모른다.)은 그를 "The Greatest All Time Artist"의 59번째 자리에 위치시켰다. (루이스 조던이라고도 하고 루이 조던이라고 해도 되지만 아무튼 마이클 조던과 상관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그는 블루스, 재즈, 리듬 & 블루스, 점프 블루스등의 장르에서 모두 "장르의 Pioneer"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자신이 손을 댄 장르마다 일가를 이룬 보기 드문 "천부적 재능과 그 재능을 빛나게 할 수 있는 노력까지도 재능으로 타고난" 한 마디로 "음악의 신이 있다면 그의 축복을 과도하게 많이 받았다 할 수 있는" 아티스트라 할 것이다.



빌 클린턴의 태어나지 않았다면 과연 공화국의 인민들이 그 주가 있다는 것을 알기나 했을지 모를 Arkansas주에서도 깡촌으로 여겨지는 Brinkley(그나마 빌 클린턴의 고향은 주의 수도인 Littlerock이기라도 하다.)에서 티렉스의 돌아가신 할머니보다 한 살 어린 나이로 태어난(1908년 7월 8일 생이다. 7월 8일은 아론의 생일보다 하루 앞선 날이기도 하다.) Louis Jordan이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는 이유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그 것이 어떤 장르건 간에-은 Race Chart이라 해서 백인들의 대중음악과는 어떤 식으로든지 분리해서 사고하던 시대에 단지 Race Chart에서만이 아닌 백인들의 대중음악 차트에도 오르는 몇 안되는-냇 킹 콜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아티스트였다는 점이며, 듀크 엘링턴과 카운트 베시 이후엔 밴드의 리더로서(밴드 매스터라고도 한다나 뭐라나...) 그만큼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던 인물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가 미국의 대중음악사에 기록될 클래스의 다른 밴드리더들과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그가 악기를 전혀 연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주로 트럼피스트나 피아니스트 때로는 클라리넷 연주자들이 밴드의 리더(즉 밴드 마스터)였던 점에 비해 그는 뛰어난 보컬리스트로서 밴드를 이끈 아티스트였다는 점이다. 이 것은 역으로 이야기해서 "그가 이끌던 밴드는 다른 밴드들에 비해 더 다양한 것들을 대중들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는 점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도 대단히 뛰어난 색소포니스트였고 피아니스트였으며 클라리넷 연주자이기까지 했다. 이 점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자주 반복되어 조금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한가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과연 "대중음악의 바람직한 소비행태란 어떤 것일까?"라는 케케묵은 문제에 대해 개인적 견해를 밝히라 한다면 "훌륭한 음악(이 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불변의 조건이다.이 되도록이면 많은 수의 대중들에 의해 적절한 방법으로 소비되는 것"이라 하겠다. 훌륭한 음악에 대해선 이전에도 여러번 이야기했고 앞으로도 이야기할 기회가 많을 것이니 오늘은 좀 쉬도록 한다. 문제는 되도록이면 많은 수의 대중이 소비한다는 것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하는 점일텐데,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언어로 정의해야할 부분일 것이다. "바람직한 소비"라는 것을 자칫 오해하여 "특정 장르의 음악을 소수의 특정인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하며 소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곤란하다. 다소 어렵더라도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평소 인디음악이라는 것이 단순히 그 음악의 제작과 배급방식을 일컫는 이야기에 그쳐야지, 그 자체로 장르화된다면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문제는 골치아프니 앞으로도 골백번도 더 생길 기회가 올 때마다 이야기하도록 하고, 갑자기 음악의 소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바로 조던 정도의 탄탄한 음악성을 가진 인물이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했고 그 것은 대중음악 자체에 하나의 축복일 수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감상자의 입장에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겠지만 소비의 행태로만 본다면 가장 지양해야활 방식이 훌륭한 음악을 소비하는 것에서 Esorteric한 쾌감을 느끼는 방식의 대중음악의 소비일 것이라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던은 대단히 바람직한 선례를 남긴 아티스트일 것이다. 그는 1930년대 빅밴드 재즈(스윙 재즈라해도 무방할 것이다.)로부터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해서 점프 블루스를 거쳐 부기-우기 스타일의 재즈와 블루스 심지어, 리듬 & 블루스에 이르는 넓은 영역에 걸치는 활동을 했고 빙 크로스비(이 양반의 크리스마스 앨범이 불과 몇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정확한 연도와 날짜는 알 수 없으나 그 기록이 비교적 최근, MJ에 의해 깨졌다고 한다. 그 앨범은 당연히 "Thriller"겠지?) 엘라 핏제럴드(Ella Fitzgerald),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과의 듀엣 작업을 통해 자신의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좀 더 다양한 음악적 커리어를 쌓았으며 외모처럼 위트와 재치도 넘쳤던 나머지 다수의 상업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고 두 편의 음악영화(Musical이라나 뭐라나...)의 제작과 음악작업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밴드의 멤버로서 활동하던 시기를 거쳐 자신의 솔로 커리어를 쌓아가는 과정에선 과거의 밴드들과는 달리 좀 더 소형화된 규모의 밴드를 조직하여 그런 활동방식을 재즈나 블루스의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는 데에 기여하기도 했다.(그의 밴드 이름이 Louis Jordan and His Tympany Five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하실 것이다.) 그리고 음악사가들이 기록하는 그의 큰 공헌 중 하나는 1940년대 이후, 재즈나 블루스 음악에 일렉트릭 기타와 일렉트릭 오건(electric organ)을 도입하여 안착시켰다는 점이다.(모르는 사람이 이 게시물을 본다면 티렉스가 조던의 빠돌이인줄 알지도 모를 일이다.)



그과 그의 밴드인 Tympany Five은 지금의 리듬 & 블루스와는 굉장히 이질적이라 "엉엉 울어대며 소를 몰거나 간드러지게 꺾는 음악"을 리듬 & 블루스라 인식할 세대들에겐 "저런 음악이 도대체 어떻게 알앤비야?"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R&B의 parameter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지금도 그들의 음악은 리듬 & 블루스의 파라미터라 여겨진다. 그와 그의 밴드가 데카 레이블을 통해 발매한 많은 78회전 음반들은 음악사가들에게 리듬 & 블루스의 교과서라는 평가를 받으며 고전 중의 고전이 되어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R&B이라 불리는 장르가 정착하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세웠다 할 것이다. 그 당시 그와 그의 밴드의 음반들은 대부분 밀 게이믈러(Mill Gabler)라는 프로듀서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후대에 비틀스와 조지 마틴의 파트너쉽에 비견될 정도로 가장 완벽한 케미스트리를 가지고 있던 아티스트와 프로듀서의 관계로 인식되고 있다. 이 밀 게이블러라는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밀이 조던과 그의 팀패니 파이브와의 활동을 바탕으로 해서 Rock and Roll의 고전 중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Bill Haley의 "Rock around the clock"의 프로듀싱에 참여했으며 다음 번에 또 이야기하겠지만 이 오지랖 넓은 조던 할아버지라는 분이 Rock and Roll이라는 장르에 있어서도 그의 족적을 남긴 위대한 분이시라는 점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어질-아직 날짜는 정확히 모른다. 1년 후가 되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게시물에서도 역시 조던 할아버지의 음악 몇 곡 소개하게 될 것이다.





추신>

1. 이런 종류의 게시물을 쓸 기분이 아니라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2. 어떤 색히들은 "너같은 무식쟁이 사류 딴따라가 사회나 정치에 대해 뭘 아냐? 닥쳐라!"라고 욕메일을 보내고 어떤 놈들은 "왜 이렇게 약한 이야기만 하느냐?"며 좀 더 선동적일 것을 주문하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출까요?

3. 오른쪽 발바닥에 깨진 유리병으로 인해 상처가 났을 때 가장 통증이 심한 곳이 왼무릎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오른발을 신경쓰다보니 자연스레 왼다리에 힘이 들어가더군요. 줴길

4. 어제 귀가하던 중 고삐리 두 명이 절 에워싸고 용돈을 좀 보태달라기에 오랜만에 사고를 좀 쳤더니 다친 곳은 없으나 어깨가 욱신거립니다. 빌어먹을... 나중에 상황 정리된 후에 왜 까불었냐고 물어봤더니 "저 새끼 싸움 되게 못하게 생겼다. 저 새끼한테 삥뜯자"라는 의견의 일치를 봤다고 하더군요. 빌어먹을 만만하게 생긴 자의 설움...

5. 좋은 소식 한가지 CBS Sony에서 Digitally Remastered 버전으로 MJ의 솔로 데뷔음반인 "Off the Wall"을 재발매했습니다. MJ이 팝의 황제가 아닌 아직 장르음악을 하던 시기의 음악을 들어보시는 것도 그 유명한 래리 칽튼의 기타를 들어보시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되실 겁니다.



Louis Jordan & His Tympany Five--Is You Is Or Is You Ain't




Louis Jordan - Buzz me Baby





Louis Jordan - Choo choo ch'boogie(이 곡 아주 죽입니다. 핫핫)

아님 말고 1000곡(97)

쾌락 快樂 명사

활용〔쾌락만[-랑-]〕

[명사]
1 유쾌하고 즐거움. 또는 그런 느낌.
한 권의 양서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쾌락 중 하나이다.
사람의 심리에는 남을 학대함으로써 쾌락을 느끼는 사디즘적 요소와 남에게서 학대받음으로써 쾌락을 느끼는 마조히즘적 요소가 있다.≪이문열, 시대와의 불화≫
2 <심리>감성의 만족,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
성적 쾌락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다.




97. 쾌락의 절정

사전엔 위와 같은 내용의 쾌락에 대한 정의가 있다. 갑자기 뜬금없는 이상야릇한 단어를 이야기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분들도 계시리라. 사람이 예술활동을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견해로는, 쾌락이라는 것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예술행위는 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장르의 바운더리로부터 몰아내게될 것이다. 쾌락이라는 단어 자체에 쾌락을 느끼실 분도 계실 것이고 "티렉스 저 색히는 배우지 못한 놈이라 생각하는 것이 순 허리하학적인 것이구나"라고 말씀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말씀을 돌려드리면 되려나 모르겠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건가 어쨌던가... 감성의 만족이건 욕망의 만족이건 쾌락을 주지 못하는 예술활동이란 생각하기도 싫다. 미술작품의 감상자건 음악의 감상자건 유쾌하고 즐거운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감상활동을 더 이상 지속하려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쾌락이 항상 쌍방향으로 이뤄지지도 않고 시간적으로 일치하기도 힘든 일이다. 음악 애호가들이 기를 쓰고 굶어가며 무대에 서는 연주자들을 보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는 이유는 쾌락의 일방성을 피하고 쾌락의 동시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적극적인 예술 관련 행위"중 하나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우 어린 시절의 연극의 감동이 영화의 감동을 압도하는 이유도 역시 앞서 이야기했던 두 가지의 문제의 해결에 나름대로 근접한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영화가 연극보다 열등하다는 등의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한가지 더 애석한 것은 쾌락의 쌍방향성과 동시성이라는 것이 어느 한 쪽이 충족된다고 하여 다른 한 쪽이 반드시 충족되지도 심지어는 다른 한쪽이 쉽게 충족될 조건을 제시화지도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요소가 필수적 요소가 되는 예술 장르에 있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반드시 계속 연구되어져야만 할 과제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쾌락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한 가지 해보면 예술이 주는 쾌락이라는 녀석은-물론 다른 곳에서 섣을 수 있는 쾌락이라는 놈들도 마찬가지이지만- Esoteric하면 할수록 그 쾌락을 자기 것으로 가지게 되는 이들의 만족도는 더욱 더 높아진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장르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의 무의식엔 이런 쾌락의 본질이 숨겨져있음을 부인할 숭 없을 것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다. 1970년대 의 신화적 성공은 장르에 집착하는 그런 사람들의 영향력이 현실화된 가장 좋은 케이스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장르의 감상자들은 이런 밀교적 쾌락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화기 위해 시간이 자닐수록 자폐적 경향을 띠게 되는 경우도 있다. 때론 이 점이 장르 예술 자쳬의 발목을 잡게 되기도 한다. 종종 장르예술이 보편적인 힘을 가지지 못하는 것과 이러한 쾌락의 성질은 서로 강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장르예술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열광하는 장르가 보편성을 가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그 장르를 떠나게 되기도 한다. 어떤 점에서 보면 쾌락과 밀교적 성격은 불가분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정한 쾌락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 소수인지도 모른다.



위 단락에 이어 이야기하자면 쾌락은 나눌수록 그 만족도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때로는 한계효용이 체감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것이 쾌락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이러한 종류의 쾌락이 최고조에 달하게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설혹 같은 시간에 같은 쾌락을 느낀 사람의 수가 상당하다 하더라도 각자의 쾌락이 서로 배타적"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미국의 대배우들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험프리 보가트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골초인데다 차를 싫어했던 그는 예의 그 중절모를 눌러쓰고 로스 앤젤리스의 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산책을 하며 궐련이나 여송연을 피워대는 것은 그의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고 하는데 험프리 할배가 워낙 골초인지라 가끔은 산책 중 담배가 떨어지는 일도 발생했다 한다. 그 때 그는 거리낌없이 행인들에게 다가가 "저 혹시 아시려나 모르겠는데요 저는 험프리 보가트라 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담배 한 대 얻어 피울 수 있을까요?"라 이야기 했다고 한다. 논리의 비약일지 모르겠으나 험프리 보가트에겐 일상이었겠지만 그는에게 담배를 준 행인들은 평생 그의 충실한 팬이 되었다 한다. 예가 적확하진 않지만 정확하게 일치하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유쾌함은 서로 배타적이었다 할 것이다. 아마 보가트의 사인 행사 같은 데서 그를 만났다고 한다면 이런 배타적인 유쾌함은 불가능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쾌락이 극대화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쾌락을 얻은 그 행위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이나 권력에 의해 금지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쾌락을 느낄 수 있고 그 쾌락이 서로 다른 종류와 강도의 쾌락을 느끼고 있는 그 순간 "자신이 어찌활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그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힘을 가진자들의 적"으로 돌리게 되고 그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 쾌락은 절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예컨데 그 순간 경찰이 더 이상 자신이 쾌락을 느끼고 있던 그 행위를 더 이상 진행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게 된다면 바로 그 시점이 쾌락의 절정에 도달하는 시기가 된다 할 것이다. 이런 점이 쾌락의 본질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쾌락의 강도를 높이는 데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욕망이 억압되게 되면 그 순간 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점부터 쾌락의 절정을 향해 달리게 될 다른 탈출구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이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비틀스가 에비로드 스튜디오의 옥상에서 그들의 마지막 대중 앞에서의 고민을 하던 그 시간에 에비로드 스튜디오 근방을 지나가다 경찰에 의해 그들의 마지막 대중 앞에서의 연주가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는 것을 목격한 그 사람들, 그 유명한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을 허가도 없이 거리에서 연주하다가 경찰에 의해 제지되는 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우연성이건 필연성이건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 쾌락의 절정에 서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자리에서 열광하고 자신의 쾌락의 절정을 느꼇던 사람들의 쾌락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공범의식"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꿈을 꾸고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아니나,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는 "진정한 쾌락을 향한 뻘짓"이 이런 것이고 나름대로 누군가 이런 일을 종종 해줌으로 인해 음악의 적극적 감상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햇던 것 이상의 쾌락을 경험하면서 음악에 대한 한 단계 성숙된 자세를 가지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아님 말고...







The Beatles, Get Back



026 I've Got a Feeling - THE BEATLES

The Beatles - Don't Let Me Down (1969)

The Beatles - I Dig A Pony (1969)
딱정벌레 형아들 곡들은 이 정도에서...

U2 -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Video

아님 말고 1000곡(96) Goodbye MJ

4. MJ의 공과(?)

MJ의 경우 역사상 유례가 앖다고 단언할 수 있는 상업적 성공과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음악적 성과를 거둔 것임에 틀림없으나 그의 경우처럼 "음악적으로 그를 추종하는 후배들이 거의 없던 경우"는 그의 엄청난 위치에 비한다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이클 잭슨의 모든 것을 닮으려 한다거나 그를 목표로 했던 그의 후배들은 대단히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추종했던 사람들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혹 그의 곡이 리메이크 된 적도 있으나 리메이크와 그의 음악을 추종했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이 게시물의 결론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냥 이런 식으로 단언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 게시물은(본디 하나의 게시물을 더 쓰려 했으나 그냥 하나로 묶어버리고로 했으니 분량이 좀 많을 것이다. 이해를...) MJ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물론 그의 사생활이라든지 인간적인 부분은 제외하고)를 내리는 데에 많은 부분을 활애할 예정이다. 혹시라도 스스로가 마이클의 빅팬ㄴ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은 부디 오해하지 마시고 차분히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MJ와 같은 클래스의 인물이 대중음악계에 다시 나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한 번 해보자. 그에 대한 내 개인적인 답은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작곡자로서나, 보컬리스트로서나 댄서로서나 각각의 한가지만 본다 하더라도 그 정도의 인물이 나오기 힘든 마당에 그 모든 요소를 모두 갖춘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길에 가다가 벼락에 맞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하여 그 것이 성공할 것을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모한 짓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MJ의 가장 빛나는 재능은 표현 그대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대중음악가로서의 재능"일 것이다. 그는 재능있는 소년에서 출발하여 "세상에서 가장 주목받는 20대 초반의 솔로 가수"로 성장한 다음 "역사상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앨범을 가진 가수"가 된 후 "전세계의 모든 대중음악의 팬들이 그의 등장을 언제나 기다리게 만드는 인물"로 진화했다. 솔로 데뷔 이후 그의 음반들은 "Off the wall"을 제외하곤 당대의 대중음악의 트랜드와는 항상 무관한 음악들이었다. 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대중음악가들이 트랜드를 만들어 그 것을 세상에 알리고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가는 동안 마이클 잭슨은 "마이클 잭슨"이라는 이름의 트랜드를 만들고 "마이클 잭슨"이라는 음악을 만들며 "마이클 잭슨 그 자신이 블록버스터"인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 잭슨은 그 자체로 "장르"였다.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해서 나 자신은 6하원칙에 입각해서 마이클 잭슨의 이런 성공에 대해 이야기할 능력이 없다. 모르긴 해도 지구상의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그의 성공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그의 "타고난 감각"과 "본능적 능력"에 기대어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것은 그 이전의 누구도 갖지 못했고 그 이후의 누구도 갖지 못할 "신의 선물"이랄 밖에 다른 설명을 할 도리가 없다. 무책임하다고? 마이클 잭슨의 성공은 무책임한 설명만 가능한 그런 부분이 있다. 죄송하다. 이 이상 말하다간 내 능력의 바닥이 보일 것이다.



마이클 잭슨이 대중에게 입증한 것은 이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타고난 감각에 엄청난 물량을 때려 붓게되면 음향학적으로 완벽한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누가 뭐라 하더라도 이 부분은 MJ의 최고의 업적이라 할 수 잇을 것이다. "돈으로 처바르면 그런 사운드를 만들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고 질문하고 싶으시다면 "모두가 다 가능하다고 믿겠지만 당신은 불가능할 것!"이라 답해드리고 싶다. MJ의 타고난 천재성이 없었다면 아무리 돈을 처바른다 하더라도 그런 빈틈없는 논리적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이 MJ의 약점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그가 "돈에 의지해야만 음반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MJ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음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즉 MJ식의 방식의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가 거둔 거의 역사(그렇다 그의 앨범 타이틀이 "History"인 것도 그이기 때문에 용서될 수 있다.)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MJ류의 음악"이라는 것이 하나의 대중음악의 트랜드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다. MJ 정도의 감각을 가진 사람이 다시 나오는 것도 대단히 힘든 일이겠지만 더 힘든 것은 그런 대단한 감각을 음반으로 그대로 옮길만한 감각과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물량을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것이 "MJ의 음악이 지나치게 친절한 사운드를 구사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라하는 후배들이 없었던"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것은 MJ에게도 "반드시 자신의 위대함을 대신 증명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바로 그 점으로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면이 있음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문제의 "Invincible"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MJ의 마지막 정규앨범이 되고 만 문제의 "Invincible"은 2001년 10월 30일 무려 열여섯개의 트랙과 총 재생시간이 무려 77분 8초에 달하며 1997년 10월에 녹음을 시작하여 2001년 6월에 녹음이 끝난 이 대작 앨범은 미국에서만 200만장이 넘는, 즉 더블 플래티넘,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MJ에 있어 이 음반은 상업적으로-음악적으로는 평가가 분분하지만 개인적으로 최악이라고까지 평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참담한 실패를 거둔 앨범이 되고 말았다. 일단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두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인데 1)대중들이나 평단이나(특히 평단) 그간 쌓여온 MJ에 대한 음악적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았음을 증명한 앨범이었다. 사실 방금 전, 최악은 아니라고 이야기했으나 "팝의 황제"의 앨범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2) 이 세상에서 2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참담한 실패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마이클 잭슨이 유일할 것이다. 사실 이 앨범은 발매전까지 여러가지 소문이 많았더랬다. 아시는 분들은 아실 개인적인 이유로 인해 마이클 잭슨은 이 앨범이 상업적으로 엄청나게 성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고 재정난으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비틀스 곡들의 판권을 활용하여 자신에게 닥친 재정적 문제들을 최대한으로 방어하고 있던 차라 앨범에 대한 별의별 소문이 돌았으나 밖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확실했던 것 중 하나는 "이 앨범이 미국내에서 팔려야할 마지노선이 500만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MJ에게 엄청난 위기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그러나, 음악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대단히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왔고 지금 돌이켜보건데 Invincible은 MJ에게나 그의 팬들에게 일종의 재앙이 되고 말았다 할 것이다.



그의 팬들에겐 대단히 죄송한 이야기 되겠지만, 개인적으로 "마이클 잭슨에게 음악적으로 고공낙하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더랬다. 그 계기는 누가 들어도 "아! 이 곡의 제작자는 저 R. Kelly여요!"라고 손을 들던 곡인 "You are not alone"과 "Heal the world"의 두 곡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두 곡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곡이고 객관적으로 나쁜곡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두 곡 다 "꼭 MJ의 곡이 아니어도 될만한"곡들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MJ의 계속되는 승승장구로 인해 그는 최소한 "Blood on the dance floor"정도의 수준을 가진 곡들을 내놔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R. Kelly의 색채가 너무 강했던 "You are not alone"이나 마치 자선 이벤트를 위해 급하게 만들고 녹음한 캠페인 송처럼 비유와 상징과는 거리가 먼 직설적 메시지를 담은 "상대적으로 모든 면에서 대단히 허술한 곡이었던" "You are not alone"을 들으며 "마이클 잭슨도 대단히 큰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면 조금 오버일지는 몰라도 그런 류의 곡들이 마이클 잭슨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햇으며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평소 개인적인 지론이 "좋은 음악이 굳이 어려울 필요는 없다는 것"임을 수차례 이야기한 바 있다. 하지만, 쉬운 음악이라고 해서 사운드의 곳곳이 비어있는 것이 귀에 거슬릴 정도라거나 자신의 능력이 100인데 그 능력을 50도 쓰지 않은 안이한 곡들에 대해서까지 "쉬운 음악이 좋다."는 우호적인 평가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한사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게시물의 앞 부분에서 MJ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에 완벽하다는 이야기를 하진 않았던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물론 MJ가 뛰어난 프로듀서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프로듀서로서의 그의 능력에 대한 상찬의 레토릭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자신의 뛰어난 프로듀싱 능력을 1/10정도만 발휘했다는 점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워 하는 것은 그의 그 뛰어난 프로듀싱 능력을 가지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지나치게 자신이 여지껏 잘해왔고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를 따라오지 못할 그런 음악들"에 안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돈나가 프로듀서로서 엘라니스 모리셋을 발굴하고 프로디지를 미국시장에 소개했으며 심지어는 "Frozen"과 같은 마돈나식의 테크노를 발표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곡들 중 하나라 일컬어지는 "American Pie"를 자신의 스타일로 다시 만드는 등의 시도를 할 때 MJ의 경우 지나치게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들만을 해왔다는 점이 대단히 안타깝다할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2001년 Invincible을 발매하던 당시 미국 대중음악 시장의 추세는 "영화식으로 비유하여 이야기하자면" 블록버스터식의 제작 방식에서 독립영화 형태로 제작의 패턴이 변해가는 과정의 덫에 걸렸다는 점도 짐작해볼 수 있는 MJ의 불행 중 하나라 할 것이다. 그의 너무나도 뛰어난 재능에 갇혀 자신의 최고 장점이었던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탁울한 음악적 감각"이 다소 무뎌진 것은 아닌는 추측을 해 볼 따름이다. 과연 그가 "대중예술가의 경지에 이른 대가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지금까지 써 온 게시물의 분량만큼의 이야기를 더 하더라도 겨론이 나지 않을 수 있지만 "과연 그가 prince of pop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무조건 그 답은 "당연하지"가 될 것이다. 그가 음악적으로 고전하게 된 이유에 대한 여러가지 설들이 있으나 이 자리에선 절대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 것은 예의가 아니다.



추신>

1.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MJ같은 수퍼스타는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며 그처럼 혼자 독식할만한 인물이 나오는 것도 곤란하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다.



2. MJ의 자녀들에 대해 친자여부나 양육권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 모양이다. 일단 양육권에 대한 추접한 싸움에 대해선 역사상 그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려나보다하고 넘어가지만 그의 자녀들이 친자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인간들의 주둥아리는 찢어버리고 싶다.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 마이클과 한 밥상에서 밥을 먹고 매일 뒹굴고 뛰고 놀았으며 자기 전에 아버지가 읽어주는 동화를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관계는 충분히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다. 더 무엇이 필요한가? 마이클이 그들을 자신의 자녀로 애지중지 키웠으며 아이들이 마이클을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아버지"라고 한다는데...



3. 이러저러한 이유로 다시는 MJ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하게 된다면 그 게시물을 완성한 다음 날이 나 역시 세상을 뜨는 날이 될 것이다.



4. 오늘 링크할 곡들은 개인적으로 MJ 답다고 생각하는-혹은 개인적으로 그의걸작이라 생각하는-곡들이다.



blood on the dance floor(사적으로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 곡입니다.)



Smooth criminal



in the closet



1. 급히 서둘러서 이 두배 정도는 될 이야기를 간략하게 하다보니 허섭한 네 개의 게시물이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로 인해 대단히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2. 지금 다시 하나하나 살펴보니 MJ에겐 참으로 훌륭한 곡들이 많군요. 오로지 대작만이 가치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겐 미흡할지 모르지만 정말 이 사람의 곡들의 사운드엔 빈틈이 없는 곡들이 많습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3. 결국 자의건 타의건 팜 음악은 또 하나의 시대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미묘한 감정이 듭니다. 어려서부터 학업과 독서를 멀리하고 오로지 음악만을 들어온 사람으로서 이런 묘한 느낌은 존과 조지가 세상을 떴을 때와는 또 다른 설명 불가능한 미묘한 여러가지의 감정들이 교차함을 숨길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MJ 급의 대스타는 이제 그만 나왔으면 합니다. 그에 대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MJ의 뒤를 이을 그런 대스타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을 생각한다면 그 것이 최선인 것 같습니다. 마치 로버트 루카스가 "내일 시험을 본다"라는 공고를 낸 후 학생들의 최선의 반응은 시험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무언가 준비를 해야할 큰 상실과 시련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버거운 일이 될 것입니다.

4. MJ의 사생활이나 법적으로 누가 아이들의 양육권을 가지게 될 것이며 유산 문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에 환멸을 느껴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고 무조건 그의 음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하다보니 그의 음악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부분인 퀸시 존스와의 관계에 대한 것까지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미 밝혔듯, 제가 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는 그런 류의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MJ가 그와는 좀 다른 사람들이지만, 존, 조지, 짐, 지미, 제니스, 엘비스, 듀언, 로이 등과 멋진 음악을 저 세상에서 만들게 되리라 확신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MJ의 명복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기원해주시기 바랍니다.

6. 진이 빠져 다음 게시물의 업데이트는 조금 늦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혹 그렇더라도 널리 양해를...



아! 정말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은 것은 말이지요. 어떤 장르든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존경심"만큼은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아님 말고 1000곡(95) Goodbye MJ(3)

95. Goodbye MJ(3)

앞의 게시물에 이어서 조금 보충을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MJ의 솔로 데뷔 후의 음악이 백인취향이었다는 구체적 근거를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직관이라는 차원의 문제를 추론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대단히 힘들긴 하지만 우선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에선 잘 쓰이지 않는 각 마디의 첫박에 강세(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 마디에서 가장 큰 혹은 센 강세)를 쓰는 경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것은 두 가지로 설명된다. 우선 이런 비트는 아주 전형적인 팝이나 Rock음악의 형식의 답습이라는 점!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자신의 모든 음악을 "자신의 댄스와 구별하지 않는 MJ식의 편곡방식"이라는 점인데, 이 MJ식의 댄스비트라는 것은 전형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ㄹ의 댄스나 라린탠스와는 대단히 동떨어져 있고 굳이 그 연원을 찾자면 디스코의 비트와 대단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텐데 물론 디스코라는 장르의 시작 역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과 춤에서 비롯했지만 그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비기스(전에 미국인에게 비지스라 발음했다가 그 단어의 발음은 비기스라고 어찌나 핀잔을 주던지 되도록이면 한글로 펴기하지 않으려 하지만 비기스가 맞는 발음이라는 것 정도는 여러분들도 아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나 빌리지 피플 등의 전통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팀이라 볼 수 없는 팀들의 활동기였다. 이 정도로만 설명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비트에 대해 이해가 좀 더디신 분들이라면 아주 상식적 차원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장르음악과는 대단히 동떨어진 멜로디라인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만 상기하셔도 될 것이다.



3. MJ의 음악적 문제들

또 대단히 길어질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우선 ETN이라는 케이블 엔터테인먼트 채널에서 MJ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던 중 1972년 "Off the Wall"로 솔로 데뷔!라는 자막을 내보냈는데 작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자신의 원고를 넘겼고 자막처리를 담당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1972년은 MJ의 솔로 프로젝트가 제일 처음 시도된 해임엔 분명하지만 그 것은 모타운 시절, 잭슨스의 활동을 하면서였고 솔로 앨범이 본격적으로 출시된 적은 없었으며 더더군다나 그 솔로 프로젝트의 타이틀이 "Off the Wall"은 절대 아니다. 왜 위키피디아만 찾아봐도 알 수 있는 일을 그런 숱한 거짓말을 해댈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런 일이야 한 두번이 아니니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적으로 심지어 음악전문채널-사랑스런 조카들의 이야기를 빌자면 M-Net은 이제 종합 연예채널이지 음악전문 채널이 아니란다. MTV는 다행히 음악전문채널...이라 생각했으나 그 역시 엔터테이너들의 가십거리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절반이었다.-을 추구하는 듯한 회사에서들 역시 지상파 매체나 뉴스전문채널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식의 보도를 일삼는 것을 보며 "아직 명랑사회는 멀었구나!"라는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MJ의 음악적인 업적에 대한 평가가 절대 후한 편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 시대 휠을 잡았던(이 표현 정말 안 좋은데 마땅히 대체할 표현이 없다.), 심지어는 엘비스와 비틀스에 필적할만한 유일한 인물이라 이야기하는 MJ에 대한 분석기사 혹은 특집기사의 수준이 이 정도라는 것은 대중음악에 대한 담론이 얼마나 암담한가를 웅변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곡들은 "대단히 훌륭한 사운드"를 구사한다. 한 때 주변의 지인들과 마이클 잭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내린 결론은 "현재 지구상에서 돈으로 세션을 사든, 인맥을 동원하든 그 어떤 방법을 쓰던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사운드를 음반을 통해 완벽하게 그대로 재생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마이클 잭슨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 정도의 돈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사운드를 얼마든지 음반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실 것이다. 당연하다. 마이클 잭슨 정도의 인맥과 경제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음반의 완성도가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함에 있어서도 대단히 조심해야할 것은 "머릿 속에 있는 것이 그대로 음반으로 나온 그 사운드" 자체의 정교함이나 세련됨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일이며 그 점 때문에 마이클 잭슨이 가지고 있는 대단한 음악적 감각이라는 점을 절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른바 흔히들 이야기하는 "작품성"에 대한 논의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다만 여기서 이야기할 것은 마이클 잭슨이 머릿 속에 그리고 음반으로 세상에 내놓은 그 사운드는 "대단히 정교하고 세련된 사운드인 동시에 대단히 지적이며 논리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마이클 잭슨의 사운드의 일반적 특성들-정교함,세련됨,지적,논리적-은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데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단어들임을 잊지 않도록 하자.



마이클 잭슨이 음악적으로 앞서의 "대가"들과 다른 특성은 한마디로 "그의 사운드는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점일 것이다. 항상 최고의 세션과 충분한 작업기간과 믹싱이나 매스터링에 있어서만큼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완벽함 등은 그보다 앞서 활약했던 이른바 "대가"들의 음악이 가지고 있었던 "청자 혹은 감상자가 음악에 개입할 여지"를 완벽하게 차단한다.(개인적으로도 마이클 잭슨이 팝의 황제일 수는 있으나 역사상 최고의 팝 음악가라는 평가를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10여년전부터 수없이 해왔고 그에 대한 근거가 바로 이 점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세상에 내놓은 음악들은 대단히 완성도가 높은 음악임에 분명하나 그의 음악들의 멜로디와 연주 그 외의 기계젹 요인들과 심지어는 가사까지도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음악적 소양이 더해져 하나의 작품이 되는 쾌감"을 전해주진 않는다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국내에서 불세출의 밴드인 "Yes"가 다른 프로그레시브 밴드에 비해 그다지 많은 호응을 얻지 못했던 점을 상기하시면 될 것이란 생각도 든다. 프로그레시브 신에서 예스는 항상 최고의 라인업을 갖춘 팀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연주력은 항상 최고였고 보컬인 존 앤더슨은 앞으로 Rock음악의 역사가 얼마나 더 지속될지 알 수는 없어도 Rock이라는 음악장르를 통해 배출된 보컬리스트들 중 가장 독특한 경지에 이르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기승전결이 "과도하게 확실한 그들의 사운드"는 "스스로 진보적이고자 했던 progressive rock의 팬"들에겐 다소 환영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그 것은 바로 너무나 꽉 짜여진 그들의 사운드 때문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개인적 견해이다.



마찬가지로 마아클 잭슨은 그런 친절한 자신의 사운드에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엔터테인먼트 컨텐츠"가 되는 그의 공연이나 비디오 클립으로 인해 "감상자로서의 능동적 측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청자들"에겐 다소 지루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고 그런 점들이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철학적 경지에 이른 음악"이라든지 혹은 "예술철학의 관점에서 훌륭한 작품"이라든지 하는 평가를 내리게 하는 데엔 주저할 수밖에 없는 모멘텀들을 청자나 평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기실, 이른바 대가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사운드는 그 정도에 있어 "아주 조금에서부터 대단히 많은 정도"까지 불친절한 면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화성학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실수가 있는 곡들도 있고 서양음악의 일반적 작곡기법에서 대단히 벗어난다든지 혹은 멜로디의 전개가 대단히 비논리적이라든지 하는 "어떤 면에서 본다면 대단히 결점이 많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사운드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청자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곡작업에서부터 시작해서 감상에 이르는 지점까지"를 하나의 예술적 혹은 미학적 과정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왔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두고 "팝이란 장르를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했을 정도의 대가인가?"라는 질문을 내려본다면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고 사적으로는 "절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편에 서고 싶다. 분명히 밝혀두건데 이 것은 그의 인기를 질투해서라기 보다는 "지나치게 빈틈없는 MJ의 사운드가 다소 지루하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잡지나 서적에 의지하지 않고 이런 긴 내용들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는 점을 보면서 그간 대단히 MJ에 대해 할 말이 많았구나... 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다음에 또 계속...)



링크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들인데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MJ에 대한 게시물들에 있어 선곡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 점 다시 한 번 말씀드리니 "아니 어째서 무슨무슨 곡이 없는데 이 곡을 링크시켰냐?"라는 말씀은 피해주셨으면 한다. 이 게시물은 MJ의 팬의 한 사람이 그에게 바치는 헌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Bad



They don't care about us





They don't care about us(Prison Version)





기분이 하도 꿀꿀하여 여러분들께 퀴즈 하나 내보겠습니다. 문제 자체가 허섭하지만, 제가 이 두 곡을 한꺼번에 선택한 이유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가장 근사한 답을 주시는 분께는 후사하겠습니다.

아님 말고 1000곡(94) Goodbye MJ(2)

2. MJ 음악의 양면성? 다면성?

이 시점에서 MJ의 음악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가설을 결론인양 치환하여 그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당연히 이 이야기가 MJ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절대적 규율이 되는 것은 아니며 더군다나 어디 가서 "이상한 블로그를 하는 미친 놈이 이런 소릴 하더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그저 개인적 가설을 결론으로 "뻥튀기한"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MJ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MJ의 경우 철저하게 백인의 음악을 지향했다."

물론 흑인으로서 백인의 음악을 지향했던 "최초의 거물급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MJ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첫번째 인물로는 냇 킹 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는 같은 인종의 음악 청자들에게 숱한 욕을 먹어가면서도 백인취향의 음악 혹은 백인지향의 음악을 죽을 때까지 시도했던 인물이었다. 이 양반에 대한 이야기는 당연히 나중에 또 할 기회가 생기니 너무 지금 안달을 내실 필요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냇 킹 콜은 애초에 그런 음악을 함으로 자신을 세상에 알린 인물이고 "음악적인 전향의 과정"같은 것이 두드러진 인물도 아니었으나 MJ의 경우엔-물론 나중에 대단히 몰락하는 음악 트랜드인 동시에 심지어는 장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Motown Sound의 대표선수격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음악적 전향과정"은 단지 개인적인 취향이나 선호의 변화로 단순하게 여기기엔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대단히 복잡하며 티렉스가 결론을 내지 못할 수도 있는 문제이니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데까지 진행해본다는 데에 만족해도 될 듯하다. 물론 싫으시면 관두시면 되고...



다이애너 로스 & 더 슈프림스,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잭슨5(잭슨즈)등을 앞세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모타운 사운드의 위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모타운 레이블이 차트를 점령한 것은 물론 방송과 클럽들까지도 모타운 사운드가 없으면 운영이 불가능하다할 정도의 엄청난 대중적 소구력을 가지고 있었다 할 것이다. 모타운이 그런 절대적 지위를 누릴 수 있던 이유 중 가장 절대적인 것은 "소울이라는 장르를 전문으로 하는 레이블이었지만 레이블에 소속된 아티스트들의 음악적 스펙트럼이 대단히 다양했던 점"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애초 유니버설 레코드의 자회사였던 모타운 레코드는 나중에 자신들의 자회사만 하더라도 최대 28개 회사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레이블이다. 물론 여러분들은 모타운의 헤드쿼터가 Ford와 GM의 헤드쿼터가 위치해있던 명실상부한 미국 제조업의 중심지이자 미국 경제의 상징이었던 Detroit에 있던 관계로 Motor+Town=Motown이라는 의미로 자신들의 레이블의 이름을 정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레이블의 창시자였던 Berry Gordy라는 인물은 마치 홍콩의 영화사 쇼브라더스의 란란 쇼나 봅 애럼과 함께 프로복싱계를 양분했던 프로모터였던 돈 킹과 같은 제왕적 지위를 누리던 인물이었다. 물론 1959년 창립해서 미국의 소울 음악을 대표하는 레이블로 그 명성과 부를 축적했으나 정통 리듬 & 블루스에서 재즈와 힙합 심지어는 영국에 있던 모타운의 브랜치였던 Gull Record이라는 레이블을 통해서는 브릿팝 음반들까지 발매하는 등 한 시대를 좌지주이했던 대레이블답게 아직까지도 (많이 위축되긴 했지만) 대단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레이블이다. 그런 모타운 레이블이 스스로 발굴해내 스타덤에 오르게한 스타의 대표가 바로 마이클 잭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빈 게이라는 대단한 음악성을 가진 인물이 있긴 했으나 그를 베리 고디가 배출한 인물이라 보기엔 시작부터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을 꼽자면 다이애너 로스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솔로 프로젝트 자체는 그가 모타운의 대표적 스타였던 1972년부터 꾸준히 있어왔다.(당시 MJ의 나이는 14세였다.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잭슨즈가 MJ의 변성기와 함께 하향세를 겪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반은 진실이고 반은 진실이 아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 솔로 가수(아티스트라는 단어를 쓰기엔 무언가 꺼림직한 부분이 있다.)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실질적인 데뷔를 한 것은 Epic 레이블을 통해서였고 그는 자신의 실질적인 솔로 데뷔 앨범에서 본래 자신의 주특기였던 소울을 바탕으로 리듬 & 블루스와 클럽 댄스, 디스코, 팝, urban pop, rock등의 장르를 통합한 "일종의 대작 앨범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였고 모타운 사운드의 전통을 이어가는 듯하면서도 누가 들어도 다른 점을 확신할만한 음악을 들고 나오게 된 데에는 "Let's groove"를 제작하여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물론 그 곡이 그의 출세작은 아니다. 그저 MJ와 공동으로 작업을 시작하기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시간상으로 둘의 공동작업에 가장 근접한 시기의 작품인 관계로 예를 드는 것뿐이다.-) Quincy Jones와 함께 하게 되며 그러한 Off the wall의 음악적 특성은 MJ 혼자의 힘이 아닌 Quincy Jones의 프로듀싱 스타일도 가미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세계적으로 1억장이 훨씬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는 Thriller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겠으나 Off the Wall은 20,000,000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이제 겨우 21세된 마이클 잭슨을 전세계가 가장 주목받는 가수로 만들게 된다. 공화국에선 주로 Thriller의 성공이 크게 부각되어 많은 이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실이지만, Thriller의 경우 이른바 Sophomore Jinx을 확실하게 날려버렸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평가받아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이다. (아! 씨! 이거 왜이리 길어지냐...)



그러나, 그 무섭다는 서포모어 징크스를 깬 "Thriller"이라는 이름의 "대단히 역사적인(대중적 성공을 거둔)" 음반은 본격적으로 MJ이라는 인물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청자들의 논란의 중심에 서게되는 계기가 된다. 디스코의 시대의 대미를 장식한 "일종의 명반"이라 부를 수 있는 "Off the wall"이라는 걸출한 음반과 비교했을 때, 그리고 MJ의 모습을 잭슨5이나 잭슨즈 시절부터 기억해오던 팬들에게 이 음반은 일종의 "음악적 배반이자 배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Off the wall"에 비해 훨씬 더 풍부한 사운드를 장착하고 대중들에게 선을 보인 이 음반은 MJ의 모타운 시절의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은 음반이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음반을 가지고 "MJ의 음악적 변신이나 음악적 발전"이라는 측면을 이야기하기엔 대단히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 것은 "Thrikller"은 MJ 자신이 과거의 MJ의 모든 것을 부정한 프로젝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Thriller의 말도 안되는(?)성공에도 불구하고 MJ이라는 인물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세월이 흐르며 자신의 피부색이 점점 흰색으로 바뀌듯, 마치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지우려는 작정을 하고 나온 사람 같아 보였다. 물론 그가 Thriller을 발매하던 1982년 말엔 이미 디스코라는 장르의 유통기한이 다한 후였다는 것도 부일할 수 없는 사실이고 뉴 웨이브가 장르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데에 생각보다 더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존 레넌의 죽음이라는 충격으로 인해 팝신 전체가 1970년대 말에 예상했던 1980년대 초반의 흐름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하더라도 Thriller이라는 타이틀의 앨범은 그 놀라운 상업적 성공과 MJ이라는 인물을 대번에 "팝의 황제"로까지 올려놓은 미증유의 성공과는 다른 측면에서 MJ자신에 대한 또다른 논란의 여지들을 대중들에게 던졌던 것이다.

(빌어먹을... 또 다음 번에 계속...)



P.S.>

기껏 Thriller이 가져온 논란 어쩌고 하면서 링크를 거는 곡들은 정작 Off the wall에 수록된 곡들입니다. 앞서의 게시물에서 들으셨던 Thriller 앨범의 대표적인 "메가 힛 송(제가 이런 표현을 쓰다니요!)"들과 비교해보시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인식해 보시는 것도 대단한 즐거움일 것입니다. 물론 아님 말고...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아주 사적인 취향에 의해 이 곡은 MJ의 베스트 중 하나라 생각하는 곡입니다.)



Rock with you

아님 말고 1000곡(93)Goodbye MJ(1)

워낙 대중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대중적 인기가 본질을 왜곡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그 빌어먹을 놈의 대중적 인기라는 것과 그의 음악성이라는 것이 "대체적으로 일치해주는"것이겠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여지껏 존재했던 노래하는 것을, 연주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모두 다 밥 딜런처럼 대중적 지지를 얻은 동시에 음악적 평가도 "대단히" 긍정적이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만(물론 그에 대한 논란도 엄청나게 일었던 적이 있었지만) 음반판매량과 그의 음악성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의 영웅과 음악 Scene의 영웅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도 어쩌러 수 없이 그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해야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에둘러서 이야기할 필요도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다소간의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 마이클 잭슨이 한국 시간으로 26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사람은 없으니 평소에 가져왔던 그에 대한 공과 과를 차분히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래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대한 개인적 근거는 두 가지이다.

1) 그의 베스트 앨범이 발매되고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베스트 앨범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참담한 성적을 거둔 것을 보며 이제 더 이상 마이클 잭슨에게서 새로운 음악적인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당분간은 힘들다는 생각을 했고 그 이후부터 나름대로 여러가지 부분에 있어 마이클 잭슨의 공과 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것이 마무리되어가던 차에 이런 일이 발생했기 때문

2) 장르음악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일반적 의미에서 "팝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에 있어 마이클 잭슨에 대한 이야기들을 정리해야만 20세기의 팝음악 혹은 "대중적" 대중음악에 대한 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 대중음악에 있어 "보여주는 것"혹은 "보여지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접근

마이클 잭슨이 역사적인 솔로 데뷔앨범인 "Off the wall(1979)"을 들고 재등장하기 전에 이른바 "비주얼이 좋다"는 이야기는 베이시티 롤러스나 저팬(Japan)과 같은 그루피들을 이끌만한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아이돌 스타들에게 어울리는 이야기였지만, 마이클 잭슨의 솔로 데뷔 이후로 그야말로 "보여줄 것이 많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재정립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솔로 데뷔 이후의 마이클 잭슨의 활동을 보면 "음악을 듣는 사람들만이 한 가수의 팬이 되거나 하는 것은 아님"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공화국에선 "Thriller"의 워낙 엄청난 위세에 눌려 "Off the wall"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지만 Jackson5, Jacksons시절에도 이미 충분히 많은 시각적인 서비스를 해왔던 마이클 잭슨이 성인이 된 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을 "들려주는 것만으로 나 자신을 알리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게 되었다 할 것이다. 막 MTV의 개국과 함

께 팝음악에 있어서 "보여주고 보여진다는 것"의 중요성이 조금씩 주목받을무렵 솔로로 나타난 마이클 잭슨은 "Off the wall"을 들고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컴백을 했으며 대중들은 이미 "Thriller"의 발매 이전에 "언제든지 마이클의 새 앨범이 나오기만 해봐라 당장 레코드숍으로 달려가리라!"는 자세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음악적인 면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그 유명한 Beat It의 그 엄청난 기타 애드립의 연주자가 다름 아닌 에드워드 밴 헤일런이라는 사실을 다들 아실 것이다.- 팝신을 관심있게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을 경악시켰던 것은 "런던의 늑대인간"(제목이 정확하지 않다. 확인 후 틀리다면 정정하겠다.)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책임하에 제작되었던 옴니버스 영화인 "Twilight Zone"으로 SF 미스터리 장르에서 신예 감독으로 호평받고 있던 존 랜디스를 앞세워 "Making Thriller"을 주무기로 들고 나온 것이었다. 대략 30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이 비디오 클립은 Thriller의 풀버전에 그리고 비디오 클립의 메이킹 필름이 삽입되어있는 앨범과는 별도로 발매된 VCR이었는데 원본을 구하려고 한 때 국내에서 대단한 소란이 벌어진 적도 있었더랬다.



그 "Thriller"을 시작으로 마이클 잭슨은 새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항상 새로운 비디오클립을 장착하고 대중에게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 비디오 클립은 항상 화제의 중심에 서있었으며 더욱이 중요한 것은 뮤직비디오를 하나의 작품(예술이라고 이야기하기엔 좀 낯간지럽다.)의 경지에 올려놓는 작업이기도 했으며 단순히 뮤직비디오의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떠나 "기술적인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도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컨데 기술적으로 별것 아니라 생각되던 "빌리진"의 뮤직비디오도 그 당시로선 "거의 최초로 교차편집을 사용한" 뮤직비디오였으며 "Thriller"의 특수분장의 경우도 그 당시 비슷한 특수분장을 필요로했던 호러영화들보다 더 앞선 수준의 기술수준을 가지고 있었다.(그도 그럴만한 것이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호러 영화들은 대부분 B급 영화들이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여기서 등장이란 단어는 당연히 솔로 데뷔 후를 말한다.- 대중음악에 있어서 일종의 시각적 혁신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지금도 수도 없이 패러디되고 있는 "Black or white"등에 대해 굳이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물론 미국에서 MTV이라는 이름의 음악전문 케이블 채널이 개국을 한 것은 1981년이지만, 마이클 잭슨의 "Thriller"이라는 타이틀의 앨범은 "이제 더 이상 MTV이라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대중음악에 대해 논할 수 없는 시기가 도래햇음을 알리는 하나의 중대한 신호"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후 벌어진 뮤직비디오에 대한 엄청난 투자들은 꼭 긍정적이진 않았으며 때론 음악과는 관계없이 비디오클립만으로 새로운 스타를 만들어내거나 음악이 뮤직비디오에 묻히는 등의 악영향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개인적으론 그런 현상들을 "새로운 대중음악신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새집 등후군" 정도로 여긴다. 물론 뮤직비디오와 그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영화라는 장르가 서로 주고받은 영향력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하더라도 그 것이 마이클 잭슨의 책임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담론에서 마이클 잭슨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결정적 이유는 그의 뮤직비디오가 "대단히 혁신적이며 화려하고 무수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긴 했으나 그의 곡들을 본질적으로 훼손하는 역기능을 수행하지는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이야기는 계속된다.)



P.S.>

MJ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나가면서 게시물의 타이틀에 곡명을 붙이진 않을 생각이다. 그저 여러분들께 링크된 곡들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하는 편이 조금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오늘 링크시킬 곡들은 굳이 더 설명을 드릴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Thriller(1982)



Beat It(1982)



Billy Jean(1982)

아님 말고 1000곡(92)

92. Flying Home-Lionel Hampton(1942)-

사적으로 대단히 좋아하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이 장르의 음악이 굉장히 좋다." 혹은 "꼭 들어봐 야할 장르이다." 내지는 "당신의 음악공부를 위해선 놓쳐선 안될 많은 것들을 제공할 장르"라며 권해주고 그 때마다 "이 XX 이런 걸 나한테 들으라고 하냐?"는 이야기를 듣는 장르가 있으니 "Jump Blues"이라는 장르가 바로 그 것이다. 사적으로 이 장르를 좋아하는 이유는 블루스로는 보기 드물게 up tempo의 블루스이기 때문이다. 그건 개인적 취향이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이 점프 블루스라는 장르는 주로 혼(horn)을 포함하는 소규모의 그룹이 연주를 하는 형태의 음악이었으며 1940년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한 음악이다. 그리고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1940년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 장르는 1950년대에는 "rock and roll"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rock and roll이라는 장르가 blues으로부터 왔다는 점은 음악학자들의 음악의 계통적 분류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런저런 이론적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점프 블루스의 존재와 그 역사적 발전과 변이를 문헌적으로 연구하기만 해도 자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일 것이다. 즉, "음악적으로 보았을 때 블루스가 로큰롤의 선행장르 혹은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는 말이지 리듬이 어쩌고 기본 8비트가 어쩌고..." 이렇게 설명하며 잘난척 하는 인물이 있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신 후 그 다음부터는 그와의 연락을 가볍게 끊어주시면 될 것이라는 점 밝혀드리는 바이다.



1940년대 초반에 나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빅밴드 팀들인 Lucky Millinder, Lionel Hampton등의 밴드들로부터 진화한 것이 점프 블루스라는 것이 아직까지 큰 무리없이 미국음악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공동적으로 시인하는 점프 블루스의 기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40년대를 대표할만한 점프 블루스의 뮤지션들로는 Jack Mcvea, Earl Bostic, Arnett Cobb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보통 그냥 "점프(Jump)"이라고도 불리는 대략 관심이 없으실지도 모르지만 이 점프라는 장르는 "boogie-woogie"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점프"는 본디 Boogie Craze의 확장에서 비롯된 음악으로 Tynpany Five와 같은 밴드는 eight-to-the-bar boogie style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른바 "부기-우기 스타일"이라는 것이 미국의 대중음악에 얼마나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관계로 기회가 있을 때(죽기 전에 가능할까?) 이야기하도록 하자. 1942sus Lionel Hampton과 그의 밴드는 "Flying Home"이라는 곡을 녹음한다. 물론 이 곡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곡이 바로 "점프 블루스"의 효시가 되는 곡이기 때문이라는 점은 두 말하면 입아픈 이야기! 이 곡이 이전의 빅밴드 블루스 곡들에 대비해 가지는 가장 특이한 점은 블루스에선 잘 쓰이지 않는 악기인 "테너 색소폰"이 곡의 녹음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곡은 당연히 대단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이 곡은 콜맨 호킨스와 벤 웹스터 스타일의 스윙 리듬에 당대 유행하던 부기 우기 스타일의 리듬과 기타, 그리고 테너 색소폰을 포함한 편곡으로 "발매되던 당시부터 이미 연구대상이 되어버린" 스타일 상에 있어 기념비적인 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점프 블루스의 특색으로서 가장 두드러진 곡은 "블루스"라는 명칭이 쓰이고 블루스라는 장르로 분류되는 음악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위에서 햄튼의 곡에 대한 설명을 드렸듯- 그 바탕에 재즈가 깔려있고, 더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재즈로부터 파생된 장르라 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음악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잠시 살펴본다면, 재즈라는 장르가 대중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얻고 보편화될 무렵 재즈 연주자들은 더욱 더 많은 무대가 필요했고 이러한 즈음 빅밴드 편성의 재즈의 유행에 편승(?)하여 기존의 블루스 연주자들이 재즈 연주자들과 한 무대에 서게 되는 일이 종종 생겼고 그 와중에 스윙 재즈를 바탕으로 한 재즈의 음악에 블루스의 부기-우기 스타일을 연주하던 블루스 연주자들의 영향력이 스윙 재즈 안으로 편입되기 시작하며 나타난 일종의 Fusion의 과도기적 선상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이 탄생하게 되었고 당대는 물론 후대의 사람들이 이런 배경을 가지고 유행되던 1940년대의 음악에 "점프 블루스"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라고 아시면-이해가 불가능하시다면 암기를!-될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은 "Black Listener"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번져나가게 된 것이다. 이미 몇차례 말씀드렸지만, 기본적으로 재즈라는 음악은 흑인 음악에 뿌리를 둗고 있었고 재즈 연주자들 역시 흑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재즈라는 장르를 향유하는 층은 주로 백인들이었다는 점에서 "블랙 리스너"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는 점이 음악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장이 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흑인들에게 있어 재즈는 그들의 메인 스트림 장르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공화국의 리스너들이 알고있는 것과는 달리...(이부분에 대해선 다른 게시물에서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매번 다음번 게시물... 그 다음번 게시물은 대체 언제 나오는건지...)



이쯤되면 점프 블루스의 편성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릴 때가 된 것 같다. 기본적인 점프 블루스의 형태는 세 대의 혼(horn)과 리듬파트이다. 잠시 빅밴드와 비교하자면 그 차이는 "빅 밴드의 편성은 최소 16인조를 기본으로 한다.(sixteen ensemble system)"는 점에 있다 할 것이다. 또한 미리 말씀드렸지만 점프 블루스에 있어 테너 색소폰은 가장 중요한 악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점프 블루스 밴드들의 주된 팬층은-몇몇 서적에선 이를 점프 밴드들을 고용한 층이라는 표현으로 쓰기도 한다.- 대부분 광정인 재즈 팬들이었다 전해진다.(jitterbug이라는 영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시면 무슨 뜻잊지 더욱 분명해진다.) 이들이 점프 블루스 밴드 연주의 주된 고객이 된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이 이야기를 하면 맞을지도 모른다.) 그 것은 점프 블루스의 공연을 감상하는 데에 드는 비용이 빅밴드 재즈나 혹은 빅밴드 블루스의 공연을 보는 데에 소요되는 비용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저렴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세계대전과 같은 격변기엔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는데 흔히 이야기하는 black listner들은 다른 곳에서의 소비를 줄인 돈으로 어떻게든 음악을 향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할 것이다. 물론 공화국엔 대중음악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없다. 그리고 점프 블루스의 중흥기는 이른바 "ballroom owner"라 불리는 사교춤을 출 수 있는 클럽의 소유자들의 전폭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했다.



점프 블루스의 전성기는 40년대에서 5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였다 하는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은 Louis Jordan, Big Joe Turner(설마 이 이름을 잊어버리시진 않으셨으리라) Wynonie Harris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점프 블루스라는 장르는 rock and roll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이름으로 음악사 최대의 극적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1980년대에 이르게 되면Joe Jackson과 Brian Setzer등에 의해 본래 형태의 점프 블루스를 다시금 재현하려는 노력이 끊이지 않았고 요 근래에는 "MoPac and The Blue Suburbans"와 "Mitch Woods and His Rocket 88s"등에 의해 꾸준히 연주되고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또한 이 점프 블루스의 재기를 위한 노력들은 세칭 컨템퍼러리 스윙 밴드인 Lavay Smith, Steve Lucky & The Rhumba Bums Featuring Miss Carmen Getit Stompy Jones등도 이러한 대열에 동참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전통적인 블루스를 연주하는 밴드들도 점프 블루스의 부활에 물심양면의-이런 말도 안되는 표현은 지양해야 하는데...-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해진다.



Lionel Hampton - Flying Home (1957)



Flying home





추신>

요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툭하면 각종 포털에서 패스워드 바꾸라고 난리를 쳐대서 "이메일 해킹에 대해서는 포털 사이트들이 전향적 노력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검찰이 요구하면 인터넷에서의 개인정보 보호와 같은 이야기는 좆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좆도 더럽군요. 빌어먹을 놈들이긴 한데 게시물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라 태그엔 넣지 않았습니다. 줴길

아님 말고 1000곡(91)

90. Ustad Umeed Ali Khan Sahib

오늘의 본격적 이야기를 하기 앞서 대단히 중요하긴 하지만 게시물의 구성상 따로 하나의 게시물로 만들기엔 조금 애매하고 그렇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부분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하는데, 그 것은 인도 음악 특유의 기보법(記譜法,notation)이다. 인도 전통음악의 기보법에 대허서 알자면 guru-shishya tradition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그 것은 기보법이 전해지는 것이 구루와 시샤의 관계에서 개인적으로 전승되어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기보법이라는 것이 사적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인도의 전통음악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기보법의 체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인도 전통 음악의 큰 문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이론 체계가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닌가? 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예컨데 인도의 전통음악을 대단히 깊은 수준의 학습을 통해 익힌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어딘가에서 기적적으로 발굴된 인도 전통음악의 악보"를 이용하여 자신의 연주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데에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때로는 그 악보를 통해 연주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기보법에 대해 사후적 통일이나 지금 통일된 기보법을 만들어 과거의 악보들을 하나의 체계로 묶어내려는 두 가지의 노력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아무튼 오늘 할 이야기는 Hindustani음악에 대한 이야기이다.



참 답답한 것이 대충 이야기하려고 해도 최소한 두 문단 정도는 나올 것이고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몇 번의 게시물에 나누어 이야기를 해야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수위를 가지고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점을 밤잠을 설처가며 생각해보았는데 결론은 "줴길... 답은 없다."였고 어차피 인도 음악은 워낙 관심이 있던 음악이고 이 게시물을 제대로 보고 링크를 건 동영상이나 음악을 제대로 들을 사람도 없으니 뭐 그냥 하고 싶은대로 하다가 안되면 말자는 식으로 할테니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힌투스태니 음악의 기원은 서기 12세기정도까지 올라간다. 이 음악이 발달한 곳은 북부 인디아이고 이 음악이 발달한 시기는 힌두교의 Veda가 자리를 잡던 시기로 본다. 아무튼 그 것은 그렇고 힌두스태니 음악은 북부 인디아에서 시작되어 지금은 그 부근의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네팔,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의 음악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 음악이다. 사실 이 힌두스태니의 전통을 더 깊게 이야기하자면 고대 페르시아의 음악과도 닿아있다는 많은 이들의 주장을 접하게 되고 사실상 지금은 많은 이들이 고대 페르시아의 음악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Musiqi-e assil이라는 이름의 페르시아의 전통 음악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인근 지역에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판단된다. Hindustani Classical Music은 North Indian Classical Music 혹은 Shāstriya Sangeet이라는 용어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Pandit이라는 단어가 있다. 무슬림들은 같은 뜻의 단어로 Ustad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단어는 힌두스타니 음악의 연주자가 대단히 탁월한 위치에 올랐을 때 그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붙여지는 호칭인데 힌두스타니 음악의 연주자들은 이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자신들의 음악활동을(연주활동 되시겠다.)한다고 하는 것이 힌두스타니 음악계의 오랜 전통이라 한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Sufism이 그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에(수피즘에 대한 것은 알아서들 찾아보시기 바란다. 이슬람교에 관련된 용어인데 그 것까지 여기서 주저리 주저리 설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이슬람교의 Bhjan들이 힌두스타니 음악(특히 성악곡)은 연주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허다했다. 12세기 경엔 본래의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힌두스타니 음악이 분화되기 시작하여 Carnaticclassical music이 탄생하게 된다고 한다. 두 음악의 근본개념은 음조에 있어서는 라가(raga), 리듬에 관한한 tala(Carnatic classical music의 기본적인 리듬 패턴을 이렇게 부른다.)을 따른다고 한다. 이런 전통의 기원은 Samaveda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 Samaveda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들은 Sruti에 대한 찬가의 규준이며 혹은 Rig Veda에 대한 찬가의 규준이기도 했다. 이러한 규준들은 Bharata과 Dattilam에 의해 작성된 Natyashastra에서 대단히 정교하게 다듬어졌다고 전해진다.



중세시대에 이르러선 음조의 많은 부분이 페르시아의 음악과 융화되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나 이런 현상은 Sufi음악의 작곡가인 Amir Kushro라는 사람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엔 모굴 왕조 시대에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Tansen등과 같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작곡가들에 의해 꽃을 피우게 되는데 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Vaishnavites등의 종교 그룹들이다. 16세기 이후에 힌두스타니 음악의 가창 스타일은 gharanas라 불리는 뮤지션과 댄서들의 조직의 분화와 그 궤를 같이 하며 세분화되기 시작한다. 1900년 경에 이르러 pandit(인도의 현자나 학자를 이르는 말이다. 물론 나만 모르고 있었던 단어일 것이다.) Vishnu Narayan Bhatkhande(그냥 공부나 하지 왜 작곡 같은 것을 해서 날 괴롭히는가 말이다!)은 수많은 Thaats(That이라는 단어는 힌두어로 음악을 뜻하는 말이다. 당연히 요 단어는 복수형 되겠지?)을 작곡하여 힌두스타니 전통음악의 형식을 공고히 했다고 한다. 20세기에 이르러 드디어 "인도의 전통음악 그 중에서도 힌두스타니 전통음악"은 전 세계적인 붐을 이루게 되는데 이에 기여한 뮤지션들은 꽤 여러명이 있지만 일단 기억해두셔야 할 사람은 여러분들 모두 아시는 Ravi Shankeer(이 사람은 비틀스와의, 그 중에서도 특히 조지와의, 관계로 인해서도 유명하고 그 유명한 노라 존스를 싸질러 낳아놓고 무책임하게 버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Al Akbar Khan정도면 충분할 것이라 본다.



인도의 고전음악은 Sa Re Ga Ma Pa Dha Ni라 불리는 일곱 개의 기본 음과 그 외에 다섯 개의 반음으로 이뤄져 있다.(이 것은 서구의 음악과 동일하다.) 그런데 서구의 음악과 인도의 음악을 구별하는 가장 기본적인 차이가 되는 것은 서구의 12음계는 각각의 pitch이 고정되어있는 것에 비해 인도 고전음악의 12음계는 하나하나의 음의 높낮이가 항상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이 점이 인도 음악에 대한 공부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음악의 기본적 특징은 근세를 거쳐 현대에 오면서 harmonium(70-80년대에 학교를 다니셨던 분들이라면 기억하실 발풍금을 뜻하는 단어다.)의 일종인 sarnagi가 전통악기들을 대체하면서부터 점차 pitch의 통일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근자에 작곡되는 곡들의 pitch은 거의 고정되어 있다고 보면 무리 없을 듯하다.(그 음들이 어떤 높낮이를 가지고 있냐고? 당신이 할 수 있으면 글씨로 한 번 헤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빌어먹을!) 인도 고전음악의 연주는 raga(raag이라고도 쓴다.)이라고 불리는 멜로디의 패턴과 강세(Arohana)와 음의 점강(Avarohana)의 연결로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 역시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도 고전음악의 연주는 King(Vadi) Queen(Samavadi) Phrase(Pakad)등에 의해서도 그 성격이 규정된다.(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찾아보실 것을 권한다. 이를 설명하려면 지나치게 길어진다.) 또한 음역(register 힌두어로는 Ambit), 글리산도(glissando, 글리산도 악절이라 하면 다들 아실텐데 혹시 글리산도 악절을 모르신다면 활주음부라고 하시면 다들 아실 것이다. 인간 지식의 하한선 티렉스가 아는데 여러분들이 모르신다면 당신은 거짓말쟁이! 힌두어로는 Meend)등에 의해서도 특징지어진다. 아무튼,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하느니 그냥 인도 고전음악-힌두스타니 고전음악-의 연주는 상당부분 즉흥연주에 의존한다는 정도로 알아두셔도 좋을 것 같다.



사진은 Miyan Tansen혹은 Ramtanu Pandey의 초상화이다.



Ustad Umeed Ali Khan Sahib- Raag Desi Part 2



Ustad Umeed Ali Khan Sahib - Raag Desi Part 1





대단히 죄송하지만 아래의 링크부터 들으셔야 한다. 귀찮아서 링크의 위치를 바꾸지 못했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라며...



추신>

혹시라도 이 곡을 다른 사람도 들을 수 있는 상황에서 들으시며 담배를 피거나 향을 피거나 하면 누군가가 신고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란다. 이 곡을 들으면서 담배를 피우면 누가 봐도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아님 말고 1000곡(90)

90. Funeral for a friend/Love lies bleeding(1973)-Elton John-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당연히 인도의 고전음악의 한 장르인 Hindustani Classical Music에 대한 이야기가 와야할 차례지만, 그 것이 그다지 급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다른 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인도음악에 대한 기대를 하셨던 분이 계시다면 대단히 죄송한 일이지만 조금 참아주시면 되리라 말씀드린다. 이번 같은 특별한 경우가 생기지 않더라도 반드시 소개하고자 했던 곡이기 때문에 일단 이 곡과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한 뒤에 이 곡들이 갑자기 튀어나오게 된 다른 이야기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1) 잊기는 커녕 용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으로서 재임하는 기간 햇던 수많은 일들 중 "순전히 유물론자이고 자본에 대한 반감과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찬 삐돌이인 티렉스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지겹도록 인용되어 이젠 그 인용 횟수가 전세계적으로 1000억번 정도는 가뿐히 넘었을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말조차 거론하기 싫을 정도로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정책들에 대해 동의는 커녕 납득하거나 더 많이 봐주더라도 "눈 한번 질끈 감고 넘어갈 수 있을" 수 없을 일도 많다. 그리고 그의 비극으로 인해 사적인 정치적 신념까지도 잊은 채 그를 마냥 "훌륭했던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은 체질에도 맞지 않거니와 그런 일은 그도 바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잊기는 커녕 용서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단순한 슬픔의 차원이 아닌 비통함"을 느끼고 있다는 점 역시 맹세컨데 진실이다. 정말이지 그의 최후의 선택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는 미친듯이 책을 읽어댔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책 속에 있는 검은 색의 글씨라 불리는 것"을 그냥 눈으로 봤다. 그의 죽음이 단순한 슬픔이 아닌 비통함, 때로는 분노를 느끼는 것은 내가 그를 용서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점들 때문에 그렇다.



그는 자본과 그의 개들이 이야기하듯 "반기업적"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를 그토록 박살내지 못해 안달이던 중앙일보의 홍석현을 주미대사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별의별 욕을 먹어가면서 비정규직법도 개악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가 소싯적 "가진 자"라고 자신이 이야기했던 부류들과 되도록이면 큰 마찰 없이 지내려 했다. 출총제? 씨발 3%의 지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건희 새끼가 그 큰 삼성을 떡주무르듯 주무르고 사기업으로 취급하고 주총 따위가 뭐냐?고 비웃으며 그 새끼 하고 싶은대로 하고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고 자신의 계열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면서도 큰 문제 없이 아들새끼한테 물려주기까지 한 주제에 출총제 정도도 없으면 도대체 그 빌어먹을 놈의 자본을 어떤 식으로 취급하라는 말인가? 그렇다. 문제는 그 것이다. 과거 이상주의자였던 노무현이 그토록 욕을 먹으면서까지도 잘 지내려고 했던 그들이 그저 그가 "싫다"는 이유 하나로 심증은 넘치나 물증은 없고 정치적, 도의적으로는 존나게 문제가 있으나 법적으로는 단 1그램도 문제가 없는 방법으로 간단히 보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여 대통령까지 했던 사람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간단하게 보내버린" 것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이 것이다.



자본과 구우파(舊右派)들에게 밉보이면 "그냥 소리 소문도 없이 가는 수가 있느"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정말 무서운 것이다. 1그램이라도 그들의 수에 틀리는 짓을 한다면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사람도 아주 간단하게 지난 월요일 대한문에 가기 전까지 같이 술을 먹던 후배의 표현을 빌자면 "깨구락지 새끼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요 새끼를 잡아먹을지 그냥 보낼지를 저울질하듯" 가지고 놀았고 결국 아주 간단하게 보내버렸다. 하물며 나같은 사람들이나 이 게시물을 보는 여러분들 정도는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한 번에 수만명도 보낼 수 있는 새끼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고 정말 무서운 것은 그 점이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머리가 조낸 좋아 전국 1등을 했건 인간성이 조낸 좋아 모두의 칭송을 받건 그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여러분들은 자본과 구우파들에게 개기면 그 걸로 인생은 쫑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이다. 빌어먹을 공화국에 뼈빠지게 세금을 내도 수천억을 탈세하는 새끼들의 눈밖에 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가는 수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이 노력하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막말 해서 죄송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시고 계신다면 "웃기고 자빠진 일"이 될 것이라 말씀드린다.



그가 다시 대통령으로 돌아와도 그 때와 꼭 같은 정책들을 편다면 여전히 반다할 것이다. 하지만 그결국 이 빌어먹을 자본과 구우파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의 희생자가 되었고 그 점에선 그와 내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술에 꼴아 길을 걷다가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이 이명박이라면 "더러워서 피하거나" 혹은 "야 이 씹새끼야!"라고 한 다음 그의 수행원들에게 두들겨 맞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노무현에게 "아저씨! 아저씨가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닙니까? 나랑 술 한잔 더 빨면서 이야기 좀 해보자구요." 한다면 최소한 겉으로라도 "저 미친 놈 뭐야?"라는 식으로 대하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정말 내가 그의 죽음에 비참한 기분이 드는 진짜 이유들 중 하나가 바로 이 것이기도 할 것이란 생각이다. "우리가 훌륭한 정치가를 일은 것"인지 "가장 훌륭했던 대통령을 잃은 것"인지에 대해선 사실 긍정을 하기 힘들지만 이 빌어먹을 공화국의 구조와 그의 죽음이 겹치면서 내가 가지게 되는 억울함과 분노란 대통령으로서의 그에 대한 내 생각과는 관계 없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빌어먹을! 내가 적이라 생각했던 그가 결국은 수십년간 내가 적이라 생각하며 분노했던 그들에게 당한 것이다. 이 슬픔은 치유되고 말고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슬프다가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빌어먹을...



(2) 짧게 이야기하죠.

어차피 언젠가는 소개할 곡이었지만 그 사람을 보내는 곡으로 택했다. 어차피 D급 딴따라는 고상한 장송곡이나 장엄미사곡 따위로 그를 보내는 것이 내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다. 엘튼 존이라면 말랑말랑한 발라드를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이 곡이 가장 엘튼 존 다운 곡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고 이 음반이 엘튼 존의 최고의 음반이라는 말씀을 언젠간 드릴 예정이었는데 번거로우시더라도 직접 찾아보시기 바란다. 혹시라도 음반과 곡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달라는 덧글이 다섯개 이상 붙으면 정식으로 하나의 게시물로 정리해서 올려드린다 약속드린다.(절대 그런 덧글이 다섯개 이상 달릴 염려는 없기 때문에 결국 그냥 넘어가겠다는 뜻이다.) 타이틀을 보시면 알겠지만 두 곡이 커트 없이 이어지고 있고 앞의 곡-우리 말로 "친구의 장례식"-엔 보컬 파트가 없고 보컬이 나오는 부분 부터가 "Love lies bleeding"이다. "친구의 장례식"이라는 곡명이 어째 그를 보내기 바로 전 날 들어야할 곡으로는 가장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Funeral for a friend/Love lies bleeding(1980년 뉴욕 센트럴 파크 실황)



Funeral for a friend/Love lies bleeding





언젠 안그랬겠냐만 오늘 유난히 게시물이 거칠고 내용도 없고... 한 마디로 저질이다. 죄송하다.

아님 말고 1000곡(89)

89. Some Ragas

사실 처음 생각엔 현대 대중음악의 기원을 미국의 아프리카게 미국의 음악이나 아프리카에서가 아닌 다른 쪽에서 찾아보자는 의도가 있었고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을 여러분들도 기억하시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저질 싼티 게시물들을 양산하다보니 그런 애초의 생각에서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벗어난 감이 있어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다시 한 번 밤잠을 설쳐가며-이 사기꾼 색히! 그 생각 때문이 아니라도 밤에 제대로 잠을 못자는 것이 너 아니더냐!- 켈트인들의 음악에 대해서도 많은 조사를 해보고 남미의 음악에 대해서도 많은 조사를 해보았으나 남미 음악에 대해선 우리가 알고있는 대부분의 남미를 기원으로 하는 음악이 라틴계통의 유럽인들이 건너간 이후의 음악들 위주로 그 형태가 남아있고 켈트족의 음악들은 지금 현재 영어권을 중심으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옳은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하나 남은 것이 아시아의 음악인데, 아시아 음악에 대해선 항상 조심스러운 것이 자칫하다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이야기하기 곤란하나 동아시아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될 경우 자칫하다 원치 않는 공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정도로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벌떼같이 몰려드는 민족주의자들이 동아시아의 모든 음악은 한반도에서 나왔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매국노 운운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공화국이 자랑스럽게 전통가요 운운하며 이야기하는 트로트는 민망할 정도로 일본의 엔카를 베낀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아닌 예를 들겠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들이 "조까라 이 씹새야! 그 색히들이 자랑스런 한민족의 트로트를 베껴 가지고 가서 엔카를 만들었다. 모르면 닥치고 있어라"는 이야기를 도배를 한 적이 있어 동아시아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작정한 적이 있다. 물론 그래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오늘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현재 세계 음악의 기준이 되다시피한 유럽 음악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음악이 남아있는 지역들 중 하나가 바로 인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유럽의 음악이나 중동의 음악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덫에 걸릴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관계로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나 되도록이면 사실관계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인도 음악은 크게 보면 인도의 민속음악, 대중음악, Indian pop, Indian R&B그리고 인도 고전음악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설마 이 게시물 하나에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은 계시지 않으리라 보고,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인도의 전통음악(Indian Classical Music)에 관한 내용이다. 인디아의 전통 음악은 대부분 힌두교의 성전인 베다(Vedas)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조금 있다 다시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인도의 전통음악은 북부 인디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Hindustani와 남부 인디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Carnatic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각자에 대한 설명은 추후에...) 아무튼 좀 지겹고 재미없는 이야기라 생각하실 수도 있겠으나 Vedas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언급해야만 인도의 전통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므로 그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도록 하자. (싫음 말고...) 왜 그 것을 알아봐야 하냐 하면, 내용을 힌두교 경전에서 가져왔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 힌두교 경전 자체가 음악으로 된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제발 이런 것엔 밑줄 좀 치시기 바란다.) Vedas이라고 하는 것은 가지로 구성되어있다. Samaveda, Rigveda, Yajurveda Atharvaveda가 가지가 그 것이다. "그 것이다."라기 보다는 "그렇다고 한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아무튼 이 이름들을 잊어버리시면 곤란하다.(아님 말고...)



Samaveda라는 것이 있다. 이 것이 결국엔 음악으로 묘사된 것이다. 그런데 이 Samaveda라 하는 것은 Rigveda에서부터 나온 것인데 Samagana라고 불리는 찬가, 혹은 송가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아주 중요하니 밑줄들 치시게나... Samaveda는 Jatais라는 것으로 발전하고 결국 궁극적으로 ragas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 라가라 불리는 것은 인도 음악의 멜로디 라인의 중심을 이루며 재즈나 블루스에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인디아판 Jam(이 단어가 주로 재즈의 연주에 많이 쓰이므로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의 기본적 규칙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쉬울지 모르겠다. 인도의 전통음악이라는 것은 종교적 수행으로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명상의 일환이었다는 이야기이다.(쉬운 이야기 어려운 용어 써가면서 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raga의 모든 다른 형태의 멜로디는 chakras(그렇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로 그 "샤크라"가 이 단어이다.)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이 것은 kundalini로 이행되는 과정의 중간 정도로 보시면 될 것이다. 하지만 Bharat's Natyashastra에는 이런 밀교적인 믿음에 대한 반대 의견도 존재하는데, 그 것은 라가라는 것이 연극 혹은 극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다른 수단들과 춤의 표현 방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개인적으로도 이 부분에 대해 주목하고 있고, 또한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데 음악이라는 것이 과연 종교의 발생과 그 흐름에 의해서만 발달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티렉스의 개인적 생각에 대해 긍정하실 수 잇으실 것이다.(문장 참 더럽게 매끈하지 못하다.) 음악은 종교발전의 과정에 의해 발전된다기 보다는 그 외의 여러 역사의 여러가지 미시적 요소들에 의해 발달한다고 보는 것이 조금은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인도 전통음악의 체계를 관찰하다보면 발견하는 것이 그 것이 서구의 전통음악-클래식 음악-의 체계와 대단히 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12음이 한 옥타브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7개의 반음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렇다. 순서대로 Sa Re Ga Ma Pa Dha Ni Sa라 불리는 음들이 있는데 이 것을 서구의 음계의 Do Re Mi Fa So La Ti Do에 대입시켜보면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차이점 역시 존재하는데 그 것은 서구의 클래식 음악이 equal temperament tuning system을 사용하는 데에 반해 인도의 전통음악은 just intonation tuning을 사용한다는 데에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즉, 서구의 전통음악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평균율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고 그에 반해 인도의 음악은 평균율이 아닌 정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다소 어려운 개념이니 일단 이 정도로만 알아두시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궁금하시면 더 찾아보시든지... 인도의 고전음악은 지극히 단조로운 단선율의 음악이고 고정된 지속저음에 기반하여 연주되는 단일 멜로디 라인으로 연주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인도 음악의 연주는 멜로디 측면에 있어선 라가(ragas)에 기반하고 있고 리듬의 측면에선 tales에 기반하고 있다. 아! 다소 여러울 것이라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어차피 이런 것들을 알고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관심 없으신 분드은 그냥 넘어가셔도 무관하다. 어차피 이 짓거리도 계속될지 아닐지 모르는 마당에 뭐 이런 것을 하라 말아라 할 처지도 아니고...





Ravi Shankar - Raga Rangeela Piloo



S.D. Batish sings Raga Manavati - 72 Carnatic Melakartas rendered in the Hindustani Classical style



Raga Bihag



Raga Shivranjani on Bansuri (Indian Bamboo Flute)



RAJENDRA TEREDESAI - BANSURI / BAMBOO FLUTE - RAGA MARUBIHAG





피에쑤>

개인적으로는 음악 듣느라고 귀지 좀 후볐다는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선 인도 음악들에 대한 지식이 필수라 생각하지만 뭐 듣든가 마시든가...

아님 말고 1000곡(88)

88. I'm nobody's baby(1920)-Milton Ager-

*일단 사과의 말씀 드려야 할 것은 원래 88이라는 수를 기념하여 인도의 민속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자료를 번역하던 중 약간 막히는 부분도 있고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는 관계로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은아 미국 음악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의 첫부분을 시작하는 것으로 인도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하려하니 양해 있으시길 바란다.(양해? 얼어죽을 양해는 보는 사람이나 있어야 양해니 뭐니 하는 말을 쓰지...)



Tin Pan Alley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미국 음악사에 나름대로 관심이 많으신 분일 것이라 생각한다. 일단 틴 팬 앨리가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한 가지 가정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가 보도록 하자. 만일 "미국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티븐 포스터의 시대에 Copyright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면 스티븐 포스터가 "소년소녀 위인전"에 등장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의 여기저기서 울려퍼지는 그의 노래들로 인해 그의 노래들의 악보에 대한 저작권만으로도 엄청난 부를 쌓았을 것이고 영양실조와 안좋은 위생상태로 인한 몹쓸 병따위는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최고급 송아지 고기 스테이크와 최상으 ㅣ디저트를 매일같이 먹어대며 수십 에이커에 이르는 대저택에 살며 메이드들이 그의 잠자리와 식사를 돌봐주고 그의 집사가 귀찮은 일들은 다 알아서 처리해주었을 것이며 그를 후원하는 수많은 부호들에 둘러싸여 몇 곡 연주해주는 것만으로도 일년을 충분히 먹고 살고도 남을 "푼돈"을 벌며 인생을 지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Tin Pan Alley라는 단어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런 가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면 아실 것이다. 설마 "틴 팬? 그거 홍대 근처에 있는 바 이름 아니야?"라고 말씀하신다면 당연히 맞다. 아마도 그 바의 이름은 여기서 차용한 것이리라...



Tin Pan Alley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당시 미국의 대중음악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대중음악 작곡가들의 그룹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틴 팬 앨리의 시작은 1885년 뉴욕 맨하탄(맨해튼이라 표기해야 하나?)의 한 구역에 음악 출판사들이 밀집하여 서점을 낸 것을 기원으로 한다. 그리고 틴 팬 앨리의 종말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과 그 시기를 같이 한다. 틴 팬 앨리라는 명칭은 뉴욕 맨해튼의 West 28th와 Street 5번과 6번 Avenue 사이에 있는 특정한 장소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지금은 저작권의 천국이자 저작권의 지옥으로 알려져있는 미국이라는 나라도 19세기 중반까지는 저작권이라는 것에 대해 완전히 개념을 상실한 동네였다. 사실 처음 이야기한 포스터의 예도 그들이 느낀 위기의식의 출발이었고 실제로 틴 팬 앨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틴 팬 앨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포스터의 종말을 보고 위기 의식을 느낀 나머지 틴 팬 앨리를 조직하게 된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물론 포스터가 부자였다면 이렇게 살았을 것이란 것에 대한 묘사는 순전히 티렉스의 상상이다. 아무튼 이러한 저작권에 대한 인식은 일련의 작곡가, 작사가, 음악 출판업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스스로 보호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고 틴 팬 앨리는 그의 결과물이라 생각하면 되시겠다. 뉴욕에서 시작된 이 틴 팬 앨리의 영향으로 시카고와 뉴 올리언스, 세인트 루이스와 보스턴 등에서도 작곡가, 작사가, 출판업자들이 이런 그룹들을 조직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대중문화는 경제적으로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시기엔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가 인민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면 가장 먼저 버림을 받는 속성이 있다. 평소엔 관심도 없다 경제가 나쁘니 지출을 줄여야 할 때엔 항상 가장 큰 표적이 되는 존재인 것이다. 툭하면 출연료 삭감에 제작비 절감에 이런 단어들을 마구 써대고 그리고 빠순질을 해대는 자신들의 아이가 "우리 옵화들(혹은 누나들)의 새 CD가 나왔으니 사게 돈 주세요?"라고 하면 "야 이 빌어먹을 놈아! 지금 엄마 아빠가 얼마나 힘든데 그런 데 돈을 써 이 후례자식아!"라고 이야기하는 과정을 거쳐 가계 지출에서 가장 먼저 삭감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아무튼 틴 팬 앨리의 해체란 것은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다 잘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당연하지 내가 그 때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다 잘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래고 틴 팬 앨리로 인해 미국은 유럽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음악과 관련된 저작권이 의회를 통한 입법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뤌씬 더 일찍 법적 권리로서 보호받게 되었다.(이 것은 틴 팬 앨리의 해체와는 무관한 일이다.) 그리고 틴 팬 앨리의 가장 큰 공헌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저작권을 공식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로 격상시킨 것... 혹시라도 틴 팬 앨리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음악의 조류가 아닐까?라고 기대하셨던 분들에겐 또 죄송하다. 오히려 대단한 음악적 조류라기 보다 당대 휠을 잡던 횽아들의 비공식 조직이다 보니 틴 팬 앨리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작곡가들의 곡들은 세속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무리를 겸해서 왜 하필이면 이 곡인가?라 질문하신다면 그에 대한 답을 짧게 드리고 끝을 내려고 한다. 답은 아주 간단하다. Milton Ager의 성이 무엇인가? Ager!!! 딩동댕! 예! 그렇습니다. 이 사람의 성은 A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철자인 G역시 알파벳에서 대단히 앞에 위치하는 글자입니다. 예! 여러분의 예상이 맞습니다. 왜 Milton Ager이냐하면 틴 팬 앨리의 작곡가들의 이름을 알파벳 순서로 나열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Milton Ager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곡을 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곡들 중에서 하필이면 "I'm nobody's baby냐?" 고 물으시겠지요. 이 역시 간단합니다. Ager의 많은 히트곡들 중 이 곡이 시기적으로 가장 빨리 히트한 곡입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이런 허무한 이유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곡을 통해 여러분들은 1920년대 대공황 시기 이전의 미국의 통속적 대중음악이 어떤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가늠해보실 수 있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제가 링크한 버전 중엔 베니 굿맨의 밴드의 연주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이해 하시겠지요?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이 빌어먹을 지식의 보고 네이버"에서 이 게시물이 "흘러간 팝송" 내지는 "7080 세대 히트곡"으로 검색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단언컨데 이른바 7080 세대들은 이 곡을 모를 것이라 확신합니다. 줴길... 아무튼 죄송합니다. 사진 옹른쪽의 똥글이 아저씨가 Nilton Ager 옵화입니다.





Helen Forrest with Benny Goodman - I'm Nobody's Baby





Ruth Etting - I'm Nobody's Baby

아님 말고 1000곡(87)

87. Hor che gli augell Etc.-Jacopo Peri-

혹시라도 성악곡들을 좋아하시는 분들, 특히 오페라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사람의 이름을 반드시 외워야 할 것이다. 더 저질스러운 이야기 하나 할까? 만일 자신이 한 눈에 반한 이성이 "전 오페라를 조낸 좋아해요"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 말 한 마디 해보시기 바란다. 최소한 10점은 먹고 들어갈 것이다. "Jacopo Peri는 오페라의 창시자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아시고 계셨지요?" 이 경우 상대가 알고 있었어도, 모르고 있었어도 당신에게 손해될 일은 단 한 개도 없다. 참 쉽죠, 잉~ 하지만 이런 저질스런 이유로 음악을 대하는 자, 성경에 "재떨이로 흥한 자 재떨이로 망한다" 했듯, 저질스런 목적으로 흥한 자, 저질스런 목적으로 망할테니 이런 저질스런 목적으로 음악을 대하는 것은 일생에 두어번 정도로 족하다. 이거 아주 나쁜 버릇이다. 이런 버릇이 정말 고칠 수 없게 되면 당신은 인류의 보편적 발전에 장애물이 되는 "쓰레기"가 되고 말 것이다. 항상 이야기한다. "음악은 자신을 대하는 사람이 음악을 존중하는 만큼 그에게 주게 되어있다." 물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는 이야기지만, 정황상 사실인 이야기이다. 아무튼 또 사설이 길었다. 오늘의 이야기 시작해보도록 하자.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들의 연표를 보면 시기적으로 가장 면저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Jacopo Peri"이다. 1561년 8월 20일에 태어나 1633년 8월 12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8일만 더 살았다면 72세를 채웠을 사람이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1681년 생이니 그가 사망햇을 때 심지어 바흐의 부모조차 "웅성생식세포따위"도 아니었을 터이다. 물론 대부분의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이 그랬듯 Jacopo는 Italy 출생이다. 이 사람이 활동하던 시기는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에 걸쳐있다. 1597년 경에 그는 Dafne(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익히 아실 이름이다.)이라는 작품을 쓰는데 그 작품이 오늘날 말하는 오페라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아쉽게도 그 작품은 현재까지는 발견되지 않고있고 1600년에 그가 쓴 작품인 "유리디세(Euridice)"가 현존하는 작품들 중 "오페라"라 불릴만한 작품들 중에선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로마에서 태어났으나 음악 수업을 받고 테너로서 건반악기 연주자로서 교회에서 합창을 지휘하는 일을 하던 것도 그리고 작곡가로서 활동하던 것도 모두 다 플로렌스(Florence)에 거주하면서 한 활동들이다. 그 곳에서 그의 스승은 Cristofano Malvezzi였으며 세계사를 공부할 때 반드시 나오는 명사인 메디치가(Medici)의 경제적 후원 하에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초창기 그의 작품은 incidental music(연극에 사용되는 음악으로 요즘 이야기하는 사운드 트랙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이다.), intermedi(인터메쪼라고 하면 이해가 되시려나...), madigral(그냥 무반주 합창곡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될 듯하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등이 주류를 이뤘다고 한다.



그의 활동에서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1590년대의 활동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기에 그는 자신과 이름도 비슷한 Jacopo Corsi라는 사람과 많은 교분있었는데 둘은 당대의 예술활동이 과거 그리스, 로마 시기의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 뒤로 그 둘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그리스 비극"들을 현대화(이 현대화란 단어는 물론 1590년대를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배경이 그를 오페라의 창시자로 만들게끔 한 원동력이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wikipedia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보도록 하자.

"In the 1590s, Peri became associated with Jacopo Corsi, the leading patron of music in Florence. They felt contemporary art was inferior to classical Greek and Roman works, and decided to attempt to recreate Greek tragedy, as they understood it. Their work added to that of the Florentine Camerata of the previous decade, which produced the first experiments in monody, the solo song style over continuo bass which eventually developed into recitative and aria. Peri and Corsi brought in the poet Ottavio Rinuccini to write a text, and the result, Dafne, though nowadays thought to be a long way from anything the Greeks would have recognised, is seen as the first work in a new form, opera."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위에서 이야기한 작업의 과정에서 현재 오페라라 부를만한 새로운 형식의 악곡을 자코포 페리가 만들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에 리누치니의 공이 대단히 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Peri와 Rinnucini는 Euridice를 쓰는 동안 같이 작업을 하게 된다. 그 작품의 초연은 1600년 10월 6일이었다. 아! 그 날이 무슨 날인가 하면.... 별 일 없었던 날이다. 그리고 대단히 다행히도 Dafne와는 달리 Euridice는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하지만 그 작품 역시 현대에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고 일종의 골동품과 같은 상태로 존재한다고 보시면 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한 것은 다소 음악적으로 전문적 용어들과 무대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 관계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도록 하자.) Peri는 그 외에 몇 편의 오페라 작품들을 더 썼으며 많은 경우 다른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외에도 수많은 궁정음악을 썼다고 전해진다.(뭐 실제로 그렇게 했으리라 본다.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았다는데 궁정음악을 쓰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활발했던 활동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연주되고 있는 곡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물론 저질 유투브의 한계겠지만 많은 링크를 찾을 수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오페라라는 형식을 창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작품의 스타일은 그와 별 차이가 나지 않는 후배격인 Claudio Monteverdi등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대단히 구식이었다고들 한다.(음악 연구자들의 평가가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절대 내 개인적인 견해는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형식을 창시한 만큼 그의 후대에 대한 영향력이 미미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영향력은 대단히 큰 편이라 평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짤방은 에우리디세 유리디세 혹은 Euridice의 자켓이다.





"Hor che gli augelli"by Jacopo Peri







"Se tu parti da me" by Jacopo Peri

아님 말고 1000곡(86)

86. Frankenstein(November,1972)-Edgar Winter Group-

이 게시물이 올려질 때의 날씨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 게시물을 작성하고 있는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티렉스는 비와 눈에 모두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비가 온다거나 눈이 온다거나 할 셩우 평상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수도 적어지고(이 말이 가지고 있는 여거가지 의미가 있으나 그저 알아서 해석하시길...) 심지어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대단히 폭력적이 되기도 한다.(사람을 때린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볼륨을 높이고 음악을 듣는다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 사실 이 곡은 원래 이 차례가 아니었다. 대단히 이기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뭄이 들어 (다른 사람들은 말고) 내가 목이 말라 죽어도 좋으니 제발 비라는 것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평소의 소원인데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여하튼 상태가 별로 좋아지진 않는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감미로운 추억의 올드 팝송" 따위를 찾아 이 곳을 찾아오셔티렉스에게 굴욕을 느끼게 하소 싶으셨던 분들이라면 기겁을 하고 도망가실만한 곡을 소개하고자 한다. 게다가 이런 급진적인 곡이 빌보드 Hot 100 Single Chart에서 1위까지 했다면 "다른 명분이 있는 척하며 개인적 스트레스를 풀기엔 더없이 훌륭한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 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Sex Pistols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이 지나치게 순진했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선입견 대로라면 그처럼 간단하다 못해 쉬운 음악과 그처럼 문학성과는 거리가 먼 가사는 그런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대단히 순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대부분 스스로 아티스트라 불리길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시드처럼 그런 순진무구한 음악을 시장에 내놓을 수는 없다. 왜냐고? 쪽팔리니까... 그런데 에드가 윈터는 오히려 섹스 피스톨스의 시드와는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라 볼 수있을 것이다. 그의 음악은 지나치게 진지하고 진지하다 못해 급진적이며 "순전히 음악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대단한 완성도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십수년 전(아니다. 20년도 더 전이다.) 에드가 윈터를 처음 접했을 때 그가 미국인이라는 것, 그리고 컨트리 & 웨스턴의 본고장인 텍사스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놀라 쓰러지는 줄 알았다. 당시 미국인들의 음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가벼움"에 기대는 음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내게 이런 심각한 음악이 미국인들이 만든 음악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이 것은 아주 이전의 이야기이다. 지금에 비해 음악이라는 것에 대해 훨씬 모르던 시절 말이다. 그리고 에드가 윈터는 항상 개신교도들과 구교(한국어로는 천주교 영어로는 캐톨릭)들의 가장 만만한 표적 중 하나였다. 이유는 탐 크루즈를 범기독교 신자들이 싫어하는 것과 같다. 그는 사이언톨로지의 신자이다. 아무튼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다른 게세물이 될 수도 있다.) 하도록 하자.



대단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1970년대 초반을 "흔들기 시작의 문예부흥기"(Rock Music의 르네상스기라고 하시면 더 쉬우시려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시기에 핑크 프로이드나 예스, 에머슨 레이크 & 파머 혹은 레드 제플린이나 딥 퍼플이 나왓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부를 수 있을 수 있는 이유의 정점엔 에드가 윈터나 맨 프래드 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 이 이야기를 아무데나 가서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떠들진 마시기 바란다. 내 이런 견해는 지극히 이단적일 수 있는 견해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에그가 윈터는 Rocker이지만 그의 음악은 Hard Rock, Blues Rock, Jazz Rock, Blue-eyed Soul등으로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Rock 음악이 다른 장르에 대한 대단히 높은 개방성이 높은 것을 바탕으로 세계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면 그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는 것이 에드가 윈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에드가 윈터가 대중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바로 그 유명한 Woodstock Festival을 통해서였다. 그는 피아노, 오르간, 신서사이저등의 건반악기는 물론이고 색소폰과 클라리넷과 같은 관악기를 비롯하여 마림바와 드럼과 같은 타악기에 이르는 이른바 Multi-Instrumentalist였다. 물론 보컬리스트로서의 그의 역량도 대단히 훌륭한 아티스트였다. 아무튼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즉, 다른 게시물...



이 곡은 1972년 9월에 녹음되어 1972년 11월에 발매된 Edgar Winter Group의 네번째 앨범인 "They only come out at night"의 B면의 마지막 곡이자 앨범 전체에서 10번째 트랙이며 결론적으로 그 앨범의 마지막 트랙이다. 이 곡은 물론 싱글 차트의 1위에 올랐지만 Free Ride 역시 싱글 차트의 14위에 오르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며(여러분들은 빌보드 싱글 차트의 14위가 얼마나 대단한 상업적 성공인지를 아셔야 한다.) 그리고 앨범은 무려 200만장이 넘게 팔려 Double-Platinum을 공식적으로 수여받았으며 그들의 음반들 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음반인 동시에 대중음악의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대단히 중요한 앨범이라 평가받는 앨범이며 심지어는 명반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이 앨범은 2006년 Mobile Fidelity Sound Lab에 의해-이 회사는 과거 앨범들의 재발매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이다.- SACD이라는 레이블에서 재발매 되기도 하였다. 원래 음반은 Epic Record에서 발매되었으며 음반의 원래 프로듀서는 Rick Derringer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스스로 뮤지션으로도 상당한 위치에 있기도 하며 주로 패러디송을 불러 유명한 "Weired Al" Yankovic(마이클 잭슨의 Beat it을 Eat it으로 Bad을 Fat으로 가사를 바꿔 부른 것으로 잘 알려져있는 사람이다.)의 제작자로 유명한 사람이다. 릭은 이 앨범에서 베이스 연주를 맡기도 했다.





Johnny Badanjek - drums
Rick Derringer - producer, bass, guitar, pedal steel, vocals, claves
Dan Hartman - guitar, bass, percussion, maracas, ukulele, vocals
Randy Jo Hobbs - bass
Ronnie Montrose - guitar, mandolin
Steve Paul - organic director
Chuck Ruff - conga, drums, vocals
Bill Szymcyzk - technical director
Edgar Winter - organ, synthesizer, ARP 2600, piano, marimba, saxophone, timbales, vocals, clavinet, liner notes





1."Hangin' Around" (Edgar Winter, Dan Hartman) – 3:02
2."When It Comes" (Winter, Hartman) – 3:16
3."Alta Mira" (Winter, Hartman) – 3:18
4."Free Ride" (Hartman) – 3:08
5."Undercover Man" (Winter, Hartman) – 3:49
6."Round & Round" (Winter) – 4:00
7."Rock 'N' Roll Boogie Woogie Blues" (Winter, Hartman, Ronnie Montrose) – 3:25
8."Autumn" (Hartman) – 3:00
9."We All Had A Real Good Time" (Winter, Hartman) – 3:05
10."Frankenstein" (Winter) – 4:44





Edgar Winter Group - Frankenstein(스튜지오 버전보다 지나치게 기니 인내심을...)



Frankenstein - Edgar Winter Group - FretsOnFire RF-mod 3.5







피에쑤>

1. 쪽지 보내서 MP3 파일을 보내달라고 하시는 분들... 나도 이 앨범 없습니다. 사주고 그런 소릴 하시든지... 그리고 전 그런 것 안키웁니다.

2. 원래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싸가지가 오늘은 완전히 탈출해버렸으나 비 때문이라 생각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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