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첫 2/3의 시기에 미국 내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여자 엔터테이너를 이야기하라면 그 누가 뭐라 하더라도 당연히 Sophie Tucker을 꼽아야할 것이다. 1884년 1월 13일에 태어나 1966년 2월 9일에 생을 마감했으니 정확하게 82년 11개월에서 조금 모자라는 삶을 사는 동안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가수로서 그리고 여성 코미디언으로서 태어날 때의 이름은 Sonia Kellish였고 부모는 유태인이었으며 러시아의 Tsarist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태어났고 그가 아직 어렸을 때 부모가 코네티컷 주의 Hartford으로 이주하여 레스토랑을 열며 그와 동시에 그들의 성을 Kellish에서 Abuza로 바꾸게 된다. 그가 싱어로서 데뷔했던 것은 19세때인 1903년으로 데뷔 무대는 그의 집안이 경영하던 식당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곧 Louis Tuck이라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는데 그가 엔터테이너로 활동하던 기간 내내 사용했던 이름인 Tucker은 물어보나 마나 그의 전 남편의 성인 Tuck에서 따온 것이다. 나중에 또 하게 될 이야기지만 과거 모노 시대에 활동하던 레코딩 아티스트 혹은 스튜디오 아티스트들에 대한 개인적 평가는-소피 터커를 포함해서- 대체적으로 정말 엄청나게 탄탄한 기본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며 물론 소피 터커 역시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루 종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노래만 하더라도 몸에 그다지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트레이닝의 과정을 걸쳤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그런 부류의 아티스트라 할 것이다.
소피 터커는 피아노를 연주했고 burlesque(미국어로는 저속한 소극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와 vaudeville(이에 대해선 지난 번에 말씀드렸다.) 음조를 Blackface 분장을 하고 노래했다. 그런데 당시 극장 매니저의 증언이나 소피 터커 자신의 이야기에 의하면 항상 문제가 되었던 것은 광객들의 반응을 끌어내기에 그녀가 너무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그가 불렀던 노래 중 "Nobody Loves a Fat Girl, But Oh How a Fat Girl Can Love"이라는 자기 비하적인 노래가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객석의 반응은 항상 싸늘했다고 한다. 티렉스는 항상 이야기한다. "티렉스의 자기비하적 개그는 소피 터커로부터 왔다. 하지만 다른 것은 소피 터커는 그 것이 자신감에 찬 그저 자기 비하였을 뿐이나 티렉스에겐 가슴 아픈 진실이다." 20세기의 3분의 2지점까지 미국의 여자 엔터테이너들 중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다소 의외의 사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기에 소피 터커는 극장에서의 자신의 쇼에 몇몇 뛰어난 아프리카계 미국인 싱어들을 고용하여 무대에 세움으로써 자신의 공연을 내용의 측면에서 충실하게 하려 노력했고 그 자신 역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에 대한 관심과 소양을 쌓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시도가 소피 터커를 20세기 최고의 불세출의 엔터테이너의 위치에 오르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20세기가 막 시작할 무렵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쇼는 Zigfeld Follies이라는 이름의 쇼였는데 소피 터커는 1909년에 이 무대에 서게 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의 무대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그와 같은 무대에 서던 쇼의 인기 여가수가 소피 터커와 "무대를 나누는 것"에 대해 지독한 반감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한다. 그 반감의 이유는 "자신보다 소피 터커가 훨씬 더 인기가 많은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나 뭐라나... 그러나 금세기 초 미국의 가장 영향력있던 엔터테이너들의 에이전시였던 William Morris Agency의 설립자인 William Morris은 이 때의 터커를 눈여겨 보고 자신과 계약을 맺은 후(전문용어로 소위 입도선매라 한다.) 그를 American Music Hall의 무대에 세우게 되는데 이 역시 같은 해인 1909년의 일이다. Blackface 분장의 에피소드도 여기에 있다. 무대에 서기 직전 메이크업 킷이 들어있는 그의 짐가방을 도둑 맞아 어쩔 수 없이 그냥 얼굴을 검게 칠하고 무대에 올랐던 것이다. 그 날의 반응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전해지고 있고 그로 인해 터커는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으나 터커가 그 분장으로 무대에 오른 일은 그 뒤로는 다시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시기엔 과거부터도 그랬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를 자신의 무대위에서의 연주에 접목시키는 데에 열을 올렸고 당시로는 백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니 절대 오해 마시길- 래그타임에 대해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불렀던 "The Mary Garden of Ragtime"이라는 곡은 당시 레그타임의 레퍼런스였던 동시에 오페라의 소프라노 가수들의 레퍼런스가 되기도 했으며 소피 터커는 래그타임이나 재즈 외에 블루스의 영향도 상당히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911년에 발표된 곡인 "Some of these days"는 터커의 곡들 중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곡인 동시에 1945년 발매된 그의 자서전의 제목이기도 한데 여러분께 바라는 것은 제발 부탁이니 핑크 플로이드의 "Meddle"앨범의 타이틀 트랙인 "One of these days"와 무슨 일이 있어도 헤깔리지 말아주십사하는 것이다. 1921넨에 들어와 소피 터커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Ted Shapiro를 자신의 크루에 포함시키는데 나중에라도 소피 터커에 대해 연구를 하실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면 이 이름을 절대 잊으시면 안될 것이라 당부한다. 소피 터커의 싱어로서의 활동에 있어 이 사람의 역할이란 실로 대단했으며 이른바 최고의 콤비라 불릴만한 호흡을 보여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Mamie Smith와 소피 터커의 특수한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바 있고-어떤 이들은 매미 스미스를 발굴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 주장은 날이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 Ethal Waters(대단히 필요한 일은 아니겠지만 이 이름의 발음은 "에달 워터스"가 아니라 "이설 워터스"에 가깝다고 한다나 뭐라나...)역시 소피 터커를 통해 레코딩 아티스트로 데뷔하게 된다. 바로 이런 점들이 소피 터커를 단순한 엔터테이너 이상의 가치를 부여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마치 마돈나가 자신의 레이블인 매버릭을 통해 앨라니스 모리셋이나 프로디지를 데뷔시켜 그의 영향력을 쌓아왔던 것처럼...
1925년 Jack Yellen 이라는 작곡가는 "My Yiddishe Momme"이라는 곡을 쓰고 그 곡을 소피 터커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되었는데 곡목에서 알다시피 이 곡은 유태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곡이며 소피 터커가 중요 도시를 순회하며 자신의 공연에서 이 곡을 부를 때(정확하게는 이 곡을 부르는 것을 관객들이 거의 알고 있을 때) 대부분의 청중이 유태인이었다고 하고 훗날 터커는 인터뷰에서 "난 관객의 대부분이 히브리어에 대한 소양이 있다고 판단되었을 경우에만 이 곡을 불렀고 그 반응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나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꼭 유태인들이 주류인 관중들 앞에서만 불렀던 것은 아닌데 히브리언어에 대한 지식이 없고 자신이 유태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곡으로 받을 수 있는 감동이 그다지 반감되진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했다. 1929년 소피 터커는 자신의 첫번째 영화인
1950-1960년대의 시기에 에드 설리번 쇼(Ed Sullivan Show), Person to person, What's my line, The tonight show등에 출연하여 텔레비전 엔터테이너로서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히며 미국은 물론 영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1966년 82세의 나잉로 영면한 소피 터커는 코네티컷 주Wethersfield에 위치한 Emanel Cemetary라는 곳에 묻히게 된다. 소피 터커의 코믹한 스타일은 후대 수많은 영향력있는 여성 엔터테이너들의 전범이 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Mae West, Joan Rivers, Roseanne Barr등을 꼽을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Bette Midler는 자신의 쇼에서 스스로의 캐릭터를 "Soph"이라 이름 붙이고 소피 터커 그 자체를 하나의 캐릭터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1938년 소피 터커는 전미 배우 노동조합(American Federation of Actors)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 당시 여성 엔터테이너들의 사회적 지위를 감안한다면 그의 영향력이 실로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Sophie Tucker - Some Of These Days - original 1911 recording
Sophie Tucker -"You cant deep freeze a red hot mama"
Sophie Tucker - The Lady Is A Tramp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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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링크한 자료들 외에도 소피 터커에 대한 자료는 유투브에 꽤 많으니 꼭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 혹시 이런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이 중차대하고 위급한 상황에 한가하게 음악이나 이야기하고 있냐? 이 비겁한 새끼야!" 예, 비겁할 수 있다는 것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런 짓거리라도 하지 않는다면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 게시물들은 일종의 분노 조절용 치료약 같은 것입니다.
3. 소피 터커같은 사람이 왜 여기 끼었느냐고요? 허허...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 좋은 이야기 있습니다. "닥치고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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