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15일 화요일

아님 말고 1000곡(84)

*사적인 발언으로 인해 물의 따위가 있지 않았을 것이란 것은 익히 알고있는 이야기지만 혹시나 하여 말씀드린다. 그렇다. 티렉스의 개인적 취향은 "블루스"와 "포크"에 대단히 집중되어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이른바 "블루지한" 음악으로 통하는 백인들의 블루스 보다는 초창기의 대단히 깔끔한 형식미를 갖춘 블루스 곡들을 좋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게시물들에 그런 개인적 취향이 "압도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혹시라도 이 게시물들을 처음부터 보시지 않은 분들이 이 바로 앞의 게시물을 보시고 나서 가지게 되실지도 모르는 약간의 오해라도 없애기 위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하지만 "블루스의 아빠"인 핸디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세 번이건 네 번이건 혹은 다섯 번이건 간에 반드시 자세히 해둘 필요가 있으니 이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구하고자 한다.*



84.. Yellow dog blues-Wiliam Christopher Handy(1912)-

어떤 이들에겐 관심도 없을 듣보잡 할아버지인 핸디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그가 현재 상식으로 되어있는 열두마디 블루스(Twelve-bar Blues)의 형식을 완성한 사람이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그를 "블루스의 아빠"로 부르는 것이다. 지난 번 이야기가 끝난 부분은 우리의 불쌍한 핸디 선생과 그의 밴드가 갖은 고생 끝에 "만국 박람회"가 열리는 시카고로 갔다가 빌어먹을 만국 박람회가 1년 연기되어 캐고생을 하시다가 결국 밴드까지 해체되고 핸디 선생은 인디애나주의 에반스빌(Evansville)로 이사하시게 된 데까지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에반스빌로 이주한 뒤 핸디 선생의 인생은 갑자기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풀리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름이 정확하게 알려져있진 않지만 에반스빌에서 그가 몸담았던 밴드가 에반스빌은 물론 그 일대의 도시들에 이르는 꽤 넓은 지역에서 꾸준히 연주할 기회를 가지게 된 말 그대로 "인디애나 주에선 퓔을 잡았던 밴드"였고 결국 그 밴드의 명성이 주 경계를 넘어 이 주, 저 주로 연주여행을 다니던 중 Kentucky주의 Handerson에서 열린 한 바베큐 파티에서 연주하던 중 Elizabeth Price이라는 이름의 여성을 만나게 되고 처음 만나고 난 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1896년 7월 19일에 급기야는 그와 결혼하게 되는 것이다. 빌어먹을 시카고 만국 박람회 만세! 아무튼 그의 음악적 노력은 Minstrel Tenor에서부터 앨라바마에선 밴드 디렉터로도 일했고, 코럴 디렉터로도 일햇으며 코네티스트와 트럼피스트로도 연주활동을 했으며 23세엔 Mahara's Colored Minstrels이라는 이름의 밴드의 밴드 마스터가 되게 된다.



청년기 핸디는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서의 연주를 시작으로 1902년에는 미시시피의 각지를 여행하며 보통의 흑인들(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연주하는 음악들을 많이 감상하게 되었다. 그가 가장 자주 연주한 악기는 위에서 이야기한 코넷과 트럼펫 외에도 기타와 벤조 그리고 아주 드문 일이긴 하나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가 "블루스의 아빠"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시기의 그의 여행 때문이었다 할 수 있는데 그는 당대의 보편적인 다른 아프리카계 미국인 연주자들과는 달리 채보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여행 시기에 접했던 음악들을 거의 대부분 악보로 기록해 두었으며 이러한 방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훗날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 후대가 평가하는 12-bar blues의 형식적 기초를 완성하는 데에 활용한다. 그가 1896년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Minstrel 그룹인 "Mahara's Minstrel"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 팀에 합류하게 된다. 그가 팀 합류를 제안받은 이유는 팀이 약 3년간의 투어를 떠나기로 계획하고 있었고 그 투어에 참여할 연주자를 구하던 과정에 그를 눈여겨본 멤버들에 의해 그의 합류가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그들은 그 기간 동안 시카고, 텍사스, 오클라호마, 테네시, 조지아, 플로리다를 거쳐 큐바에까지 연주여행을 떠나게 된다. 당시 핸디가 받았던 급료는 주급 6달어였다. 큐바에서 돌아온 후 그룹은 다시 알라바마주를 북에서 남으로 종주하는 연주여행을 떠나게 된다. 핸디와 그의 부인인 일리저비스(엘리자베스라 해두자.)는 이런 불안한 생활에 불안감을 느끼게 되어 그들의 고향인 플로렌스 근처에 정착하게 된다.



나중에 또 언급하게 되겠지만 여기서 핸디의 미국 음악에 대한 기여를 잠시 언급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핸디 이전의 미국 음악에 대해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분명히 자신의 음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의 음악에 대해 끊임없이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 미국의 음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유럽의 음악이라 하는 것은 당연히 "Classical Music"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윌리엄 크리스토퍼 핸디의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의 독특한 음악적 스타일로 인해 "끊임없이 융럽의 클래식 음악을 모방하는 것이 미국의 음악이 발전하는 길"이라 여기고 있었던 미국의 지배계급의 사람들조차도 "미국적인 음악의 독자적 발전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할 수 있도록 만든 계기를 제공해준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미국 사회가 얼마나 재즈나 블루스와 같은 자신들의 음악을 정규 음악교육 과정에 편입시키고 아이들에게 그런 음악을 교육시키기 위해 애썼는가?라는 핸디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보아 지식인들에게 얼마나 큰 반향을 얻었던 담론인가를 짐작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야기할 것은-이 부분은 핸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이야기될 것이지만- 핸디 자신이 항상 자신은 자신의 능력에 비해 낮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의 이런 생각은 음악을 하나의 사업으로 여기기 시작한 최초의 아티스트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그에 대한 공과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오늘 이야기할 곡인 Yellow dog blues이라는 곡은 워낙 많은 아티스트들이 연주하고 특히 1920년대 이후엔 재즈 밴드들에 의해 많이 연주된 관계로 그 원형이 어떤 것인지조차 불분명할 정도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영향력도 발휘하고 대중적으로도 알려졌으며 연주자들이 사랑해온 곡이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블루지한" 블루스라는 것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전의 곡들은 많은 이들이 "이 곡이 블루스 곡인가? 설마? 이 곡은 재즈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재즈나 블루스를 나누는 기준은 "스타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곡의 형식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밑의 베시 스미스의 곡을 들어보면 더 그런 의문을 느끼실 수 있는 것이 베시 스미스 버전의 "노랑 강아지 블루스"는 클라리넷을 비롯한 관악기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일반적인 선입견에 따르면 크랄리넷을 저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재즈 악단"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 곡은 핸디의 12마디 블루스의 형식에 충실한 곡이며 베시 스미스의 곡이 핸디의 원곡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곡일 것이다. 여러분들은 헤깔리시더라도 "부드"나 "스타일"이 아닌 형식에 의해 음악을 구분하는 방법에 익숙해지셔야 한다. 그래야 어디 가서 "음악 듣느라고 귀지 좀 후볐다."는 이야기를 하실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짤방은 없다. 죄송하다.





















Yellow Dog Blues Soprano Summit 1995.mov



"The Yellow Dog Blues", Ted Lewis and his Band



Bessie Smith - Yellowdog Blues(이 트랙은 반드시 들어보셔야 한다. 후대의 사람들이 왜 베시 스미스를 최고의 블루스 보컬 중 한 명이라 하는지를 단 40초 내에 아시게 될 것이다.)



1920s JAZZ -- "Yellow Dog Blues" - Raderman's Jazz O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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