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용〔쾌락만[-랑-]〕
[명사]
1 유쾌하고 즐거움. 또는 그런 느낌.
한 권의 양서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쾌락 중 하나이다.
사람의 심리에는 남을 학대함으로써 쾌락을 느끼는 사디즘적 요소와 남에게서 학대받음으로써 쾌락을 느끼는 마조히즘적 요소가 있다.≪이문열, 시대와의 불화≫
2 <심리>감성의 만족,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
성적 쾌락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다.
97. 쾌락의 절정
사전엔 위와 같은 내용의 쾌락에 대한 정의가 있다. 갑자기 뜬금없는 이상야릇한 단어를 이야기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분들도 계시리라. 사람이 예술활동을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견해로는, 쾌락이라는 것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예술행위는 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장르의 바운더리로부터 몰아내게될 것이다. 쾌락이라는 단어 자체에 쾌락을 느끼실 분도 계실 것이고 "티렉스 저 색히는 배우지 못한 놈이라 생각하는 것이 순 허리하학적인 것이구나"라고 말씀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말씀을 돌려드리면 되려나 모르겠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건가 어쨌던가... 감성의 만족이건 욕망의 만족이건 쾌락을 주지 못하는 예술활동이란 생각하기도 싫다. 미술작품의 감상자건 음악의 감상자건 유쾌하고 즐거운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감상활동을 더 이상 지속하려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쾌락이 항상 쌍방향으로 이뤄지지도 않고 시간적으로 일치하기도 힘든 일이다. 음악 애호가들이 기를 쓰고 굶어가며 무대에 서는 연주자들을 보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는 이유는 쾌락의 일방성을 피하고 쾌락의 동시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적극적인 예술 관련 행위"중 하나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우 어린 시절의 연극의 감동이 영화의 감동을 압도하는 이유도 역시 앞서 이야기했던 두 가지의 문제의 해결에 나름대로 근접한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영화가 연극보다 열등하다는 등의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한가지 더 애석한 것은 쾌락의 쌍방향성과 동시성이라는 것이 어느 한 쪽이 충족된다고 하여 다른 한 쪽이 반드시 충족되지도 심지어는 다른 한쪽이 쉽게 충족될 조건을 제시화지도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요소가 필수적 요소가 되는 예술 장르에 있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반드시 계속 연구되어져야만 할 과제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쾌락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한 가지 해보면 예술이 주는 쾌락이라는 녀석은-물론 다른 곳에서 섣을 수 있는 쾌락이라는 놈들도 마찬가지이지만- Esoteric하면 할수록 그 쾌락을 자기 것으로 가지게 되는 이들의 만족도는 더욱 더 높아진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장르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의 무의식엔 이런 쾌락의 본질이 숨겨져있음을 부인할 숭 없을 것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다. 1970년대
위 단락에 이어 이야기하자면 쾌락은 나눌수록 그 만족도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때로는 한계효용이 체감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것이 쾌락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이러한 종류의 쾌락이 최고조에 달하게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설혹 같은 시간에 같은 쾌락을 느낀 사람의 수가 상당하다 하더라도 각자의 쾌락이 서로 배타적"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미국의 대배우들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험프리 보가트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골초인데다 차를 싫어했던 그는 예의 그 중절모를 눌러쓰고 로스 앤젤리스의 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산책을 하며 궐련이나 여송연을 피워대는 것은 그의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고 하는데 험프리 할배가 워낙 골초인지라 가끔은 산책 중 담배가 떨어지는 일도 발생했다 한다. 그 때 그는 거리낌없이 행인들에게 다가가 "저 혹시 아시려나 모르겠는데요 저는 험프리 보가트라 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담배 한 대 얻어 피울 수 있을까요?"라 이야기 했다고 한다. 논리의 비약일지 모르겠으나 험프리 보가트에겐 일상이었겠지만 그는에게 담배를 준 행인들은 평생 그의 충실한 팬이 되었다 한다. 예가 적확하진 않지만 정확하게 일치하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유쾌함은 서로 배타적이었다 할 것이다. 아마 보가트의 사인 행사 같은 데서 그를 만났다고 한다면 이런 배타적인 유쾌함은 불가능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쾌락이 극대화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쾌락을 얻은 그 행위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이나 권력에 의해 금지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쾌락을 느낄 수 있고 그 쾌락이 서로 다른 종류와 강도의 쾌락을 느끼고 있는 그 순간 "자신이 어찌활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그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힘을 가진자들의 적"으로 돌리게 되고 그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 쾌락은 절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예컨데 그 순간 경찰이 더 이상 자신이 쾌락을 느끼고 있던 그 행위를 더 이상 진행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게 된다면 바로 그 시점이 쾌락의 절정에 도달하는 시기가 된다 할 것이다. 이런 점이 쾌락의 본질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쾌락의 강도를 높이는 데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욕망이 억압되게 되면 그 순간 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점부터 쾌락의 절정을 향해 달리게 될 다른 탈출구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이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비틀스가 에비로드 스튜디오의 옥상에서 그들의 마지막 대중 앞에서의 고민을 하던 그 시간에 에비로드 스튜디오 근방을 지나가다 경찰에 의해 그들의 마지막 대중 앞에서의 연주가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는 것을 목격한 그 사람들, 그 유명한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을 허가도 없이 거리에서 연주하다가 경찰에 의해 제지되는 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우연성이건 필연성이건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 쾌락의 절정에 서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자리에서 열광하고 자신의 쾌락의 절정을 느꼇던 사람들의 쾌락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공범의식"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꿈을 꾸고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아니나,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는 "진정한 쾌락을 향한 뻘짓"이 이런 것이고 나름대로 누군가 이런 일을 종종 해줌으로 인해 음악의 적극적 감상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햇던 것 이상의 쾌락을 경험하면서 음악에 대한 한 단계 성숙된 자세를 가지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아님 말고...
The Beatles, Get Back
026 I've Got a Feeling - THE BEATLES
The Beatles - Don't Let Me Down (1969)
The Beatles - I Dig A Pony (1969)
딱정벌레 형아들 곡들은 이 정도에서...
U2 -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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